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55)
255. 티라노시아루스
어른들의 대결도 그렇지만, 아이들의 대결에서도 심리전이란 무척 중요한 부분이다.
남자아이는 자신이 별 생각 없이 뱉은 한마디에 얼굴이 빨개진 시아가 너무 귀여…….
아니, 귀여운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도리도리.
남자아이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살아온 긴 시간 동안 본, 가장 예쁜 아이 시아에게서 눈을 떼고 바둑판에 집중했다.
결승전이다.
우선 서울 지역 어린이들을 제압하고, 전국으로 나가 초등부 최강이 된 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윤시우 사범님 같은 멋진 프로 기사가 될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남자아이는 바둑돌을 하나씩 바둑판 위에 내려놓았다.
한편, 아홉 살 시아는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거짓말쟁이 아닌데.’
뾰로통하게 나온 시아의 입술이 들어갈 줄을 몰랐다.
엄마에게 거짓말은 정말 나쁜 거라고 배운 시아는 거짓말쟁이라고 불린 게 너무 충격적이라 바둑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거짓말한 건 맞으니까…….’
억울하긴 한데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래서 더 슬프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받은 시아가 겨우 정신을 차린 것은, 바둑이 중반으로 접어드는 시점이었다.
남자아이는 안경 너머로 시아를 힐끗 본 뒤, 테이블 밑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꼬물거렸다.
현재까지 형세는 수월하다.
눈앞의 귀여운 여자아이는 바둑에 집중을 못하고, 자꾸만 자기 가족들이 있는 방향을 쳐다보곤 했다.
‘이대로 가면 내가 우승이야. 하지만…… 더 크게 이기고 싶어!’
승리를 직감하자 욕심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지금까지의 실력을 봤을 때 상대 여자아이는 분명 자신보다 한 수 아래다.
그렇다면, 더 압도적으로 이기고 싶다.
남자아이의 시선이 바둑판 좌측에 있는 시아의 대마로 향했다.
저 대마…….
‘꿀꺽.’
잡고 싶다.
남자아이는 시아의 대마를 잡기 위해 바둑판 위에 돌을 놓았다.
상대가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목표인 왼쪽의 대마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인 오른쪽을 먼저 건드렸다.
바둑도장에서 배운 성동격서(聲東擊西).
오른쪽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왼쪽을 치는 병법.
오른쪽에 위장 공격용 돌을 놓은 남자아이는 혹시 시아에게 속내를 들킬까, 괜히 비뚤어진 돌을 정리하는 척 손으로 바둑판 오른쪽 돌들을 만졌다.
시아는 손가락으로 바둑돌을 쥐다 남자아이의 손이 반복적으로 한쪽의 돌들을 정리하는 것을 보았다.
‘……우웅?’
큰 오빠가 말했다.
애들이 자꾸 특정 방향에 있는 돌을 만질 때는, 그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려 보라고.
흐름을 뺏긴 채로 정신없이 바둑을 두던 시아는 시우 오빠의 말대로 잠시 여유를 갖고, 바둑판 전체를 둘러보았다.
“…….”
엉망진창.
지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생각보다 차이가 더 크다.
‘왜, 왜 이렇게 됐지?’
결승전인데…….
아빠랑 엄마도 있고, 할아버지들이랑 할머니들도 응원하러 와 줬고, 오빠들도 다 보고 있는데…….
꼭 이기고 싶었는데…….
‘졌어.’
형세 판단을 마친 시아는 입을 꾹 다물고 다시 가족들 쪽을 봤다.
눈이 마주친 친가와 외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활짝 웃으면서 힘내라는 듯이 시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울먹울먹-
그러던 중, 엄마 얼굴을 본 시아의 눈동자에 순식간에 눈물이 맺혔다.
“훌쩍…… 훌쩍…….”
“어, 어이구. 저기 우리 애기 지금 우는 거 아냐?”
외할아버지 준식이 당황한 얼굴로 가족들에게 물었다.
