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16)
216. 선비님
그날은 매우 화창했다.
미세먼지도 없었고, 햇빛도 쨍쨍하니 아주 끝내줬다.
내 기분만 더러울 뿐.
연예인 놈들 솔직히…… 아니, 진짜 솔직히 인성 개차반인 놈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로드 매니저로 2년 일하면서 참 못 볼 꼴 많이 봤다.
“야, 간식 이거…… 뭐야. 뭐냐고.”
“네? 형이 아침에 드시고 싶다고 하신 거, 제가 편의점 들러서 사다 놓은 건데요.”
“……그래. 그렇긴 한데. 내가 말한 거랑 맛이 다르잖아!”
나는 욱돌이가 던지듯이 건넨 간식을 받아 얼른 확인했다.
포도맛.
“마이~ 츄~ 는 당연히 복숭아맛이지! 어릴 때 이거 안 먹어 봤어? 상식이 없냐. 포도맛은 인위적인 맛 난다고!”
“…….”
후우-
아침도 못 먹고 가서 사 왔더니만, 이런 식빵 같은…….
“죄송해요, 형. 제가 착각했나 봐요. 포도맛 사 오지 말라는 걸 포도맛 사오라는 말로 잘못 알아들었네요! 운전하면서 들어 가지고…… 하하.”
올해까지만 일하고 사표 낸다.
……올해가 아직 많이 남은 게 문제지만.
분을 삭이며 돌아서는 그때, 멀리서 밝은 인사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촬영장에서 평소 들은 기억이 없는 맑고 활기찬 목소리.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오늘 특별 출연이 예정되어 있는 월드 스타 윤시우가 보였다.
아…… 큰일 났네.
위험하다.
원래도 우리 욱돌이 따위는 압살하는 외모를 가졌지만, 실물은 더 장난 아닌데?
오늘…… 같이 붙는 씬일 텐데, 우리 욱돌이 완전 비교되겠어.
아니나 다를까, 시우의 실물을 본 욱돌이는 표정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
“얼굴이, 얼굴이 좀 되네. 오늘 내가 컨디션이 좀 안 좋아서…… 부어 가지고…… 아~ 부담되네. 내가 컨디션만 좋았으면 절대 안 밀리는데 말이야.”
“후웃.”
이크, 실수.
나는 입 밖으로 슬쩍 새 나오고 만 웃음소리를 얼른 추슬렀다.
“……뭐야, 방금 웃었냐?”
욱돌이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욕하는 소리에만 귀가 매우 밝다는 것이다.
이럴 때 어설픈 부정은 큰 화를 부른다.
“아, 네. 저기 윤시우 계속 인사하고 다니는 거 보세요. 그게 너무 웃기기도 하고 그래서…… 애가 사극 출연이 어릴 때 이후로 처음이라던데, 많이 긴장한 거 같죠?”
자연스럽게 화제 전환.
욱돌이는 스태프들 한 명, 한 명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있는 윤시우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뭘 저렇게까지 열심히 인사를 하지? 나도 슬쩍 가서 앞에 서 있어 볼까? 나한테도 인사하라고.”
“……윤시우가 선밴데요.”
“야 씨, 그래도 나이는 내가 위잖아~ 이럴 때는 기선 제압이 중요해. 연예계는 한 번 호구 잡히면 끝이야. 너 선배? 오케이. 나 형. 이런 느낌으로 가자.”
욱돌이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엉덩이를 씰룩이며 꼴 보기 싫게 걷는 욱돌이의 뒷모습을 쫓아가다 보니, 어느샌가 윤시우의 인사 반경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냥 먼저 인사하면 될 걸.
그놈의 배우들끼리의 자존심 싸움.
지겹다.
내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욱돌이의 뒤에 자리를 잡고 설 때쯤, 윤시우가 우리를 발견했다.
정말 먼저 인사할까?
욱돌이가 후배인 거 윤시우도 뻔히 알 텐데?
아니, 웬만한 젊은 연예인 중에 윤시우보다 선배가 있을 리가 없잖아.
아기 때부터 쭉 공백 없이 엄청난 커리어를 만들어 온 월클 배우님이신데.
윤시우와 욱돌이가 눈이 마주친 순간, 만약 윤시우가 먼저 인사하지 않고 욱돌이를 빤히 쳐다본다면?
그럼…… 욱돌이는 과연 먼저 인사를 할까?
난 그게 걱정이었다.
둘 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서서, 상대방이 인사하기만 기다릴까 봐.
