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96
100. LTCM의 붕괴(2)
러시아 모라토리엄과 중남미 외환위기 여파로 미국의 금융시장이 심각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모라토리엄이라는 대외적인 원인 때문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진정한 내부 원인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9월 23일, 월가에 자리한 연방준비은행(FRB)에서는 심각한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인 앨런 그린스펀의 명을 받아 뉴욕 연방 준비은행 총재인 윌리엄 맥도나우가 주요 은행장을 비밀리에 소환해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참여 은행은 뱅커스 트러스트, 베어스턴스, 체이스맨해튼, 골드만삭스, JP 모건, 리먼 브러더스, 메릴린치, 모건 스탠리 등 미국을 대표하는 은행이었다.
회의를 주최한 맥도나우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상황을 아시겠지요? 모두가 합심해서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 합니다.”
한 은행장이 다시 물었다.
“LTCM이 7000여 개의 파생상품 포지션에 모두 1조 4000억 달러의 포지션을 갖고 있는 게 사실입니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전 파생상품 미결제약정의 1/3을 LTCM에서 갖고 있습니다. 만일 LTCM이 파산하면 졸지에 그 1/3의 반대편 포지션을 쥔 투자자는 상대가 사라져 마찬가지로 파산상태에 빠질 겁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금융시스템은 완전 마비가 될 겁니다.”
미국 금융시장을 받치고 있는 11개 대형은행장이 모인 이유는 LTCM의 파산 때문이었다.
LTCM은 94년 3월부터 영업을 시작해서 94년 28%, 95년 59%, 96년 57%, 97년 25%의 파격적인 수익을 거뒀다. 97년 10월에는 고문이었던 두 사람이 노벨 경제학상을 타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영광은 거기까지였다.
천재적인 새로운 금융기법으로 금융을 지배했던 그들은 자신의 매매를 지나치게 큰 리스크에 노출시켰다.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이 커진다는 명제에 충실했다.
LTCM은 이론적으로는 리스크가 없는, 무위험 차익거래만 했다. 하지만 실제로 무위험이 아니었다. 온갖 돌발적인 위험이 상존하는 현실에서 이론적으로 계산되지 않은 위험이 터졌다.
이론적으로는 그 위험이 발생할 확률은 10의 24승분의 1에 불과했지만, 현실에서 발생하지 않는 위험은 아니었다.
100년 만에 1번 발생하는 홍수라 하여 올해 발생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LTCM이 예측하지 못했던 위험은 바로 러시아 모라토리엄이었다. LTCM은 러시아의 부도가 없을 것으로 예상했고 이 잘못된 예측은 LTCM에 14%의 손실을 입혔다. 모라토리엄이 해당 국가에서 일단락되었다면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이 파국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위험을 불러일으키며 미국 금융시장으로 번졌다.
금융시장이 흔들리면서 파생상품인 스왑과 주식 변동성이 폭발했다. 이 상품은 LTCM이 과도한 차입을 사용해 투자한 영역이었다. 예기치 않은 금융위기는 LTCM의 주 포지션마저 흔들었다.
이 후폭풍은 LTCM을 사실상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무려 30배의 차입 거래를 하던 LTCM은 일부에서 손실이 발생하자 정교하게 짜 맞혀 두었던 포지션이 깨졌다. 그 불길은 전체 투자 상품으로 번져 LTCM은 감당 불가능으로 추락했다.
마침내 LTCM은 8월에 손을 들었다. LTCM은 자산 대부분을 잃었고 연방은행에 SOS를 쳤다.
“승승장구하던 LTCM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습니까?”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은행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글쎄요. 사실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첨단, 첨단 기법이었으니까요. 모든 은행이 그들을 믿고 돈을 투자했고 그들은 그동안 거대한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루아침에 모든 자산이 마치 폭발하듯 사라진 겁니다.”
바로 파생상품의 위험성이었다.
맥도나우 총재가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 LTCM이 무너지면 이 나라의 금융이 마비됩니다. 그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LTCM에 돈을 투자했던 여러분도 책임이 있습니다.”
