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9)
9. 내겐 너무 무서운 아내
3월의 늦추위도 사라지고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꽃이 피는 나들이의 계절이었다.
시우는 아빠, 엄마와 축구장에 가서 축구도 보고, 남산에도 올라가고, 청계천도 구경했다.
“시우야! 아빠 여깄다! 딱 열 걸음만 걸어 볼까?”
그리고 4월 초.
여의도 벚꽃 축제에서 마침내 신발을 신고 혼자 걸음마를 떼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걷는 것은 물론이고 뒤로 달리기도, 장애물 넘기도, 하여튼 뭐든 할 수 있었지만 적당한 시점에서 걷는 것을 택한 시우였다.
‘이 정도면 평범하지. 드디어 답답한 거 하나 줄었네. 하아. 이제 말문은 또 언제 트나.’
걷기는 어느 날 갑자기 걸으면 되는데, 말 트는 것은 단계적으로 언어를 늘려 가야 자연스럽기 때문에 약간 귀찮았다.
‘그냥 돌 지나고 언어 폭발시켜? 아니야. 그래도 부모님께 아이 말 늘어 가는 재미를 느끼게 해 드려야지.’
말에 대해선 나중에 생각하고, 우선 오늘은 집 밖에서 인생의 첫 발을 내딛는 모습을 보여 드릴 때였다.
시우는 두 팔을 신나게 휘두르며 아빠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갔다.
땅에 무릎을 대고 앉은 도진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어! 그래! 현주야! 시우 걷는다! 찍고 있어?!”
혹시나 넘어지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으로 시우를 쫓아가면서 현주가 말했다.
“응, 오빠! 찍고 있어! 잘 걷네. 우리 아들. 어떡해. 기분 되게 이상해. 눈도 못 뜨고 누워 있던 아기였는데…….”
현주는 작은 두 발로 열심히 걷는 시우를 보며 울컥 눈물이 치미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힘이 드는지 잠시 멈춰 선 시우는 휴대폰으로 자신을 찍고 있는 엄마를 돌아보고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시우의 머리 위로 벚꽃 잎이 날아와 붙었다.
“엄마아!”
엄마에게 손을 흔들어 준 시우는 다시 아장아장 걸어 기다리고 있던 아빠의 품에 포옥 안겼다.
“잘했어! 시우야! 아빠한테 뽀뽀!”
시우는 아빠의 볼에 뽀뽀를 했다.
볼 뽀뽀를 받은 도진이 이번에는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다.
“입에도!”
……입은 사양합니다.
시우는 몸을 휙 돌려 엄마에게 갔다.
그 단호한 뒷모습에 도진이 웃으며 말했다.
“입 뽀뽀는 진짜 안 해 준다. 그렇게 싫은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우를 안아 들면서 현주가 말했다.
“나한테도 입에는 안 해 줘.”
현주는 도진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잘 찍혔나 확인해 봐. 나중에 부모님이랑 언니한테 보내 줘야지. 언니 좋아하겠다.”
“잘 나왔네. 벚꽃도 예쁘고, CF의 한 장면 같은데?”
“그치? 우리 시우가 워낙 잘생겨 주셔서 카메라만 갖다 대면 작품이야.”
현주는 시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 * *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내겐 너무 무서운 아내의 촬영일이 되었다.
“우리 시우. 잠도 잘 자고 밥도 많이 먹었으니까 오늘 가서 힘내자~!”
첫돌을 열흘 정도 앞둔 시우와 함께 현주는 집을 나섰다.
택시에 몸을 싣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일산에 위치한 세트장이었다.
반년 만에 다시 느끼는 촬영장 분위기에 현주는 조금 긴장이 되었다.
심호흡을 하고 세트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약 3억 원을 투입해 두 달 동안 공들여 만든 세트장에는 주인공 부부의 30평대 아파트 내부를 포함해 실내 촬영에 필요한 주요 장소들이 거대한 규모로 들어서 있었다.
놀이터에서 야외 촬영 한 컷만을 찍어 본 현주와 시우는 신기한 마음에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감독과 출연자들을 찾아갔다.
“어머, 시우 엄마?”
스태프를 따라 복잡한 세트장을 걷던 현주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딱 한 번 맡아 봤을 뿐이지만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향수 냄새가 훅 풍겨 왔다.
정태 엄마였다.
“안녕하세요. 정태야, 안녕.”
현주가 인사를 했다.
엄마 손을 잡고 화장실에 다녀온 정태는 잠시 머뭇거리다 인사를 하지 않고 얼굴을 돌려 버렸다.
