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93
97. 증권사 인수(3)
“뭔가 이상해.”
서하나가 유서준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집에서 오랜만에 두 사람만의 시간을 보내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바쁜 탓에 이렇게 집에서 밥을 먹는 것은 한 달에 서너 번밖에 없을 정도로 드물었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간단한 요리를 곁들인 식사를 함께했다.
“뭐가?”
유서준이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었다.
“금감위에서 요구한 조건 말이야.”
그녀는 낮에 있었던 금감위와의 만남에 대해 유서준에게 설명했던 차였다. 그녀는 선배 오도욱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나머지 사항은 자세히 말해주었다.
“별로 이상할 것은 없는데?”
유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하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조건을 내걸면 누가 인수해? 사실상 하지 말라는 거잖아?”
지금 같은 위험시기에 추가로 100억이나 더 투입하여 다른 부실 자회사까지 인수하라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조건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오도욱 선배는 그녀에게 겉으로는 친절하게 응대해주었지만 내심까지 그럴 일은 없다고 그녀는 추측하고 있었다. 물론 실제로는 그의 뒤에 자리한 이 나라 관료 체계의 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배인 오도욱 앞에서 야멸차게 협상을 깨고 나올 수도 없었다. 상대가 일단 증권사의 상위기관이자 목줄을 쥐고 있는 금융감독위원회 인물이었고 한편으로는 증권사 설립은 유서준의 꿈이었기 때문이었다.
냉철히 판단하면 인수하더라도 절대 정상화가 불가능할 법한 그런 요구 조건이었다.
유서준이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그만큼 외부인이 그 판에 끼어들기를 싫어한다는 거지.”
어느 분야든 이미 진출해 있는 사람끼리의 암묵적인 연합이 존재한다. 따지고 보면 판검사가 판치는 법조계나 의사가 주축이 된 의료계도 외부에서 다른 이질적인 것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 있다. 자격고시 또는 합격 인원 같은 것으로 일차적인 울타리를 치고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체계를 마련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 금융 분야도 그들만의 리그가 있다. 그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꽤 큰 출혈이 필요하다. 그나마 지금이 국가적 위기라 느슨해진 경우라고 유서준은 생각했다.
“하지 말까?”
서하나가 넌지시 중얼거렸다. 위험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그녀로서는 심히 망설여졌다.
유서준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해야지. 차라리 잘 됐잖아? 이 기회에 아예 금융그룹을 완성하지 뭐.”
태평스러운 유서준의 말에 서하나가 놀라는 표정을 짓다가 배시시 웃었다.
“언제나 자신 있네.”
“응, 상대가 그런 조건을 내건 점이 의아스럽긴 하지만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우리가 능력만 있으면 특별히 손해 볼 일도 아니니까. 오히려 은행 돈을 손쉽게 빌려올 기회지.”
“사람은 어떡하지?”
그녀는 오도욱이 제안했던 간판급 인물을 떠올렸다.
유서준은 그마저 이미 준비되어 있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둔 사람이 있어. 그들이 원한다면 그런 사람을 사장으로 내세워 주지. 그럼 문제없잖아?”
서하나는 동의했다. 믿음직스러운 그를 보니 괜한 걱정을 하는 것 같긴 했다. 그렇다고 증권사 인수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것도 사실이기에. 남들은 모두 계열사를 팔아 몸집을 줄이려고 발버둥 치는 시대다.
그 순간 유서준은 머릿속에서 다이어리에 기록되어 있던 주가 움직임을 떠올렸다.
길게 보면 은행 차입 100억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만간 외환위기를 벗어나 사상 최대 거품인 밀레니엄 버블이 시작될 예정이니까.
그 이전에 그 100억을 어떻게 해치울 방법은 없을까. 그가 고민하는 이유였다.
곧바로 그의 머리에 두 달 뒤부터 벌어질 무차별 상승이 떠올랐다.
**
명동 인베스트먼트의 이영호 대표와 증권사 인수에 대해 밀담을 나눈 유서준은 오랜만에 송예은을 만났다. 이제는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녀는 과거 그가 과외를 했던 때와 모습이나 행동이 그리 바뀌지 않았다.