은행장 모두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첨단 금융기법으로 찬사를 들었던 LTCM은 하루아침에 금융시스템을 망치는 역적으로 돌변했다. 파생상품 거래에서 통제되지 아니한 변수는 과연 위험했다. 87년의 블랙먼데이와 95년의 베어링 은행 파산이 바로 이 위험성의 결과물이었다. 그 끔찍한 괴물이 이번에는 LTCM을 덮친 것이다.
회의는 길어졌다. 은행은 어떻게든 손실에서 빠져나오고자 발버둥쳤지만, 방법은 없었다. 11개 은행은 40억 달러를 모아 LTCM에 구제금융을 제공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파생상품 거래 규제 법안이 생겨났다.
9월 28일에 연방은행의 구제금융이 집행되고 29일에는 금리 인하가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던진 안정 메시지는 컸다. 다음날 미국 다우지수를 비롯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상승으로 화답했다. 한국의 주식시장은 단번에 6.5%가 상승하여 300선을 뛰어넘었다.
폭발했던 변동성이 안정을 찾으면서 간신히 LTCM 사태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사그라들었다.
붕괴 조짐을 보였던 미국 금융시장도 천천히 안정되기 시작했다. LTCM은 전 자산이 0으로 추락하며 청산되었다.
LTCM은 불과 4년 만에 누구도 오르지 못했던 금융시스템의 정상에 올랐다가 한방에 몰락했다. 천재를 모아 새로운 거래 시스템을 구축했던 LTCM 창업자 존 메리웨더는 타격을 입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존 메리웨더의 아들, 톰 메리웨더가 있었다.
**
[1998년 9월 27일]일요일 아침에 잠에서 깬 직후 전 세계에서 발생한 뉴스를 검색하다가 유서준은 LTCM의 붕괴 소식을 알게 됐다.
그는 경악했다. 어떻게 된 사실인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미국 금융을 주무르던 공룡이 쓰러진 것이다.
세계 금융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기업이기에 금융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 깊게 사태를 추적하고 있었지만, 유서준이 바라보는 시각은 다소 특별한 것이었다.
바로 미래에서 온 편지에 나와 있던 LTCM의 정체 때문이었다.
“90년대의 LTCM과 미래의 편지에 적힌 2027년의 LTCM은 다른 것이었나?”
그는 알 수 없었다. 2027년이 되기 전까지는 어떤 확답을 내리기 어려웠다.
어쨌든 공룡 LTCM과 싸워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갖고 있던 그는 한숨을 돌렸다.
동시에 그가 깨달은 교훈도 있었다.
시장은 공평했다. 첨단 기법으로 무장해서 승승장구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리스크가 없는 수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경제학의 교훈도 주목했다.
이것은 유서준 그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였다. 금액이 적어 시장에 영향을 주지 않을 때는 다이어리를 통한 그의 거래와 수익이 시장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금액이 커져 시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 그의 거래는 점차 미래를 조금씩 바꾸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예기치 않은 위험에 빠질 것이다.
현재 그가 굴리는 전체 금액은 수백억을 넘기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과거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승승장구하던 그도 LTCM처럼 한방에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가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이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유서준의 눈빛이 깊어졌다.
아침 햇살이 창가에 몰려오고 있었다. 거실 내부가 뿌옇게 밝아졌다.
그가 주가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요즘 주가 움직임이 나쁘지 않죠?”
서하나가 모닝 커피를 들고 그에게 다가왔다.
지난 9월 23일 최저점을 찍은 후 24일에는 미국 금리 인하와 발맞추어 폭등했다. 다음날부터는 옆으로 횡보하는 중이었다.
“이제 포지션에 들어가기 시작했으니 아직 모르지.”
유서준이 커피를 받으며 대답했다.
연한 분홍색 장미가 그려진 찻잔은 서하나가 매우 좋아하는 잔이었다. 두 사람은 동일한 문양이 그려진 커피잔으로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이번에도 2000 계약?”
유서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나가 다소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언제까지 구축할 거야?”
“10월 만기일 전까지.”
“이번에도 만만찮은 싸움이 되겠네요.”
T 펀드가 하방으로 공세를 취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녀였다.