현주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둑판 앞에서 혼자 손으로 눈물을 닦고 있는 시아를 지켜봤다.
아홉 살밖에 안 된 조그만 딸아이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물을 흘린다.
승패를 떠나 그런 시아의 모습에 현주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되지…….’
당황한 현주와 도진,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시우가 말했다.
“원래 바둑 두다 보면 애들 많이 울어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믿고 응원해 주세요.”
질 때의 괴로움과 자책감은 어른이나 아이나 다르지 않다.
어른도 똑같이 울면서 둔다.
단지 어른은 속으로만 운다.
못하겠다고 기권하고 가족들 품으로 도망쳐 올 법도 한데, 시아는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자리에 앉아 계속 바둑판을 보고 있었다.
‘그래. 시아야. 자포자기하지 말고 그렇게 방법을 찾는 거야.’
기권은 언제든지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 말고,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걸 찾아야지.’
“훌쩍…… 훌쩍…….”
시아는 손바닥으로 얼굴의 눈물을 비비듯이 닦아 냈다.
그리고 눈물이 묻은 손으로 바둑돌을 집어 들었다.
탁!
이대로 포기하면 너무 화가 날 거 같았다.
큰 오빠가 그랬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쫓아가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남자아이는 코끝이 빨개진 채 계속 울먹울먹하는 시아가 정말 귀엽다고 생각했으나, 지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유인책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상대 여자아이는 울면서도 자신의 의도를 눈치채고, 왼쪽의 대마를 보호했다.
‘아쉽다. 저거 잡고 싶은데…… 우음…… 많이 유리하니까 그래도 한번 잡으러 갈까? 내가 더 잘 두니까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고민고민.
아직까지도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는 시아를 본 남자아이는, 시아가 자신보다 하수라고 확신했기에 한순간 경솔하게 손을 움직였다.
‘에잇, 그냥 잡으러 가자!’
탁!
감각적인 행마로 남자아이는 시아의 대마를 압박해 갔다.
열 살 아이의 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화려하고 창의적인 한 수!
그러나, 치열한 계산 없이 기세나 기분에 따라 둔 수가 얼마나 큰 참사를 불러올지-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오는 또래의 상대를 만나본 적이 없는 남자아이는 아직 그 무서움을 모르고 있었다.
시아는 눈물에 젖은 얼굴로 상대의 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상하다.
방금 내가 대마를 보호하는 수를 뒀는데, 그래도 공격해 오네?
시아는 상대가 자신을 엄청 얕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 수는 거의…….
‘너 나보다 바둑 못 두잖아.’
라고 상대를 무시하는 한 수.
조용히 울먹울먹하며 머릿속으로 계산을 이어 가던 시아가 견적이 나왔는지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시우 오빠를 닮아 전투력에 큰 장점이 있는 시아에게, 자기도 모르게 판을 깔아 주고 만 남자아이는 지금 눈앞에서 티라노시아루스가 깨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웃는 얼굴로 바둑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으허어…… 끄윽! 끄윽! 우으으! 엄마아…… 흐어어!!”
남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시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엄마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두는 동안에는 시아가 울었는데, 끝나고 나서는 남자아이가 울고 있다.
화면을 통해 바둑을 지켜본 최택 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누가 시우 여동생 아니랄까 봐, 한 번 기회가 오면 상대를 아주 박살을 내 버리네요. 저희 학원 애들이 시아를 티라노시아루스라고 부르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죠.”
시아의 별명을 처음 들은 시윤은 별명 진짜 끝내준다는 생각을 하며 형에게 입을 열었다.
“형은 그럼 티라노시우루스야? 크크…… 아니, 말하고 보니까 은근 잘 어울리네. 나 공부 가르칠 때 보면…….”
“너 공부 가르칠 때만 그렇단다.”
“……응.”
괜히 놀리려다 본전도 못 찾은 시윤은 풀 죽은 얼굴로 물러났다.
시우는 시윤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말했다.
“열심히 할 거지?”
시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근데…….”
“근데 뭐?”
