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78)
78. 바다아이
4월.
아직 날이 쌀쌀했지만, 또다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다.
100번째 생에 맞는 몇 번째 봄이던가.
‘내가 5월생이니까 태어났을 때 겪은 봄도 포함해야 되나.’
시우는 차창 밖으로 보이는 벚꽃 나무들을 구경하며 속으로 지금껏 자신이 겪은 봄의 횟수를 세어 보았다.
운전석의 태우가 말했다.
“어머님도 같이 가시면 좋을 텐데, 시윤이가 열이 나서 큰일이네. 괜찮아야 할 텐데.”
개나리색을 쏙 빼닮은 노란색 유치원 체육복을 입은 시우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괜찮을 거예요~”
오늘 새벽, 5개월 아가 시윤이가 잠깐 열이 났다.
잔병치레를 모르는 시우만 키워 본 탓에 아이가 아픈 것에 면역이 별로 없는 현주가 당황해 병원 갈 준비를 하는 사이, 시우는 조용히 아기 침대로 가 동생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해 주고 유치원으로 출근을 했다.
그리고 정말 꿀 같은 오전 근무만 하고, 자신을 데리러 온 태우 아저씨와 함께 대본 리딩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우리 시우, 드라마 리딩은 세 살 때 이후로 처음인가? 시우야, [왕의 길> 드라마 혹시 기억나니? 더쿠 아부지~ 다녀와유~ 기억나? 안 나지? 너무 어릴 때라.”
전생도 기억하는데 세 살 때 일을 기억 못할까요.
시우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쪼끔~ 기억나요.”
“오, 그래? 하긴 우리 시우가 기억력이 남다르지. 대본 암기력도 그렇고. 요즘 인터넷 바둑 몇 단이야? 아, 단 말고 급이라고 한댔나?”
한돌바둑 사이트에서 활동 중인 윤슈슈는 여전히 30급이었다.
이제는 ‘무적의 30급’이라는 별명에 애착이 생겨, 9단도 때려잡는 30급을 목표로 일부러 초보 상태에서 급수를 올리지 않고 있었다.
“3…… 급?”
“3급이야? 그렇구나. 잘하네.”
사실 몇 급이 잘하는 건지 전혀 모르지만, 바둑 신동이랬으니까 잘하겠거니 칭찬하고 보는 태우였다.
“어쨌든 드라마 정식으로 하는 건 진짜 오랜만이다. 열심히 하자, 시우야. 일곱 살에 주연을 맡는 경우는…… 정말 와…… 말도 안 되는 거야. 어린이 영화도 아니고, 저녁 금토 드라마를 일곱 살에 주연…… 이야…….”
두 달 전-
회사로 대본이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태우는 시우가 초반 부분에만 나오는 줄 알았고, 제작사에서도 그런 뉘앙스로 말을 했다.
그런데 시우의 열혈 팬이라는 노진희 작가가 제작사의 요구를 거절하고 시우를 최대한 길게 끌고 가고 싶다는 자신의 기획 의도를 계속 고집해, 드라마의 남녀 주인공 캐스팅이 상당히 난항을 겪게 되었다.
초중반까지 남주보다 일곱 살 아이의 분량이 더 많은 기형적인 대본이 계속 집필되었고, 남주들은 자신의 분량을 보고 캐스팅 제의를 거절.
유명한 남배우들이 다들 역할을 걷어차자 상황을 보던 네임드 여배우들도 결국 떨어져 나가면서,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 한 명과 모델 출신의 외모는 무척 뛰어나지만 연기 검증이 안 된 남배우 한 명이 주연 자리에 앉게 되었다.
탈고되는 대본 자체는 어쩐지 팔릴 만한 느낌이라, 어영부영 고민하다 노진희 작가를 자를 타이밍을 놓치고 만 제작사는 반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시우 주연을 허락했다.
그렇게-
작가의 고집과 몇몇 행운들이 겹쳐, 시우의 인생 첫 주연작이 탄생하기 직전이었다.
“와하하하! 시우야! 삼촌 봐봐! 어이구, 예쁘게도 컸다! 삼촌 누군지 알아? 응?”
온몸에 빵빵한 근육을 장착한 40대 중반의 남자 배우가 시우의 앞에서 보디빌더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힘-! 크아아-! 파워-! 삼촌 근육 눌러 볼래? 벽돌보다 단단하다?”
시우가 네 살 때 출연한 예능 [어촌하루>에서 요리를 담당하던 근육맨 배우 강동훈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우는 두 손을 가지런히 배꼽 위에 모으고 예의 바르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 다 컸네! 유치원 다니니? 체육복이야? 귀엽다. 일루 와! 오랜만에 한번 안아 보자!”
동훈은 [어촌하루> 때처럼 시우를 한쪽 팔에 앉혀 번쩍 들어 올린 뒤,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놀이기구를 태워 주었다.
동훈이 시우를 안은 채 리딩실로 입장을 했다.
20년차 대선배의 등장에 젊은 배우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임지석이라고 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드라마의 남주 임지석이 인사를 했다.
이어 여주 손수현도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손수현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후배들의 깍듯한 인사에 동훈이 미소 띤 얼굴로 화답해 주었다.
