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89
93. 투기자본(3)
6월 15일 월요일, 주식시장은 -4.8% 하락하며 300선을 깼다. 이날 종가는 최저인 288.21을 기록했다. 주식시장은 6월 16일까지 폭락했다. 이날 종합주가지수는 장중 저점인 277.37을 찍었다. 종가는 정확히 280.0이었다.
투자자들은 아연실색했다. 아직 외환위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나? 물론 외환위기를 벗어나려면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구제금융이 투입된 현시점에서 작년 12월의 저점을 깨트리고 수직 낙하하는 것을 이해하긴 힘들었다.
한쪽에선 외국인의 주식 매도와 더불어 선물에서 쌓이는 매도 포지션에 우려를 나타냈다.
서하나는 친구로부터 전해진 T 펀드 정보를 살피며 한숨을 내쉬었다.
“T 펀드도 대단하네. 지난 수익에 만족 못 해서 이번에도 매도 포지션을 쌓고 있다네. 내부적으로 9월 만기일까지 주가지수 250은 깬다고 보고 있나 봐.”
그녀가 말을 하며 유서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그리 어두워지지 않았다. 뭔가 속으로 갖고 있어 보이는 분위기.
서하나가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에는 매도 포지션 수량 27000계약을 목표로 하고 있다네. 지난번보다 더 큰데?”
토끼가 사는 곳에 호랑이가 재미를 들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번 연달아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꽤 들어가 있지 않아? 지난 6월물에서 9월물로 이월된 것도 있을 것이고.”
“요즘 한창 작업 중인가 봐.”
“대단한 놈이네.”
“돈이 엄청나게 많은 놈이니까.”
외국인 투자자는 국내 기관보다 압도적으로 돈이 많다. 말 그대로 국내 시장 정도는 돈의 힘으로 억누를 수 있는 녀석이다.
“27000계약이나 작업하려면 한 달은 걸리겠네.”
유서준이 중얼거렸다.
서하나가 염려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는 주식을 오늘부터 사기 시작했어. 대기업에 업종 내에서 일등주 위주로. 선물은 어떡하지?”
“선물도 이번엔 제대로 들어갈 거야. 그것도 내가 직접 매수 주문 들어간다.”
유서준이 굳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직원을 시키지 않겠다는 것은 그 위험성을 고려한 조치다. 그녀는 그 표정에서 굳은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서하나는 걱정이 앞섰다. 선물의 위험성 때문이었다.
“선물은 매수로 들어갈 거지? T 펀드와 반대로. 주식과 선물이 모두 같은 방향인데 위험하지 않겠어? 잘못하면 완전히 망하는데?”
“걱정돼?”
서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를 믿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현재 얼마나 있지?”
서하나가 잠시 계산을 해보더니 대답했다.
“연초 대비 이자가 약간 붙었어. 거의 투자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그 이자 상당 부분을 경비로 사용해서 현재 총자산은 개인 계좌로 140억, 자본금 고유 계정으로 200억이야. 이중 우리 것은 240억이고. 주주의 것이 100억이지.”
이 돈은 유서준이 87년부터 약 10년에 걸쳐 일구어온 결실이었다.
서하나가 계속 설명했다.
“이중 절반을 현물 주식매입에 들어갈 거야. 총 340억 중에 200억으로 예상하고 있어. 선물에는 140억이 투입 가능해.”
유서준은 머리를 굴렸다. 이번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내심 이번에 승부를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 투기자본도 혼을 내주고 증권사 인수 자금도 마련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유서준이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자 서하나가 물었다.
“설마 풀베팅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물론 그것은 아니었다. 유사시를 대비해 항상 최후의 수단은 남겨두어야 하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소 과하게 베팅해볼 생각이었다.
“선물에는 그 절반인 70억을 넣기로 하자. 어때?”
서하나가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70억이면…… 지금 선물 1계약이 250만 원가량이니까 모두 2800계약이 가능해.”
“그럼 2000계약으로 준비하자.”