서하나가 깊은숨을 내쉬며 침을 삼켰다.
파생상품 거래란 것은, 그것도 지금처럼 다소 과한 포지션을 취한다는 것은 그만큼 부담이 큰 것이었다.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렇게 위험한 거래를 하는 것은.”
유서준이 중얼거리며 변명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이번 매매의 뒤에는 은행 차입금 100억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뒤에는 그녀에게 100억을 차입하게 만든 오도욱이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는 오도욱의 진정한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그녀에 대한 호의로 100억을 빌려준 것은 아니란 사실 정도만 짐작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성공할 거야.”
“그래요. 당신은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까.”
서하나가 그를 응원했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주식시장이 상승으로 돌아서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했다. 그의 말에 틀린 점은 없었다. 다만 주식시장이 하락해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하라고 해도 똑같이 그만큼의 합당한 이유를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원래 주식시장은 이유가 있어서 오르거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르고 내린 다음 이유가 만들어지는 곳이니까.
사실 예전부터 유서준은 남과 다르게 움직인 적이 많았다. 주가지수가 1000을 돌파해서 모두가 상승을 외쳤을 때 그만은 그날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락을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를 한두 번 겪어본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 또한 그의 감을 믿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그를 믿고 큰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커피를 홀짝이는 유서준의 뒤에서 서하나는 몸을 밀착시키며 껴안았다.
유서준은 그녀의 따뜻한 체온을 느끼면서 커피를 넘겼다.
“부사장 일은 어때?”
“그냥 그럭저럭. 바쁘기만 하고 재미는 없어.”
서하나의 투덜거림에 유서준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염려보다 훨씬 그녀가 잘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서는 잘 해줘?”
그는 박지점장을 비서로 뽑은 일을 상기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최훈재 씨는 생각대로 행동이 참 빠릿빠릿한 게 일을 잘해. 스케줄 관리도 잘 하고. 일 처리도 꼼꼼해.”
“잘 골랐네.”
유서준은 커피를 넘기며 다음 대답을 기다렸다.
서하나가 그의 궁금증을 곧 풀어주었다.
“박필석 지점장은 역시 노련한 맛이 있더라. 외부 사람 만나기도 편해. 박지점장이 알아서 분위기를 잘 잡아주니까. 그가 아니었으면 다른 증권사 사장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을 거야.”
나이가 어리다는 것이 서하나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재벌 2세가 아니라면 그녀의 나이에 부사장이란 직함에 올라선 이는 없었다. 나이 차 때문에 회의에서 서먹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박지점장의 존재가 유연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박지점장 말이지, 위험하진 않아?”
유서준이 근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왜?”
서하나가 반문했다. 물론 그녀 역시 그가 말하고 있는 핵심을 알아챘다.
“아무래도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잖아?”
“하하, 그렇긴 해. 하지만 그는 나를 배신할 수 없어. 내가 그를 지켜본 게 몇 년인데. 그럴 위인이 못되지. 원래 윗선에 아부하는 것만 고민하던 사람이니까. 게다가 지금 그 자리는 그가 제일 적임자야. 무리하지 않고 살살 구슬리면 충성할 타입이니까.”
박필석 지점장은 애초에 윗선에 꼬리를 흔들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비록 서하나와는 악연으로 얽혔지만 회사에 충성하던 사람이었다. 약간의 포용력만 보여주면 알아서 길 것이라는 것이 서하나의 예상이었다. 실제로 비서실로 데려온 다음에도 그러했다.
“그리고…….”
서하나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그리고 김만학 가도건설 사장을 부를 거야.”
부의 정점에 서다 5
101. 화보 촬영
다소 놀란 표정으로 유서준이 서하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커피잔의 커피를 쏟을 뻔했다.
“응?”
“부도가 난 이후로 어렵게 산다더라. 그렇더라도 그자도 한번 손봐야지.”
“이유는?”
“뭐…… 약간 돌려줄 게 많아서 그렇지. 그자가 그걸 다 감수하면 고용해줄 생각도 있고…….”
“누나 정말 뒤끝 대단하다.”
“나 원래 그래.”
