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88
92. 투기자본(2)
다행히 서하나의 동기 중에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그쪽 펀드에 입사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시아 쪽 헤지펀드 운용에서 싱가포르 담당자였다. 그를 통해 국내에 들어온 T 펀드의 움직임에 대해 정보를 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음, 대단한데?”
서하나가 정보를 받은 이메일을 보여주며 말했다.
유서준 역시 그녀에게 바짝 붙어 이메일을 함께 확인했다.
“T 편드가 제대로 한탕하려고 작정하고 들어왔네. 이거 봐.”
서하나가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서준의 눈이 손가락을 따라갔다.
“6월 만기를 노리고 선물 매도 총수량을 2만 개 이상까지 쌓을 예정이라고?”
유서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서하나에게 물었다.
“요즘 미결제약정이 얼마나 되지?”
“만기 부근 가면 3만 계약이 조금 넘을 정도?”
“그럼 전체 중 2/3에 해당하는 포지션을 홀로 가져간다는 거잖아?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유서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선물시장이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지만 아직 하루 거래량은 1만 계약 정도이고 미결제약정은 3만 계약이었다. 이런 시장에 2만 계약을 퍼붓겠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토끼가 토닥거리는 곳에 호랑이가 나타난 격이다. 토끼는 열 마리여도 호랑이에게 감히 맞설 수 없다. 호랑이는 손쉽게 포식자가 되어 토끼를 찢어발길 것이다. 국제 투기세력인 T 펀드에 맞서 국내 투신이나 증권사는 장렬한 최후를 맞을 것이다.
그럼 그다음에는? 혼자남은 T 펀드는 어쩌겠다는 이야기인가? 시장이 망가지면 자신도 살아남기 어렵다. 하지만 이들은 외국인. 한국 시장을 버리고 뜨면 간단하다.
서하나가 유서준의 갈등을 눈치채고 물었다.
“T 펀드를 따라갈 거야?”
선물 매도에 동참할 거냐는 물음이었다.
유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스스로 금융시장을 망가트리긴 싫어.”
“그럴 줄 알았어.”
서하나가 미소를 지었다. 평소 유서준을 가까이서 보아왔던 그녀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젠 금방 눈치채는 그녀였다.
유서준은 고민했다.
그렇다고 반대로 선물 매수에 뛰어들어 T 펀드와 맞설 용기는 없었다. 다이어리에 나타난 6월까지의 하락이 T 펀드 때문이라면, 만일 T 펀드와 대결하여 이긴다면 주식시장의 흐름을 상승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서하나와의 결혼에서 보듯 미래를 바꿀 수 있음을 확인했다. 하지만 SJ 투자자문은 이제 일이백 억의 돈을 굴리는 소규모 펀드일 뿐이다. 국제 헤지펀드에 맞설 실력이 되지 않는다. 체급 차이가 너무 컸다. 아직은 몸을 사려야 할 때였다.
문득 유서준은 편지에 나타난 제이 외환위기를 떠올렸다. 그때의 국제 투기세력으로 지목된 LTCM. 지금 그 LTCM이 미국에서 굴리는 돈이 천억 달러를 넘는다. 지금부터 40년 후면 대체 그 규모가 얼마나 될까. 그때도 지금처럼 거인과 난쟁이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
유서준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지만 먼 훗날 미래에는 지금처럼 무기력할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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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을 기점으로 주식시장은 서서히 미끄러졌다. 엄밀하게는 지난 2월 초부터 출렁거리며 하락을 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4월 들어서의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조금씩 천천히 계단식으로 하락 중이란 점이었다.
T 펀드에서도 한방에 매도를 쳐서 하락을 시키면 먹을 것이 줄어들기에 조금씩 매도 포지션을 쌓다 보니 이런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와중에 일본의 경기침체설이 흘러나왔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일본발 세계 대공황 예고 소문이 강타했다. 주식시장은 경기를 일으키고 다시 그만큼 미끄러졌다.
외환위기를 처음으로 예측하여 스타가 된 쌍용증권의 스티브 마빈은 ‘제 이의 외환위기가 오고 있다’는 섬뜩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스티브 마빈의 통찰력에 감탄한 투자자가 그를 따라 장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스티브 마빈은 스타가 되었지만 정작 그를 고용한 쌍용증권은 부도 위기를 맞아 정리해고에 명예퇴직을 단행 중이었다. 쌍용그룹 전체가 상황이 나빠 조만간 타 금융사에 인수합병 될 것이라 했다.
