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71)
171. 쁘띠
“…….”
[…….]니콜라스는 말이 없었다.
짧은 한숨과 함께 시우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니, 나 진짜 깜짝 놀랐다고. 상상도 못했어.”
베이비 오브 레전드에서 자기 손잡고 아장아장 걸음마 연습하던 그 밤톨이가, 로건 호크였다니-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만 몰랐나?
게임에서 밤톨이와 붙어 다닌 준영이 자신에게 밤톨이와 잘 지내라고 한 말이 혹시 그런 뜻이었나?
시우의 한숨 소리를 들은 니콜라스는 휴대폰 너머에서 신나게 웃었다.
이 순간을 위해 그동안 열심히 숨겨 온 것이었다.
[나는 계속 입이 근질거렸는데, 로건이 비밀로 해 달라고 해서 꾹 참았지~ 얼마나 놀랐어? 막 거기서 입 벌리고 있었던 건 아니지?]“저기, 그 정도는 아니고.”
[나라면 진짜 놀라서 엉덩방아 찧고 넘어졌을지도~ 하하. 어땠어? 로건이 외모랑 스타일은 되게 딱딱한 분위긴데 알고 보면 괜찮은 사람이야. 좀 친해졌어?]시우가 자신을 어렵게 여길까 봐,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으로 먼저 가까워져 볼까 서프라이즈를 계획한 로건이었다.
덕분에 선입견 없이 친해지긴 했다.
로건은 어린 시우가 항상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시우는 냉랭해 보이는 로건이 겉보기와 달리 좀 허당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현실에서는 완벽주의 연기자.
게임에서는 일만 시키면 실수하고 어떻게 하냐는 듯이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허당 아기.
‘갭이 귀엽네.’
시우는 피식 웃고는 니콜라스에게 대답했다.
“응. 친해졌어. 같이 연기하면 재밌을 거 같아.”
LA에서 주연 배우 로건과 처음 만난 시우는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훗, 과연 그럴까?]“응?”
열흘 뒤.
시우는 LA에서 광고 촬영과 자선 행사 등의 스케줄을 소화하고 있었다.
일을 마친 시우가 숙소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위해 냉장고를 열었을 때.
냉장고 문에 달린 스크린에서 AI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슈슈 님- 전화가 왔습니다- 연결하시겠습니까-?]스크린에는 로건 호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아…….”
요즘 자주 전화가 온다.
시우는 요리 재료를 조리대에 올려놓고,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부재 중으로…… 아, 아니야. 받을게. 스피커로 연결해.”
[로건 호크 님의 전화를 받습니다-]짧은 신호음이 울리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안녕하세요.”
“네, 뭐. 좋았어요.”
[오케이. 다행이군. 어제 우리가 연기에 대해 두 시간 동안 아주 깊은 대화를 나눴잖아?]“……네. 어제만 그런 건 아니지만.”
[너의 고민을 듣고 내가 영화 몇 편을 골라 봤어. 오늘 함께 보면서 어제의 이야기를 이어서 해 보는 게 어떨까? 아침에 케빈에게 물어보니까 지금부터 시간이 된다던데?]시우의 고개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케빈 쪽으로 돌아갔다.
눈이 마주친 케빈은 미안하다는 듯이 시우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지금 저녁 해 먹으려던 참이라. 먹고 나면 시간이 늦을 수도 있는데요.”
[며칠 전처럼 너희 집으로 가서 같이 밥 먹을까? 널 위한 무알콜 와인도 한 병 선물할게.]원래 마음을 잘 열지 않는 차가운 사람들이, 마음을 연 상대에게는 확 잘해 주곤 하는데…….
아무래도 로건은 시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시우도 로건의 호의와 열정이 싫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LA에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봤으면 좋겠다며 매일 전화를 거는 게 약간 부담스러울 따름이었다.
시우는 이 형님을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하다가 별 수 없다는 듯이 가볍게 웃고는 초대를 했다.
“네. 오세요.”
시우의 허락이 떨어지고, 30분 뒤-
집 앞에 로건이 도착했다.
시우와 로건, 케빈은 불고기와 달걀말이, 맵지 않게 만든 부추 샐러드 등으로 저녁을 먹었다.
로건은 오기 전에 이미 식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우의 요리에 연신 감탄하며 쌀밥 위에 불고기와 부추를 올려 맛있게 밥을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언빌리버블. 이 부쭈는 향이 정말 독특하군. 내가 먹어본 가장 인상적인 샐러드야.”
