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17)
217. 형제의 외출
갓 아래로 차분하면서도 어딘가 싸늘한 분위기가 풍기는 선비님의 얼굴이 보였다.
촬영 전의 귀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유빈을 내려다보는 시우의 얼굴에서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유려한 얼굴 위로 먹빛의 검은 눈동자가 고고하게 빛났다.
넋이 나간 유빈의 귓가로 조금은 무심한, 낮은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괜찮으냐?”
퍼뜩 정신이 돌아온 유빈이 황급히 대사를 뱉었다.
옆에서 정욱이 자신을 부축하려 하고 있었지만, 시우에게 집중한 나머지 전혀 의식이 되지 않았다.
“네? 저, 저 말씀이십니까?”
시우는 가볍게 붉은 입술을 비틀어 피식 미소를 짓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방금 날아간 이가 너 말고 누가 있느냐.”
정신이 완전히 돌아온 유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퍽.
일어나던 유빈의 팔꿈치가 옆에서 그녀를 부축하려 알짱대던 정욱의 턱을 강타했다.
대본에 적힌 약속된 장면이었다.
정욱이 짠내를 풍기며 턱을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여성 시청자들의 보호 본능을 불러일으키고자 약간 불쌍한 강아지처럼,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러나 감독은 말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 표정이 아니야. 눈에서 오기가 느껴지잖아.’
방금 전에 NG를 내고 나서, 욱한 기운이 연기에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오, 저걸 프로라고 진짜…… 자기 관리도 안 되고…….’
자신들이 여주로 원했던 고유빈과 같은 기획사인데다, 비주얼도 딱히 나쁘지 않고.
게다가 여주 중심의 사극이었기에 이름값 있는 남주는 구하기가 힘들어 현실적으로 타협을 하긴 했지만…….
연기력 논란 기사를 보고 스트레스를 먹는 걸로 푸는지…….
‘후우- 일단 이대로 계속 가고 정욱 표정은 끝나고 다시 따야겠어.’
감독은 윤시우와 고유빈에게 집중했다.
윤시우는 특별 출연임에도 불구하고 역할에 완벽히 몰입한 게 보였다.
기품이 흘러넘쳤다.
일어난 유빈은 재차 시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딘가 낯이 익다는 듯이-
그러나 이내 의문을 털어 버리고, 그녀는 씩씩하게 외쳤다.
“일단 구해 준 건 감사합니다만…… 사람을 그렇게 팽개치는 법이 어딨습니까? 떨어질 때 팔이 아주 부러질 뻔…….”
선비님의 외모에 놀라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일부러 더 볼멘소리를 내뱉는 장면이었다.
투덜거리는 유빈의 얼굴을 조용히 응시하면서 시우는 대본에 적힌 지문을 떠올렸다.
선 – (월영의 말을 끊으며 앞으로 다가선다. 차가운 표정 아래 드러날 듯 말 듯 은은하게 피어오르는 한 줄기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아팠느냐?
‘작가님이 나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게 많으신가 보네. 어디 함 해볼까~’
시우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주춤.
월영 역의 유빈은 시우가 다가온 만큼 자기도 모르게 뒤로 반보 물러났다.
시우의 갑작스러운 접근에 놀라 말이 멎은 유빈에게, 시우는 몇 걸음 더 다가간 뒤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아팠느냐?”
시우의 표정은 여전히 냉랭했으나, 살짝 느낌이 달랐다.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 다양한 감정을 싣는 건, 딥 러닝 때 수도 없이 했으니까.’
유빈은 자신의 눈앞에서 미묘하게 변화하는 시우의 눈빛을 보고,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설레는 걸 주체할 수가 없었다.
언뜻 차가워 보이는 표정 위로 자신을 걱정하는 봄바람 같은 마음이 느껴졌다.
감독 옆에 앉아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던 작가는 자신이 상상한 것보다 몇 배는 더 예쁜 그림이 나오고 있는 것을 보고, 무의식중에 입을 귀까지 끌어올렸다.
‘역시……!’
유빈이 갑자기 반보 뒤로 물러났을 때, 순발력을 발휘해 좀 더 다가간 판단도 너무 좋았다.
그 덕에 선이라는 캐릭터가 더 강렬하게 월영의 뇌리에 새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시청자들의 뇌리에도 그럴 테고.
훅 다가오는 시우의 모습에 실제로 얼굴을 슬쩍 붉힌 유빈이 짐짓 더 큰소리로 말했다.
“당, 당연히 아프죠! 사람이 날아갔는데 아프지 않을 도리가 있습니까? 물론…… 말이랑 부딪치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만…….”