‘저런 버릇없는 놈을 봤나.’
시우는 엄마의 인사를 무시하는 정태의 태도에 혀를 찼다.
그러나 특별히 화가 나거나 하진 않았다.
여러 번의 생을 통해 저 나이대 어린애들이 인사를 잘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 이한수 감독과 관계자들 앞에서 꾸벅 배꼽 인사를 한 것은 엄마에게 철저히 훈련받은 비즈니스 인사였다.
흔들던 손을 머쓱하게 거둬들인 현주는 정태 엄마에게 말했다.
“일찍 오셨네요.”
정태 엄마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미리 인사도 드리고 간식도 돌리고 해야 해서요. 시우 엄마도 가서 좀 먹어요. 내가 신사동에 있는 아주 유명한 디저트 집에서 한 달 전에 예약해서 가져온 것들이니까. 뭐…… 맛의 차이를 알지는 모르겠지만.”
유행과 동떨어져 있는 현주의 옷과 신발, 그리고 약간 낡아 보이는 기저귀 가방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하는 정태 엄마.
현주는 어쩐지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정태 엄마의 시선을 피해 앞으로 먼저 걸어 나갔다.
“저는 감독님께 인사드리러 가 볼게요.”
“같이 가요. 우리도 화장실 갔다 돌아가는 거니까. 지금 한태수 배우님 와 계시고 이수진 배우님은 아직 안 오셨는데, 한태수 배우님이 우리 정태를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시더라고. 진짜 아들 삼고 싶다나 뭐라나.”
“아, 네. 잘 됐네요.”
“맞다. 이번 영화 캐스팅 소식 올리고 우리 정태 인싸 팔로워가 4만 명으로 늘었어요. 팬분들이 영화 꼭 보겠다고…….”
깔깔 웃으면서 떠드는 정태 엄마의 투 머치 토크를 한 귀로 듣고 흘리며 현주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저 독한 향수 냄새로부터 시우를 빨리 피신시키고 싶었다.
세트장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계약할 때 만난 적이 있는 이한수 감독이 보였다.
현주는 시우를 안은 채 잰걸음으로 가서 인사를 했다.
“감독님.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올 때 안 힘들었어요? 여기가 좀 외져서 정태 어머님은 운전해서 들어오다 아주 혼났다던데.”
“네. 저는 택시 타고 와서…….”
“어우, 아기 데리고 택시 타고 다니려면 힘들겠다. 다음에는 우리 스태프한테 픽업해 달라고 해요. 아님, 집 가까우면 정태 엄마한테 부탁해도 되고.”
이한수 감독의 말에 정태 엄마가 나섰다.
“그래요. 저 어차피 삼성동 살아서 일산 오려면 서울 가로질러 와야 되니까 태워 줄게요. 이따 갈 때도 같이 타고 가든가. 택시비 아깝잖아.”
“저, 저는 괜찮은데…….”
대화를 듣다 시우는 속으로 몸서리를 쳤다.
집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저 향수 냄새를 맡아야 한다고?
생각만 해도 멀미가 났다.
시우가 엄마에게 좀 더 강하게 거절하라고 어떻게 의사 전달을 할까 고민할 때, 이한수 감독 쪽으로 한 남자가 다가왔다.
“정태 어머님이 성격이 참 좋으세요. 스태프들 먹으라고 간식도 챙겨 오시고, 또 흔쾌히 운전도 해 주신다고 하고.”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현주는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청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영화 내겐 너무 무서운 여친의 남자 주인공 한태수였다.
뛰어난 외모의 배우는 아니었으나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영화계의 만능 재주꾼이었다.
“안녕하세요. 시우 어머님이시죠? 한태수라고 합니다.”
“네. 저, 저는 윤시우 엄마고요. 진짜 팬이에요. 스무 살 때 영화 너무 재밌게 봤어요.”
현주의 말에 한태수는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영화는 이수진 씨가 다 했죠 뭐. 이번에도 저는 수진이한테 묻어가면 될 거 같아요.”
한태수는 겸손하게 말한 뒤, 시우에게 관심을 내비쳤다.
“얘가 시우죠? 유명한 아기 배우님 얼굴 좀 볼까요?”
“네.”
현주는 엄마 품에 기대 있던 시우를 돌려 안았다.
한태수를 본 시우는 내심 생각했다.
‘그냥 동네 형처럼 생겼네?’