“어어, 그래. 반갑다. 잘해 보자. 솔직히 내가 너희를 잘은 모르는데, 둘 다 외모가 아주 훌륭하네. 언제 데뷔했어?”
“2년 전에 드라마 [강력 1반>으로 데뷔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영화 [신의 이름으로>에서 데뷔했습니다.”
수현의 대답에 시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신의 이름으로~?”
동훈에게 안겨 있는 시우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수현을 보자, 수현은 정말 반갑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 으응. 누나가…… 우리 시우~ 선배님과 직접 같이 찍는 장면은 없었는데, 단역으로 류승현 선배님하고 카페에서…….”
시우에게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수현을 보고 동훈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치, 선배님이지. 시우는 7년차야. 데뷔한 지 일 년밖에 안 됐으면 깍듯이 모셔야지.”
“네! 당연히 그래야죠.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선배님.”
수현이 웃으며 시우에게 손을 흔들었다.
“앗!”
시우는 수현의 얼굴이 기억났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승현이 형아한테 전화번호 주던 누나!”
[신의 이름으로>에서 저승차사 조사팀이 이승에 카페를 차렸을 때, 승현에게 반해서 친구들을 데리고 매일 출근 도장을 찍던 대학생 누나였다.자신을 기억해 준 게 기쁜지 수현의 웃음이 한층 밝아졌다.
“응! 맞아! 그러다 류승현 선배님께 차이고 울면서 뛰쳐나간 그 사람이 누나야!”
거기서 눈도장을 받아 이후 유명 기획사와 계약도 맺었고, 웹드라마에도 출연하고, 연말에는 지상파에 조연으로도 나가는 등 마법 같은 한 해를 보낸 그녀였다.
뛰어난 미모와 신인치고 나쁘지 않은 연기력이 장점이었다.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윤시우 선배님. 하하.”
남주 임지석도 시우에게 인사를 했다.
2년 전, 모델에서 배우로 전향한 지석은 큰 키와 수려한 외모를 자랑하는 극강의 비주얼파 배우였다.
다만, 배우로 전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연기가 살짝 서툴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두 배우 모두에게 이번 드라마는 자신들의 향후 배우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매우 큰 기회였다.
전작이 시청률 5%로 폭망했다곤 하나, 트렌드를 못 잡을 뿐 필력은 늘 좋았던 노진희 작가가 작정하고 트렌드에 맞춘 드라마.
황금 시간대인 금토 저녁 드라마.
최근 대유행인 판타지 소재.
잘되면 바로 꽃길이다.
그리고 이 드라마의 성패를 가를 열쇠는, 누가 뭐라고 해도 눈앞에 있는 이 작은 아이-
생후 6개월에 “엄마…….”라는 대사로 전국을 울린, 연기 7년차 윤시우 선배님이셨다.
일곱 살 어린아이인 시우는 자신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두 어린 양들의 눈빛을 보며 주연 배우의 부담감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 * *
[‘신의 이름으로’의 아역 배우 윤시우 군, 차기작은 ‘바다아이’> [바다아이 여주인공으로 웹드라마 여신 손수현 캐스팅 확정> [임지석, 손수현, 윤시우. TVM의 새로운 판타지 드라마 주연> [대박 길만 걸어온 신계 아역 윤시우. 일곱 살에 첫 주연 도전>대본 리딩 이후, 본격적으로 드라마 홍보가 시작되었고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미국에서 방영되고 있는 XOXO 시즌6 특별 출연으로 국내 팬들에게 다시 이름을 알린 시우가 단연 화제의 중심이었다.
– 와~! 염라다~! 기대된다~! 그런데 염라 캐릭터가 워낙 강해서 보면서 계속 염라가 떠오를 거 같은데…… ㅎㅎ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네.
– 노진희 작가네. 믿고 걸러라. 제목이 바다아이? ㅋㅋㅋㅋㅋ 내가 내용 다 얘기해 줄게. 어촌 마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아이의 시선으로 보여 주면서 시청자들한테 힐링과 감동 강요하는 드라마가 되겠지. 시청률 0.5% 예상한다. 아. 염라아이가 졸귀니까 운 좋으면 1% 나올 수도.
– 드라마는 별로 기대 안 되는데 주연 셋이 비주얼은 역대급이네. 우리 시우 얼굴이나 많이 나오게 해 주세요. 시우 분량 많으면 본방 사수 해 드릴게요.
– 주연 라인업이 비주얼은 좋은데 ㅋㅋㅋㅋ 일곱 살 애가 연기로 캐리해야 되는 라인업인데? ㅋㅋㅋㅋㅋㅋ
– 남주로 배우가 아니라 모델을 데려다 놨네? 그리고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자칭 웹드 여신 ㅋㅋㅋㅋㅋ 바다아이 말고 어촌하루로 제목 바꾸고 시우랑 동훈 아재 주연으로 예능이나 찍자!
– 노진희가 판타지…… 전작들 줄줄이 말아먹고 돈이 많이 궁했나 보네. 판타지 싫다더니 작가가 자존심이 없네. ㅋㅋㅋㅋㅋㅋ
처음이었다.