“감사합니다.”
전생이나 현생이나, 누군가 자신의 요리를 맛있게 먹어 주면 기쁜 것은 당연했다.
기분이 좋아진 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무알콜 와인이랑 어울릴지는 모르겠는데 안주로 해물부추전을 대령하겠습니다.”
“부쭈전? 뭔진 몰라도 지금까지 내가 먹은 한국 음식은 전부 맛있었어. 니콜라스가 한식 매니아가 된 이유를 알겠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지.”
귀족적인 외모의 소유자 로건은 기품 있게 발을 동동대면서 해물부추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세 남자는 전을 앞에 두고 앉아 와인잔을 부딪쳤다.
챙-
시우는 무알콜이긴 해도 잔을 부딪치니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올해로 열아홉 살인가. 많이 컸다. 101번째 생이 없다고 치면, 올해가 내 마지막 십대 생활이로구나.’
아니다.
만 나이로 계산하면 좀 더 남았을지도.
시우는 와인맛 음료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응?’
꽤 맛있었다.
무알콜이라고 얕봤는데 완벽한 밸런스가 느껴졌다.
‘……블랙커런트. 블랙베리 아로마.’
시우는 신경을 혀끝에 집중하고 맛을 음미했다.
붉은 액체를 입안 가득 담자, 향긋한 제비꽃과 섬세한 후추 향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와인은 바닐라의 우아한 여운을 남기고, 시우의 목 뒤로 사라졌다.
짙은 여운이 입 안에서 맴돌았다.
‘훌륭한데?’
조금 놀란 시우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던 로건이 미소를 지었다.
“호오, 맛을 아는군? 어때- 꽤 좋지? 술을 못하는 친구들을 위해 내가 만든 작품 중 하나지.”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고,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로건에게 말했다.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다행이군. 무알콜 와인은 진정한 와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고정 관념을 깨 준 녀석이야. 선물로 두고 갈 테니 어른 분위기 내고 싶을 때 천천히 즐기도록 해.”
시우는 감사히 선물을 받았다.
“자, 이제 어제 이야기를 계속해 볼까?”
로건은 어설픈 젓가락질로 부추전을 집으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안드로이드의 감정 표현에 대해 고민이 많다고 했지? 그래. 이해해. 배우는 도대체 안드로이드의 인간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아니, 표현하는 게 과연 옳을까. 미세한 얼굴 근육의 움직임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정보를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어. 그 말은 즉 하나의 실수가 잘못된 정보를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연기가 설득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멍-
케빈은 속사포처럼 튀어나오는 열정 부자 로건의 말을 초점 없는 눈빛으로 듣다가, 시우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멋진 두 배우가 진지하게 연기를 논하도록, 잠시 피해 줄 생각이었다.
케빈이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부추전과 와인잔을 들고 몸을 일으키는 그때-
탁.
와인잔에 신경을 쓰던 케빈의 무릎이 테이블을 쳤다.
“으윽!”
무릎뼈에서 올라오는 짜릿한 고통에 케빈의 몸이 휘청였다.
그리고-
툭.
와인 애호가 로건에게 무알콜 와인도 훌륭한 와인이 될 수 있다는 깨우침을 준 레드와인이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했다.
와장창!
시우와 케빈, 로건이 얼음처럼 굳은 가운데 로건의 절절한 외침이 다이닝 룸에 퍼졌다.
“으아악! 쁘띠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바닥을 향해 손을 뻗은 로건은, 이내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케빈이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너무 미안해하는 케빈과 시우에게 로건이 말했다.
“하하, 하하하. 괜찮아. 다 괜찮아. 진정하라고. 일단 이…… 이 잔으로 와인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함께 치우도록 하자고.”
많이 아끼는 와인이었는지 로건은 오돌돌 떨리는 손끝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기품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으나, “또 만들면 돼…… 또 만들어서 줄게…….” 중얼거리는 로건의 표정이, 아기 밤톨이와 안쓰럽게 오버랩되어 시우와 케빈의 머리를 더욱 밑으로 떨어지게끔 만들었다.
차마 로건을 쳐다볼 수가 없어 깨진 와인병만 바라보던 시우는 앞으로 로건이 언제 찾아오든 늘 반갑게 맞아 주겠다고 다짐을 했다.