엄밀하게는 하는 짓이 똑같았다. 지금도 풋내기 여고생처럼 그를 만나자 방방 뜨며 즐겁게 맞았다. 게다가 옷차림도 그대로였다. 지나치게 짧다 싶은 그녀의 치마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예쁜 만큼 또 늘씬한 다리를 가진 만큼 보는 그로서는 즐겁긴 했다. 그가 보기에 훗날 나이가 들어도 저런 차림이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잠시 걸을까?”
두 사람은 강남역 주변 거리를 거닐었다.
마치 연인처럼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꼈다. 과거 그녀가 막 졸업했을 즈음 그날이 생각났다.
“어떻게 지내?”
“흐음, 샘 결혼하시고 한동안 상심해서 우울하게 지냈죠.”
“정말?”
“하하, 농담이죠.”
유쾌하게 키득거리며 송예은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유서준보다 2년 아래인 그녀는 중간에 1년을 해외 교환학생으로 다녀왔다. 그녀는 5년만인 94년 초에 졸업했다. 곧바로 유학을 떠나고 싶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다. 일단 그녀는 국내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그녀가 석사학위를 마쳤을 때는 96년 초였다. 이때 다시 유학을 추진하고 싶었지만, 주가 하락이 발목을 잡았다. 아버지가 투신사에 근무하는 상황에서 주가 하락은 집안 수입의 감소를 의미했다. 아버지 벌이가 타격을 입는 때에 그녀가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유학을 주장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일단 유학을 포기하고 대기업에 들어갔다. 대기업 기획실에 배치되어 근무를 시작했다. 그다음 지금까지 순식간에 2년여가 흘렀다.
“그게요, 아직 유학의 꿈은 버리지 않았어요. 여건만 되면 가볼 거예요. 박사과정을 밟거나 그게 아니면 MBA를 다니거나 그런 계획을 하고 있어요. 문제는 외환위기가 오며 그마저 다 미루어져 버렸다는 거죠. 망했어요.”
유서준은 그녀의 처지를 이해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유달리 해외 유학을 바랐던 그녀였다.
“결혼은 안 하고?”
어느새 송예은도 나이가 찼다. 아마 집안에서도 결혼하라고 난리일 것이다.
송예은이 혀를 쏙 내밀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헤헤, 아직은 생각 없어요.”
“왜?”
“왜긴요, 샘 같은 남자가 안 나타나서요.”
“응?”
“아, 실수. 얼굴은 좀 다른 사람으로 바꾸고. 히히.”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더니 곧바로 킥킥거리며 웃었다.
유서준은 함께 웃어주었다.
거리를 걸으며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받던 송예은이 마침내 그에게 물었다.
“흐음, 갑자기 만나자고 하신 이유가 있죠?”
유서준의 표정도 전과 달리 진지해졌다.
“아버지 요즘 뭐하시니?”
다소 난감한 질문이었다. 외환위기로 실직자가 넘치는 시기에 특히 금융기관에 종사하던 사람의 직장을 물어보는 것은 예의가 아닌 듯했다.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유서준의 짐작대로 송예은이 우울하게 대답했다.
“예전부터 다니던 국민투신을 그만두고 명퇴하셨어요.”
예상하던 대로였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도 있고 명퇴 자금도 꽤 받아서 생활에는 문제가 없지만, 아버지는 아쉬운가 봐요. 그만두고 한동안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셨어요.”
적어도 삼십 년을 한 직장에 다녔을 테니 그럴 만도 했다.
송예은이 분위기를 바꾸며 물었다.
“그런데 아버진 왜요?”
“아버지를 스카우트하고 싶어서 말이야.”
송예은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뚫어지라 쳐다봤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증권사 설립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눈이 놀라서 크게 떠졌다.
“그래서 아버지를 SJ 증권 사장으로 모시고 싶어서 말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그녀가 방방 뛰었다.
“우와, 아버지께서 엄청 좋아하실 거예요.”
자기 일인 것처럼 그녀가 좋아했다.
흐뭇한 미소를 짓는 그를 향해 송예은이 말했다.
“오빠, 저도 자리 하나 줘요.”
“넌 지금 다니던 곳이나 계속 다녀라. 조만간 유학 가겠다며?”
“힝… 지금 같은 환율이면 갈 수도 없어요.”