뭐, 윤시우가 스태프들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있긴 하지만…….
후배 배우를 상대로는 또 얘기가 다르지.
자기가 월드 스탄데 자존심이 없겠어?
모르긴 몰라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둘의 시선이 정확하게 맞부딪쳤다.
……나는 밑으로 내린 두 손을 꽉 쥐었다.
긴장감이 감도는 그 순간, 허무하게도 윤시우가 활짝 웃는 얼굴로 스스럼없이 꾸벅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나는 봤다.
욱돌이의 입가에 은은하게 떠오른 그 승리의 미소를.
뭐냐, 너 월드 스타잖아.
왜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90도로 인사를 하는 거야?
그 정도로 공손하지 않아도 되잖아?!
욱돌이는 무척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건방지게 손을 내밀었다.
“어~ 그래. 오느라 고생했어. 만나서 너무 반갑다.”
……내가 다 부끄럽다.
한참 선배인 윤시우가 90도 인사를 했으면 최소한 너도 머리는 숙여라.
어디서 태연하게 악수를…….
“네. 감사합니다. 오늘 잘 부탁드려요~”
“그래그래. 오늘 잘해 보자. 혹시 도움 필요하면 형한테 언제든지 말하고.”
욱돌이와 악수를 한 윤시우는 다른 곳으로 가려다, 욱돌이 뒤쪽에 서 있는 날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햇살처럼 눈부신 미소와 함께 내게도 꾸벅 인사를 했다.
…….
뭐지, 얘는.
뭔가 다르다.
‘외모도 인성도…… 욱돌이랑은 클라쓰가 달라!’
나는 왠지 오늘의 더러웠던 기분들이 싹 씻겨 나가는 감정을 느끼며, 상쾌하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윤시우는 누가 먼저 인사를 하든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상대의 경력이나 나이 등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친절하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윤시우의 매니저와도 인사를 한 나는, 혼자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는 나의 담당 배우를 보며 어쩐지 울고 싶어졌다.
욱돌이가 조용히 내게 말했다.
“야, 애가 똘망똘망하니 예의도 바르고 귀엽네. 너 아까 그 포도맛 마이츄 쟤 갖다 주고 와. 형이 주는 선물이라고 하고.”
내가 왜 이놈을 욱돌이라고 부르냐 하면 말이야.
욱하는 성질에 가끔 돌아이 같기도 하고 해서 그런 건데…….
그런 이유도 있지만, 왠지 욱돌이라고 하면 개 같잖아.
나중에 개는 소중하다에 출연 신청 넣어 볼까.
게스트로 나갔다가 문제견으로…….
“하하하. 저 일단 가서 복숭아맛 얼른 사 올게요.”
시우는 손에 들린 복숭아맛 마이츄 통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오랜만이네. 유치원 다닐 때 많이 먹었지. 지호는 포도맛 좋아했는데.’
얼굴을 들자 자신에게 손을 흔들며 멀어지고 있는 정욱의 매니저가 보였다.
“감사합니다~!”
시우는 큰소리로 인사를 하고, 촬영 준비를 했다.
몰래몰래 계속 자신에게 눈길을 주고 있는 감독과 작가에게도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인 시우는,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남색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갓을 머리 위에 쓴 시우가 걸어 나왔다.
어느새 주변이 조용해졌다.
시리게 빛나는 눈.
진지하게 꾹 다문 입술.
옷만 갈아입었을 뿐인데, 아까와는 사뭇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스태프들 사이로 여주인공인 고유빈이 입을 헤 벌리고 서 있었다.
유빈의 매니저가 한숨을 푹 쉬고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촬영 안 할 거야?”
“아…… 해야죠.”
여성 매니저는 조용히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침 떨어지겠다. 얘.”
유빈은 화들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훑은 다음, 민망한 듯이 말했다.
“아, 아니거든요?!”
정신을 차린 유빈은 옷매무새를 정비하고, 표정을 관리한 뒤 사뿐사뿐 걸어 시우 옆에 섰다.
감독이 외쳤다.
“아까 맞춰 볼 때 분위기 좋았거든~ 딱 그대로만 하면 좋겠어! 잘 살려봅시다!”
스태프들은 평소 예민하게 굴던 감독의 나긋나긋한 모습에 자신들도 긴장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었다.
윤시우를 바라보는 감독의 눈빛에서 무한 신뢰가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남주인공 정욱은 시우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느끼고, 남몰래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역시 맘에 안 들어…….’
조연출이 외쳤다.
