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14)
114. 승호와 지안
유인석 감독은 승호의 감정을 고스란히 가져와 폭발시키는 시우의 연기에 감탄하면서 또 다른 배우 유나에게 사인을 보냈다.
유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으로 나섰다.
멍뭉미 넘치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시우가 연쇄살인마를 쫓는 예민하고 서늘한 미소년 승호로 변한 것처럼, 유나도 승호의 첫사랑 소녀 지안으로 변했다.
지하철 승강장 벽에 기댄 승호는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추위를 타는 것처럼 몸을 조금 움츠린 채 숨을 골랐다.
서서히-
흥분이 가라앉았다.
침착해야 했다.
과거로 돌아온 이후 여러 가지 상황들을 이미 머릿속으로 충분히 그렸다.
이런 상황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최악의 상황일 뿐.
과거 지안과 자신이 처음 만난 것은 하교하는 버스 안이었다.
버스가 급정거를 했고, 중심을 잃은 지안이 자신과 부딪치며 자신의 휴대폰이 버스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게 지안과 만나게 되고-
좋아하게 되고-
자신의 과외 선생님인 정우가 지안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녀가 죽었다.
승호는 눈시울을 붉히고 머리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래서…….
지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버스 대신 과거 지안이 전혀 이용하지 않던 지하철을 타고 등하교를 해 왔다.
그런데, 똑같은 상황이 장소만 바뀐 채 일어나고 말았다.
“이러면…… 나중에 일어날 일들도…… 아니야, 바꿀 수 있어…….”
“저기, 괜찮아?”
앞에서 들려온 그리운 목소리에 승호의 얼굴이 위로 들렸다.
과거의 일이 반복된 순간, 너무 놀라고 두려워 정신없이 도망친 승호였으나 조금 진정된 상태로 다시 한번 지안을 마주하자 이번에는…….
‘와, 진짜 이지안이다. 열여덟…… 살아있는 지안이네…….’
승호의 눈에 맺혀 있던 눈물방울이 톡, 떨어져 내렸다.
웃는지 우는지 모를 얼굴로 승호는 지안을 봤다.
너무너무 서러웠다.
네가 죽은 후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지금 당장 달려가 꽉 안고 전부 다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과 얽혀선 안 된다.
유인석 감독과 스태프들은 숨 쉬는 것조차 잊고 시우의 섬세하게 변화하는 표정과 눈빛에 빨려 들어갔다.
시우가 지안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반가운 눈빛을 보낼 때는, 죽은 첫사랑과 재회한 승호의 감정에 이입해 마음이 저절로 두근거렸고.
시우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질 때는, 과거로 돌아오기 전 승호의 아픈 삶이 떠올라 심장이 옥죄이는 듯했다.
승호의 혼란스러움이 시우를 통해 모든 이들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지안이 입을 열었다.
“아…… 저…… 이, 이거 놓고 가서.”
승호의 휴대폰을 주워 들고 반사적으로 따라 내린 지안은 계단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 승호의 모습에 ‘얘, 뭐야! 무서워! 괜히 따라 내렸어!’하고 후회가 솟구쳤다.
그러나 벽에 기대 몸을 떨고 있는 남자아이가 왠지 자꾸 신경이 쓰여 지안은 분실물 센터로 향하던 걸음을 되돌렸다.
팟!
승호의 손이 빠르게 날아와 지안의 손에 들린 휴대폰을 낚아채 갔다.
“아!”
손이 부딪치면서 조금 통증이 있었는지 지안이 짧은 비명 소리를 냈다.
잊지 않기 위해 미래의 기록들을 적어 놓은, 목숨보다 중요한 휴대폰을 빼앗아 주머니에 넣던 승호는 지안의 비명에 잠시 주춤했다.
부딪친 손을 혼자 쓰다듬던 지안은 조금 화난 얼굴로 승호를 올려다봤다.
순간, 승호와 눈이 마주친 지안…… 아니, 유나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시리도록 잘생긴 소년이 베일 것 같은 눈매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역설적이게도 눈에는 아련한 그리움이 가득했다.
두근두근-
유나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시우의 연기에 압도당해 집중이 흐트러진 것이다.
머릿속으로 시우 발목 잡지 말라던 댓글이 스쳐 지나갔다.
유나는 이름 모를 댓글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댓글 한 줄의 힘으로 간신히 몰입의 끈을 다시 붙잡았다.
“되게…… 예의가 없네. 난 물건 찾아 준 건데. 보통은 고맙다고 할…….”
지안이 굳은 표정으로 살짝, 애가 약간 무서우니까 아주 살짝 한마디 따지려는 그때.
