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15)
115. 운명
모니터링 이후 시우와 승현은 서점에서 실제 문제집을 보며 긴장도 풀 겸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시우, 진짜 전교 1등 맞구나?”
“그럼 거짓말인 줄 알았어~?”
“고등학교 과정까지 알 줄은 몰랐어. 공부 열심히 했네. 칭찬해 줘야겠다.”
현실에서는 중2인 시우가 영화 속 승호처럼 고1 문제집의 문제들을 쉽게 풀자 승현은 대견한 마음에 함박웃음을 짓고, 시우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의 눈에는 여전히 시우가 아기 같은데 자라고 있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났다.
시우와 승현이 우애가 좋은 형제처럼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태프들과 유나의 준비가 끝났다.
유인석 감독은 배우들에게 감정을 잡을 시간을 준 뒤, 호쾌하게 외쳤다.
“레디, 액션!”
승호와 정우는 문제집 몇 권을 골라 계산대로 향했다.
고등학교 문제집 코너를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 책장들 사이의 좁은 길목에서 승호와 정우는 한 여학생과 맞닥뜨렸다.
“…….”
승호의 눈이 커졌고, 여학생의 입이 벌어졌다.
“아.”
주말을 맞아 친구들과 놀다가 귀가하는 길에 잠깐 서점에 들른 지안은 승호를 기억해 냈다.
지하철에서의 첫 만남이 너무 강렬하기도 했고, 애초에…… 잊기가 힘든 외모였다.
서로를 발견하고 멈칫 굳어 있는 두 고등학생을 본 정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누구?”
승호는 대답했다.
“어…… 그…… 모르는…… 사람…….”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승호의 반응.
태연하려고 애를 썼지만, 핏기가 사라진 얼굴빛과 미묘하게 흔들리는 시선 끝을 정우는 놓치지 않았다.
조용조용하고 소심하던 승호가 어느 날부턴가-
태도가 당당해지고, 갑자기 어른스러워지고, 또 자신을 보는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정우는 마치 원래의 소심하던 승호로 돌아간 것과 같은 지금의 모습이 무척 흥미로웠다.
정우의 입에서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는 사람 같은데? 혹시…… 여자친구라거나? 하하. 형이 비밀 지켜 줄게. 말해 봐.”
정우의 말에 지안이 먼저 반응했다.
“전혀 아닌데요. 그냥 예전에 지하철에서 폰 주워 준 것밖에 없어요.”
그리고 지안은 그대로 승호와 정우를 지나쳐 문제집 코너로 들어가 버렸다.
지안이 떠나자 승호는 속으로 안도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책했다.
더 침착했어야 했다.
아니, 아니.
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광경을 보고 이 이상 침착하게 반응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심장이 세차게 떨려 왔다.
그나마 지안이 빨리 떠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얼른 계산대로 가려는데, 정우가 지안이 있는 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뭐해?”
“응? 아니. 아무것도 아냐.”
여학생의 얼굴을 다시 떠올려 보니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디선가 본 거 같은데…….
정우가 기억을 되짚으며 승호와 같이 발걸음을 옮길 때, 계산대 쪽에 있던 두 명의 여학생이 문제집 코너 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야! 이지안! 빨리 와~ 나 오늘 엄마가 일찍 들어오래서 이제 가야 돼!”
“그래! 우리 소설책 사러 온 거잖아~ 제발 목적에 충실하자!”
정우의 걸음이 멎었다.
승호도 걸음을 멈췄다.
정우가 말했다.
“이지안…… 이지안…… 아~”
“…….”
승호는 말없이 정우의 등을 쳐다봤다.
정우의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하하. 이름이 예쁘네.”
“……응. 맞아. 예쁘네.”
승호는 정우의 등 뒤에서 앳된 얼굴과 상반되는 지독한 쓴웃음을 입가에 띠고 대답을 했다.
괴롭고, 허무했다.
