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89)
289. 아기 산타
“기억?”
뜬금없는 질문에 지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얼굴을 들어 올렸다.
곰곰이 생각하던 지호가 시우에게 되물었다.
“무슨 기억에 관련된 시나리오 들어왔어?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주인공?”
“으응. 뭐 꼭 그렇다기 보다…… 내가 쓴 소설 네메시스 주인공 이야기야. 여러 번의 삶을 살잖아. 계속 환생하면서.”
“네메시스? 아~ 그러네. 그렇게 여러 번의 삶을 산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되게 힘들 거 같지 않아? 매번 이별하잖아. 나는 정말 상상만 해도 힘들 거 같아.”
지호의 말에 시우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긴 해.”
망각은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말도 있다.
기억을 잃지 않은 채 계속 되살아나고, 전생의 인연들을 끝없이 그리워하는 일은 사실 고문에 가까웠다.
시우는 환생이 혹시 저주가 아닐까 의심하며 괴로워하던 오래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있는 그대로 운명을 받아들이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기억이 뭐? 그 소설 주인공,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걸로 설정하려고?”
“음…… 그냥 어떨까 하고 생각해 봤어.”
지호는 오랜만에 보는 친구의 진지한 모습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기억이 완전하지 않다라…… 만약 내 기억이 그렇다면 꽤 충격을 받을 거 같긴 하다. 그런데…… 그 주인공처럼 여러 생을 살다 보면 당연히 완전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그런가?”
“응. 어떻게 그 모든 시간들을 다 기억해. 컴퓨터도 용량이란 게 있는데, 그 엄청난 시간들을 다 기억하려 들면 사람 머리가 폭발해 버리겠지. 아님 미쳐 버리거나. 조언을 해 주자면 난 주인공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은 게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봐. 그렇게 설정해!”
“설정? 아, 으응. 그렇지. 그럼 그렇게 설정해야겠다.”
시우와 지호는 말없이 서로를 보다 하하하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지호가 불현듯 말했다.
“사실 나도 가끔 이상한 거 느낄 때 있어.”
“이상한 거?”
“가끔 꿈을 꿀 때 엄청 실감 나는 꿈을 꾸는 거야. 진짜 현실인 것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전혀 분간이 안 가. 근데 꼭 그 꿈에 네가 나오더라고.”
움찔.
시우는 뭔가 찔리는 사람처럼 멋쩍게 웃었다.
지호의 말이 이어졌다.
“꿈속에서 내가 초등학생인데, 횡단보도에서 신호 무시한 버스에 치일 뻔한 거야. 근데 네가 갑자기 그 버스를 무슨…… 히어로도 아니고 손으로 빡 막고 날 구해 주거든. 그 꿈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꾼다?”
“…….”
실제로 있었던 일이니까.
“음, 그래. 참. 특이한. 꿈이네. 하하하.”
“누나한테 말했더니 어릴 때 네가 날 하도 많이 챙겨 줘서 무의식중에 그런 꿈을 꾸는 거래.”
“지연 누나 말도 맞네.”
“아니거든, 나도 의외로 너 많이 챙겼거든?”
“……이게 열심히 키워 놨더니만 갑자기 헛소리를 하네.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널 아주 들쳐 업고 키웠어. 초1 때 학교 갈 때마다 무섭다고 내 손 잡고 가겠다고 막 울고불고…….”
“야!!!”
군대도 다녀온 22살의 몸으로 지호랑 초등학생 때처럼 발차기를 주고받으면서 시우는 생각했다.
‘내가 지호의 기억을 자연스럽게 덮어 놓은 것처럼, 내 기억도 덮여 있는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인정하고 싶지가 않다.
인정해 버리면 너무 혼란스러우니까.
하지만 종종 떠오르는 머릿속의 영상들은, 분명히…….
어딘가 외부에서 들어오는 영상들이 아니라, 자신의 안에서 깨어나는 영상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영상들을 보통은…….
잊고 있던 기억이라고 부른다.
‘내가 전생에 시윤이와 시아를 만난 적이 있나?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 번의 삶이 더 있었나? 아니면…… 혹시 가끔 떠오르는 그 영상들이 내 진짜 기억이고…… 지금 내 모든 삶이 꿈……?’
부르르-
시우는 오싹한 소름 속에 몸을 떨었다.