말과는 다르게 멀쩡해 보이는 월영.
남장을 한 그녀를 위아래로 슥 훑어본 선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다시 원래대로 눈빛을 차갑게 되돌리며 입을 연다.
“나도 아프다.”
일동 조용-
작가가 급히 만든 선의 기존 캐릭터는 무미건조하고 고지식한 부분이 있었다.
시간이 없어 스토리 라인은 짰지만, 캐릭터에 디테일한 색은 입히지 못했다.
그래서 촬영 전에 따로 통화를 하면서 시우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 캐릭터를 서서히 완성시켰다.
덕분에 캐릭터성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시우 특유의 장난기를 가미시켜 좀 더 통통 튀는 입체적인 대사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열심히 떠들던 월영도 선비님의 예상치 못한 말에 입을 잠시 다물었다.
아프다고?
어디가?
“……네?”
한 템포 늦게 그녀가 반문하자, 선은 조금 못돼 보이는 미소를 입꼬리 끝에 매달고 말했다.
“팔이 많이 아파.”
“…….”
시우는 천연덕스럽게 대사를 이어 갔다.
다른 작품에 특별 출연한 것이 아니라, 마치 본래 자신의 작품이었던 것처럼 씬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위급해 보여 서둘러 구하려다 보니 그만, 사람을 들어 던지고 말았구나. 팔이 아주…… 휴~ 얼마간은 붓도 들기 힘들겠어. 그런데 이거 원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안 하니…….”
말을 잇던 선이 눈앞에 있는 조그만 사내 녀석을 바라보자,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우물쭈물거리다 얼굴을 대각선 방향으로 살짝 떨어뜨린 채 조그맣게 말했다.
“……고, 고맙소.”
그 얼굴이 꼭 여자아이 같았다.
선은 자신의 동생이 떠올라 그만 살며시 미소를 짓고 말았다.
아까 땅을 나뒹굴며 형편없이 비뚤어진 월영의 갓을 선이 살짝 잡아 바로 해 주려는 그때.
옆에 있던 범우 역의 정욱이 끼어들었다.
“어딜 손대는 것이냐!”
탁!
범우의 손이 선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범우는 신분을 숨긴 대갓집 자제였기에 선의 귀한 행색에도 개의치 않고 손을 썼다.
선의 손과 함께 선이 쥐고 있던 월영의 갓이 밑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바닥을 뒹굴 때 갓 안에서 반쯤 풀려 버린 월영의 흑단 같은 긴 머리가…….
밑으로 사르륵 흘러내렸다.
당황한 월영의 시선과, 놀란 선의 눈빛이 교차했다.
그 순간, 선의 망막에 오랜 시간 찾아 헤맨 작고 귀여운 어린 소녀의 얼굴 하나가 맺혔다.
“……혜아?”
오랜만에 듣는 어린 시절 이름에 월영의 눈이 점점 커졌다.
3초-
5초-
눈을 마주한 채 10초가 지나고.
“컷! 오케이!”
감독의 만족스러운 오케이 사인이 나왔다.
감독이 작가를 돌아보며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끝~! 그리고 다음 주를 기다려 주세요. 하는 거죠.”
쿵짝이 맞은 감독과 작가는 간만에 신이 나는지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모니터링을 하던 유빈은 영상 속 자신과 시우의 모습을 보며, 혼자 조용히 생각했다.
정욱과 연기할 때는 뭔가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할 때가 많았고, 호흡도 엇박이 날 때가 종종 있었는데 시우와는 단번에 멋지게 끝냈다.
‘……아, 남자 주인공이 윤시우 선배님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빈의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본 시우는 조금 의아해하다 유빈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누나, 잘 이끌어 주셔서 고마워요…… 남은 씬도 잘 부탁드릴게요~”
“네! 선배님! 헤헤!”
화기애애한 두 사람의 뒤편에서 묵묵히 모니터링을 하던 정욱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젠장……!’
영상 속 자기 얼굴이 시우에 비해 너무 컸다.
* * *
[윤시우, 월영의 첫사랑 역으로 특별 출연!> [얼마 전 이미 촬영 마쳤다! 시청자들 기대 폭발!> [윤시우X고유빈X정욱, 3각 관계로 갈등 고조> [윤시우 특별 출연으로 월영과 범우의 미지근한 관계 급진전?>– 아니야. 미지근하게 놔둬. 제발. 드라마 보면서 안 이어지길 바라는 커플은 너희가 처음이니까. 월영이는 그냥 시우랑 이어 주세요. 작가님~~~ ㅠㅠㅠㅠㅠ
– 윤시우 투입으로 월영이랑 범우가 가까워진다고? 상식적으로 윤시우 놔두고 정욱한테 가는 여자가 있다고?