과정만 다를 뿐, 자신이 아는 미래와 같은 결과가 하나씩 눈앞에 닥치고 있었다.
정우가 던질 다음 질문을 승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정우가 물었다.
“승호야, 너는 운명 같은 거 믿어?”
지난 생에는 이 질문에 “그런 게 어딨어~ 오그라들게. 형은 믿어? 형, 로맨티스트야?” 이렇게 뭣도 모르고 해맑게 웃으며 지껄여 댔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온 지금은, 저 질문의 의미를 안다.
승호는 말했다.
“응. 믿어. 필사적으로 노력해도 피하지 못하는 게 있는 거니까.”
정우는 승호의 대답에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계산대로 떠났다.
승호는 문제집 코너에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지안을 봤다.
눈이 마주친 지안은 좋지 못한 첫 만남 때문인지 승호를 피해 고개를 돌리고 친구들 사이로 갔다.
잠시-
아주 잠시, 집요하게 쫓아오는 정해진 운명이란 것에 자포자기한 채로 서 있던 승호는 친구들과 웃고 있는 지안의 모습을 보다 주먹을 있는 힘껏 꽉 쥐었다.
회색빛으로 탁해졌던 승호의 눈에 다시 불씨가 떨어졌다.
지안이가 죽는 게 정해진 운명이라면,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것도 운명이다.
반드시…….
뭔가를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승호는 마음을 다잡았다.
정우가 지안이 누군지 알아챈 이상, 이제 지안을 피해 다니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승호는 곁에서 직접 지키는 쪽으로 대응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학생들의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는 늦은 저녁 시간.
승호는 교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엑스트라 여고생들은 후광이 은혜롭게 내려오는 위대한 미모를 뽐내며, 분위기를 잡고 서있는 승호를 발견하고 다들 꺅꺅 소리를 질러 댔다.
“누구야? 쟤, 되게 잘생겼다.”
“와, 비주얼 연예인!”
“가, 가서 말 걸어 볼까?”
가방을 메고 나오던 지안은 교문 앞의 소란스러움을 느끼고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친구들 사이로 얼굴을 슬쩍 내밀어 보았다.
“……어?”
지하철과 서점에서 본 그 남자애였다.
“흠, 우리 학교에 왜 온 거야?”
반갑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오든 말든 어차피 자신과는 관계가 없었다.
지안은 저 성격 나쁜 남자애의 외모에 빠져 웅성대고 있는 다른 여학생들을 두고 교문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덥석.
‘……응?’
누군가 지안의 손목을 잡았다.
고개를 돌려 보니, 그…… 지하철에서 막 혼자 소리 지르던 무서운 남자애가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쭈뼛.
“뭐, 뭐야? 왜? 나, 나, 나 찾아온 거야?”
끄덕.
승호의 고갯짓에 지안은 소름이 오소소 돋는 기분이었다.
지안의 속도 모르고 다른 여학생들은 축제로구나~!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꺄아악! 이지안! 좋겠다!”
“어머나아~! 쉐상에에~! 공부만 하는 줄 알았더니이~!”
“남자친구 진짜 잘생겼다! 꺅! 꺅! 꺅!”
난리가 난 교문을 뒤로하고 승호는 지안을 학생들이 없는 상점가 골목 쪽으로 데리고 갔다.
“뭐 하는 거야! 나 소리…… 소리 지른다!”
골목에 도착한 승호는 지안을 놨다.
지안은 적개심 가득한 눈으로 승호를 쏘아봤다.
170 중반 정도의 키에 다른 여학생들이 외친 것처럼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외모를 가진 남학생이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어떡하지? 소리를 질러야 되나? 아니면 일단 무슨 일인지 이야기라도 들어봐야 되나?’
이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지안이 승호로부터 슬금슬금 거리를 벌릴 때.
승호는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지안에게 말했다.
“빨리 말할게. 잘 들어.”
“뭐?”