‘오늘도 연기 얘기 밤새 나눠야지. 사실 진짜 고민이 되는 부분도 많으니…… 음?’
하얀 대리석을 붉게 물들인 채,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고 있는 레드와인을 바라보던 시우의 뇌리로 좀 전에 들은 로건의 말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 무알콜 와인은 진정한 와인이 될 수 없다는 나의 고정 관념을 깨 준 녀석이야.
‘나도…… 안드로이드는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게 아닐까?’
안드로이드 연기에 대한 첫 번째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시우는 기쁜 마음으로 와인잔을 들어, 로건에게 내밀었다.
로건은 시우의 의도를 짐작한 뒤, 내민 잔을 향해 웃는 얼굴로 건배를 했다.
“쁘띠를 위하여-!”
45도로 기울어진 잔의 몸체가 가볍게 부딪치며, 에밀레 종소리와 같은 맑은 소리를 냈다.
“SF 영화 리스트 적어 오셨다고 했죠? 오늘 늦게까지 계속 연기 연습해도 괜찮아요?”
“오, 나야 환영이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연습해 보자고!”
* * *
2월 말.
봄방학의 끝 무렵, 시우는 가족여행을 떠났다.
“올해 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가족여행을 두 번이나 가네.”
현주는 짐짓 너무 자주 가는 거 아니냐는 투로 말했으나,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이 밝았다.
시우는 웃고 있는 엄마를 보다 슬쩍 물었다.
“엄마, 좋아요?”
“응? 아니~ 뭐, 좋긴 누가. 그냥 너희 좋으라고 가는 거지.”
“외할머니 못 만난 지 꽤 됐잖아.”
“……그런가? 그렇네. 한참 됐지.”
친정 엄마 생각에 현주는 괜시리 마음이 울컥했다.
전화를 자주 드리려고 노력하지만, 매번 가겠다는 말만 반복하고 정작 가지 못하는 현실에 차츰차츰 횟수가 줄어들었다.
게다가 남편에 아이 셋에 두 동물들까지 돌보다 보면 한 달, 한 달이 뭘 했는지 모르게 사라져 있곤 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면, 부모님께 연락드리지 못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세 아이의 엄마인 자신을 어린아이로 만드는, 친정 엄마와-
많이 어색해서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묵묵히 항상 딸을 걱정하는 아빠-
자신에게도 엄마와 아빠가 있다는 사실을 현주는 가끔 잊고 살았다.
“외할머니 빨리 보고 싶어~ 비행기 언제 내려?”
현주 옆에 앉아있던 시아가 외쳤다.
시우는 시아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금방 내릴 거야. 시아, 외할머니 만나서 뭐 하고 싶어?”
시아는 입가에 과자 가루를 묻힌 채,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사랑한다고 말해 줄 거야~ 외할머니는 내가 사랑하다고 할 때가 제일 좋대!”
“그래. 시윤이도 할 거지?”
시우가 시윤에게 묻자, 시윤은 당황했다.
“나, 나도? 나 이제 중학생 되는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시우의 눈빛을 본 시윤은 못 이긴 척 입을 내밀면서 대답했다.
“알았어…… 형 하면 나도 할게. 크크크~!”
“참 나. 어휴.”
시윤의 코를 손가락 끝으로 탁 때린 시우는 창밖을 봤다.
구름이 예뻤다.
비행기는 어느덧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외할머니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친가나 외가나 할머니들의 손주 사랑은 다를 게 없었다.
“어이구~ 내 새끼들!”
하얗게 머리가 샌 시우의 외할머니가 반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시우는 먼저 동생들을 앞세웠다.
“할머니~!”
시아가 다다다 뛰어가 외할머니 품에 폭 안겼다.
시윤은 조금 어색한지 쭈뼛거렸으나 시아에 이어 할머니에게 자신의 몸을 맡겼다.
다음은 시우 차례였다.
“할머니, 저 왔어요.”
“우리 시우 많이 컸다! 이리 와! 우리 애기!”
시우는 할머니를 마주 안은 다음, 힘자랑을 하듯 할머니를 번쩍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할머니는 놀란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깔깔 웃음을 터트렸다.
도진과 현주도 짐을 끌고 다가왔다.
“장모님~ 사위 왔습니다! 그런데…… 장인어른께서는 같이 안 오셨어요?”
“응? 그 양반은…… 휴우, 말도 마라.”
“네?”
외할머니의 한숨에 시우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