승호가 말했다.
“꺼져.”
“……뭐?”
지안은 잘못 들었나 하고 되물었다.
놀란 토끼 같은 표정이 된 지안을 향해 승호는 또박또박 재차 말했다.
“꺼지라고. 내 근처에 얼씬거리지 마. 한 번만 더 눈에 보이면…….”
“…….”
“가만 안 둘 거야. 알았어?”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지안을 두고 승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뛰어갔다.
승호의 뒷모습을 한참 보던 지안이 겨우 한마디를 뱉었다.
“뭐 저런, 저런 애가 다 있어?”
당황한 지안의 모습을 마지막까지 담아 낸 유인석 감독은 큰소리로 외쳤다.
“컷! 오케이!”
감독의 사인과 함께 촬영장의 긴장된 공기가 풀렸다.
곳곳에서 스태프들이 크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와, 승호가 지안이 쳐다보는 눈빛이 너무 좋았던 거 같아.”
“중학생 되니까 바다아이 때랑 느낌이 완전 다르네. 빨리 다음 씬도 보고 싶다.”
“저 복잡한 감정을 열다섯 살짜리 애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끌어내지? 실제로는 150년 정도 산 거 아냐? 하하.”
스태프들은 시우의 연기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았다.
유인석 감독과 모니터링까지 마친 시우는 승현과 태우의 옆으로 가 앉았다.
승현이 말했다.
“리딩 때랑 리허설 때는 적당히 했구나? 실전 들어가니까 다르네.”
“그때 적당히 했다기보다는, 실전에서 더 열심히 하는 거지~”
시우는 태우, 승현과 함께 승강장 의자에 앉아 셋이 나란히 바나나우유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제 평범한 등하교 씬을 몇 번 더 촬영하고 장소를 옮길 예정이었다.
“형, 정우 캐릭터는 준비 다 됐어요?”
“너랑 밤낮으로 같이 연습했으니까 널 위해서라도 제대로 해야지.”
승현은 귀여운 동생에서 믿음직한 동생으로 성장한 시우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말했다.
시우는 가만히 일정을 계산해 보았다.
‘승현이 형이랑 서점 씬 찍는 날이…… 그날 감정 표현이 오늘보다 많이 어려울 거 같은데. 나도 준비 제대로 해야겠다.’
* * *
“야! 윤시우 또 전교 1등 했다!”
점심시간.
한 남학생이 친절하게도 우주 중학교 복도를 뛰어다니며 시우의 성적을 광고해 주고 있었다.
“대박! 바빠서 학교도 가끔 오는데 시험 보면 다 1등이야!”
“시우가 나한테 뇌세포 몇 마리만 주면 좋겠다.”
“몇 마리 받아서 뭐 하냐? 티도 안 나겠다.”
각 반 아이들은 역시 시우느님, 천재느님 하며 찬양을 해 댔다.
시우가 속한 2학년 1반 교실도 마찬가지였다.
“시우 진짜 천재 아니냐? 바둑도 프로고 연기는 월드 스타고…… 사람이 아닌 게 분명해.”
남학생이 외쳤다.
시우는 손을 내저었다.
“됐어. 아직 갈 길이 멀다. 연기도 한참 더 해야 하고. 바둑도 말만 프로지 스케줄 때문에 대회 참가도 못하는데 뭐.”
“에이, 겸손하기는!”
시우는 늘 그렇듯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친구들은 시우에게 여러 가지 질문들을 쏟아 냈다.
“시우야~ 영화 촬영하는 거 힘들지 않아?”
한 여학생이 물었다.
“괜찮아. 어릴 때부터 쭉 하던 일이잖아. 오히려 익숙해서 편해.”
“오오~”
남학생들도 시우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요즘 그럼 최유나랑 매일 영화 찍는 거야?”
“나 최유나 누나 진짜 이상형인데~!”
“실물이랑 화면이랑 어느 쪽이 더 예뻐?”
시우는 다음 수업 교과서를 꺼내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똑같아.”
“영화에서 유나 누나랑 너랑 커플이야?”
“영화관 가서 직접 확인하세요.”
“아~ 그럼 혹시 루시 라일리랑 최유나 중에서는 누가 더 예뻐? 역시 루시가 월클이니까 더 나아? 막 차이 많이 나?”
시우는 한숨을 쉬었다.
이상하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그리고 중학교.
왜…….
위로 올라갈수록 친구들이 더 유치해지는 거 같지?
시우가 입을 열려는 찰나, 지호가 자리에서 딱 일어나더니 남학생들에게 진지한 얼굴로 일침을 가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우리 누나가, 사람 외모 비교하고 평가하고 그러는 거 아니랬어.”