“근데 말하기 전에 너 한 번만 꼭 안아 보면 안 돼?”
“뭐어~!?”
지안은 방어하듯 자신의 몸을 두 팔로 감쌌다.
“가, 가까이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나 태권도도 배웠어!”
“알아. 3단.”
“헉! 어떻게 알았어?”
“미래에서 온 네 남자친구거든.”
“아, 그래? 그래서 아는구나…… 뭐래!! 너 뭐야!! 혹시 스토…….”
지안의 말이 끊겼다.
승호는 속이 후련한지 시원하게 웃는 얼굴로, 눈물을 글썽글썽 매달고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지안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위험한 스토커라기보다는 왠지 너무 사랑스러운 느낌이라 지안은 그 마음을 부정하려는 듯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조금씩 멀어지는 지안을 보던 승호가 결국은 참지 못하고, 지안의 몸을 확 잡아당겨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았다.
* * *
미국 LA.
루시는 친구들과 코리아타운을 방문했다.
한국 사람은 아니지만 언젠가부터 쉬는 날 친구들과 코리아타운에 가서 한국 음식도 먹고 한국 화장품과 옷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루시의 일상이 되었다.
한여름의 화창한 햇빛 아래, 한국 나이로 치면 시우보다 일 년 먼저 열일곱 살이 된 루시는 빈티지한 데님 재킷을 걸치고 한 손에는 소떡소떡을 든 채 미드윌셔 대로를 활보하고 있었다.
루시의 양옆에는 조금 통통한 체형의 빨간 머리 소녀 케이티와 한국계 미국인 소녀 제니가 함께였다.
“한국어로 남편을 뭐라고 해?”
케이티가 한국계 소녀 제니에게 물었다.
제니는 어설픈 억양으로 대답했다.
“써방니임~?”
“오우! 써파뉨~”
둘은 같이 웃었다.
루시는 손에 들고 있는 소떡소떡보다 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빨리 영화나 보러 가자!”
루시는 친구들을 두고 앞장서 걸었다.
케이티와 제니는 루시의 뒤를 쫓았다.
“아, 영화 제목이 뭐였지? 되게 달콤했는데?”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다?”
“맞아. 이거 로맨스 영화잖아. 루시~ 시우가 영화 속에서 다른 여배우랑 스킨십 같은 거 하면 어떡해?”
멈춰 선 루시는 두 친구를 향해 침착하게 설명을 했다.
“이건 시우가 시리얼 킬러를 쫓는 스릴러 영화야. 그런 로맨틱한 분위기의 영화가 전혀 아니라고. 알겠어?”
“아쉽다. 루시 질투하는 거 보고 싶었는데.”
“그러게. 귀여울 거 같았는데.”
루시는 안타까워하는 두 친구를 향해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여 준 뒤, 코리아 타운에 위치한 한국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제일 큰 사이즈의 팝콘과 음료수, 스키틀 캔디를 산 루시는 자신을 알아보는 한국 팬들에게 친절하게 사인도 해 주고 친구들과 함께 2관으로 입장했다.
“와, 예매하길 잘했네.”
케이티가 말했다.
상영관에는 관객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한국 관객들이 많았지만 시우의 팬인 미국 관객들도 적지 않았다.
자리에 앉은 루시와 친구들은 팝콘을 먹으며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두근두근.
할리와트의 에반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시우를 볼 수 있는 정말 오랜만의 기회였다.
루시는 즐거운 표정으로 스크린에 시선을 주었다.
곧이어 상영관이 어두워지고, 관객들의 귀에 한겨울의 쓸쓸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영화가 시작됐다.
[10년 전>이라는 영어 자막이 떠올랐다.그리고 깜깜하던 스크린에 한국 시골의 겨울 풍경이 보였다.
헐벗은 나무들이 서있는 산 밑 얼어붙은 호숫가 위에서 몇몇 아이들이 까르륵까르륵 웃음소리를 내며 뛰어노는 광경이 비쳤다.