“아홉 살 밖에 안 된 시아도 왠지 자기 길 찾아서 가는 거 같은데…… 우리 남매 중에 나만 진로를 못 정하는 거 같아서…….”
“신경 쓰여?”
“아니~ 신경 쓰이는 건 아니고! 그냥 가끔…… 아주 가끔 내가 한심할 때가 있는 거지.”
타악.
시윤의 등을 때려 준 시우가 동생의 목을 꽉 끌어안고는 말했다.
“너 겨우 중3이야. 중3에 진로를 결정하는 게 오히려 일반적이지 않은 거지.”
“그런가?”
“그래. 비교하지 말고. 천천히 네 페이스대로 가면 돼. 인생 엄청 길어. 형이 항상 옆에서 응원해 줄게.”
“뭐, 뭐야. 오그라들게 왜 그래~”
시우의 팔을 뿌리치고 나가는 시윤의 얼굴에는 싫지 않은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지고 불안하던 것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얼굴이 붉어진 시윤은 괜히 두 팔을 휙휙 휘두르며 형에게 말했다.
“형, 시아랑 기념사진이나 찍으러 가자~!”
“그래.”
우승 트로피를 든 시아를 중심으로 가족들이 전부 모여 사진을 찍었다.
시우는 자신의 휴대폰에 찍힌 가족사진을 보며, 자신의 마지막 가족들이 평생 이렇게 웃으면서 지낼 수 있도록 꼭 지키겠다는 생각을 했다.
* * *
[고마워.]“…….”
[고마워.]“……?!”
시우는 눈을 떴다.
유럽으로 가는 비행기 안.
열 시간이 넘는 장거리 비행에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뜬 시우는 멍하니 비행기 천장을 올려다보며 방금 전에 들은 목소리를 떠올렸다.
‘……목소리?’
아니, 그냥 머리에 떠오른 메시진가?
흐릿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고맙다는 말.
뭐지, 혹시 잘 때 옆에서 누가 진짜로 말을 한 건가?
그렇다면…….
시우가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안대를 낀 채 입을 쩍 벌리고 자고 있는 케빈이 보였다.
‘음…… 이쪽은 아니야.“
오랜만에 꿈이라도 꾼 걸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시우는 옆에 놓아둔 차가운 음료를 찾아 한 모금 마셨다.
정신이 돌아온다.
시우는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내 케빈의 자는 얼굴을 촬영하고, 덮고 있던 이불을 정리했다.
‘고맙다라…… 뭔 꿈이었는지 기억이 안 나네. 뭔가 그리운 느낌이었던 거 같은데.’
전생에 관한 꿈이었나?
꿈을 꾸는 것도 드물지만, 꿈을 꿔놓고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는 이 흐릿함.
익숙지 않다.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이상하게 나쁘지 않다.
머리를 갸웃거리고 있는 시우의 귀로 이제 곧 파리에 도착한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시우는 생각을 멈추고 케빈의 몸을 흔들었다.
“형. 이제 일어나. 파리…….”
팍!!
케빈의 팔이 시우가 들고 있던 작은 페트병을 쳐 냈다.
음료가 든 페트병이 앞좌석으로 넘어갔다.
화들짝 놀란 시우는 얼음이 되었고, 잠결에 팔을 휘두른 케빈은 아무것도 모른 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앞좌석의 손님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안대를 벗은 케빈과 앞좌석 승객의 눈이 마주쳤다.
잠이 덜 깬 케빈은 상황 파악이 안 돼 잠시 어리둥절해하다 음료를 뒤집어쓴 그 승객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런, 뭐 쏟으셨어요? 괜찮으세요?”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
시우와 케빈은 정중하게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정말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남자는 업무차 서울로 출장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그는 음료 자국이 선명한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다 털털하게 웃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참 매너 있고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얀 바지 한가운데까지 노란 음료가 흘러내린 모습에 시우와 케빈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자꾸만 사람들이 그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케빈은 안절부절못하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혹시 지금 시간 괜찮으세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