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94
98. 증권사 인수(4)
[1998년 9월 2일]SJ 증권으로 이름을 바꾼 D 증권 임원은 본사 대형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대부분이 50대 중년의 남자인 그들은 긴장 속에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난데없이 나타나 새 주인이 된 SJ 투자금융지주의 정체였다.
사실 SJ 투자금융지주의 전신인 SJ 투자자문에 대해 알려진 바는 많지 않았다. 나이 30도 채 되지 않은 젊은 기업가가 제 1 대주주라는 것뿐이었다. 제도권 금융사에는 신비한 자였다. 재벌 2세라는 설마저 돌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인물이 있긴 했다. 제 2 대주주인 명동 인베스트먼트의 이영호 대표였다. 사실 그들이 우려하는 것은 대부업체 대표에 불과한 이영호가 증권사의 주요 주주로 입성하는 점이었다. 제도권 금융사로서 갖고 있던 우월감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낀 그들은 전전긍긍했다.
모습을 드러낸 다른 대주주 한 사람도 관심의 대상이었다. D 증권사에 입사해 7년을 근무했다는 제 3 대주주 서하나였다. 서하나의 입사 동기이거나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임원급은 아직 없다. 이곳에 모인 임원에게 그녀는 미지의 대상이었다. 관심 있는 자는 그녀의 인사 이력 파일을 뒤졌지만 뛰어난 인재라는 것 외에 알 수 있는 바는 많지 않았다.
“서하나씨에 대해 알고 있습니까?”
어떤 한 임원이 공개적으로 물었다.
대부분이 고개를 젓는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했다.
“당시 신입사원 연수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네? 그런데 어떻게 본사에 있지 않고 지점으로 내려갔습니까?”
다시 질문이 쏟아지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당시 박지점장이 강력하게 요청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회사 측에서도 지점에서 고객을 응대하는 일이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고요.”
“누구였지요?”
“전 본 적 없습니다만 당시 인사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엄청 예뻤다고…….”
임원 몇이 눈살을 찌푸렸다. 가끔 힘이 센 지점장이 예쁜 여직원을 선점하는 경우가 있었다. 원래는 불가한 일이었지만 대부분 눈 감아주고 넘어갔다.
“설마 문제가 있었던 인사조치였었나요?”
임원들이 웅성거렸다. 새삼 찔리는 바가 있었다. 어쨌든 그런 여직원이 지금 대주주라는 신분으로 나타났다.
“그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한차례 구조조정 열풍이 불어 인적 자원 정리가 어느 정도 진행되긴 했지만, 대외 상황으로 보아 안심할 단계는 아니었다. 더구나 임원은 매년 계약하는 자리로 파리목숨이었다. 그들은 예전의 자신을 돌이켜보았다. 신임 경영자에게 뭔가 책 잡힐 일을 한 적은 없는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임 사장에 내정된 송희관씨입니다. 아시는 분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만 능력도 있고 꽤 합리적인 인물 아닙니까?”
“그렇죠. 국민투신에서도 평판이 좋았습니다.”
임원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모두 다섯. 가장 앞에 들어온 사람은 서하나였다. 그녀의 뒤를 이어 송희관, 이영호, 손달호가 들어왔고 마지막으로 유서준이 나타났다.
서하나를 본 임원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임 대주주가 예쁘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던 탓이다. 그들은 눈을 비비며 다시 그녀를 확인했다. 물론 그들 가운데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사장인 송희관이 마이크를 잡았다.
“반갑습니다. 새로 사장에 선임된 송희관입니다. 이미 저를 알고 계신 분도 계실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도 이곳에 몇 분 계시네요. 앞으로 SJ 증권을 보다 훌륭한 증권사로 이끌어 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송희관이 인사를 했다. 임원들의 박수가 터져 나왔다.
뒤를 이어 서하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녀는 장내의 임원을 둘러보았다. 모두 한 번 정도는 그녀가 보았던 인물이었다. 신입사원 연수 때 보았거나 아니면 본사에 들렀다가 마주쳤거나, 그게 아니라면 회사 사보에서 보았거나. 어쨌든 한때 하늘 위에 있어 쳐다볼 수도 없었던 임원 앞에 서니 그녀는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을 그만둔 지 5년 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분이 많이 계시네요.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아 기쁩니다. 저는 부사장이자 투자전략본부장으로 맡은 바 역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맑고 또렷했다. 이미 임원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야말로 이곳 증권사의 실질적인 인사권을 가진 실세임을. 임원에 비해 엄청나게 어린, 이제 갓 30을 넘긴 그녀였지만 그 누구도 그녀의 부사장 선임에 토를 달지 못했다.
이영호는 간략하게 본인 인사만 했고 손달호는 SJ 투신의 신임 사장으로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유서준이 나섰다.
거구에 우락부락하게 생긴 그가 나서자 모두가 움찔하는 표정을 지었다.
“전 SJ 투자금융지주 대표 유서준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SJ 증권을 이끌어가는 주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송희관 사장님, 서하나 부사장님과 함께 SJ 증권을 이 나라 최고의 증권사로 키워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 임원들은 유서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가 어리다고 깔보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던 것이 막상 접하고 나니 씻은 듯이 사라졌다. 험악한 얼굴과 빛나는 눈초리를 보자니 자리를 보전하려면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SJ 증권이 추구하는 목표는 고객과 함께 하는 증권사입니다. 우리의 제일 목표는 회사의 이익이 아니라 고객의 이익입니다.”