선물시장이 비약적으로 성장하여 거래량은 충분했다. 1000계약 정도는 원하는 가격에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거래 가능할 정도로.
물론 T 펀드의 27000계약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하지만 2000계약도 절대 작은 수량이 아니다. 최근에 움직이는 폭을 감안하면 하루 10억이 오가는 돈이다. 평소라면 손이 떨려 주문을 내기도 힘들고 시세에서 눈을 떼면 불안해서 정신을 못 차릴 금액이다.
“무리하는 것 아냐?”
“이번에 승부를 볼 거야. 계획대로 풀리면 D 증권사 인수하자.”
유서준의 대답에 서하나가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유서준이 그녀의 손을 슬그머니 잡으며 장난을 걸었다.
“증권사의 실질적인 오너로 만들어주면 그 보답은 뭐로 해줄 거야?”
“응?”
서하나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는 그녀는 너무 귀여웠다.
“갑자기 무슨 이야기야? 뭔가 꿍꿍이가 있구나?”
“아하, 어쨌든 대답해. 나에게도 뭔가를 해줘.”
“흐음…….”
그녀가 한참을 고민했다.
유서준은 잠자코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소원 하나 들어줄게.”
“무엇이든?”
금방 되받아치는 그의 물음에 그녀가 한참 고민했다. 분명 뭔가 곤란한 요구가 있을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다. 예전에도 그렇게 소원 들어주기 내기를 한 적도 있었고. 무엇보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건다는 그에게 조금이라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었다.
**
[1998년 6월 20일]서울 여의도의 한 빌딩 안.
턱수염을 기른 한 외국인이 책상 앞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나이답지 않게 짧게 친 머리와 파란 눈, 붉은빛이 살짝 어리는 하얀 피부는 전형적인 북유럽인의 모습이었다.
그는 세계 2대 헤지펀드로 알려진 T 펀드의 아시아 담당 책임자였다.
그의 앞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늘씬한 금발의 여인이 허리를 곳곳이 편 자세로 대기 하고 있었다.
책임자인 사내가 매끄러운 영어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최근 이틀간 상승 후 다시 저희가 매도 포지션을 잡고 들어가자 지수가 주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들어갔지?”
“총 27000계약 중 6월물에서 이월한 것이 5000계약이고 신규진입분이 5000계약입니다. 아직 17000계약을 더 들어갈 겁니다. 대략 하루에 1, 2천 계약씩 꾸준히 진입할 예정입니다.”
그들은 선물 매도 포지션을 구축하고 있었다. 천천히 조금씩 매도 포지션을 구축해서 주가를 억누르다 보면 결국 어느 시점에 주가는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되어있다.
적어도 돌발적인 외부 변수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들을 당할 자 없다.
주식시장은, 특히 선물 시장은 자금 동원력의 싸움이다. 돈이 많은 자가 적은 자의 항복을 받아내어 이기게 되어있다. 궁극적으로는 주식시장이 제 갈 길을 가겠지만 일시적으로는 돈의 힘에 의해 왜곡될 수밖에 없다.
“흐흐… 지난 6월물처럼 물려서 빈사 상태에 이르는 한국놈을 구경할 수 있겠군.”
사내가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들은 포식자였다. 초식동물만 존재하는 금융시장이란 곳에서 유일하게 육식을 일삼는 육식동물이다. 부도 위기로 전전긍긍하는 한국의 금융기관은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한국의 개인투자가도 아이엠에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부는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데다 외국인 투자가라면 일단 굽신거리고 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다른 준비는 어떻게 됐지?”
“주식을 포함한 전방위로 투자자에게 우리가 시장을 하방으로 본다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겁먹은 자는 당연히 우리를 따라올 겁니다. 게다가 일본 노무라증권 리서치 팀을 비롯하여 몇 군데에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로 했습니다. 정보망에 따르면 스티브 마빈 역시 조만간 리포트를 하나 더 낼 거라고 합니다. 제목은 ‘한국의 은행이 관료에 유린되고 있다’ 대충 이런 제목이라고 하더군요.”