유서준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맺힌 한이야 모를 바 아니었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난 일인데 아직 이를 갈고 있었나 보다. 그 김사장이 망한 모습을 소문이 아닌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것으로 생각했다.
“알아서 해. 조심하고.”
“나도 사람 보는 눈은 있어.”
서하나가 뒤에서 그의 뺨을 매만졌다.
그녀 특유의 향이 느껴졌다. 고운 그녀의 손이 간질거리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그는 의자 뒤로 고개를 젖히고 가까이 다가온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문득 서하나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물었다.
“처음에 증권사를 안겨준다고 할 때 믿지 않았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네. 그때 약속이 하나 있지 않았어?”
유서준이 커피를 내려놓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있었지.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서하나가 그와 눈을 마주치자 눈길을 피했다.
유서준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며 보다 적극적으로 나왔다.
“왜? 들어주려고?”
“흐음…….”
서하나가 곤란한 표정으로 그의 눈치를 봤다.
“말 나온 김에 지금 소원 말할까?”
“말하는 거 봐서.”서하나가 곧바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수상쩍은 표정으로 유서준을 이리저리 살폈다.
유서준이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잖아도 조만간 말할 생각이었는데 말 나온 김에 오늘 하기로 해. 일단 아침밥 먹고 움직여. 누나가 해야 할 일은 일단 미장원에 머리부터 하러 갔다 와. 최대한 예쁘게. 그다음부터는 오늘 하루 동안 내가 말하는 대로 움직이면 돼.”
갑작스러운 그의 요구에 서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계획인데?”
“아 그런 게 있어.”
유서준이 그녀의 손을 이끌며 채근했다. 영문도 모르고 서하나는 일요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녀가 머리를 꾸미러 간 동안 유서준은 약간의 짐을 챙겼다.
**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청담동에 있는 작은 스튜디오였다.
건물 2층에 아담하게 꾸며진 스튜디오 입구에는 커다란 화보 사진이 좌우로 걸려 있었다. 한눈에 봐도 누군지 알 수 있을 만한 인물이 한껏 멋을 내고 찍은 사진이었다.
스튜디오 입구에는 윤경화 스튜디오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서하나는 어디에선가 그 이름을 많이 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유명 연예인이 화보를 찍을 때 자주 찾는 유명 사진작가라고 했던가.
“여긴 어떻게 알았어?”
서하나의 물음에 유서준이 곧장 대답했다.
“우리 펀드에 돈을 맡긴 탤런트 한세진 씨 있잖아? 그 사람 통해서 알게 된 사람이야. 물론 윤경화 씨도 우리 펀드 고객이야.”
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의도가 수상쩍었다.
“근데 우리가 여긴 왜 왔어?”
“화보 사진 찍으려고.”
“우리 둘이?”
“아니, 누나 혼자. 산적 같은 내가 나오면 그게 화보냐?”
서하나가 키득거리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가 생뚱맞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유서준이 그녀를 달랬다.
“내 소원이 뭐냐 하면 누나가 잘 나온 화보를 갖고 싶어. 누나 앨범이라 해야 하나…….”
그제야 서하나는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오래전부터 유서준은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을 남기고 싶었다. 사실 서하나의 외모는 연예인도 울고 갈 정도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였지만 지금까지 변변하게 남은 사진이나 영상은 없었다. 결혼식 사진이 전부였다.
유서준은 예쁜 그녀의 모습을 갖고 싶었다. 벌써 많이 늦었다. 꽃다운 20대가 훌쩍 지나버린 시점이었기에.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이를 거부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의 바람과 별개로 그녀 역시 자신의 예쁜 모습을 남기고 싶은 욕심은 있었다. 단지 쑥스러워 실행에 옮기지 못했을 뿐이다. 막상 이런 자리가 마련되니 한편으로는 감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민망스러웠다.
“아이…….”
서하나가 마지못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거부 의사를 밝혔다.
유서준이 그녀의 등을 떠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거부할 권한이 없다니깐. 내 소원이니까. 무조건 내가 시키는 대로 화보를 찍어야 해.”
다소 어두운 복도를 지나 스튜디오 사무실로 들어갔다.
