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58)
258. 네로의 눈빛 연기
픽시 측에서 도진과 준식을 위해 제공해 준 호텔방.
도진은 창가에 서서 파리 풍경을 내려다보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준식은 침대에 걸터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장모님께서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
원래는 장인어른과 장모님을 모시고 올 예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정에게 감기 몸살이 찾아오는 바람에 준식만 동행을 하게 됐다.
준식은 아내가 아픈데 내가 무슨 파리 여행이냐며, 자신도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여정에게 떠밀리다시피 예정된 비행기에 올랐다.
도진은 장모님의 한 마디가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정말 내 건강이 걱정되면…… 좀 가…… 나도 좀 쉬자…….’
그 말이 충격이었는지 준식은 그 뒤부터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무거운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
장인어른의 눈치를 살피던 도진은 잠시 침묵하다 네로를 찾았다.
‘네로라도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휴우.’
“네로야~ 네로~ 아빠한테 와 볼까?”
네로는 PC 모니터 뒤에 드러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네로~ 네로~ 졸려? 이리 와 봐~ 아빠가 무릎에서 재워 줄게~ 네로야~”
애타게 네로를 부르던 도진과 준식의 눈이 마주쳤다.
도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네로가 한번 깊게 잠들면 업어 가도 몰라요.”
“흐음.”
준식은 가만히 손을 움직여 침대 밑에 놓아 둔 네로의 간식통을 집어 들었다.
토토토토-!
간식통을 흔들자 닭고기를 건조시켜 만든 작은 큐브들이 통 안에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벌떡!
우다다다!
– 냐아아! 앙~! 앙~!
잠들면 업어 가도 모른다던 네로가 전속력으로 달려와 준식의 앞에 앉았다.
준식은 간식 몇 개를 꺼내 손바닥에 올렸다.
간식을 먹는 네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준식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도진을 쳐다봤다.
“이렇게 불러야지. 시아가 가르쳐 줬어~”
“아…… 네에. 저도 알고는 있는데 간식통이 멀리 있어서. 하, 하하.”
‘네로, 이 녀석. 아빠보다 간식이 더 좋단 말이냐. 나 원.’
도진이 서운해하고 있을 때, 간식을 다 먹은 네로가 아빠 마음을 안다는 듯 사뿐사뿐 다가와 도진의 다리에 머리를 스윽스윽 두어 차례 비비고 지나갔다.
그러자 도진은 또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이리 와~ 요놈!”
네로를 안아든 도진은 네로의 엉덩이를 손으로 팡팡팡 두드려 주었다.
네로는 기분이 좋은지 도진의 품에 얼굴을 묻고 골골골 소리를 냈다.
네로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어졌다.
준식은 애교를 부리고 있는 네로를 보며 웃다가 침대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내가 있으면 쉬기가 힘들다는 말이 참 그래. 평생을 살았는데…… 돌아가면 저기 어디 요리 학원 같은데 가서 음식 좀 배워 보려고.”
“장인어른께서 요리를요?!”
“어~ 아무래도 내가 있으면 내 밥을 챙겨 줘야 하니까 힘들어서 그런 거 같아. 내가 뭘 해 주려고 해도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제대로 차리질 못하잖아. 결국 아내가 움직이게 되고.”
“음, 현주도 아플 때 밥하는 게 제일 서럽다고 하더라고요.”
번쩍!
준식의 눈이 커졌다.
“자네, 현주 아플 때 밥하라고 시키나?”
도진은 화들짝 놀라 마구 손사래를 쳤다.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저는 시우한테 요리를 좀 배워서 주말이나 아니면 현주 힘들 때 제가 하거든요. 여행 오기 전에도 제가 애들이랑 먹으라고 쇠고기뭇국 한 솥 끓여 놓고 왔습니다!”
“……훌륭하군.”
준식은 시우도 요리를 하고 도진도 요리를 한다니, 어쩐지 자신도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아내가 좋아하는 얼큰한 육개장부터 함 배워 볼까?
준식은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도진에게 물었다.
“도진아. 혹시…… 육개장 끓일 줄 아니?”