늘씬한 여인이 비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자식은 제목 하나는 끝내주는군. 이제 양 떼를 몰 듯 몰아붙이면 되겠네. 돌발 상황은 발생하지 않겠지?”
사내가 마지막 점검을 했다.
“뉴욕 증시가 폭등하거나 엔저 현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 없을 겁니다.”
여인이 자신감을 보였다.
그들의 뇌리에 지난 6월물에서 이득을 본 1600억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2천억이 넘겠지. 두 사람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
6월 20일, 고객 펀드 유치 설명회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왔다. 물론 일 년 전처럼 출입을 통제해야 할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참여한 인원은 대략 오십 명가량. 그럼에도 유서준은 만족했다.
시중에 돈이 말라버린 상황에서도 투자 의향이 있다는 것은 여윳돈이라는 의미였다. 주식 투자에서 가장 바람직한 돈이다. 그리고 일 년이나 지난 후에도 찾아왔다는 것은 SJ 투자자문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다는 의미였다. 이들이야말로 그들의 진정한 고객이었다.
유서준이 단상에 서자 밀집한 고객이 긴장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최근 같은 주식시장 폭락 상황에서 펀드 자금을 모집한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무모하게 보였으니까.
유서준은 화이트보드에 커다랗게 글씨를 썼다.
Buy Korea. 대한민국을 사라.
그는 다소 흥분된 음성으로 연설을 시작했다.
“Buy Korea. 들어보셨습니까?”
청중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바이 코리아는 현대증권 이익치 회장이 최근 전면에 내건 슬로건이다. 아이엠에프를 맞아 바겐세일하는 한국의 기업을 무차별로 사들이는 외국인에 대항하기 위해 국내 투자자본을 모집하면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애국심을 자극하는 상술이라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아이엠에프를 맞아 국민은 호응했다. 최근에 무려 7조 원에 해당하는 자금을 끌어모았다고 알려졌다.
“여러분은 이 문구를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살 때입니다. 외인에게 넘어갈지도 모를 기업을 우리의 손으로 다시 일으켜 세울 때입니다.”
유서준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한 투자자가 그에게 물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투자하면 기업이 부도나서 더 손해 보지 않겠냐고.
“여러분들은 일 년 전 제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적어도 이곳에 모인 사람은 일 년 전 그가 펀드 모집을 중단한다며 과감하게 외쳤던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말도 안 된다며 의아해했던 그때를 지금 다시 되새겨보면 이제는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전망을 했던 이곳의 대표를 신기하게 볼 것이다.
눈빛을 반짝거리는 청중을 향해 유서준은 말했다.
“주식은 쌀 때 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투자하시면 1년 뒤에 최고의 수익으로 보상받을 겁니다. 아, 기간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연말까지입니다. 지금부터 1999년 12월 말까지 펀드를 운용할 것입니다. 기간은 1년 반입니다.”
2000년대 새로운 밀레니엄을 최고의 수익과 함께 맞으라는 그의 말에 모든 사람이 환호의 박수를 보냈다.
연설이 끝나고 유서준은 연예인 한세진을 만났다. 지난번에 이어 이번에도 그녀는 그에게 투자를 맡겼다. 그녀는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기에 앞선 1년간 다른 곳에 돈을 투자하지 않아 원금을 그대로 지킬 수 있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말하며 유서준에게 감사했다.
이제는 신인의 티를 벗어나 웬만큼 알려진 연예인으로 거듭난 그녀는 주위의 다른 연예인도 데려왔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연예인이나 유명인의 펀드 가입은 펀드를 알리는 유용한 수단이었다.
모든 행사가 끝이 나고 고객이 돌아갔을 때 서하나가 그에게 말했다.
“티비에서만 보던 한세진을 실물로 보니 정말 예쁘네요.”
유서준은 그녀를 보며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서하나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입술을 쭉 내밀며 혀를 찼다.
“으그, 설마 그녀에게 관심 있는 건 아니죠? 하긴 여자인 내가 봐도 예쁘긴 하더라.”
유서준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치며 웃음을 지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냐, 당신이 더 예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