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53)
153. 바둑여신
은주는 깜짝 놀랐다.
“우와, 예쁘다.”
시우의 뒤에서 나타난 여성을 본 은주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정작 본인이 여배우면서 오히려 그녀를 보고 여배우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어깨 밑으로 가지런히 내려온 흑단처럼 검은 생머리가 무척 부드러워 보였다.
‘얼굴 진짜 작다. 눈코입이 완전 인형처럼 생겼어. 누구지?’
차림새는 수수했으나 깊은 눈빛과 단아한 외모에서 풍기는 청초함이 굉장했다.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있는 첫사랑의 정석을 그대로 꺼내 옮겨 놓은 듯한 모습이라고 은주는 생각했다.
은주가 나도 저렇게 생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부러워하고 있을 때, 은주와 눈이 마주친 수아는 조금 부끄러운 듯이 시우의 친구들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은주와 친구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얼굴이 빨개진 채, 같이 머리를 숙였다.
“넵! 안녕하세요!”
소개를 원하는 친구들의 간절한 눈빛이 시우에게 향했다.
시우는 이대로 궁금해 죽게 놔둘까 하다가, 질문 공세에 시달리게 될 것 같아 친절하게 입을 열었다.
“바둑 기사 최수아 7단님이시다.”
한 남학생이 외쳤다.
“맞다! 바둑여신! 나 인터넷에서 봤어! 와, 실물이 더 예쁘…….”
말을 멈춘 남학생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친구들 뒤로 숨었다.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왜?”
주위가 시끌벅적해졌다.
시우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수아와 함께 친구들이 없는 곳으로 잠시 떠났다.
“널 제주도에서 만나네. 너무 신기하다.”
휴식차 언니와 제주도로 여행을 온 수아였다.
시우는 수아의 언니에게 꾸벅 인사를 한 뒤, 수아에게 말했다.
“그러게. 대회 끝나고 머리 식히러 온 거야?”
“응. 마지막 대국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수아는 얼마 전에 출전한 세계 대회 8강에서 아쉽게 탈락을 했다.
다 잡은 판을 끝에 가서 한순간의 착각으로 내주고 말았다.
웃고는 있었지만 어릴 때부터 수아를 봐 온 시우는 그녀가 현재 매우 우울한 상태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게 상변 역끝내기를 먼저 해 놨어야지. 아무리 후수라도 거길 처리한 후에 선수 끝내기를 들어가야…… 그랬으면 분명히 누나가 한 집 정도…….”
“…….”
“……아니야.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미안해.”
똑같이 아쉬운 마음이 들어 열심히 말을 잇던 시우는 수아의 눈동자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고 서둘러 말을 멈췄다.
코끝이 살짝 빨개진 수아는 눈물을 꾹 참으며 입을 열었다.
청초한 외모와 달리, 목소리에는 이가 갈리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초읽기라…… 헷갈렸어…….”
“그, 그럴 수 있지. 응. 잊어버려. 세계 대회 8강이면 엄청 잘한 거잖아.”
“우승 아니면 다 망한 거야.”
“아니, 저……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몰라. 그냥 내가 한심해 죽겠어.”
시우는 자책하는 수아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을 꺼냈다.
“누나 숙소 어디야?”
“왜?”
“혹시 가까우면 이따 놀러 오라고.”
* * *
혜성예고 2학년 학생들은 흑돼지 두루치기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잔뜩 들뜬 얼굴로 오후 일정에 나섰다.
섭지코지와 바닷가를 구경한 학생들은 저녁 6시쯤 성산일출봉 쪽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시우는 방에 가방을 놓고 저녁을 먹으면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눴다.
요즘 연극부에서 대본 집필에 매진하고 있는 극작과의 재희도 시우 옆에 앉았다.
“이래서 제주도, 제주도 하는구나. 경치 진짜 좋더라. 막 글이 술술 나와. 여기 와서 수첩에다가 벌써 글 이만큼 적었어.”
시우는 자랑스럽게 수첩을 내미는 재희를 보고, 웃음이 나왔다.
“글 쓰는 게 그렇게 재밌어?”
“음…… 재밌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는데 재능이 없으니까 매일 쓰려고 노력하는 거지.”
작년 초만 해도 2학년 되면 문창과로 옮길 거라더니, 시우와 작업한 ‘누군가 내게 1점을 줬다’ 웹 드라마의 성공 이후 극작과에 아예 말뚝을 박은 재희였다.
시우는 돈까스를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킨 뒤, 재희에게 격려의 말을 던졌다.
“너 재능 있어. 나중에 좋은 작가 될 거야.”
재희는 멋쩍게 웃었다.
