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13)
113.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인천 국제공항.
아이들은 경호원들과 함께 출국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공항 편의점에서 산 훈제란을 까먹으며 목이 막히는 느낌을 친구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먹어 봐. 맛있어. 안 먹으면 나 혼자 다 먹는다.”
조용-
친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헨리, 먹어. 시간이 없어서 찜칠팡에도 못 갔잖아. 이 달걀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헨리는 시우와 루시의 눈치를 살피다, 못 이기는 척 니콜라스에게 훈제란을 받아들었다.
“냠.”
훈제란을 한 입 깨문 헨리는 입안에서 느껴지는 훈제 향과 달걀의 탱탱한 식감에 감탄하면서, 무심코 손을 뻗었다.
니콜라스는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미소 띤 얼굴로 헨리의 손에 훈제란을 두 개 더 건넸다.
의자에 앉아 출국 시간을 기다리던 아이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콜라스가 말했다.
“한국에 오자마자 미국으로 돌아가네. 다음에는 방학 때 더 느긋하게 놀다 가면 좋겠다. 한국 영화 촬영 현장 같은 것도 구경하고, 케이팝 공연도 보고 싶었는데…….”
말없이 살짝 떨어져 걷고 있는 시우와 루시를 흘끗 본 니콜라스는 한숨을 쉬고 어른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가 눈치가 있어서…… 말 안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거든? 근데 도저히 안 되겠네. 너희 어제…… 아이스링크에서 둘이 무슨 일 있었지?”
흠칫.
루시가 놀란 얼굴로 니콜라스를 봤다.
되게 둔하다가도 가끔 예민한…… 헨리와 다르게 니콜라스는 계속 둔한 타입이었는데, 오늘은 웬일로 촉을 세우고 있었다.
“아, 아니야.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었어.”
“너희 어젯밤에 들어온 뒤로 눈도 잘 안 마주치고, 말도 잘 안 하잖아. 누굴 바보로 알아?”
니콜라스는 시우와 루시의 몸을 한쪽으로 밀었다.
“자, 저기 가서 둘이 얘기 좀 하고 와. 우린 여기서 기다릴 테니까.”
시우와 루시는 보기 드문 니콜라스의 예리한 눈치에 낯설어하며 같이 자리를 옮겼다.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을 보던 니콜라스가 혀를 차다 헨리에게 말했다.
“아무리 티 안 내려고 해도 어릴 때부터 친군데 분위기 보면 딱 알지! 쟤네…… 싸웠어~ 싸워도 크게 싸웠어~ 으휴, 녀석들. 여행 와서 싸우고 난리야.”
헨리는 니콜라스를 돌아봤다.
그리곤 고개를 저었다.
“너는 좋겠다.”
“뭐가?”
“됐어. 아무것도 아니야.”
“아~ 뭔데?”
“크면 알게 돼.”
“응?”
조용하던 분위기를 먼저 깬 것은 시우였다.
“피곤하진 않아?”
“아, 그럼~ 덕분에…….”
시우의 다정한 물음에 루시의 얼굴이 약간 밝아졌다.
그냥 꼭 한번 마음을 말하고 싶었을 뿐, 루시는 지금과 같이 어색하지 않은 친구처럼 편한 상태가 좋았다.
루시는 시우를 살그머니 올려다봤다.
동양의 왕자님처럼 신비한 기운이 느껴지는 맑은 눈에 수려한 이목구비를 가진 얼굴이 보였다.
시우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루시.”
화들짝.
“어? 응?”
시우가 품속에서 뭔가를 꺼냈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작고 예쁜 비늘이 달려 있는 키링이었다.
키링을 본 루시의 눈동자가 커졌다.
처음 보자마자 너무 마음에 들어 시우의 집에서 계속 만지작거렸던 바다아이 굿즈였다.
“이건…….”
“자. 내가 오다가 길에서 주웠다. 잘했지?”
시우의 농담에 루시의 입에서 풋 웃음이 새어 나왔다.
“고마워. 잘 간직할게.”
“달아 줄까?”
시우는 루시가 메고 있는 작은 흰색 크로스백을 살짝 끌어당겼다.
앞에서 가방을 당기자, 루시의 몸이 툭 끌려오듯 시우와 가까워졌다.