원래 이 마을에 사는 아이들도 있었고, 명절을 맞아 내려온 아이들도 있었다.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행복한 얼굴들이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그중 한 남자아이를 잡았다.
열세 살쯤 됐을까.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어울려 놀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놀이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결국 그 아이는 어느 순간 무리에서 떨어져 호수 중앙으로 차츰차츰 걸음을 옮겼다.
아이의 시선은 발밑에 있는 깊은 호수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혼자 있는 소년을 쫓아 뛰어왔다.
“오빠~ 거기서 뭐 해?”
소년 정우는, 호수 밑바닥에서 눈을 떼고 자신에게 뛰어오고 있는 여덟 살 여자아이 지안을 봤다.
타지에서 명절을 보내러 온 아이였는데 제법 귀엽게 생긴 데다 성격이 활발해 기억에 박혀 있었다.
어린 지안은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오빠를 불러오기 위해, 빙판 위를 열심히 달렸다.
그때.
파삭-!
얼음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지안의 몸이 얼음 밑으로 푹 꺼지듯이 사라졌다.
루시와 친구들은 깜짝 놀라 서로의 팔을 꽉 붙잡았다.
놀란 관객들 사이에서도 외마디 비명들이 터졌다.
쿵쿵-!
루시와 관객들의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작은 여자아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그들은 긴장된 눈으로 스크린을 봤다.
소년 정우도 ‘조금’ 놀란 눈치였다.
어른을 찾아 고개를 휘 돌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자신이 너무 멀리 온 탓인지 아무도 이 상황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정우는 물에 빠진 아이를 건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그곳으로 걸어갔다.
지안은 다행히 물속으로 완전히 가라앉기 전, 주변의 깨지지 않은 빙판을 가까스로 붙잡은 채 허우적대고 있었다.
“어푸…… 푸하…… 사, 살려…….”
밖으로 나와 있는 지안의 손을 잡아 끌어올리면 될 것 같았다.
관객들은 안도하면서도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어진 소년 정우의 행동에 숨을 흡 들이켰다.
정우는…….
지안이 빠진 얼음 구멍 옆에 쪼그리고 앉아, 차가운 물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지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정우는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감각에 몸을 맡긴 채 태어나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 도와…….”
정우는 기다렸다.
좀 더 기다렸다.
그런데도 작은 손으로 빙판을 잡은 지안은 필사적으로 계속 버텼다.
결국 정우는 빙판을 잡고 있는 지안의 손가락을 떼어내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멀리서 어른들이 외쳤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정우야! 누가 얼음에 빠졌냐?!”
정우는 입술을 꽉 깨물고, 원래 의도와는 반대로 지안의 손을 잡고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정우와 어른들의 노력으로 얼음 밖으로 빠져나온 지안은 아빠 품에 안겨, 몸을 바들바들 떨며 병원으로 떠났다.
마을 어른들은 정우에게 잘했다며 지안이는 네가 살린 거라며 칭찬들을 던져 댔다.
지안의 사고로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정우는 가족들과 같이 호숫가를 벗어나는 지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이번에도 역시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아쉬웠다.
태어나 이렇게 기뻤던 순간이 없었고, 이렇게 슬펐던 순간도 없었다.
늘 메마른 삶을 살아온 소년 정우에게, 이것은 강렬한 충격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정우의 눈은 계속해서 멀어지는 지안을 쫓았다.
루시와 친구들은 충격을 받아 입을 벌리고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이티가 말했다.
“괜찮아. 루시. 시우가 저 녀석을 응징할 거야. 설마…… 놈에게 당하고 끝나는 건 아니겠지? 엔딩 알아?”
“몰라.”
“쉿-”
제니가 친구들의 말을 막았다.
시우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그랬던가-첫사랑이 가슴 아픈 이유는,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연쇄살인마들도 종종 그런 말들을 뱉곤 했다.
죽이지 못한 첫 상대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다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