윤경화 사진작가는 30대 후반의 커리어 우먼이었다. 이쪽 방면에서 꽤 알아주는 성공한 작가였다. 시원시원한 마스크에 활동적인 와이셔츠 차림을 한 그녀는 두 사람을 곧바로 알아보고 인사했다.
“SJ 증권 부사장님이시죠?”
서하나는 그녀와 악수를 했다. 어느새 증권사 부사장이란 직함이 익숙해진 그녀였다.
두 사람이 한쪽 소파에 자리를 잡자 곧바로 음료가 들어왔다.
윤경화가 바짝 다가앉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들으셨겠지만 오늘 다소 많은 분량의 사진을 찍을 겁니다. 부사장님께선 연예인 사진집을 생각하시면 되고요. 최소 쓸만한 것만 500컷 이상을 찍게 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의상 역시 10가지 이상 갈아입으셔야 할 거고요. 생각보다는 약간 힘든 일정이 될 거예요.”
서하나는 깜짝 놀라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생각보다 내용이 훨씬 거창했다. 유서준은 그녀의 눈을 피하고 벽에 걸린 다른 사진을 멀뚱거리며 구경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미 유서준과 사진작가가 모든 계획을 짜 맞춘 후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의 의사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진 작업에서 모델은 작가가 시키는 대로 포즈를 취할 뿐이다. 지금 그녀도 그런 상황이었다.
“부사장님은 마스크도 몸매도 좋아서 작품 하나 나올 것 같네요.”
윤경화가 웃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윤경화가 유서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의상 가져온 것 있으세요?”
“몇 개 못 챙겨왔어요.”
유서준이 가져온 가방을 열고 옷을 꺼냈다. 비교적 정숙한 정장과 화려한 나들이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평소 그녀가 애용하던 소품도 튀어나왔다.
“언제 저걸 다…….”
서하나가 그를 보며 눈을 흘겼다.
윤경화가 옷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대답했다.
“그 정도면 괜찮네요. 여기에도 약간의 옷과 소품이 있거든요. 적당히 짜 맞추면 부족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바로 시작하죠, 괜찮아요?”
윤경화가 서하나에게 눈짓으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서하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곧바로 바로 옆 영상 스튜디오로 이동했다. 꽤 넓어 보이는 스튜디오는 전체적으로 검은색 배경에 서너 종류의 세트가 구비되어있었다. 흔한 사진관 분위기의 세트에 더해서 집 거실과 침실 분위기 세트, 사무실 분위기의 세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윤경화가 스위치를 올리자 은은한 전등 빛이 들어왔다. 작업을 보조해주는 아가씨 한 명이 옆에 붙었다.
“자자, 일단 지금 입고 있는 그대로 먼저 시작하죠.”
윤경화가 서하나를 끌고 스튜디오 세트 정중앙으로 데려갔다.
이런 촬영이 처음이라 서하나는 뻣뻣한 자세에 수동적으로 움직였다.
파박!
셔터음이 들리며 스트로보가 터지고 주위가 밝아졌다. 사진을 찍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유서준은 한쪽 옆에 서서 작업을 구경했다.
점차 찍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서하나의 포즈가 자연스러워졌다. 그녀의 미소도 자연스럽게 변했다. 빨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하얀 치아가 빛났다.
중간중간에 윤경화가 다가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매만져주거나 포즈를 다시 잡아주었다.
잠시 후 서하나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금까지의 정장 스타일과는 다른 캐주얼한 복장이었다.
스튜디오 세트도 옆으로 옮겨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작업을 했다. 시간도 많이 흘렀고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힘들었다.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그들은 음료를 마셨다.
“부사장님은 처음이라면서 의외로 포즈를 잘 잡는 것 같아요. 미소도 자연스럽고.”
“아, 저 정말 처음이어요.”
서하나가 칭찬에 손을 내저었다.
윤경화가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다시 칭찬을 늘어놓았다.
“아녀요, 정말이어요. 마스크로 보나 포즈로 보나 진짜 연예인으로 데뷔하셔도 되겠는데요.”
서하나는 얼굴이 붉어지자 부채질하듯 손을 얼굴 앞에서 휘저었다.
