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35)
35. 왕의 길
“아~ 부~ 지~”
시우의 얼굴 위로 5월의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려왔다.
대본 리딩을 한 지도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어른들이 출연하는 초반 궁궐 부분 촬영이 끝나자, 이제 시우가 등장할 차례가 됐다.
촬영 장소는 민속촌.
살짝 때가 탄 삼베옷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시우는 귀엽게 아부지를 부른 후, 아장아장 동식에게 걸어갔다.
카메라는 시우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화면 가득 담기도록 촬영하고 있었다.
사냥꾼 옷을 입은 동식이 쪼그려 앉아 팔을 벌렸다.
시우는 걸음을 빨리해 동식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어이구~ 이 귀여운 녀석. 아부지가 너 땜시 산다.”
동식이 시우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시우는 예쁜 목소리로 꺄르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촬영을 지켜보던 스태프들은 시우의 웃음소리에 하나같이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시우와 동식이 눈을 맞추고 웃는 장면까지 찍은 이홍균 감독은 만족한 표정으로 외쳤다.
“컷! 오케이~!”
짝짝짝-!
스태프들의 박수가 나왔다.
첫 씬을 무사히 마친 아기 시우에게 보내는 칭찬과 격려의 박수였다.
“와, 잘하네!”
“표정 좋더라! 그냥 사랑스러움을 타고난 거 같던데?”
“얼마 전에 두 돌 됐다며. 진짜 똑똑하다. 나는 저 나이 때 뭐 했지?”
“지금도 딱히 하는 거 없잖아.”
“이런…… 확!”
“하하하!”
궁궐 부분을 촬영할 때와는 분위기가 천양지차였다.
물론 드라마 내용의 차이도 있겠지만, 시우의 존재가 촬영장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자는 강행군이 시작된 상황 속에서, 스태프들은 시우를 통해 잠시나마 피로를 잊고 농담을 주고받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이홍균 감독은 웃음꽃이 만개한 스태프들을 본 뒤, 혀를 내둘렀다.
‘한수 말대로 보통 아기가 아니야.’
이홍균 감독 역시 시우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는 중이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시우의 행동이나 말이 아니더라도, 이 나이가 되도록 촬영장에서 밥을 벌어먹고 살아온 감독으로서의 느낌이란 것이 있었다.
‘아주 좋아. 이 아이가 나오는 씬은 분명히 화제가 된다. 1화 대본도 더할 나위 없이 잘 나왔고…… 드라마의 첫 단추가 훌륭하게 끼워질 거야.’
드라마 제작에 있어, 1화의 중요성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자, 다음 갑시다.”
이홍균 감독의 말에 스태프들은 웃음을 거두고 빠르게 다음 씬을 준비했다.
시우는 휴대용 유모차에 누워 파란 하늘을 구경하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 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자신의 첫 등장 씬을 끝내고,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면서 비타민을 아작아작 씹어 먹고 있자니 솔솔 잠이 왔다.
씹던 비타민을 입안에 반쯤 남긴 채로 깜빡 잠이 든 시우는, 순간 오동통한 짧은 다리로 발차기를 하며 깨어났다.
화들짝.
‘아…… 졸았어…… 촬영 남았으니까 자면 안 되지.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엄마~ 물~”
“응? 물 줄까?”
“웅~”
간이 의자에 앉아 있던 현주가 가방을 열고 물을 꺼내 주었다.
“감시이다~”
꼴깍꼴깍.
물을 마신 시우는 정신을 좀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촬영은 지금도 진행 중이었다.
동식이 동네 사람들과 익숙하게 인사를 나누며 마을을 걷는 씬이었다.
저렇게 걸어서 동식이 집에 도착을 하면, 아까 촬영했던 시우의 첫 등장 씬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실제 이야기 순서와 촬영 순서가 다른 경우는 흔하다.
단역 배우들과 동식이 합을 맞춰 연기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시우는 고개를 돌려 엄마의 무릎에 놓인 초록색 대본 책을 흘끗 봤다.
“우우음…….”
약간의 불만이 섞인 소리가 시우의 입에서 새 나왔다.
현주가 물었다.
“시우야, 끙아해?”
“아니야아~”
즉각적으로 대답한 시우는 입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대본 책으로 손을 뻗었다.
“아, 책 달라고? 시우야, 이거 찢으면 안 돼. 조심해서 봐야 돼. 알았지?”
