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293)
293. 오로라
시우는 기분이 묘했다.
온 세상이 계속 밤이라는 것은 정말로 낯선 감각이었다.
11월부터 1월까지 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이 기간을 극야라고 부른다고 한다.
‘……멋지다.’
극야라고 해서 세상이 온통 깜깜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시우는 홀린 듯이 멀리 지평선 너머로 보이는 태양의 붉은 기운을 바라봤다.
어두운 하늘 아래 주황색 빛줄기가 비치고, 그 주변의 구름들만 마치 하늘 위의 또 다른 세상인 것처럼 신비롭게 빛나고 있었다.
자연은 언제나 경이롭다.
시우는 북극의 하늘을 보며 자신이 세상의 한 톨 먼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무슨 생각 해?”
시우의 곁으로 다가온 헨리가 물었다.
헨리의 손에는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이 들려 있었다.
“세상이 참 신기하다는 생각.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는 생각.”
시우는 운명을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믿는 쪽이었지만, 그렇다고 운명의 거대한 힘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환생을 그렇게 해 대는데 어떻게 운명이란 단어를 무시할 수 있겠어.’
세상 모든 곳에서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밤이 되면 해가 지는 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가운데, 그 상식과 전혀 동떨어진 이곳 북극에서 맞는 아침과 저녁은 시우에게 매일 자신의 운명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까지 환생을 거듭해 온 자신의 삶이 해가 지지 않는 백야였다면, 이 100번째 생을 끝마치고 맞게 될…….
이후의 시간들은 해가 뜨지 않는 극야다.
‘영원한 끝.’
시우는 지평선 너머의 빛과 숙소에서 보이는 거리의 하얗게 빛나고 있는 눈들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두근- 두근-
감상에 너무 젖은 탓일까, 시우의 심장이 요란하게 두방망이질 쳤다.
왠지 심상찮은 기분이다.
‘북극에 오니 마나가 넘쳐나네. 감당하기가 힘들 정도야.’
몸 안의 기운들이 들끓는다.
시우는 입술을 살짝 떼고, 숨을 고르며 운기를 했다.
다시 차분해진 눈빛으로 시우는 헨리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니콜라스랑 루시는?”
“루시는 식료품 사러 갔고. 니콜라스는 스태프분들이랑 밖에서 눈싸움.”
“우리는 뭐 할까?”
헨리는 코코아를 홀짝거린 다음, 잠깐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글쎄~ 니콜라스 옆에서 눈사람이라도 만들까? 내일 또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다고 했으니까…… 여기서는 오늘이 마지막이네.”
“응. 이따 신세 진 마을 분들께 인사드리러 가자.”
“좋아. 그런데 북극 와서 그냥 마을이랑 도시 구경하면서 놀기만 하는 거 같아. 이래도 되나?”
“너무 편해서 그래?”
“약간.”
시우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헨리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원래 고생시키기 전에 놀게 해 주는 거야.”
“그, 그런 거야?”
“응. 그러니까 쉬게 해 줄 때는 푹 쉬어. 우리 적응하라고 배려해 주시는 거니까.”
“그래~ 그럼 나가서 눈사람이나 만들자. 북극 와서 눈사람 만들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벌컥!
숙소의 문이 열리고 얼굴이 상기된 루시가 들이닥쳤다.
“시우, 헨리! 나와 봐! 우리 내일…….”
뛰어왔는지 가쁘게 숨을 몰아쉰 루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썰매 타고 갈 거래! 연습하러 나와!”
썰매?
시우와 헨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봤다.
그때, 밖에서 개들의 하울링 소리가 들려왔다.
– 아우우우우우!!
눈이 휘둥그레진 둘은 곧장 루시를 따라 밖으로 달려 나갔다.
* * *
“시우는 어떻대? 잘 지내고 있대? 춥진 않대? 감기 기운 있는 거 같진 않고? 음식은 입에 맞나?”
TV를 틀던 태우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아내의 질문에 뭐부터 대답해야 할지 순간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아내의 디테일한 질문에 한마디로 대답했다.
“케빈 말로는 잘 지낸대~”
“케빈은?”
“케빈도~”
“당신 나랑 말하기가 싫어?”
“응?”
“케빈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좀 자세히 알려 달라고. 혹시 북극점 이런 데로 들어가나? 배나 비행기 같은 건 안 탔으면 좋겠는데.”