투덜거리는 것도 잠깐, 함박웃음을 지으며 송예은이 물었다.
“아버지께는 언제 말씀하실 생각이세요?”
“언제가 좋을까?”
“지금 당장요. 히히.”
송예은이 어린애 같은 미소를 보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즐거웠다. 만일 서하나가 아니었다면 그녀에게 결혼 프로포즈를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다가 그는 고개를 저었다. 차분하게 살림을 하는, 아니 내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이 도무지 연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서준이 송예은의 아버지 송희관을 처음 본 것은 송예은의 입학 축하 자리에서였다. 그날 그와 주식에 관한 대화를 나눈 이후로 그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졌었다.
그 후로는 사실상 만날 일이 거의 없었지만 가끔 전화로 안부를 묻고 주식시장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유서준은 그의 경제에 대한, 또 투자에 대한 식견을 높이 샀지만, 그보다 인생에 대한 삶의 철학에서 배울 점이 많았다.
미래에서 온 편지에 송예은이 언급되어 있어서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필요성 때문에 시작된 일이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오직 다이어리에 의해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전진하던 유서준에게 송희관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마음의 안정을 느끼게 해주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SJ 투자자문을 건립할 때도 그에게 소액이지만 투자를 받았었다. 그렇게 연을 끊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도 투자자인 송희관을 초창기 증권사 사장으로 모셔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다. 훗날 증권사가 기틀이 잡히면 사장 자리는 서하나에게 넘기고 고문으로 물러서면 될 것이다. 물론 그때쯤이면 송희관도 은퇴 시점이 다가올 때라 아무 불만이 없을 것이다.
**
유서준은 송희관에게 흔쾌히 승낙을 얻었다. 이제 남은 사람은 삼성 투신 부장으로 있던 손달호였다.
그는 유서준에게 졸업 후 삼성 투신으로 올 것을 강력히 추천했었다. 그것이 지금은 뒤집혀서 유서준이 그를 SJ 투신 사장으로 모셔오게 된 것이다.
손달호는 아직 삼성 투신에 재직 중이었다. 그는 직장을 옮기거나 명퇴를 한다는 생각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유서준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심지어 그는 SJ 생명을 이끌어갈 인물을 추천하기도 했다. 아직 인재풀이 미흡한 유서준으로서는 당연히 그의 추천을 받아들였다.
여기에 명동 인베스트먼트 이영호의 소개로 몇몇 인물을 받아들이자 완벽한 증권사, 투신, 생명의 인수팀이 완성되었다.
오도욱이 제안했던 100억 역시 유서준은 개인 재산을 담보로 1년 동안 차입하는 조건으로 받았다. 그는 98년이 지나기 전에 그 100억을 그대로 갚을 생각이었다. 그가 노리고 있는 결전의 날이 다시 한번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
[1998년 9월 1일]마침내 SJ 투자금융그룹이 탄생했다. 전신인 SJ 투자자문은 SJ 투자금융지주로 이름이 바뀌었다. D 증권사는 SJ 증권으로 D 투신은 SJ 투신으로 D 생명은 SJ 생명보험으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모든 계열사의 정점에 선 SJ 투자금융지주의 지분은 유서준이 50%, 명동 인베스트먼트의 이영호 대표가 30%, 서하나가 10%, 기타 인원이 10%였다. SJ 증권은 SJ 투자금융지주가 40%의 지분을 가졌고 유서준이 15%, 서하나가 5%의 지분을 추가로 소유했다. SJ 투신과 SJ 생명보험은 SJ 투자금융지주가 각각 40%의 지분을 가졌다.
SJ 투자금융지주는 비상장회사였지만 SJ 증권과 SJ 생명보험은 상장회사였다.
재계에서는 난데없이 갑자기 나타난 금융그룹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이런 현상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는 사회 문화에서 전반적인 변혁을 일으켰고 재계 역시 정부의 강제 빅딜과 함께 수렁에 빠져있었으니까.
금융계에서는 박현주의 미래에셋증권이 뮤추얼펀드인 인디펜던스의 대성공으로 갑작스러운 폭풍을 몰고 왔고 중공업 분야에서는 외환위기를 넘어가며 STX 그룹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