유서준의 주장을 임원들이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그 정도 말은 누구나 다 했다. 신임 사장이 취임할 때마다 비슷한 좋은 말을 했었다.
그의 말을 이어받아 서하나가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부터 고객의 계좌를 일임매매하는 행위를 금합니다. 직원 평가에서도 수수료 기여 항목은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고객 만족도로 평가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할 것입니다.”
임원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했던 좋은 말 수준이 아니었나? 지금까지는 회사에 가장 기여하는 사람이 최고의 고과를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정도로 평가 기준을 바꾼다고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하나가 좌중을 한차례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갑자기 모든 시스템을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은 바꿀 생각입니다. 모든 임원께서는 이것만은 유념해주십시오,”
임원들은 유서준과 서하나의 눈치를 봤다. 내심 만만찮은 인물이란 평가를 내렸다. 한편으로는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이 국내 금융가에서 유명인사가 될 것 같다는 예상을 했다.
누구보다도 서하나는 감개무량했다. 쫓겨나듯 사표를 내고 떠났던 옛 직장에 최고의 권력으로 입성한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이곳 SJ 증권을 앞으로 어떻게 개조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새로운 발상이 하나하나 자리잡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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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필석 지점장은 좌불안석이었다. 그는 서하나가 증권사 부사장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과거에 그녀를 이곳에서 떠나게 했던 장본인이었다. 그가 그녀를 가도건설로 내몰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이곳을 그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그다음 한차례 그녀가 찾아왔을 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자리를 보존하기는 했다. 그는 그때의 치욕을 머릿속에 새겼다. 언젠가는 복수를 하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가 감히 올려다보기도 힘들 만큼 높은 자리로 올라가 버렸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그런 권력자가 되어 나타났다.
요 며칠간 그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도무지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다시 그녀에게 가서 무릎 꿇고 빌어 볼까. 아니면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나갈까.
할 줄 아는 것이라곤 금융밖에 없었다. 금융맨으로 살아온 지 수십 년이었다. 굳이 지금 같은 외환위기 국면이 아니더라도 이곳에서 쫓겨나면 갈 곳도 없었다.
“젠장.”
욕을 한다고 달라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본사에서 그를 불렀다.
신임 사장, 부사장과 지점장 간의 면담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그는 그 자리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짓는 자리란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벌써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지점장 중에 절반 가까이가 물갈이될 예정이라고 했다.
다른 지점에서는 그에게 부러움의 눈길을 보냈다. 예전에 데리고 있던 부하, 서로 친한 사람이 실세로 떠올랐으니 얼마나 득을 보겠느냐는 시각이었다. 그럴수록 그는 불안했다. 서하나 그녀가 그에게 얼마나 독기를 품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며 박필석 지점장은 본사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과의 면담은 의례적인 인사 외에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그는 부사장실 앞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미래를 결정지을 만남이 높여있었다.
피하고 싶지만 피해갈 수 없는 상황에 어쩔 수 없이 그는 노크를 한 다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부사장실. 주인의 성품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깔끔하고 조화로웠다. 그 한가운데 손님맞이용 커다란 탁자와 소파가 높여있었다.
소파 한가운데 앉아 서하나가 각종 서류를 쌓아놓고 검토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방금 들어온 박필석 지점장과 마주쳤다.
“아… 안녕하십니까? 부사장님.”
박필석 지점장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 그에게서 볼 수 없었던 정중한 태도였다.
서하나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군요. 잘 지내시나요?”
예상외의 환대에 박필석 지점장은 당황했다. 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자 서하나가 손짓으로 그를 불렀다.
“자, 앉으시죠.”
박필석은 조심스럽게 그녀의 앞 소파에 앉았다.
멀뚱거리는 그를 향해 서하나가 냉랭한 표정으로 쏘아보았다.
박필석은 심장에 비수가 꼽힌듯한 충격을 받으며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역시 잘리는 것인가. 그는 앞이 캄캄해졌다. 막 대학을 졸업한 자녀의 학자금 대출을 다 갚지 못했다. 거기에다 자녀마저 제대로 직장을 잡지 못했다. 구조조정과 해고가 범람하는 이 시기에 취업하는 것 자체가 가능할까. 잘못하면 일가족 전체가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였다.
그는 재빨리 판단을 내렸다. 처세에 능한 것이 그의 최고 장점이었다.
곧바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꿇어앉은 채 바닥만 바라봤다. 그의 눈앞에 슬리퍼를 신은 서하나의 발이 보였다. 얇은 스타킹에 감싸진 예쁜 발이었다.
서하나는 상대의 뒤통수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애초 생각은 볼 것 없이 자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쌍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쉽게 용서하고 놓아주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박필석 지점장이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자… 자리를 보전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발 자르지만 말아주십시오.”
서하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심 높은 부하죠. 당신은…….”
“저… 저도 충성심을 높이겠습니다. 지… 지난번에도 보여드렸다시피 버… 벗으리면 벗겠습니다. 당신의 충실한 부하가 되겠습니다.”
동시에 박필석 지점장이 머리를 바닥에 꾹 찧었다.
서하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그렇게나 자신을 갈구던 사람이 반대로 애걸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눈앞의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알았어요. 지금 떠오른 생각인데…… 부사장 비서실로 오는 것은 어떤가요?”
박필석 지점장은 의외의 제안에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 서하나의 늘씬한 무릎이 보이고 그 너머로 그녀의 냉랭한 얼굴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희망을 떠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는 박필석을 향해 서하나가 말을 이었다.
“물론 비서실장 자리는 아닙니다. 비서실 말단이죠. 싫으면 할 수 없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