약 한 달에 걸쳐 누군가가 천천히 선물 매도를 쌓고 있음이 느껴졌다. 물론 그 사람이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짐작으로 T 펀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뿐이다.
그 와중에 6월에 도래할 제이 외환위기설이 터졌다. 이차 금융대란으로 기업이 추가로 부도나고 실업자가 넘칠 것이란 소식이 돌았다.
대개 이런 소문은 주가 하락에 베팅한 세력이 퍼트리는 것이다. 이런 소문이 다시 주가를 떨어트리고 그 세력은 이익을 얻는다.
유서준은 시장이 열릴 때마다 선물 호가에서 느껴지는 대결을 실감했다. 아래로 누르는 T 펀드와 반발하여 위로 고개를 내밀려는 국내 연합의 무시무시한 대결이었다.
선물의 매수와 매도는 언제나 서로 대립한다. 그 두 세력은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때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완전히 그로기가 될 때까지 몰아붙이는 일도 흔했다. 코너에 몰린 한쪽은 포지션 환매를 하게 되고 환매는 자신의 진영에 두 배의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
이런 연유로 확실하게 힘의 차이가 드러나면 지수는 알아서 가던 길을 갈 수밖에 없다. 주가 하락에 의해 혼쭐이 난 매수 세력이 매수를 환매도하면서 알아서 다시 매도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T 펀드의 평균 매도가가 선물지수 50대란 소문이 돌았다. 5월이 되었을 때 선물가격은 이미 40대를 움직였고 T 펀드는 상당한 수익을 올린 상태였다.
선물 매수를 잡은 개인투자가나 국내 기관은 하루가 지날 때마다 손실이 가중되는 죽음의 레이스에 말렸다.
“상대가 되지 않아.”
6월 초가 되었을 때 유서준이 내린 판단이었다. 확실히 체급 차이가 났다. 만기일을 앞두고 쌓여 있는 물량은 만기일의 대파국을 예고했다.
작년 12월 이후 다시 맞는 금융대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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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11일]6월 선물 옵션 만기일을 맞았다. 시작부터 엔화가 무너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다 연일 계속되는 외국인의 현물 매도는 장의 전망을 더욱 어둡게 했다.
후장 시작할 때까지 주가지수는 전일보다 약 4포인트 떨어진 320선에서 등락을 거듭했다. 작년 12월 저점, 외환위기 초입 때보다도 더 하락한 수준이었다.
호랑이인 T 펀드에 맞서 토끼가 된 국내 기관 및 개인투자가는 사실상 회생이 힘들 지경이었다. 국내 금융시장의 주권이 완전히 외국의 헤지펀드에 넘어간 상태나 다름없었다.
유서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지만 국내 금융기관을 비롯한 매수 세력은 너무 무기력했다.
“어떻게 예상해?”
그는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심각한 얼굴을 한 서하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의견도 같았다.
“싸움 자체가 안되네. 앞으로가 더 걱정이야.”
물론 포지션 진입을 하지 않은 그들은 전혀 손해가 없다. 당연히 이익도 없었다. 하지만 국내 시장이 외국 투기자본의 놀이터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수가 반등하기 시작했다.
차월물을 살피던 서하나가 말했다.
“적들이 전략을 바꾸었어. 6월물에서 9월물로 옮겨가는 것 같아.”
그 말은 시장을 9월까지 계속해서 하락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지금까지 3달간 얻은 수익은 이 정도에서 정리하고 앞으로 3달간 다시 시장을 억눌러보겠다는 의도였다.
지금까지 3달간의 하락만으로도 죽을 지경인데 앞으로 3달을 더 하락시키겠다니. 주식시장 하락은 비단 투자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가가 하락하면 해당 기업은 부도의 위기에 빠지고 부도가 나면 모두가 실업자로 전락한다.
“이번에 또 당할 수는 없지. 아마 향후 3개월은 국내 투자가의 반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유서준은 자신의 바람을 중얼거렸다. 막연한 희망이긴 하다. 서하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유서준은 다이어리에서 주가지수는 앞으로 하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만기일 며칠 후인 6월 16일, 주가는 장중 최저인 277.37을 찍은 후 상승으로 전환한다. 만일 지금 T 펀드가 차월물로 전환하여 다시 매도 공세를 펴는 것이 확실하다면 다음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매도 세력인 T 펀드에 대항하는 매수 세력에 유서준도 한 손을 보탤 생각이었다. 적어도 국내 금융시장을 어지럽히는 적에게 본때는 보여줘야 하니까.
