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87
91. 투기자본(1)
[1998년 1월 1일]유서준과 서하나는 거실에서 마주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는 이런저런 생각에 머리가 혼란스러웠고 서하나는 그런 그를 보며 고개만 갸웃거렸다.
몇 차례 입을 열려다 포기하고 커피만 들이켰던 그녀가 마침내 기회를 잡아 말문을 열었다.
“무슨 생각해?”
“그냥 이런 저런…….”
그는 말끝을 흐렸다.
다소 뚱한 그의 반응에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예전에 주가지수 300이라길래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거기까지 왔네. 금고에[ 돈을 가득 채운 은행이 돈 부족으로 부도날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증권사가 문을 닫는 것도 처음 봤어.”
“어떤 금융기관도 안전할 수 없는 그런 시기야.”
“서준이 넌 어떻게 이걸 예측했어?”
서하나가 눈동자를 반짝이며 호기심을 나타냈다.
유서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예측은 무슨. 나도 몰랐어. 다만 주가지수가 300 부근으로 내려갈 것이란 생각만 했지. 은행이 무너질 줄은 몰랐어.”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은행인 한일은행이 사실상 부도가 나서 공적자금이 투입되는 상황이니…….”
“아마 은행은 대부분 정부에서 자금 수혈을 받은 다음 은행 간 합병을 통해 새로운 거대은행으로 거듭날 거야. 부도 상태인 제일은행, 서울은행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겠지.”
“내 생각이랑 같네. 그 과정에서 실업자가 양산되는 거고…….”
서하나의 음성에도 우울한 빛이 돌았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잔을 올리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난 듯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서준이 너 부도난 증권사 인수하겠다고 예전부터 노래했잖아?”
유서준이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냐, 난 부도난 증권사라고 한 적 없어. 어려울 거라고 했지. 지난 10월엔 그 정도는 누구나 예상했었잖아? 위기가 표면화되던 시기였으니까.”
“그전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극구 부인하는 그에게 서하나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유서준은 황급히 그녀의 생각을 돌렸다.
“하하, 그래서 생각해봤어? D 증권을 인수할 건지?”
D 증권 말이 나오자 서하나가 배시시 웃음을 머금었다. 자신이 다니다가 퇴사한 증권사. 그것도 지점장의 횡포로 어쩔 수 없이 물러났던 그녀로서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그것도 증권사를 인수한 점령군의 자격으로.
처음 입사했을 때 고개도 들지 못하고 우러러보던 회사 임원진을 양쪽에 세워놓고 어깨를 펴고 걸어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자 그녀는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 이상하다. 그림이 안 그려지네.”
“무슨 생각하는데?”
“그런 게 있어.”
서하나가 미소를 흘리며 입을 닫았다.
유서준이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머금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D 증권의 모기업은 D 은행이야. 주요 계열사로 증권사 말고도 D 투신, D 생명이 있고 자산운용사와 투자자문사 등 자잘한 계열사를 모두 합하면 거의 10개나 되지.”
소규모 은행이었던 D 은행 역시 이번 외환위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부도는 아니었지만, 자금난으로 정부의 공적자금을 일부 수혈받아 간신히 연명 중이었다.
정부에서는 공적자금을 더 투입할 수 없기에 D 은행을 더 큰 다른 은행과 합병시키거나 팔아치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덩치를 줄여야 했다. 즉 계열사인 증권사나 투신, 생명보험사를 매물로 내놓을 것이다.
아직 정부에서는 경황이 없어 추진하지 못하지만, 하반기쯤이면 구체적인 방안이 발표될 것이다. 물론 그때가 되어도 자구책에 정신없는 국내기업 가운데에는 사실상 인수할만한 곳이 없을 것이다. 외국계 사모펀드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인수 불가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우리는 D 증권과 D 투신을 살 수 있어. 예상 금액으로 아마 150억이면, 아니 그 이하로도 인수할 수 있지 않을까? D 증권사의 원 자본금이 400억인데 사실상 지금 시가총액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거의 바닥 수준. 대주주의 주식은 공적자금 투입으로 사실상 소각되었고 우리는 정부 소유 주식 일부만 인수하면 돼. 급한 정부는 그리 많은 금액을 부르지 않을 거야.”
유서준의 설명에 서하나 역시 금방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그녀는 유서준의 개인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속에는 그녀의 자산 역시 많지 않지만, 일부 포함되어 있었다. 150억 정도는 충분히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쁘진 않는데…… 증권사를 인수해서 어디다 쓰지?”