“슛 들어갑니다~!”
일사불란하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카메라 롤! 레디! 액션!”
월영 역의 여주인공 유빈은 남주인공인 정욱과 같이 티격태격하며 저잣거리를 걷고 있었다.
“너는 꼭 그렇게 남장을 하고 사내놈들 사이에 섞여서 다녀야겠느냐?”
유빈이 대사를 받아쳤다.
“아니~ 이게 편하니까 이렇게 다니죠!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면서 어디 돌아다니겠습니까?”
정욱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여자아이가 말버릇이 그게 뭐냐.”
유빈은 콧방귀를 끼고, 자신의 갓을 툭툭 치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보쇼! 나 지금 남정네요!”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정욱을 두고, 유빈은 보란 듯이 칠렐레팔렐레 폴짝폴짝 뛰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정욱이 외쳤다.
“어어~ 거 참, 위험하게!”
유빈은 뒤를 돌아보고 철없게 손가락으로 눈밑을 내리면서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때.
조연출의 사인을 받은 단역 배우가 말을 타고 힘껏 저잣거리를 내달렸다.
두두두두!
엑스트라들이 홍해의 기적처럼 좌우로 쫙 갈라졌다.
그러나 뒤돌아 서 있던 유빈은 무슨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몸을 돌렸다가, 너무 놀라 그만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말이 너무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연기를 떠나 유빈은 진심으로 한순간 공포를 느꼈다.
‘눈 감고 있어도 되는 거겠지? 윤시우 선배님 믿어도 되는 거 맞죠? 꺄아악!’
평민 차림에 남장을 한 유빈은 진짜로 겁에 질려 몸을 잔뜩 움츠렸다.
안전한 상황이란 것을 머리로는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커다란 말이 달려오는 걸 봐 놓고 가만히 서 있기란 쉽지 않았다.
덜덜 다리가 후들거리려는 찰나, 누군가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부웅~
‘헉! 몸이 진짜 날았어! 뭐지?’
유빈은 시우의 손힘에 화들짝 놀랐다.
뒤로 훌쩍 날아간 유빈의 몸이 안전 매트 위로 떨어졌다.
조용-
최대한 패대기치듯이 해 달라고 하긴 했는데, 진짜 날려 버릴 줄이야.
원래 날아가는 장면은 나중에 따로 찍어 이어 붙일 생각이었다.
감독과 스태프들은 일제히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시우와 날아간 유빈을 번갈아 쳐다봤다.
항상 카리스마 넘치던 감독은 멍하니 시우를 보다 한 스태프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얼굴을 돌렸다.
놀란 사람은 감독과 스태프뿐만이 아니었다.
몸집만 보고 시우를 만만하게 봤던 정욱은 순간 찔끔했다.
‘어, 어우…….’
모두의 놀람을 뒤로하고 촬영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안전 매트가 빠르게 치워졌고, 바닥으로 내려와 누운 유빈은 정욱의 연기를 기다렸다.
“…….”
시우도 기다렸다.
“…….”
감독은 기다리지 않았다.
“조연출!!”
“네!”
“똑바로 안 해?!”
“죄송합니다!”
뒤돌아선 조연출은 서둘러 정욱의 매니저에게 뛰어갔다.
이것은 감독이 짜증이 났다는 것을 알리는 동시에, 똑바로 하라는 메시지를 정욱에게 던지는 조연출과 감독 간의 약속된 사인이었다.
조연출에게 한소리를 들은 정욱의 매니저는 정욱에게 뛰어갔다.
“……형,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하세요?”
당황해 얼굴이 시뻘게진 정욱은 빈정 상한 얼굴로 투덜대듯 말했다.
“아니, 윤시우가 고유빈 날리는 거 보다가…… 놓쳤어. 다시 하면 되지. 왜 난리야.”
감독은 그간 정욱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았는지, 정욱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다시!”
감독의 눈치에 정욱은 살짝 격앙된 채, 연기에 들어갔다.
“월영아~!”
말에 치일 뻔한 월영을 걱정하며 뛰쳐나가는 씬이었다.
그러나 월영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유빈은 볼썽사납게 뒤로 넘어진 채, 일어나려고 몸을 바둥거렸다.
자신을 거칠게 패대기친 사람이 누군지 얼굴이나 보려고 눈을 뜬 그때.
눈앞에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은 한 선비님의 모습이 보였다.
‘오…… 쥐져쓰……!’
유빈은 연기고 뭐고 정말로 심장이 쿵 내려앉고 말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