– 한 회만 출연하고 안 나오나요? ㅠㅠ 저흰 항상 기다릴 수 있으니까 그냥 범우 서브로 돌리고 시우 스케줄 될 때 잠깐씩 나와서 메인 남주 해 주면 안 되나여 흑흑흑 ㅠㅠㅠㅠ
– 윤시우 메인 남주 가자!!! 안 되면…… 월영이는 그냥 독신 가자!!! 왜 드라마에서 꼭 남주랑 이어져야 해!!! 안 이어져도 월영이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되잖아!!!
– 남주 내다 버리고 여주 혼자 잘 먹고 잘사는 엔딩 완전 참신한데? ㅋㅋㅋㅋㅋㅋ
“형, 나 준비 다 했어.”
현관 앞에서 기사를 읽던 시우는 시윤의 목소리에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옷을 갖춰 입고 나온 시윤이 시우에게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기사 좀 봤어. 월영 기사.”
“형 나온다니까 내 친구들도 엄청 좋아하더라. 애들 다 보거든.”
“그래. 열심히 하고 왔지. 촬영도 즐거웠고.”
시우는 촬영 당시의 일들을 떠올리다, 이내 시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가 볼까?”
“응.”
시우는 아직 기운을 차리지 못한 동생의 머리를 한 손으로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시윤이 짜증을 냈다.
“아~ 형!”
“……너 머리에 뭘 이렇게 치덕치덕 발랐냐?”
시윤의 머리를 만진 손이 끈적끈적했다.
‘한창 멋 부릴 나이로군.’
시윤은 울상을 지은 채 얼른 방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
끈적거리는 손바닥을 쥐었다 폈다 하던 시우는, 마법으로 손을 깨끗하게 만들려다 문득 뭔가에 홀린 듯 신발장 거울을 향해 오른 손바닥을 쭉 뻗었다.
파앗-
끈적거리는 것들이 거미줄처럼 시우의 손에서 짧게 뻗어 나왔다.
“스파이더 보이~”
손을 비벼 왼손에도 끈적거림을 옮긴 시우는, 마법을 이용해 거미줄 같은 실을 나풀거리며 혼자 히어로 흉내를 냈다.
어느샌가 머리를 완벽하게 재세팅하고 나온 시윤이 신발장 앞에서 형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시우는 스파이더 보이 놀이를 하던 손을 거뒀다.
“……왜?”
“아니. 형도 그러고 노는구나 싶어서.”
시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시우를 지나쳐 현관으로 나갔다.
시우는 건방지게 형을 한심하게 쳐다보고 나가는 동생 녀석을 슬그머니 뒤쫓아 가, 다시 머리를 손으로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아, 쫌~! 뭐 하는 거야!”
“응~ 거미줄 충전.”
복합 쇼핑몰에 도착한 시우와 시윤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평일이라 꽤 한산했다.
“개교기념일인데 친구들이랑 놀고 싶었던 거 아냐?”
“친구랑은 매일 노는데 뭐.”
“그래. 형이랑 노는 게 사실은 제일 재밌지?”
“하~ 그건 아니고요. 내가 형이랑 놀아 주는 거지.”
티격태격 장난을 치며 위로 올라간 시우와 시윤은 아쿠아리움 앞에 섰다.
휴대폰을 찍고 안으로 들어가자, 또 에스컬레이터가 나왔다.
“바다 냄새 나네.”
시우가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시윤은 머리를 갸우뚱 움직였다.
“바다 냄새? 퀴퀴한 냄새만 나는데?”
“안쪽에서 나잖아~”
“킁킁. 그런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 형제의 눈앞에 거대한 아쿠아리움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윤이 아쿠아리움 안내 책자를 펼쳤다.
“보자. 형. 루가는 가장 마지막에 만날 수 있고. 애들 배치가 좀 바뀌었대. 사실 이전 배치 기억도 안 나는데.”
시윤은 아쿠아리움을 구경할 생각에 들떠, 표정이 꽤 밝아져 있었다.
둘은 안내 책자를 들여다보며 수조 사이를 걸었다.
그때, 시윤의 종아리 뒤쪽에 뭔가가 툭 하고 부딪혔다.
시우와 시윤이 동시에 밑을 내려다봤다.
멋진 보타이를 맨 펭귄 한 마리가 형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
– …….
“비키라고?”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