“왜 갑자기 립 서비스를 해 주고 그래? 휴, 나도 열심히 해서 너랑 은주처럼 빨리 프로 무대에서 활동하고 싶다. 그런데…… 지호는 왜 못 온 거야? 아쉽다.”
“며칠 뒤에 회사에서 평가 있다고. 같은 조 애들 다 죽어라 연습하는데 혼자 수학여행 오긴 좀 그렇잖아.”
“음, 지호도 얼른 데뷔해서 잘되면 좋겠다.”
시우는 마지막 남은 음식들을 깨끗이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러게. 잘돼야지.”
리조트 입구에서 수아가 시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선한 제주도의 바닷바람에 수아의 머리카락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수아의 양손에는 간식이 가득 담긴 봉투가 들려 있었다.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어?”
“친구들이랑 나눠 먹으라고 누나가 좀 샀지.”
수아에게서 간식 봉투를 받아 든 시우가 안에 든 과자들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손 크네. 무거웠을 텐데 이걸 다 어떻게 들고 왔어?”
“내가 뭐 바둑만 두나. 체력 관리하려고 헬스도 많이 하거든~?”
보기보다 힘이 세다는 걸 보여 주고 싶은지 수아는 자신의 팔을 탁탁 두드렸다.
시우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 친구들에게 간식을 나눠 주었다.
과자와 빵, 음료수 등을 받아 든 학생들은 수아에게 잘 먹겠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두 개 먹으면 안 되지?”
“응. 안 돼.”
“흥. 언니, 잘 먹을게요!”
은주도 수아에게 인사를 하고, 과자를 들고 떠났다.
과자 배급을 마친 시우는 음료를 하나씩 든 채, 로비에 앉아 잠시 대화를 나눴다.
“아까는 수학여행 스케줄 때문에 가 봐야 해서 제대로 얘기도 못했네. 얼마 만이지?”
“응. 미국 가기 전에 봤으니까 거의 일 년 됐나?”
“시간 진짜 빠르다.”
통화는 종종 했지만, 서로 바쁘다 보니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수아 옆에 앉아 음료만 홀짝이던 시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힘들어?”
“응? 아니. 괜찮아.”
“…….”
“……조금 힘들긴 해. 뭔가 성장이 멈춘 거 같아.”
“응.”
“막다른 골목에 몰린 기분이랄까.”
시우는 고민하는 수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지면 늘 울고 분해 하던 승부욕 강한 어린 시절의 수아와 지금의 수아가 겹쳐 보였다.
시우가 말했다.
“누나. 어릴 때 기억나?”
“어릴 때 뭐?”
“나한테 질 때마다 엄청 울었잖아~”
“그, 그 얘긴 왜.”
수아는 민망하다는 듯이 얼굴을 붉혔다.
“그때 누나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
끊임없이 울면서도 시우에게 계속 도전했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포기하지 않고 계속 끈질기게 싸웠다.
그러다 보면 한 판, 두 판 시우에게 이길 때도 있었다.
그 경험들을 바탕으로 여기까지 성장해 온 수아였다.
“기억나…….”
“얼굴은 되게 착하게 생겼는데, 바둑 둘 때 누나 완전 쌈닭이었잖아.”
“……맞아. 그랬지.”
프로가 되고, 승부의 세계에서 계속 압박을 받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자신이 바둑을 좋아하던 마음도 잊고 지냈다.
너무 힘들어서.
수아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물이 수아의 손등을 적셨다.
시우는 말없이 수아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조용히 혼자 마음을 추스르던 수아가 시우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
시우는 수아와 마주 보고 웃다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장난스레 입을 열었다.
“누나 그거 알아?”
“뭐?”
“지금 누나 얼굴 되게 웃겨.”
“……!”
수아는 얼른 가방에서 손거울을 꺼내 얼굴을 확인했다.
얼굴이 엉망이었다.
“너~ 좀 모른 척해 주면 안 되냐?”
“아, 그럴걸 그랬다. 그 얼굴로 돌아다니게 뒀어야 하는데.”
“이제 컸다고 누나 놀리고 그러네? 너 일루 와. 혼나야겠다.”
주먹을 불끈 쥔 하나도 무섭지 않은 누나 수아를 보며, 시우는 웃으며 사과를 했다.
“알았어. 미안해. 미안해~”
둘이 웃고 떠들고 있을 때, 한 남학생이 뻘쭘하게 다가와 슬그머니 시우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런 소식을 전하게 돼 진짜 유감인데…….”
“응?”
“흰독이가 너를 찾으시거든.”
“흰독이?”
“쌤들 휴게실에서 기다리고 계신대.”
“……알았어.”
남학생이 떠났다.
