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176)
176. 시윤의 부탁
[형이 뭐래? 허락받았어?]시윤은 휴대폰에 대고 한숨을 쉬었다.
“아니. 어떡하지.”
[왜? 형이 네 말 되게 잘 들어준다며~]“평소에는 그런데, 무서울 때는 또 되게 무서워. 우리 형 화나면 눈빛 장난 아냐. 내가 격투기 선수 되고 싶다고 말하자마자 그 눈빛 나왔어.”
[그럼 체육관 등록은 어떻게 해? 관장님이 셋이 같이 와야 할인해 준다고 하셨잖아.]“……나도 몰라.”
[엄마한테 물어봐~]“안 돼. 형한테 먼저 허락을 받아야 돼. 안 그럼 나중에 큰일 나.”
[그, 그래? 후음…….]시윤과 친구는 한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시윤은 다짜고짜 격투기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을 뱉은 게 잘못이었다고 반성했다.
우선 운동 삼아 해 본다고 하고, 나중에 실력이 되면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이미 벌어진 일이라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시무룩한 얼굴로 방바닥을 굴러다니던 시윤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가방을 뒤졌다.
요즘은 교과서도 전자책으로 바뀌는 추세라, 가방 안에는 책 대신 몇 가지 준비물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뭐 해?]“잠깐만.”
시윤은 가방 속에서 전단지 한 장을 꺼냈다.
친구들이랑 놀러 갔다가 받은 종합 격투기 체육관 전단지였다.
체육관 전화번호와 관장님의 톡 아이디도 적혀 있었다.
“지금 우리 형 영화 보러 갔거든? 이따 저녁 때 오면 내가 체육관 다녀도 되냐고 다시 물어볼게.”
[형이 또 안 된다고 하면?]“형한테 일단 체육관 같이 가서 구경이라도 한번 하면 안 되냐고 졸라 볼래. 막상 가서 보면 형도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멋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어.”
[좋은 생각이야. 원래 태블릿 같은 거 살 때도 내가 사 달라고 조르면 우리 부모님은 진짜 완전 무시하시거든? 근데 일단 매장 가서 직원 아저씨가 설득하면서~ 할인 기간 며칠 안 남았다고 하면…… 나한테 ‘앞으로 말 잘 들을 거지?’ 물어보고 사 주셔.]생활의 지혜가 묻어나는 친구의 조언이었다.
[그리고 진짜~ 정 안 되면 너 용돈 모은 걸로 먼저 등록부터 해~ 우리 아빠가 그러는데 허락보다는 용서가 쉽대~ 우리 아빠가 엄마 몰래 VR 게임기 사 왔는데…….]친구의 엄마가 처음에는 엄청 화내시다가 현재는 아빠와 함께 베이비 오브 레전드를 즐기고 계시다는 얘기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시윤은 형한테 체육관 같이 가자고 어떻게 조를지 내내 고민을 했다.
“……!”
시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내가 밤에 다시 전화할게.”
[어, 왜? 같이 게임 안 해?]“안 돼. 나 바빠. 할 일 있어.”
전화를 끊은 시윤은 당장 주방으로 달려갔다.
가족들이 점심을 먹은 흔적들이 쌓여 있었다.
원래는 밤마다 형이 설거지를 하곤 했는데…….
두 팔을 걷어붙인 시윤은 주황색 고무장갑을 손에 장착하고, 싱크대 앞에 섰다.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설거지 하는 형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엄마 도와줄래~! 나도 설거지 할래~!” 외치면 형이 자신을 돌아보곤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 시윤아. 지금은 어리니까 나중에 중학생 되면 해~”
이제 자신도 중학생이 됐으니, 가사를 도울 나이가 된 게 아닐까?
보고 배운 게 무섭다고…….
시우가 중학생 때부터 집안일하는 걸 보고 자랐기에 시윤도 그 길을 따라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펭귄이 그려진 앞치마를 두르려고 팔을 뒤로 꺾은 채 낑낑대고 있자, 언제 나왔는지 시아가 그런 시윤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작은 오빠~ 모해?”
“응! 엄마랑 시우 형 도와주려고! 앞으로 설거지는 작은 오빠가 할 거야~”
“우와~ 나도 하고 싶어…….”
“음…… 시아는 아직 어리니까~ 너도 중학생 되면 해! 알았지?”
옛날에 형이 자신에게 한 말을, 동생에게 하게 되자 시윤은 괜히 다 큰 것 같아 어깨가 으쓱했다.
“나는 그럼~ 식탁 닦을 거야!”
시아는 까치발을 하고 싱크대에 걸려 있는 행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미 엄마가 닦아 놓은 깨끗한 식탁을 혼자 열심히 다시 닦았다.
시윤은 동생의 귀여운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설거지를 개시했다.