[내겐 너무 무서운 아내>, [왕의 길>, [신의 이름으로> 때는 제작 발표 때부터 온통 호의적인 댓글들뿐이었다.기대된다.
빨리 보고 싶다.
팬이다.
응원한다.
그런 댓글들이 절대다수였다.
한데 이번 작품은 출발점이 조금 달랐다.
시대에 뒤처진 글만 쓰던 노진희 작가에 대한 비아냥.
모델 출신에 연기도 못하면서 얼굴로 자꾸 주연 맡는 남주 임지석에 대한 비난.
데뷔한 지 고작 일 년 만에 TVM 주연을 따낸 손수현에 대한 의혹과 반감 등.
악플들이 상당했다.
노진희 작가와 임지석, 손수현이 특히 악플러들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그 와중에 염라아이 시우와 러블리 근육맨 강동훈, 호텔 레드문을 연출한 이상철 PD는 그나마 드라마에 위안을 주는 선플 메이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뭐, 정확히 말해 이 셋만 남기고 작가랑 남주 & 여주를 갈아 치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엄마 노트북으로 연예란 댓글을 확인한 시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악플 장난 아니네. 왜 이렇게까지 악플을 달지?”
정당한 연기력 비판이라면 모를까, 인격 모독 수준의 도를 넘는 악플들도 종종 보였다.
“그 형이랑 누나랑 엄청 주눅 들어서 연기하겠구나. 심하네.”
시우가 지석과 수현의 걱정을 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네~”
현주가 나가서 택배를 받았다.
정태 엄마가 보낸 시우의 생일 선물과 어린이날 선물이었다.
생일과 크리스마스 등 특별한 날이면 매년 빠짐없이 선물을 보내 주는 정태 엄마였다.
첫 만남 때 자신의 다리를 꼬집은 진상 짓은 잊을 수가 없지만, 그 후 5년 동안은 또 아주 극진히 잘 챙겨 줬다.
물론 떡고물이 목적이라는 것은 시우도 잘 알고 있었다.
“시우야, 와서 옷 입어 봐!”
현주의 부름에 시우가 작은방에서 거실로 나갔다.
‘올해는 또 얼마나 희한한 옷들을 보냈으려나. 정태 엄마의 패션 센스는 정말 아슬아슬하지.’
판타스틱 or 호러블이다.
중간이 없는 센스.
“우리 시우가 [바다아이> 드라마 한다고 일부러 그런 이미지의 옷들로 고르셨대. 그리고 바다탐험대 장난감도 보내셨네? 시우, 좋겠다.”
현주는 옷들을 꺼내 시우에게 들어 보였다.
“짜잔-! 어? 이번 옷들은…… 어머, 되게 예쁘네?”
자신의 옷들을 본 시우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시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개똥도 약에 쓴다더니-
‘이번엔 판타스틱이네? 이거…… 회사에서 골라 준 옷들보다 훨씬 나은데?’
* * *
“레디, 액션!”
[바다아이> 첫 촬영일이었다.이상철 감독은 힘차게 레디 액션을 외쳤다.
21살의 여대생이 혼자 살고 있는 작은 원룸.
공간은 아담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집들이 흔히 그렇듯, 전문가의 감각적인 손길로 꾸며진 예쁜 집이었다.
원룸 바닥에 앉은 수현이 테이블에 놓인 공과금 용지들을 보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진짜…… 공부도 해야 되고, 돈도 벌어야 되고, 서울 물가는 너무 비싸고. 식비…… 식비…… 너무 많이 먹어. 그놈. 바다에서 왔다면서 비싼 해산물만 그렇게 처먹는 게 말이 돼? 동족 의식이 없나?”
타악!
공과금 내역을 정리하던 수현이 펜을 테이블 위에 탁 내리쳤다.
그리고 테이블에 힘없이 푹 엎드렸다가, 다시 얼굴을 불쑥 들어 올렸다.
“……하긴, 바다에서 걔네가 소를 먹겠어 돼지를 먹겠어. 평생 해산물만 먹으며 살았겠지. 내가 이해해야지. 먹는 걸로 치사하게…… 그러는 거 아닌데…….”
부들부들.
수현이 지로 용지 하나를 들고 손을 떨었다.
상하수도 요금이 적힌 용지였다.
“도저히 이것만큼은 용납이 안 된다, 진짜. 우리 집이 스파야!?”
욕실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물소리에 수현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다다다-!
한달음에 달려간 수현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야! 너! 적당히 하고 나와-! 너무한 거 아냐!? 그리고 최소한 물을 받아 놓고 들어가 있든가! 왜 계속 샤워기 틀어 놓는 건데!”
욕실에 놓인 미니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고 있던 작은 아이가 수현을 쳐다봤다.
시우의 귀엽고 예쁜 얼굴이 카메라에 들어왔다.
돌고래 떼가 그려진 반팔 티셔츠를 입은 시우가 욕조 속에서 인어 꼬리를 파닥파닥 신 나게 흔들며 말했다.
“고인 물이랑~ 흐르는 물이~ 어떻게 똑같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