“웅~”
“응 말고 네 해 볼까?”
“네에~”
“아유, 예뻐. 책 보세요, 우리 아가님.”
“웅~”
시우는 받아 든 대본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장난을 치듯 파라락 넘겼다.
현주가 보기엔 책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였으나, 시우는 대본을 전체적으로 훑어보면서 자신이 나오는 부분들만 딱딱 집어 내 눈 속에 담고 있는 중이었다.
이번 작품은 미스터 문라이트나 내겐 너무 무서운 아내 때와 다르게, 자신에게 주어진 대사가 있었다.
대본에 정식으로 적힌 자신의 첫 대사들.
그것은 물론 기쁜 일이었다.
다만 문제는…….
‘뭔 놈의 대사가…… 아부지밖에 없냐…….’
아부지로 시작해서 끝까지 아부지만 찾다 끝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24개월 아기에게 다양한 대사를 주고, 타이밍에 맞춰 연기를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음…… 됐어. 뭐 언제는 대사가 있어서 말을 했나.’
시우는 대본을 덮었다.
자신의 대사보다는 다른 배우들의 대사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치고 들어갈 수 있으니까.
“어머님~ 시우 준비할게요~!”
유모차에 반쯤 드러누워 편하게 휴식을 취하던 시우가 몸을 일으켰다.
“시우야, 갈까?”
“웅~ 가쟈아~ 엄마아~”
시우는 현주에게 안겨 촬영 장소로 향했다.
준비를 마친 동식이 와서 시우를 받았다.
동식과 시우는 작은 초가집 앞에서 감독의 사인을 기다렸다.
나이가 지긋한 두 명의 단역 배우가 동식과 시우를 지나쳐 안으로 먼저 들어갔다.
“시우야, 아부지가 내려놓으면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걸어가는 거야. 할 수 있어?”
“우웅~!”
시우는 동식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대답을 했다.
동식은 시우가 정말 알아듣고 대답을 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시우가 가지 않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온다거나 하는 식으로 어른들이 만들어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24개월 아기의 행동을 유도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동식도 아이를 키워 봐서 알고 있었다.
‘갑자기 화내면서 다 싫다고 드러누워 울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이홍균 감독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레디, 액션!”
삽시간에 촬영장이 조용해졌다.
동식은 초가집 마당으로 들어서며 대사를 쳤다.
“오늘도 우리 덕구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동식이 시우를 마당에 내려놨다.
얼굴을 든 시우는 인자하게 웃고 있는 두 단역 배우분들을 올려다봤다.
덕구네 이웃에 사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 할머니였다.
덕구 아버지, 대길이가 사냥을 나갈 때마다 덕구를 친손자처럼 돌봐 주는 역할이다.
그 대신 대길이는 사냥을 해서 번 돈으로 이런저런 음식들을 선물로 사 들고 찾아가곤 했다.
아장아장.
흙바닥을 천천히 걷던 시우가 두 노배우의 얼굴을 확인한 후, 세상 행복한 얼굴로 걸음의 속도를 올렸다.
그리고 대본에 없는 대사를 날렸다.
대사 [아부지>의 발전형.
“하~ 아~ 부~ 지~”
시우는 함박웃음을 띠고 달려갔다.
할아버지만 부르면 서운하니까, 할머니도.
“하~ 무~ 이~”
보고 있던 현주는 시우가 뭔가 착각을 한 게 아닌가 싶었다.
멀리 살아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자신을 만나러 온 줄 아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 쪽은 조금 닮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부르면서 사랑스럽게 달려오는 조그만 시우의 모습에 두 배우들은 연기라는 것도 잊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우리 강아지~! 허허허~!”
할아버지가 땅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아, 달려온 시우를 꼬옥 안아 주었다.
분위기가 너무 자연스러웠다.
할머니도 예뻐 죽겠다는 눈빛으로 시우를 보고 있었다.
동식도 흐뭇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보다가 대사를 던졌다.
“저는 산에 올라가 보겠습니다~! 덕구야~! 할아버지,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라~! 아부지는 간다!”
“덕구 아부지~ 다녀와유~”
할머니 역의 배우가 주어진 대사를 찰지게 소화해 냈다.
동식이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하고 쿨하게 돌아서려는 찰나.
할아버지 품에서 빠져나온 시우가 귀여운 목소리로 동식을 불렀다.