시우가 백에 키링을 직접 달아 주는 동안, 루시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시우를 바라봤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어제처럼 넘어지지 않게 스케이트 연습 열심히 해 놔~”
이제까지 여동생 같다고만 생각했던 루시를 향해 시우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다음에 또 같이 놀러 가자.”
루시의 표정이 활짝 펴졌다.
“응! 꼭 연습해 놓을게!”
시우는 자신을 보며 꾸밈없이 웃는 루시의 밝은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귀여웠는지 손을 들어 머리를 한차례 헝클어 주었다.
다른 친구들 쪽으로 돌아선 루시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고,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반드시 스케이트를 마스터하고 말겠어!!’
* * *
10월.
오랜만에 시우의 한국 활동이 재개되었다.
바다아이 이후, 무려 8년 만의 복귀였다.
할리와트의 다른 친구들도 할리와트 측에서 제시한 몇 가지 조건에 맞춰 한 작품씩 출연을 허락받았는데, 루시는 미국 픽시사에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 더빙을 하기로 했고, 니콜라스는 유명 SF 영화에서 주인공 아역을 맡게 되었다.
반면, 헨리는 별다른 연기 활동 없이 연출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시우는-
이른바 유령 승강장이라 불리는 서울의 한 촬영용 지하철 승강장 안에서 영화의 첫 촬영을 준비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촬영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작품의 첫 촬영도 배우들에게는 늘 각별했다.
시우는 자신보다 두 살 많은 유나와 같이 지하철 차량 안으로 들어가 간단히 리허설을 한 후, 잠시 몸을 풀며 촬영 시작을 기다렸다.
“휴우, 나 이렇게 큰 작품은 처음 찍어 봐.”
유나가 말했다.
“제작비는 보통인데?”
“아니, 너랑 승현 선배님이랑 출연하시니까…… 너무, 너무 큰 작품이지. 윤시우 선배님 8년 만의 한국 복귀작에 류승현 선배님 파격 연기 변신작이라 팬분들께서 엄청 기대하고 계시잖아.”
뇌리에 선명한 댓글이 있었다.
– 최유나 너만 잘하면 돼. 승현 오빠랑 우리 시우 발목 잡으면 가만 안 둔다.
한편 시우는 혼자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긴장을 달래고 있는 유나에게 선배로서 한마디를 했다.
“누나 나 한국어 연기 오랜만이니까~ 누나만 믿고 갈게~”
쿠쿵!
장난스럽게 내던진 시우의 말에 유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왜, 왜 그래. 그러지 마. 누나가 너한테 뭐 잘못했어? 다시 선배님이라고 부를까?”
울상을 지은 채 횡설수설하는 유나를 두고 시우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초등학생 때부터 작품 활동을 이어온 경력자였고, 영화계에서 상당히 주목받는 재능이 뛰어난 배우였다.
자신의 하드캐리가 필요했던 바다아이 때와는 달랐다.
이번 영화에서는 시우도 자신이 맡은 역할만 잘 해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승현의 연기 변신이 관건이긴 했지만, 시우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승현도 서서히 캐릭터를 구축해 가고 있었다.
“준비되셨습니까? 이상 없죠?”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아주머니, 할아버지 등 엑스트라들이 지하철에 전부 올라타자 조연출이 최종적으로 점검을 했다.
얼굴과 눈빛에는 아직 멍뭉미가 넘쳤지만 중2 치고는 큰 173의 키로 고등학교 1학년 역할을 맡은 시우는 어른스러운 멋진 회색 교복을 입고 한 손에는 지하철 손잡이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차량 반대편으로 간 유나와 눈빛을 한번 주고받고, 차량 안에 타고 있는 촬영 감독과 눈을 맞춘 시우는, 승강장에 있는 유인석 감독에게도 시선을 줬다.
시우를 본 유인석 감독은 심호흡과 함께 영화의 대박을 기원하며 메가폰을 들고, 외쳤다.
“레디!”
사방에 일제히 정적이 내려앉았다.
고요함을 뚫고 유인석 감독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뒤흔들었다.
“액션!”
사인을 기다리던 시우의 편안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승호의 예리하게 날이 선 초조한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바로 앞에서 시우의 연기를 목격한 촬영 감독은 대사도 없는 찰나의 표정 변화 하나만 보고도, 분명하게 깨달았다.
한국어 연기든 영어 연기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눈빛에서 풍기는 분위기, 얼굴 근육의 움직임, 시선 처리와 삐딱하게 선 자세 하나까지.