만기일인 11일 종합주가지수는 전날보다 4포인트 오른 328.70을 기록했다. 어쩔 수 없이 선물 매수를 보유했던 자는 간신히 막판에 숨을 돌렸다. 코스피 200 지수는 37.84. 매도량 상당 수량이 막판에 차월물로 넘어가며 프로그램 매물이 출회 되지 않은 점이 크게 작용했다.
선물 거래량은 무려 7만 계약이었고, 옵션 거래량은 10만 계약을 넘어섰다. 거래대금은 1조 2천 억으로 주식시장 거래대금 3900억 원의 3배나 되었다. 선물시장에 의해 주식시장이 휘둘린다는 증거였다.
T 펀드는 평균 매도단가 51에서 진입한 선물 매도 포지션 23000계약을 청산받아 세 달 만에 무려 1600억 원의 이익을 챙겼다. 국제 투기세력의 승리였고 그만큼 국내 자본은 거덜이 났다.
곧바로 하루 뒤, 거대 이익에 고무된 T 펀드는 다시 공세를 재개했다.
6월 12일, 공격을 받은 주식시장은 다시 폭락했다. 외부에선 무려 8년 만에 벌어진 엔저 충격이 세계 금융시장을 강타하며 폭락사태를 일으켰다.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T 펀드를 앞세운 매도세력은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선물은 시작하자마자 하한가로 떨어졌다. 이날 주식시장은 전날보다 -8.1% 하락한 주가지수 302.09를 기록했다. 사실상 전 종목이 하한가였다. IMF 당시에도 깨지지 않았던 300선이 목전에 다가왔다.
이런 가운데 T 펀드가 3대 투신사에 수익증권 중도환매를 요청함으로써 외국인 투자에 찬물을 끼얹었다. 이는 투자자에게 외국인 국내 투자 철수라는 겁나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T 펀드는 주식, 선물, 채권 모든 분야에서 전방위 공세를 폈다.
국내의 모든 금융기관이 새파랗게 질려있을 때 정작 유서준의 마음은 평온했다.
하락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어두운 터널의 끝이었다.
“이거 좀 심하지 않아? 정말 300이 깨지는 거야?”
서하나가 유서준에게 물었다. 그녀는 오래전 유서준이 말했던 지수 흐름을 떠올렸다. 주가지수가 1000을 오르내릴 때 먼 훗날에는 300이 깨지는 지점까지 하락할 거라고 그가 말했던 그 날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때는 얼토당토않은 지수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눈앞에 보였다.
서하나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깨질 거야. 하지만 곧 회복할 거다. 그리고 올라가겠지.”
몇 달 만의 희망이 섞인 의견이었다.
“그럼 다시 주식을 매수해?”
서하나의 표정이 밝아지며 물었다.
유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식을 매수하고 싶어?”
“주가가 너무 싸니까 손이 근질거리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주식을 매수해서 국가, 아니 국내 금융시장에 힘을 보태주고 싶어서 그래. 어쨌든 이 분야에서 밥을 먹고 살아야 하는 우리가 이 시장을 이렇게 깨어버리면 안 되니까.”
서하나의 대답은 단순했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주식을 매수하는 것과 애국이 무슨 연관성이 있겠냐만 외국 투기자본에 국내 시장이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도 인간으로서 할 짓은 아니었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우리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 주식은 다음 주 화요일부터 매집에 들어갈 거야. 적어도 6월 말까지는 포트폴리오를 완성해야지. 직원에게도 그렇게 준비하라고 일러줘. 구체적인 회의는 내일 할 거니까.”
“응, 알았어.”
서하나의 반응은 빨랐고 표정은 밝았다.
유서준은 곧 있을 행사를 떠올렸다.
“고객 펀드 모집일이 언제지?”
“6월 20일. 그런데 사람들이 투자하려 할까? 이런 시기에…….”
서하나가 자신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일 년이나 중단된 펀드. 물론 그들은 그 기간 투자를 하지 않았기에 손해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중에 돈이 말랐다. 어지간한 기업어음을 사면 연이율 30%를 넘나든다. 과연 누가 위험한 주식을 사려 할까? 물론 채권 역시 부도의 위험에 시달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고객 펀드에 돈이 얼마나 들어올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 돈을 맡긴 사람에게 대박을 선물할 것이다. 그게 우리의 사명이니까.”
유서준은 이를 악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