“더쿠 아부지이~”
……으잉?
동식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작은 아기 시우가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시우의 입이 다시 열렸다.
“다녀와유~~~”
예상치 못한 시우의 애드립에 모든 스태프들은 순간 웃음이 빵 터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컷! 컷이 나와야 했다.
이홍균 감독이 스태프들을 살리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컷! 오케이!”
일제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하하! 아니…… 애가 다녀와유…… 다녀와유…….”
“와아, 뭐야. 할머니가 말씀하신 거 듣고 따라 한 거야?”
“너무 귀여워! 진짜 애가 어떻게 저렇게 영리하지?”
이홍균 감독은 과거 이한수 감독이 했던 생각을 똑같이 떠올리고 있었다.
“……천잰데?”
* * *
늦은 오후.
시우의 세 번째 씬이 세팅되고 있었다.
“레디, 액션!”
이홍균 감독의 사인과 함께 또다시 촬영이 시작되었다.
재수 좋게 사냥감들이 눈앞에 퍼뜩퍼뜩 나타나 준 덕분에 사냥을 일찍 마친 동식은 시우를 데리고 냇가로 향했다.
원래 이번 씬은 다른 날 촬영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오늘 날씨가 유독 따뜻하고 좋아 이홍균 감독의 지시로 일정이 급하게 바뀌었다.
동식은 시우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며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부지가 말이여, 한때는 호랭이도 한 손으로 때려잡고 그랬어~! 그냥 산짐승들이 이 아부지만 보면 벌벌 떨고 그랬다니께?”
시우가 동식을 올려다보며 말을 받았다.
원래는 동식이 혼잣말을 하는 씬이었지만, 시우는 조용히 아장아장 걷기만 할 생각이 없었다.
“호~ 앵~ 이~?”
놀라서 눈을 땡그랗게 뜬 시우는 입을 헤 벌리고 동식을 봤다.
동식은 솜털만 한 아기의 기대치 않았던 반응에 더 흥겹게 대사를 쳤다.
“아, 그려~! 호랭이~!”
갑자기 애드립 하나가 동식의 머리를 스쳤다.
이 아기가 애드립을 받아 줄까?
집에서 아빠들이 많이 하는 장난이긴 한데…….
동식은 서서히 목소리를 낮췄다.
“호랭이가…… 어흥~!”
“꺄아아~!”
시우는 까르륵 웃고는 동식을 피해 달아났다.
애드립…… 통했다.
신이 난 동식은 집에서 아들과 놀아 주는 것처럼 시우를 쫓아갔다.
“어흥~! 어흥~! 호랭이다~! 하하하!”
그렇게 웃고 떠들면서 동식과 시우는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었다.
다리 밑에 있는 냇가.
촬영이 재개되었다.
동식은 냇가에 시우를 앉히고 꾀죄죄한 얼굴을 물로 씻겨 주는 중이었다.
“어유, 이 땟국물 흐르는 것 좀 봐라.”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고 얼굴을 씻겨 주자 시우의 뽀얗고 예쁜 얼굴이 냇물 위로 드러났다.
후줄근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숨길 수 없는 귀티가 흘러나왔다.
이홍균 감독이 그토록 귀티 나는 아이를 찾아 헤맨 이유 중 하나였다.
세수를 하는 동안, 시우는 바닥의 돌을 가지고 조물거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것을 본 동식의 머리에 또 애드립이 스쳤다.
과연 한태수가 롤 모델로 삼고 있는 배우였다.
‘이것저것 하다 보면 장면 하나 건지고 그러는 거지 뭐.’
동식이 시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덕구야, 아부지가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재미는 거어?”
이 아저씨가 또 무슨 애드립을 치려고 이러나 싶어, 시우는 호기심이 일었다.
돌을 건네주자 동식은 자리에서 일어나, 냇가를 향해 섰다.
“잘 봐~ 이 아부지 하는 거~”
동식은 돌멩이를 수면 위로 비스듬히 내쏘아 튕겼다.
파앗! 파앗! 파앗! 파앗! 파앗!
물수제비 실력이 꽤 훌륭했다.
동식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랑스럽게 시우를 돌아봤다.
“워뗘? 아부지 잘허지?”
동식의 물수제비를 본 시우가 방긋 웃고는 말했다.
“나두~”
시우의 손에는 언제 주워 들었는지 납작한 돌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