‘우음, 수세미가…….’
서로 색이 다른 몇 개의 수세미가 걸려 있었다.
“…….”
기분에 따라 그날, 그날 바꿔 쓰는 건가?
“그렇다면! 멋진 블랙~!”
시윤은 싱크대 청소용 수세미를 들고, 거기에 세제를 묻힌 후 먼저 자기 컵을 꼼꼼히 쓱싹쓱싹 닦기 시작했다.
* * *
시우는 집에서 시윤이 청소용 수세미로 설거지를 하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즐겁게 영화를 관람하는 중이었다.
정태 엄마에게 정태의 연기를 더 생생하게 보여 주고 싶어, 일부러 굉장한 특수 효과들이 쏟아지는 비싼 상영관으로 들어왔는데 지금까지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정태 엄마는 완전히 영화에 빠져, 입을 크게 벌리고 주연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 하나하나에 눈과 귀를 한껏 집중하고 있었다.
시우는 정태 엄마의 옆얼굴을 흘끗 봤다.
‘이 아줌마가 내 다리 꼬집은 게 벌써…… 17년 전인가? 보호 마법 때문에 아줌마 머리털만 한 움큼 뽑히고 끝나긴 했지만…….’
두 살 나이에 만난 인생 첫 빌런.
자기 아이 잘되게 하려고 남의 아이에게 은근슬쩍 해코지하려 한 이기적인 향수 아줌마-
그러나, 이 아줌마를 알고 지낸 오랜 세월만큼이나 정태와 어울려 논 세월도 17년이었다.
정태는 자신에게 좋은 친구였고, 그 정태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가 바로 이 아줌마-
그리고 정태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도 아마 이 아줌마.
‘요즘은 성격도 많이 죽었고…….’
정확히는 집안이 기운 뒤부터니까, 나중에 일이 잘되면 성격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도 있다.
드라마 바다아이에서 자신이 골라준 시우의 인어왕자 패션이 센세이션을 일으키자, 무리하게 의류 사업을 런칭했다가 몇 년 뒤 대차게 말아먹어 버린 정태 엄마였다.
‘그때부터는 기세가 확실히 한풀 꺾였지.’
그 후, 우리 아들 스타 만들기 프로젝트도 자연스럽게 중단이 되었다.
생활에 여유가 없다 보니, 아들이 스타가 될 때까지 물심양면 뒷바라지를 하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밖에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정태는 부모님이 바빠 쓸쓸하게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신경이 쓰인 현주는 종종 시우와 시윤이를 데리고 정태와 같이 동물원도 가고 바닷가도 가고 하며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정태의 훌륭한 죽는 연기는 그 시절 시윤이와 놀아 주면서 완성된 것이었다.
나이가 많이 든 정태 엄마의 옆얼굴에 잠시 시선을 주던 시우는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정태가 등장할 시간이었다.
시우는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상영관에 들어오기 전 정태에게 말한 것처럼 정태는 분명히 잘해 냈다.
다만, 정태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예측이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옛날처럼 좋아해 주면 좋을 텐데.’
상영관은 극도로 어두웠다.
빛이라곤 스크린 속에서 진영이 휴대폰으로 켠 불빛뿐이었다.
진영이 휴대폰을 움직일 때마다 정밀하게 계산된 각도에 따라 객석도 잠시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천장 스크린이나 측면 스크린에서는 붕괴된 쇼핑몰 내부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관객들은 배우들과 함께 그곳에 갇힌 기분이었다.
시우와 수진의 뛰어난 연기력까지 더해져, 관객들은 배우들이 숨을 가쁘게 쉴 때마다 똑같이 숨막히는 답답함을 느꼈다.
신식 쇼핑몰의 단단한 기둥들이 만들어 낸 출구를 가까스로 찾은 진영은 엄마를 부축하고 그곳으로 빠르게 향했다.
먼지가 자욱한 터라 한쪽 팔로는 입과 코를 막고,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진영의 귀에 누군가의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
진영의 발이 멈췄다.
관객들은 좌우의 스크린을 둘러보면서 진영과 마찬가지로 신음 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애썼다.
정태 엄마 역시 그랬다.
그녀는 진영과 엄마의 이야기를, 마치 정태와 자신의 이야기처럼 몰입해 보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쇼핑몰에서 장을 보다 저렇게 위험을 맞았을 때, 우리 정태도 날 구하러 저렇게 달려와 줄까?
내가 힘들어할 때, 부축하고 필사적으로 출구를 찾아 헤맬까?
정태는…….
“…….”
‘안 왔으면 좋겠네…… 나만 죽으면 되는데 괜히 둘 다 위험해질 필요 없잖아…….’
파지직- 파지직-
위태롭게 불꽃이 튀고 있는 형광등 아래, 건물 잔해에 깔린 누군가의 몸이 보였다.