“물론이죠. 현주가 장모님 닮아서 육개장 킬러잖아요. 그래서 저도 좋아하게 된 음식이고.”
“다짜고짜 학원부터 가면 기본이 없어서 창피하니까. 서울 가면 좀 가르쳐 줄 수 있나 모르겠네…… 바쁘면 할 수 없고…….”
장인어른과 보다 가까워질 기회였다.
“네!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저도 시우한테 배웠는데 국물이 아주 끝내주거든요~”
“흠흠,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알겠습니다. 특히 장모님께는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어이구, 크흠. 왜 이렇게 더워? 난방이 너무 도는 거 아냐. 시우는 언제 온대?”
멋쩍은 듯이 말을 돌리는 귀여운 장인어른의 모습에 도진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무수한 명품 브랜드들을 제치고 픽시의 선택을 받은 프랑수아는 촬영 전날까지 옷을 매만지고 있었다.
픽시 남자 모델의 정체는 보안이 아주 철저했다.
픽시의 이미지에 집중해서 옷을 만들어 주길 바라는 이자벨 클레망의 의도 때문이었다.
프랑수아를 비롯한 몇몇 의류 관계자들도 의상 선정 당시에야 모델의 정체를 알게 된 상태였다.
‘시우 윤이었어.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옷이 좋은 모델을 만나게 됐군.’
기쁘다.
좋은 모델이라 기쁘고, 좋은 사람이라 뿌듯하다.
옷이 예의 없는 사람들에게 입혀져서 허투루 대해지는 게 프랑수아는 가장 고통스러웠다.
시우라면 이 옷에 깃든 디자이너의 노력을 알아줄 것이다.
“프랑수아. 너무 손대는 거 아냐? 모델이 시우라는 걸 알고부터 뭔가 더 잘하려고 너무 애쓰는 느낌이야.”
“애써야지. 시우는 내 친구기도 하거든.”
“그 하얀 바지 한가운데 노란 음료가 쏟아진 건, 진짜 절묘하더라. 의도적으로 해도 그렇게 자연스럽지 못할 거야. 예술이었어.”
“그 바지는 소장하려고.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 준 행운을 불러오는 옷이니까.”
“……소장한다고? 그래라. 그보다 뭘 또 고치려고 그래? 내일이 촬영이야. 픽시에게 선택받았을 때랑 옷의 느낌이 점점 달라지고 있어.”
동료의 직언에 프랑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아무래도 그런 거 같아. 시우에게 최고의 옷을 입히려는 욕심에 요 일주일 동안 너무 생각이 많았어. 다시 원래대로 돌리도록 하자.”
“…….”
원래대로?
처음 상태 그대로?
“아니, 픽시 측에서도 시우에게 맞게끔 약간 손봐 달라고 했고…… 그래서 이렇게 계속…… 잠깐만. 너 그럼 이 일주일 동안 도대체 뭐 하러 밤새 가며 디자인을 수정한 거야?”
프랑수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튜닝은 끝은 원래 순정이야.”
* * *
케빈은 물끄러미 자신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내려다보다 물었다.
“이게 뭐야?”
프랑수아는 웃으며 답했다.
“정장! 내 선물이야. 잘 입어 주면 좋겠어.”
케빈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래. 고마워. 잘 입을게.”
시우는 남몰래 기뻐하고 있는 케빈을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자신에게 선물을 하는 사람들은 참 많았지만, 매니저인 케빈에게 이렇게 멋진 선물을 건네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었다.
‘공항에서 봤을 때도 점잖고 좋은 사람 같았는데. 프랑수아 울리엘. 옷 만드는 실력도 좋고. 앞으로 정장은 울리엘 브랜드를 주로 입어야겠군.’
자신을 챙겨 주는 것보다 케빈을 챙겨 주는 게 더 고맙다.
시우는 파리에서의 정해진 일정이 끝나면 울리엘을 한번 방문하기로 했다.
‘준영이 형이랑 승현이 형 정장도 주문할까. 익스트림이랑…… 아, 지호도 캐주얼 정장밖에 없지?’
시우는 울리엘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고 거울을 봤다.
“와…….”
“세상에~”
“시우~ 당신을 위한 옷이네요!”