시우는 다 마신 음료를 쓰레기통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떨결에 함께 일어난 수아가 시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흰독이가 뭐야?”
시우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응. 흰대머리 독수리라고 우리 교감 쌤 별명.”
“풋.”
어느 학교든 선생님에게 별명 붙이는 건 다 비슷비슷했다.
수아는 정신없이 웃었다.
* * *
휴게실에는 교감 선생님과 몇몇 남자 선생님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선생님들 앞에 놓인 바둑판을 발견한 시우는 교감 선생님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금세 깨달았다.
시우를 본 교감 선생님은 활짝 웃는 얼굴로 백발을 휘날리며 뛰어왔다.
“우리 윤 사범님! 저기 창밖을 한번 보시죠. 경치도 좋고 아주 바둑 두기 딱 좋은 장소 아닙니까. 하하하!”
“……왜 존댓말을.”
“어이쿠, 사범님으로 모셨으니까 당연히 존댓말을 써야죠. 학생이 선생님에게 반말하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하하하!”
“선생님…… 저…… 지금 자유 시간인데요.”
“시우야. 여기가 어디야. 제주도잖아. 제주도 왔으면 이렇게 자연 내려다보면서 딱 신선처럼 앉아서 바둑 둬야지.”
시우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중학생 때도 교장 선생님께 종종 불려 갔었고, 고등학교에서는 교감 선생님께…….
‘그래도 학교는 그나마 낫지. 나중에 군대 가면 진짜 죽어라 불려 다닐 거야. 으으.’
시우는 똘망똘망 맑은 눈빛으로 자신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있는 선생님들에게 완곡히 거절의 말을 전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요. 다음에 꼭! 봐 드릴게요.”
“그, 그래?”
교감 선생님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나중에라도 혹시 시간 나면 놀러 와.”
“네!”
교감 선생님은 붙잡았던 시우의 팔을 놔주고 쓸쓸히 돌아섰다.
뒤돌아선 교감 선생님의 흰머리 사이로 보이는 휑한 머리가 어쩐지 마음이 아파 상대를 해 드리고 싶기도 했지만, 수아 누나가 기다리고 있어 서둘러 휴게실을 빠져나왔다.
“기다렸지?”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수아가 시우의 목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아니. 그런데 금방 나오네? 혹시 무슨 일 있어?”
“아…… 별건 아니고 흰독, 아니 교감 선생님이 바둑을 엄청! 좋아하시거든.”
“그래? 그럼 널 찾으신 이유가…….”
“응. 맞아. 바둑 같이 두자고 부르신 거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어 보이는 시우에게 수아가 말했다.
“음~ 그럼 마침 잘됐네! 우리 오랜만에 한판 붙어 볼까?”
수아에게서 어릴 때와 같은 생기발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좀 전에 들은 시우의 말이 적잖은 위로가 된 것 같았다.
때론 틀에 박힌 가르침보다 자신을 잘 알고 아껴 주는 누군가의 따뜻한 한 마디가 약이 된다.
시우와 수아는 바둑판 앞에 마주 앉았다.
교감 선생님은 상상치도 못한 빅 매치를 눈앞에서 보게 된 사실에 흥분을 참지 못하고, 연신 콧김을 뿜어 댔다.
소문을 듣고 온 여러 선생님들과 학생들도 휴게실을 찾았다.
“……관중이 이렇게 많아질 줄은 몰랐는데.”
수아는 옅은 미소를 띠고, 바둑돌을 손에 쥐었다.
흑돌을 쥔 수아가 바둑판 위에 첫 수를 딱 멋지게 내려놓자 선생님들은 감탄과 함께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바둑은 잘 모르지만 시우와 수아의 외모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찾아온 학생들도 왠지 모를 분위기에 압도되어 숨을 멈췄다.
휴게실이 조용해진 가운데, 수아가 시우를 보며 씩 웃는 얼굴로 자그맣게 물었다.
“아까 누나랑 한 얘기 기억하지?”
시우는 흰독 교감 선생님이 쥐여 준 부채를 촤악 펼쳐 들고 여유롭게 흔들면서 대답했다.
“그럼~ 기억하지. 진 사람이 소원 들어주는 거지?”
“응. 넌 내가 무슨 소원 빌지 묻지도 않아?”
“괜찮아. 꼭꼭 넣어 둬. 어차피 소원 말할 기회도 없을 테니까. 누나야말로 내가 누나한테 뭐 시킬지 걱정 안 돼?”
수아는 시우의 도발에 지지 않고 맞불을 놓았다.
“전혀. 너야말로 그 소원 빌 기회 없을 거야.”
시우와 수아의 눈에서 스파크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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