서하나의 질문에 유서준은 빙그레 웃었다.
“금융그룹 만들어야지.”
서하나는 유서준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을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금융기업은 처음 진입이 어렵다. 그다음에 키우는 것은 완전 다른 문제였다. 아직 국내에서는 금융그룹의 지주는 은행이 잡고 있었다. 이 은행 분야는 금산분리의 원칙에 의해 산업자본의 참여가 불가능하다.
그녀는 오래전 유서준이 말했던 투자은행을 떠올렸다. 은행과 투신의 중간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은행. 우리나라에서는 은행이 아닌 은행.
은행에 미련을 버리면 더 쉽게 금융그룹의 모양새를 갖춰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유서준이 웃으며 말했다.
“증권사 인수하면 사장은 누나가 해.”
“아, 아냐. 아직 내가 사장할 레벨이 되나. 그럼 넌 뭐 할 건데?”
“난 여기 SJ 투자자문을 지켜야지. 이걸 SJ 투자금융지주로 바꿀 거야. 말 그대로 여러 금융사를 거느리는 지주회사로.”
“그것도 괜찮겠네. 넌 그룹 지주회사 대표. 난 흠…… 사장보단 그냥 투자전략본부장 정도가 나을 것 같아.”
“사실상 인사권 전권을 쥔 무늬만 본부장도 괜찮지.”
유서준이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대화를 하다 보니 흡사 벌써 증권사를 인수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다 마신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기 위해선 약간 더 돈을 모아야 할 것 같아.”
**
[1998년 1월 3일]98년 증시가 개장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라 전망은 무의미했다. 모두가 살아남기만을 기원했다.
97년을 주가지수 376.31로 끝냈던 주식시장은 98년을 약간 내린 374.41로 시작했다. 지난 연말부터 외국인의 매수가 시작되었다는 것이 긍정적이었다.
유서준은 1월을 맞아 공격적인 주식매수를 요구했다. 물론 그는 단 1월만임을 강조했다. 지난 하반기 동안 사실상 주식매매를 하지 못했던 직원들은 신나게 매매에 동참했다. 서하나 역시 낙폭과대 종목 가운데 외국인 입질이 시작된 종목 위주로 매수할 기업을 선정했다.
선물 방향 역시 당연히 선물 매수였다. 그는 1월 3일 장이 시작되자마자 시가에 선물을 대량매수 했으며 이 포지션을 1월 말까지 들고 갈 결심을 했다. 그의 선물 매수분은 다시 프로그램 매수를 유발하여 주식매수에 영향을 줄 것이다. 즉 선물과 현물 주식이 동시에 상승하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IMF의 자본개방 권유에 의해 주식시장에서는 50%로 외국인 한도확대가 이루어졌다. 외국인의 입질이 다시 시작됐다. 외국인의 매수 재개를 따라 국내 투자가의 매수 역시 시작됐다.
1월의 상승은 컸다. 단 3일을 제외하고 주식시장은 폭등했다.
주식시장은 3일 개장지수 385.49에서 31일 567.38로 무려 +47%나 뛰어올랐다. 선물가격도 마찬가지로 상승을 보였다. 39.80에서 68.90으로 올랐다.
SJ 투자자문이 주식에서 올린 수익은 대략 40%. 주가지수 상승에 살짝 못 미쳤지만 그 크기는 컸다. 일부의 금액만 투입되었던 선물에서는 더 큰 수익이 나왔다. 이때 선물 1계약 매수 금액은 불과 300만 원. 그는 적당한 수량의 계약을 매수했다.
31일이 되었을 때 선물지수는 29.1포인트 상승하여 한 계약당 1455만 원의 수익이 들어왔다. 무려 4.5배의 수익이었다.
그의 총자산은 350억을 넘어섰다. 사실상 외환위기를 맞은 격동기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그런 수익률이었다.
이 무렵 외국의 손님이 자주 드나들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권위를 과시히고 외국 자본 유치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이를 이용했다. 국내를 방문한 외국의 큰손은 달러가 필요한 우리나라의 처지 때문에 극진한 환영을 받았다.
김대중 당선자는 환투기의 황제라 불리는 퀀텀펀드 운용자인 조지 소로스를 만나 협조를 부탁했다. 그는 싱가포르 역외 선물시장에서 원화 폭락을 일으키는 주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자에게 구걸하고 있는 정부를 욕했지만 힘이 없는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IMF의 자금 지원이 이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금융시장이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2월은 1월의 폭등에 따른 반발로 다시 하락으로 돌아서며 아래위로 출렁였다.