스태프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시우는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정장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잘 어울리네. 옷 정말 잘 만드는데?’
울리엘이 괜히 유명 명품 브랜드들을 다 떨어뜨리고 혼자 살아남은 게 아니다.
완벽한 한 벌의 정장을 만들기 위한 디자이너의 광적인 집착이 느껴졌다.
‘혼을 갈아 넣었네.’
시우가 촬영장으로 걸어 나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단번에 집중되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시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색 정장, 하지만 어두운 느낌보다는 그 검은색 자체가 빛이 나고 있는 듯한 신비한 느낌.
정장의 본래 톤보다 짙은 자수가 재킷의 한쪽 칼라와 라펠 부분, 몸통에 들어가 있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소매에는 픽시의 로고로 고풍스러운 은색 커프스를 만들어 디테일을 살렸다.
약간의 흔들림 공간을 갖춘 완벽한 핏이 시우의 몸을 멋지게 감싸 주고 있었다.
역시 옷을 갈아입고 나오던 모델 알리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시우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오, 오늘 잘 부탁해요.”
알리나는 얼굴을 조금 붉힌 채, 시우에게 인사를 하고 후다닥 그를 지나쳐 갔다.
촬영이 시작됐다.
고층 아파트.
한쪽의 통유리를 통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파리의 청색 하늘이 아름답게 보인다.
청색 하늘 밑으로는 색의 대비를 이루는 불그스름한 노을이 옅게 깔려 있다.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가득한 집으로 일을 마친 한 여성이 들어온다.
알리나는 표정 연기를 시작했다.
배우의 연기와 모델의 연기는 그 방향성이 다르다.
배우가 감정을 이어 가는 긴 호흡의 연기를 한다면, 모델은 사진이나 짧은 광고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드러내는 한순간의 연기를 해야 한다.
대사도 없다.
오직 표정과 몸의 동작.
그리고 모델로서의 포스랄까.
그것만으로 찰나의 시간 동안 자신에게 모든 사람들을 집중시키는 일.
알리나는 일에 지친 눈빛으로, 카메라 앞에서 공허함이란 분위기를 연출해 냈다.
나른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는 워킹-
그녀는 입고 있던 정장의 겉옷을 거칠게 벗어 소파로 집어던졌다.
워킹 끝에는 아일랜드 식탁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힘없이 식탁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바닥으로 주저앉는다.
힘든 하루다.
하늘과 노을과, 집안 인테리어의 모던한 색감들이 카메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그때.
집안 어두운 곳에서 느릿느릿-
마치 표범처럼 생긴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유려한 걸음걸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호박색 눈이 유난히 빛나고 있었다.
네로는 냥청미를 버리고, 그 빈자리에 야성미를 장착한 상태였다.
허리를 곡선으로 흔들며 다가오는 네로의 등 근육이 카메라 앞에서 실룩이고 있었다.
알리나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고양이 중에 제일 멋있어!’
어떻게 저렇게 잘생긴 고양이가 있지?
예술가가 혼을 담아 빚어낸 고양이 조각상이 있다면, 딱 저런 느낌 아닐까?
평소의 냥청네로를 모르는 알리나는 네로의 기품 있는 자태와 연기를 소화하는 영리함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네로는 시우와 연습한대로 천천히, 천천히 카메라가 자신을 마음껏 찍을 수 있게 배려하며 알리나의 앞으로 향했다.
알리나와 모든 스태프들은 네로의 눈빛 연기에 흥분했다.
네로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알리나의 무릎 위에 앞발을 올렸다.
호박색 눈이 신비롭게 알리나의 눈을 응시했고, 알리나도 그런 네로의 눈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한 여성과 한 고양이의 눈 맞춤-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감독이 외쳤다.
“컷! 오케이! 네로, 최고야!”
말을 알아듣는 네로는 컷 사인과 동시에 알리나로부터 고개를 쌩 돌리고, 시우를 찾아 엉덩이를 좌우로 마구 흔들며 달려갔다.
– 냐아아~!
“네, 네로……!”
알리나는 그런 네로의 뒷모습을 서운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시우의 차례가 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