드라마 시청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전부 다 꿈이었어라는 스토리.
시우는 게임이나 하겠다며 자신의 컴퓨터를 마음대로 켜는 지호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눈을 크게 떴다.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역으로 사용하면 기억을 좀 더 선명하게 되살릴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내가 기억을 지우는 마법을 도대체 언제 익힌 거지?’
* * *
[닥터 사이코, 이민준-이유진 커플 이어지며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 [윤시우의 냉정한 판단에 의해 벼랑 끝에 몰린 병원장, 극단적 선택 시도했으나 윤시우 압도적인 수술 실력으로 살려 내 법의 심판 받게 했다!> [회복한 고유빈 바라보는 윤시우의 따뜻한 눈빛!> [드디어 나왔다! 모두가 기다린 닥터 사이코 이민준의 진심 담긴 미소! 시청자들 감동시키며 닥터 사이코 종영!> [코믹과 소름, 멍뭉미와 시크미를 자유롭게 오간 윤시우의 열연으로 닥터 사이코 전 세계에 K드라마 인기 되살려!>혹시 여주인공이 잘못되고, 시우가 다시 마음을 닫은 채 처절하게 복수하는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을까 많은 시청자들이 우려를 했으나 다행히 해피 엔딩이었다.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행복한 미소와 함께 달콤살벌했던 두 남녀 주인공의 마지막 모습을 마음에 담았다.
시우는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좋은 추억을 선물했다.
건재한 정도가 아니라 한층 더 성숙해진 연기로 돌아온 시우는 복귀작을 무사히 마치고, 새로운 화보 촬영과 광고 촬영을 하며 12월을 맞았다.
하늘에서 하얀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시우는 지호와 함께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퍼억!
퍼억!
“아, 그만 하자! 빨리 가야지!”
산타 옷을 입은 지호가 옷에 묻은 눈을 털어 내며 외쳤다.
시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네가 시작해 놓고, 이제는 그만 하자고?”
“아니…… 너 혹시 눈 속에 돌 넣어서 던지는 거 아니지?”
지호는 맞은 곳이 아픈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시우는 피식 웃었다.
“내가 그렇게 비상식적으로 보이냐. 돌은 무슨.”
“너무 아파. 다리 부러지는 줄 알았어.”
“나이가 들수록 엄살이 늘어. 알았으니까 올라가자!”
시우는 먼저 장난감 보따리를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지호도 낑낑대며 장난감 보따리를 안아 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역시 산타 옷을 입은 지연과 마주친 지호는 혀를 찼다.
“쯧쯧쯧~ 누나도 진짜 황당하다. 무거운 거 우리가 다 들고 오니까…….”
퍽!
지연의 장갑 낀 손이 지호의 등을 때렸다.
산타 옷과 장갑이 모두 두터워 아프진 않았지만, 대신 굉장히 큰 소리가 났다.
“너 그렇게 혀 차는 거 하지 말랬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엄마 손을 잡고 서 있던 어린 여자아이가 깜짝 놀라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산타가 산타 때려써…….”
지호는 이때다 싶어 껄껄 웃으며 지연을 가리켰다.
“못된 산타란다~ 허허허~ 성격이 아주 못됐어. 어휴~”
현실 남매의 투닥거림을 뒤로 하고 시우는 주섬주섬 장난감 보따리에서 아이가 좋아할 만한 장난감을 꺼내 손에 쥐여 주었다.
“우와!”
기뻐하는 아이의 얼굴을 본 지연과 지호는 방금 전까지의 남매 싸움을 잊고, 얼굴에 붙인 수염 밑으로 같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우와 지호, 지연은 자신들이 사는 단지를 돌며 아이들에게 열심히 크리스마스 선물을 배달했다.
보름 전, 관리실의 허락을 받고 단지 앞에 세워 둔 크리스마스트리를 통해 선물로 받고 싶은 장난감 신청을 받은 시우, 지호, 지연이었다.
“이제 없어? 다 끝난 거야?”
지호가 자신의 다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소속사 식구들과 봉사 활동을 다니다 이웃의 아이들도 좀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직접 이번 이벤트를 기획한 시우는 가벼워진 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응. 끝.”
예쁜 그림이 그려진 보따리를 차곡차곡 접으면서 지연이 말했다.