그 와중에 은행권의 대대적인 정리해고가 잇달았다. 사실상 자본이 잠식된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은 퇴출 수순을 밟았다. 제일은행 해직자의 고통의 나날을 그린 눈물의 비디오가 전 국민을 울린 것도 이 시기였다.
3월이 되며 다시 하락으로 돌아선 듯하던 주식시장은 중순을 넘어서며 옆으로 횡보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었다.
주식시장은 여전히 힘이 없었다. 작은 매물에도 시장은 큰 폭으로 밀리기 일쑤였다.
이즈음 주식시장에는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
[1998년 4월 11일]4월 9일 옵션만기일이 지나고 시장은 오랜만에 상승으로 돌아섰다.
유서준은 증권가에 돌고 있는 찌라시를 확인했다. 그의 눈에 번쩍 뜨이는 소문이 있었다.
“이거 뭐지?”
11일 토요일 오전, 사무실에서 유서준은 서하나에게 물었다. 그의 손은 찌라시 한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흠, 외국 헤지펀드인 T 펀드에서 국내 선물 매도를 쌓고 있다고?”
서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서준이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T 펀드에 대해 아는 바 있어?”
“조지 소로스의 퀀텀 펀드와 더불어 세계 2대 헤지펀드라고 불리는 공룡펀드라는 거 밖에…… 아시아권역, 특히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주로 활동하며 대단히 공격적이고 투기적이란 소문을 들었어.”
외환위기 덕분에 금융 질서를 어지럽히는 헤지펀드에 대해 인식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헤지펀드가 국내 시장에 등장했다는 사실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선물 매도를 쌓고 있다는 것은…….”
유서준은 다이어리에 적혀 있던 주가 움직임의 큰 그림을 떠올렸다.
서하나가 대답했다.
“단순하게는 주가가 내릴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이야기지. 복잡하게는 선물 매도를 쌓음으로써 주식에 하방으로 압력을 가하게 돼. 그것은 만기일이 가까워질수록 가중되고.”
금융체질이 약화된 국내 시장에 세계적인 펀드가 하락으로 장을 유도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사실 외국인에게 주식시장이 개방된 후 가장 큰 문제는 외국인 따라하기였다. 외국인이 주식을 사면 내국인도 같이 사고, 팔면 같이 팔아서 변동성을 키우고 있었다.
T 펀드가 선물 매도 포지션을 잡고 있다는 것은 국내 투자가도 동일한 포지션을 취함으로써 하방 압력을 더욱 가중시킬 우려가 있었다.
유서준은 이 기간 최저주가지수인 277.37까지 지수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지금부터 매도 포지션을 쌓고 있다는 것은 결국 선물 만기일인 6월 초를 노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는 T 펀드의 움직임이 6월의 하락 최저점을 만든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다이어리에 적힌 대로 지수가 움직일 것이라는 의미였다.
“이거였나?”
그 움직임에 가담해야 할까. 가담하면 물론 돈을 확실하게 벌 것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국내 금융시장은 더욱 처참하게 박살이 난다.
유서준은 주가지수를 바라보며 고민했다. 원래대로라면 앞으로 2, 3일 내에 적어도 수천 계약 이상의 선물 매도를 들어갈 예정이었다.
선물을 주문 내기 직전까지 갔다가 멈추기를 여러 차례.
결국 유서준은 선물 포지션 진입을 포기했다.
그는 자신이 금융회사를 설립하는 이유를 생각했다. 제 이의 외환위기에서 자신을 구하고 이 사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 핑계로 지금 첫 번째 외환위기에서 이 나라를 수렁에 빠트리는 매매를 하려고 하고 있다.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자신의 목적에도 꽤 큰 오류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았다. 궁극적으로 본인이 돈을 벌기 위해 이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때때로 이 사회나 국가를 위해서라고 미화시켜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문이 발생하자 차마 선물 매도를 칠 수가 없었다. 지금 그것이 돈이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가 100억에 해당하는 선물을 매도하면 그 여파로 주식시장에선 거의 700억에 해당하는 매물이 퍼부어질 것이다. 평소라면 별문제가 없지만, 지금처럼 체질이 약한 상황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었다. 거기에다 국제 헤지펀드를 도와 그들이 국부를 빼가는 일을 도와줄 생각도 없었고.
그는 대신 서하나에게 요구했다.
“T 펀드 쪽으로 연줄 있으면 그들의 움직임에 대해 자세히 알아봐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