하루 종일 말 못하는 아기하고만 시간을 보내다 보니, 요즘 들어 남편인 태우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희주였다.
태우는 머리를 긁적이다 희주의 옆자리에 앉아 아내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몸에서 아들 하준이와 같은 은은한 아기 냄새가 났다.
“노르웨이랑 핀란드랑 여기저기 돌아다닌다던데, 나중에는 북극점도 갈 건가 봐. 그리고 음식은 방송 나온 거랑 똑같이 실제로도 잘 먹고 있대. 시우가 현지인들에게 재료 받아서 요리도 하고 그러나 봐.”
오랜만에 케빈과 통화를 했다는 남편에게 시우 소식을 전해 들은 희주는 그제야 얼굴이 밝게 펴졌다.
어린 시우를 데리고 미국에서 태우와 함께 생활한 시간이 길었기에, 시우는 그녀에게 아들이나 다름없었다.
“잘됐다. 그래. 우리 시우는 어디 가서든 잘할 거야. 북극이라니까 괜히 안심이 안 돼서…….”
“알지. 다음에 시우가 휴대폰 쓸 수 있을 때, 한 번 연결해 줄게. 통화해.”
“응.”
“으아아아아앙!!”
오붓하게 북극원정대 방송을 틀어 놓고 부부끼리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하준이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태우는 일어나려는 아내를 잡아 소파에 다시 끌어 앉히고, 얼른 아기 침대로 갔다.
“아이고~ 일어났어? 우리 아들! 아빠네~ 잘 잤어요?”
“……으아아아앙! 어마…… 어마아……! 아아아앙!!”
“아빠가 안아 줄게~”
“어마아아아-!”
바둥바둥바둥바둥!
자고 일어나면 꼭 엄마를 찾는 하준이 때문에 희주는 결국 몸을 일으켜야 했다.
“웬일로 앉아 있나 했지 내가. 이 나이에 육아하려니까 진짜 힘들다. 읏차!”
희주는 하준이를 안아 들었다.
엄마의 냄새를 맡은 하준이는 언제 소리를 질렀냐는 듯이 입을 꼭 다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엄마를 올려다봤다.
기저귀를 갈아 주기 위해 소파에 아기를 눕힌 희주는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면서 TV를 흘끗 봤다.
TV에서는 시우가 썰매 개들을 교육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로키를 앞지르면 안 되지~ 신나는 건 알겠는데 대열 맞춰서 뛰자! 좋아! 좋아! 속도를 올려 볼까?]파파파파파팟!
너무 멋진 외모를 가진 썰매 개들이 시우의 지휘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희주는 신기한 나머지 웃고 말았다.
“어릴 때부터 동물들이 시우를 그렇게 잘 따르더라. 동물들이랑 말이라도 통하는 것처럼~”
희주는 TV를 가리키며 하준이에게 말했다.
“하준아. 멍멍이. 멍멍이.”
뭐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멍하니 TV를 응시하던 하준이가 갑자기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에는 개들을 보고 웃는 줄 알았던 태우와 희주는 이내 시우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때만 하준이가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와, 여보. 하준이 시우 얼굴 보이나 본데?”
“그럼~ 하준이가 몇 개월인데.”
“TV로도 알아보니까 신기해서 그러지. 시우 형아야~ 시우 형아~ 하준아. 형아가 좋아?”
꺄르르르-!
엄마의 무릎에 앉은 하준이는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희주는 자신의 품 안에서 해맑게 웃어 대는 하준이의 얼굴 위로 아기 때의 시우 얼굴이 겹쳐 보였다.
‘우리 하준이도 시우 형처럼 건강하게 크길…….’
희주는 하준이를 꼭 끌어안고 TV로 시선을 돌렸다.
시우의 썰매는 환한 조명빛 밑에서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우 뒤쪽의 한 썰매가 기우뚱 중심을 잃고 옆으로 넘어가는 광경이 보였다.
“앗!”
희주는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 * *
시우는 전문가들조차 혹시 개썰매를 여러 차례 몰아 본 게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개들과의 커뮤니케이션과 운전이 완벽했다.
시우에게 노하우를 전수받은 헨리도 곧잘 썰매를 몰았다.
여러 날에 걸쳐 이곳저곳 이동을 하면서 경험을 쌓은 터라 얼마 전부터는 헨리 역시 단독으로 개썰매를 모는 것을 허락받았다.