“끝이라니. 마지막 한 집 남았잖아.”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지호가 다시 영차 일어났다.
“그러네! 우리 시아랑 하준이도 산타 언제 오나 계속 기다리고 있을 거 아냐! 이렇게 쉴 때가 아니야! 근데 오늘 저녁, 시우 네가 하는 거 맞지?”
“응. 왜.”
“아니. 좋아서. 요즘 스케줄 하면서 계속 배달 음식만 먹다 보니까 집밥이 너무 그리웠거든.”
지호는 너무너무 기대된다는 얼굴로 애들처럼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시우는 지연이 들려고 하는 마지막 선물 보따리를 슬쩍 낚아채 자신의 어깨에 걸친 뒤 말했다.
“진수성찬이 뭔지 내가 오늘 보여 준다.”
“굿. 찍어서 SNS에 올려야지. 우리 시우 요리 실력이 이 정도예요~ 하고.”
“됐어. 또 실검 1위 찍고. 포털 메인에 내 음식 사진 뜨고 그래. 하지 마.”
사이좋게 걸어가는 시우와 지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지연은 미소 띤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뒷모습이 어릴 때랑 똑같네. 쟤들은 나중에 중년 돼서도 저러고 다닐 거 같아.’
물건 들지 말라고 자신의 손에서 선물 보따리를 낚아 채간 시우의 넓은 등과 어깨를 보며, 지연은 어릴 때 눈썰매장에서 만난 아장아장 걷던 시우를 떠올렸다.
울고 있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 주던 어린아이가 언제 저렇게 컸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지연은 뒷짐을 지고 가볍게 걸음을 옮기며 시우에게 말했다.
“시우야.”
“응?”
“누나가 너 절반 키웠다~ 잊지 마라~”
지호가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누나가 뭐 했다고. 시우는 내가 키웠지. 유치원 때부터 나랑만 붙어 다녔는데.”
서로 자신을 키웠다고 주장하는 남매를 보면서 시우는 그냥 속으로 웃었다.
‘큰 착각들을 하고 있군. 둘 다 내가 키운 줄은 모르고. 하하.’
* * *
시아는 시계를 봤다.
그리고 창밖을 봤다.
발을 동동 구르던 시아는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물었다.
“산타 할아버지 언제 와?”
현주는 시아의 등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지금 오고 계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지금 다른 친구들 선물 나눠 주시느라 좀 늦으시는 거야.”
“…….”
시아는 다시 창가를 배회하다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그런데…… 산타 할아버지 큰오빠 맞지? 모르는 척해야 돼?”
“……으, 으응? 글쎄. 왜 큰오빠일 거라고 생각해?”
시아는 허리춤에 두 손을 올리고 짐짓 어른스럽게 한숨을 쉬었다.
“엄마! 나도 이제~ 알 건! 다 알아~”
시아의 눈을 응시하던 현주는 가만히 검지를 입술 앞에 갖다 댔다.
그런 엄마를 본 시아가 비밀은 꼭 지키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벨이 울렸다.
시아는 얼른 일어나 현관으로 뛰어갔고 시윤도 느릿느릿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문을 열고 들어온 세 명의 산타는 열심히 연기를 시작했다.
“네가 시아로구나~?”
“허허허! 어이구~ 집이 아주 예쁘고 따뜻하네~”
“시아야~ 안녕? 산타 할머니야~”
시아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는 시윤은, 보고 있기가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와, 진짜 보고 있기 힘들다.’
시윤은 몸을 돌려 거실로 돌아갔다.
도진이 시윤을 불렀다.
“어디 가? 네 선물도 있을 텐데.”
“……이따 받을게요. 하준이 데리고 나올게요.”
시윤은 산타인척 하는 형, 누나들과 “산타 할아버지 루돌프는 어디 있어요?”라고 묻고 있는 이제는 많이 커버린 여동생을 피해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는 이모 희주와 이모부 태우가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희주가 물었다.
“시윤이 왜?”
“하준이 보려고요.”
“시우 왔니?”
“네.”
시윤은 이모에게 대답하고 안방에 놓인 아기 침대 안을 슥 들여다봤다.
작은 아기 침대 속에서, 아기 산타 우주복을 입은 조그만 아가가 꼬물꼬물 팔다리를 움직이다 시윤을 발견하곤 동작을 멈췄다.
“부우……?”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