옆에서 지켜본 유서준도 그 말에 동의했다. 꾸민 상태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은 그녀는 눈이 돌아갈 만큼 아름다웠다.
음료를 마신 후 윤경화가 옷을 뒤적거리며 다음 의상을 골랐다.
“자, 이번엔 이 옷으로 가죠.”
“헉, 네?”
서하나가 기겁해서 그녀와 유서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윤경화가 들어 올린 옷은 그녀가 예전 호주 본다이 비치에서 입었던 아이보리색 초미니 플레어 스커트였다.
“이…… 이건 좀…….”
난감한 표정으로 서하나가 주저하자 윤경화가 곧바로 말했다.
“이것도 예쁠 거예요. 젊은 느낌도 나고 말이죠. 상의는 무엇으로 가나…… 아, 이게 좋을 것 같네요.”
윤경화가 연노랑색 와이셔츠를 집어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 복장은 예전에 비치에서 입었던 것과 거의 같았다.
서하나가 유서준을 째려보며 중얼거렸다.
“이제 알겠어. 이게 왜 소원인지…….”
속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자 유서준이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키득거렸다.
윤경화 역시 유서준과 미소로 화답하고는 그녀를 재촉했다.
“부부 사이인데 어때요? 아마 좋은 추억이 될 겁니다. 유 대표께서 원하는 대로 해주시죠?”
“아아, 몰라.”
서하나가 얼굴을 붉히며 옷을 집어 들었다.
촬영이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거실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기는 자세였다.
윤경화가 그녀에게 다가가 가슴팍의 단추를 아래까지 쭉 풀었다.
“허억.”
기겁한 서하나가 얼른 앞섶을 다시 여몄다.
윤경화가 곧바로 만류했다.
“그래야 예뻐요.”
서하나는 어쩔 줄을 몰라 유서준만 째려봤다.
윤경화가 그녀의 한쪽 다리를 잡아끌었다.
“자, 한쪽 다리도 이렇게 올려보고…….”
스튜디오 내부에서는 사진작가가 왕이었다. 서하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풀어 헤쳐진 앞섶 사이로 하얀 브래지어가 모습을 내밀었고 올려진 치마 아래로 하얀 팬티가 노출되었다.
“이러면 속옷이 다…….”
그녀의 항변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파박!
스트로보가 터지고 사진이 찍혔다.
서하나가 수줍은 목소리로 마지못해 항의했다.
“난 에로 배우가 아녀요. 명색이 부사장인데…… 부사장 체면은 다 어디가고…… 으윽.” 의견이 묵살 되면서 다시 다른 의상으로 넘어갔다.
이번에는 스튜디오 자체에서 제공하는 옷이었다. 문제는 그 의상 역시 만만치 않았다. 연예인들이 야릇한 화보를 찍을 때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서하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안면이 붉어졌다. 거기에다 의상에 맞는 속옷까지 구비 되어 있었다.
서하나는 옷을 들고 한차례 무언의 시위를 해보았지만 곧바로 쫓겨나서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이번에는 사무실 스튜디오 세트에서 이루어졌다.
“으흑, 부사장이 사무실에서 이러고 있으면…….”
서하나가 유서준을 째려보며 항의했다.
유서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일의 효율이 절로 높아질 것 같아.”
“아아, 정말 말이라도…….”
그녀의 불평은 곧바로 윤경화에 의해 가려졌다. 이런저런 자세를 지시받은 그녀는 꼼짝없이 지시를 따라야 했다.
한참 사진을 찍은 다음 자세를 풀고 일어나며 서하나가 투덜거렸다.
“서준이 너무 했어. 다음부터는 소원 일절 안 들어줄 거야.”
그런 협박에 눈 깜박할 유서준이 아니었다.
미소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녀를 구경하고 있는 유서준을 본 서하나가 갑자기 든 생각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그녀가 윤경화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 설마…… 오늘 더 한 것도 찍어요?”
윤경화도 유서준도 대답하지 않고 웃음만 지었다.
서하나의 손에서 소품이 툭 떨어졌다.
“으악, 난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