전문가와 함께 탔다가 혼자 탔다가를 반복하며 썰매 운전에 익숙해진 헨리였으나, 시우나 전문가들처럼 개들의 행동을 제대로 통제하기엔 아직 미숙한 점이 있었다.
헨리의 썰매가 코너에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기우뚱 기울어졌다.
헨리는 얼른 손을 놓고 눈 위로 몸을 날렸다.
데굴데굴-!
눈밭을 구른 헨리가 온 몸과 얼굴에 눈을 잔뜩 붙인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사람이 된 헨리는 자신의 개들이 다른 썰매에 있는 전문가의 지시에 따라 멈춰 서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너무 춥다.
추운데 왠지 웃음이 나온다.
친구들과 또 멋진 개들과 같이 어둠 속에서 오로라를 쫓아 눈 위를 질주하는 게 너무 즐겁고 행복해 참을 수가 없었다.
괜히 자기 때문에 속도가 늦어져 오로라를 놓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된 헨리는 씩씩하게 눈을 털고 일어났다.
뒤쪽에 좀 처져서 쫓아오던 루시와 니콜라스가 탄 썰매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며 헨리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루시와 니콜라스는 각자 전문가가 모는 썰매에 달린 왜건 유모차 같은 곳에 앉아 있었는데, 속도감은 못 느끼겠지만 세상 편해 보였다.
“넘어졌어? 하하하! 너 꼭 설인 같다!”
니콜라스가 웃을 때, 앞쪽에서 제작진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시우!! 시우!! 시우!!”
헨리와 니콜라스, 루시는 무슨 일인가 하고 앞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담당 PD와 스태프들이 시우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시우!! 멈춰!! 같이 가야지!!”
“안 들리는 거 같아!! 벌써 멀어졌어!!”
“뒤에서 넘어졌어!! 멈춰!! 시우!!”
헨리는 얼른 가서 PD에게 물었다.
“시우는요?!”
“선두에서 달리다 보니까 뒤쪽 상황을 파악 못했나 봐. 그냥 그대로 달려가 버렸어. 일단 촬영 멈추고 저기 현지인 분께 시우를 쫓아가 달라고 부탁드릴 거야. 너희는 안심하고 잠깐 쉬어.”
“아…… 네. 별일 없겠죠?”
PD는 눈이 소복이 쌓인 헨리의 어깨를 털어 주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우가 얼마나 똑똑한데. 썰매도 전문가들이 자기들보다 더 잘 몬다고 말했잖아. 아마 금방 쫓아오는 썰매가 없다는 걸 깨닫고 돌아올 거야.”
“네.”
헨리가 쉬러 가지 않고 그대로 서 있자 PD가 물었다.
“왜? 걱정 말고 쉬고 있어. 괜찮을 테니까.”
“……시우가 오늘 왠지 기분도 이상하고 좀 컨디션이 안 좋다고 말한 게 기억나서요.”
“아까 저녁에 말이지?”
“네.”
“음…….”
컨디션이 안 좋다고 해서 시우가 무슨 사고를 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PD와 헨리는 시우를 믿고 있었다.
시우는 누구보다 영리하고, 상황 판단도 빠르다.
‘그런데…… 그런 시우가 뒤쪽에서 소리 지르는 걸 못 듣고 그대로 가 버렸다고?’
PD는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으나, 그래도 시우에 대한 믿음이 더 컸기에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전문가들 중에서도 가장 경력이 오래된 중년 남자가 잘 훈련된 그의 개들과 같이 시우를 찾으러 떠나는 것을, 헨리와 루시, 니콜라스는 걱정을 떨치지 못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본능에 따라 썰매를 달리는 중이었다.
앞이 캄캄하다.
분명 썰매에 달린 밝은 조명이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았다.
어지럽네.
지금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지?
헨리는?
쫓아오고 있나?
누가 날 부른 거 같았는데…….
두근- 두근- 두근-
밝은 빛이 시우의 눈앞에서 쏟아져 나왔다.
시우는 왠지, 자신의 눈에서 자꾸만 뭔가가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흐릿한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일행과 떨어져 쏜살같이 달려온 시우의 머리 위로, 북극의 아름다운 오로라가 환상처럼 펼쳐졌다.
‘이곳에는…….’
마나가 너무 많다.
종종 시우의 머릿속을 괴롭히던, 영상들이 점차 선명해졌다.
살을 베는 찬바람과 함께, 북극의 신비한 오로라 밑에서 시우의 잃어버린 기억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