시우를 상징하는 캐릭터, 에반의 그림자조차 느낄 수 없었다.
‘굉장하다. 감독님의 사인과 동시에 이런 몰입감이라니.’
승호는 휴대폰 화면에 뜬 달력에 온통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달력 속의 날짜들과 싸움이라도 하듯 승호는 휴대폰을 노려보다, 신경질적으로 아랫입술을 꽉 짓눌러 깨물었다.
엄지로 화면을 마구 눌러 달력을 지워 버린 승호는 휴대폰을 든 손을 아래로 축 늘어뜨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고3 수험생도 아니고.”
수능까지 남은 날짜를 확인하듯 매번 습관처럼, 아니 이제는 병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달력을 들여다보는 게 일이 되어 버린 승호였다.
휴대폰에서 가까스로 눈을 뗀 승호는 이번에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저녁 하교 시간,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지하철에 타고 있는 자신의 앳된 얼굴이 여전히 낯설었다.
그때-
지하철이 역에 멈춰 섰다.
그리고, 정차와 동시에 승호의 옆을 지나가던 한 여고생이 살짝 중심을 잃고 승호 쪽으로 쓰러지듯 몸을 부딪쳐 왔다.
타악!
승호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앗! 죄송합니다!”
지안은 떨어진 휴대폰을 보고 몹시 당황한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사과하기 위해 빠르게 내려갔던 지안의 머리가 위로 올라오자, 승호의 눈동자에 지안의 얼굴이 들어왔다.
긴 생머리가 승호의 눈앞에서 흔들렸고, 뒤이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아…….”
순간 승호의 눈빛이 멍해졌다.
지안이 떨어진 휴대폰을 주워 주기 위해 몸을 숙이는 찰나, 얼굴을 일그러뜨린 승호는 갑자기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허겁지겁 사람들을 밀치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어? 저기! 이거…….”
승호의 휴대폰을 집어 든 지안은 황급히 승호를 불렀으나, 승호는 이미 승강장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컷! 오케이!”
유인석 감독은 만족했다.
특히 승호가 지안을 발견했을 때의 그 멍한 눈빛이 좋았다.
반가우면서도, 기쁘면서도, 충격을 받은 그 공포에 질린 넋이 날아간 눈빛.
유인석 감독은 시우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 이번 영화에 잘 담아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시우는 말없이 승강장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감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곧바로 다음 씬이 이어지기 때문에, 느긋하게 쉬거나 응원을 온 승현과 대화를 나눌 여유가 없었다.
감독과 스태프들은 시우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던지고 싶었지만, 혼자 얼굴을 푹 숙이고 앉아 집중하고 있는 시우에게 아무도 다가가지 못했다.
승현과 매니저 태우도 근처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자, 이어서 바로 갑시다!”
유인석 감독이 외치자 시우는 다시 일어나 촬영이 시작되는 승강장 한쪽으로 향했다.
지하철에서 내린 장면에서부터 이어진다.
“레디, 액션!”
시우가 얼굴을 들어 올렸을 때, 시우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처럼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지하철에서 내린 승호는 이성을 잃은 채, 거의 바닥을 기듯이 승강장 계단 앞까지 도망을 갔다.
승호는 다른 사람들의 이목 따윈 신경 쓰지 않고, 계단 앞에 서서 목이 터져라 고함을 내질렀다.
“아아악!! 으아아아!! 아아…… 아…….”
승강장의 몇몇 사람들이 놀라 가던 걸음을 멈추고 승호를 쳐다봤다.
승호는 눈을 똑바로 뜨고 다시 소리를 질렀다.
“뭘 봐-!!”
그러더니, 비틀비틀-
휘청이다 벽에 겨우 몸을 기대는 승호를 본 사람들은 고등학생 주제에 술을 마셨거나, 혹은 정신이 안 좋은 아이가 아닌가 하는 얼굴로 승호와 거리를 두며 계단을 서둘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승호는 벽에 기댄 채로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뭐야…… 왜 저기 있는 거야? 항상 버스만 타고 다녔는데? 아니야. 아니야. 장난치지 말라고.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이러면…… 이러면…….”
승호는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온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유인석 감독은 시우의 연기를 지켜보며 등골에 전율을 느꼈다.
‘……뭐야, 얘는? 연기가 미쳤는데?’
스릴러 영화,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가 크랭크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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