“…….”
교실이 조용해졌다.
바른 청소년 지호였다.
2학기 중간고사를 전교 1등으로 마무리한 시우는 다음날, 다시 촬영장으로 향했다.
유나가 시우를 반겨 주었다.
“시우야, 시험 결과 나왔어?”
유나의 질문에 스태프들도 귀를 쫑긋 세웠다.
시우는 어릴 때처럼 손가락으로 V를 그리고 당당하게 말했다.
“전교 1등~”
“우와아아!”
유나와 스태프들의 축하 인사가 이어졌다.
유인석 감독도 와서 한마디 했다.
“진짜 살다 살다 시우 같은 아이는 처음 본다. 공부 잘하는 연예인들도 보통은 연예인 되기 전에 공부를 해 놓고, 그 후에 연예계 활동하는 건데 도대체 얼마나 똑똑한 거야?”
유인석 감독은 날카로운 인상과는 다르게 마치 자식 대하듯 시우의 어깨를 탁탁 두드리며 웃는 얼굴로 말했다.
“오늘도 잘 부탁할게. 중요한 씬인 거 알지?”
“네.”
“믿는다. 시우야. 승현이랑 케미 확실하게 보여 줘.”
시우는 일부러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물었다.
“브로맨스요?”
“하하, 여기서는 브로맨스가 나오면 안 되지. 우리 영화 망해. 어이구, 이 귀여운 녀석. 안 이뻐할 수가 없네. 무슨 느낌인지 알지?”
“네에~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승현이 도착했다.
캐릭터를 만드느라 요즘 점점 말라 가고 있는 승현을 본 시우는 조용히 가서 체력 회복을 시켜 준 뒤 함께 리허설에 들어갔다.
“형, 어때 보여? 이제는 조금 정우 느낌 나지 않아?”
리허설을 마친 승현이 시우에게 물었다.
살을 빼서 좀 더 인상을 날카롭게 만들고, 소름 끼치는 표정과 눈빛을 위해 끊임없이 거울을 보며 연습하고, 상대역인 시우와도 정말 많은 대화를 나눴다.
촬영장 밖에서는 누구보다도 가까운 두 사람이었으나,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가장 치열한 경쟁자인 동시에 서로의 연기에 많은 영감을 주는 좋은 선생님이었다.
“우리 배우들! 다들 준비되셨나?”
촬영을 앞두고 긴장감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은 유인석 감독도 마찬가지였다.
진지해진 얼굴로 감독이 물었다.
각자의 캐릭터에 몰두하기 시작한 배우들은 오케이 사인을 보냈고, 이내 서점을 배경으로 한 세 사람의 첫 앙상블이 시작되었다.
“……레디, 액션!”
승호는 정우에게 끌려온 상태였다.
아, 살인자 정우에게 어디 폐공장 같은 곳으로 끌려온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실체를 잘 숨기고 있는 과외 선생님에게 이끌려 서점으로 문제집을 사러 온 상황-
서점으로 들어선 승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약간 삐딱한 자세로 정우의 뒤를 쫓아 걷고 있었다.
문제집 코너로 향하면서 정우가 뒤를 돌아보고 물었다.
“승호야, 형이 알아봤거든? 전에 문제집보다…… 이리 와 봐. 형이 골라 놓은 문제집 이거야. 같이 한번 훑어보자.”
정우의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성실한 과외 선생님의 얼굴이었다.
참고로 승호의 엄마친구아들, 즉 엄친아였고.
명문대생이었고.
엄마끼리 그리 친하진 않았지만 승호는 정우 형처럼 돼야 한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종종 듣고 자란 터였다.
물론 자신이 ‘진짜’ 정우 형처럼 되면 엄마는 기절하겠지.
“하아, 뭔데요.”
반드시 저 가면을 벗기고, 모든 죗값을 치르게 만들고 말 것이다.
승호는 마음속에 있는 원한을 꼭꼭 감추고, 표정 관리를 하며 정우에게 다가갔다.
“형, 가서 데이트나 하지. 왜 주말에 날 불러서 괴롭히는 거예요?”
승호의 말에 정우는 순진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데이트는 무슨…….”
“전에 데이트하던 그 누나는 잘 지내요? 형이랑 잘 어울리던데.”
“아, 그때 네가 본…… 하하. 그럼~ 잘 지내지.”
정우는 승호에게 문제집 하나를 건네주고, 다른 과목 문제집을 고르면서 승호로부터 등을 돌렸다.
그리고 승호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아주 낮게 혼잣말을 했다.
“네 덕분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