진영과 진영 엄마 은서의 대화가 영화관 스피커를 통해 관객들의 귀를 파고들었다.
“엄마…… 방금 그 소리…….”
“무슨 소리……?”
많이 지친 엄마 은서의 얼굴이 드러났다.
시우는 휴대폰을 든 손으로 쓰러진 남자 쪽을 가리켰다.
“저쪽에서 들렸는데…… 저, 저 사람 살아 있는 거 아닐까?”
스크린 가득 쓰러진 남자의 손이 비쳤다.
꿈틀-
불빛으로 그곳을 비추고 있던 진영이 외쳤다.
“살아 있어!”
진영이 달려갔다.
“괜찮으세요!?”
반가운 목소리로 진영이 외치는 그 순간.
카메라의 시점이 바뀌면서…….
상영관 대형 스크린에, 정태의 얼굴이 등장했다.
“으으…….”
정태 엄마는 깜짝 놀랐다.
‘와, 우리 정태랑 되게 닮았다?’
두근두근두근두근-!
정태의 심장이 폭주하고 있었다.
시우는 옆자리에서 긴장 풀라고 정태의 팔을 주먹으로 툭툭 치는 시늉을 하며, 정태에게 마나를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청심환보다 효과가 훨씬 빠른 시우의 기운이 정태의 뛰는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차마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로봇처럼 스크린만 보고 있는 정태 대신 시우가 정태 엄마의 표정을 슥 살폈다.
마침 시우에게 할 말이 있는지 고개를 돌린 정태 엄마가, 시우와 눈이 마주치자 조그맣게 속삭였다.
“우리 정태랑 너무 닮지 않았니?”
……시우는 입을 가리고 조용히 정태 엄마에게 속삭였다.
“정태 형이에요.”
“……?”
멀뚱히 시우의 얼굴을 보던 정태 엄마의 얼굴이 스크린으로 휙 돌아갔다.
그랬다.
정태였다.
수많은 관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정태의 얼굴이 스크린을 꽉 채우고 있었다.
수도 없이 들어온 익숙한 아들 목소리가 상영관에 울려 퍼졌다.
“사…… 살려…….”
스크린 속 정태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핏기 없는 입술로 간절하게 구조를 요청하는 정태의 눈이, 관객들에게 죽음의 공포를 전달했다.
최민철 감독과 시우도 인정한 훌륭한 눈빛 연기였다.
정태 엄마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 * *
“시윤아~ 너 무슨 수세미로 설거지했어?”
“응? 나? 까만 거!”
“…….”
“엄마~ 내가 설거지해 놓은 거 봤어? 잘했지? 엄청 깨끗하지?”
현주는 시윤을 탓하지 않았다.
어떤 수세미를 써야 하는지 미리 알려 주지 않은 자신의 탓이다.
설거지하는 소리를 듣고 기특하다고 칭찬만 할 게 아니라 한번 들여다봤어야 하는 건데, 시아의 숙제를 도와주느라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말았다.
‘어떡하지. 지금 다시 설거지하면 시윤이 상처받을 텐데. 이따 밤에 시윤이 자면 다시 할까.’
“잘했어~ 시윤아. 고마워. 우리 아들들 덕분에 엄마가 일이 많이 줄었어.”
“헤헤헤! 엄마아~ 나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 주면 안 돼?”
“무슨 부탁?”
“혹시 언제가 될지 몰라도~ 뭐 오늘 밤일 수도 있고…… 형이 나 혼내려고 하면 꼭 말려 줘~”
“말려 달라고? 흠, 수상하네.”
“그냥 조금만 도와주세요~ 네? 엄마아~”
옆에 와서 애교를 부리는 둘째 아들을 보면서 현주는 미소를 지었다.
왠지 시윤이는 커서도 이렇게 애교가 많을 것만 같았다.
“으휴, 알았어. 그때 상황 보고, 도와줄 만하다 싶으면 도와줄게.”
시윤은 활짝 핀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어. 꼭이다~ 꼭. 고마워!”
용기를 얻어 방으로 달려간 시윤은 시계를 보며 형이 돌아올 시간만 기다리다, 또 다른 집안일이 없는지 열심히 찾아 헤맸다.
형한테 아직 허락은 받지 못했지만, 형이랑 체육관에 놀러 갈 생각으로 이미 마음이 꽃밭에 가 있는 시윤이었다.
* * *
같은 시각-
“살려…… 줘…… 안 돼…….”
눈물을 흘리는 정태의 모습이 애처로웠다.
죽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태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입밖으로 내기 위해 노력했다.
가지 마…… 제발…….
건물 벽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태의 씬이 끝났다.
정태 엄마는 멍한 얼굴로 스크린을 바라보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상영관을 빠져나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