어디에나 흔히 있을 법한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아빠가 전작에서 이 남자의 친구3으로 출연했다고 들었는데, 냉정히 말해 외모만 놓고 보면 아빠가 주인공이고 이 남자가 친구3이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심지어 아빠는 배우로 실패했고, 이 남자는 스타가 됐다.
그만큼 이 남자의 연기력이 특출나다는 뜻이다.
시우는 배우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외모가 아니라 연기력이라는 걸 깨달았다.
‘외모가 마력이라면 연기력은…… 생명력인가?’
마력이 높을수록 쓸 수 있는 화려한 기술들이 늘어난다.
하지만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반면 생명력은 수명 그 자체다.
이를테면 아빠는 잠재된 마력은 높은데 수명이 늘지 않는 배우였던 거다.
‘둘 다 갖추면 완벽하겠네.’
만약 그냥 갖추기만 한 게 아니라 둘 다 만렙을 찍어 버리면?
‘일단 외모는 70번째 생부터였나…… 패시브 스킬로 매번 만렙 찍고 태어나니까 이미 끝났고. 연기 연습만 살짝 빡세게 해 주면, 막생에서 또 레전드 트로피 하나 얻고 갈지도.’
시우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마지막 생에 어떻게 실컷 놀다 죽을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으나, 배우의 삶도 꽤 재밌는 인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101번째 생이 없다는 게 너무 슬픈 시우였기에, 마지막에 여러 인생들을 체험할 수 있는 배우라는 직업은 제법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많이 살아 놓고도 여전히 더 살고 싶다니 나도 참 욕심이 많아.’
고기 욕심도 먹어 본 놈이 낸다고, 많이 살아보고 누려봤기 때문에 생에 대한 애착도 많은 시우였다.
‘배우라…… 배우 윤시우…… 흐음…… 있어 보이네.’
시우가 배우의 생에 대해 떠올리고 있을 때, 한태수는 입을 헤 벌리고 시우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었다.
“와아~ 이야~ 우와~ 진짜…… 한수 형! 기억나지? 수진이 걔는 10년 전에도 애들이라면 질색을 했거든?”
시우에게 눈을 고정시킨 상태로 한태수가 이한수 감독에게 말했다.
이한수 감독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수진이가 제일 싫어하는 두 가지가 애랑 고양이잖아. 연기할 때는 감성이 폭발하면서 현실에서는 많이 메말랐어. 참 걱정이다. 나중에 결혼이나 할 수 있을는지.”
“결혼은 뭐…… 그…… 안 해도 되고, 좋아하는 남자 있으면 해도 되고…… 아니, 여하간! 이래서 수진이가 시우시우 했구나? 야아, 완전 너무 귀엽다! 이런 아이 하나 낳는다는 보장만 있으면 응? 한수 형, 안 그래?”
“뭐가?”
“그…… 수진이도 엄마가 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지 않겠냐고. 정말 이런 아기 낳을 수만 있음 나는 뭐든 다 할 거 같은데?”
11개월 시우의 기절하리만치 귀여운 외모 아우라에 놀란 한태수가 감탄사를 연발하자 질투가 난 정태 엄마가 슬쩍 한마디를 던졌다.
“한태수 배우님은 아까 우리 정태도 아들 삼고 싶다고 하시더니~ 호호!”
“네? 제가요?”
“……네? 아니, 아까…… 그러셨잖아요.”
“아~ 그랬나? 정태도 귀여워요. 와, 그런데 시우는 약간 비현실적으로 예쁜데? 너 혹시 아기 천사 아냐? 하하하!”
시우는 손가락을 꼬옥 움켜쥐었다.
‘오글거리게 뭐라는 거야, 이 아저씨가.’
시우의 손발이 없어지려는 찰나, 휴대폰을 확인한 이한수 감독이 현장에 있는 모두에게 외쳤다.
“방금 연락 왔는데 이수진 씨 좀 늦는다니까 태수랑 애들 씬부터 찍자고!”
스태프들은 일사불란하게 촬영 준비에 들어갔다.
조연출이 아이 엄마들에게 말했다.
“애들 먼저 찍을게요. 저기 거실 있죠? 장난감 있으니까 우선 놀면서 대기하세요. 이따 촬영 때는 대본에 적힌 대로 정태가 잘하면 되고, 시우는 울지 않고 가만히만 있으면 됩니다. 아셨죠?”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거실로 걸어가면서 시우는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렸다.
‘내가 장식품도 아니고 나한테는 왜 늘 아무것도 하지 말래?’
반년 만에 경험하는 두 번째 촬영이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다 끝나는 건 재미없을 거 같았다.
‘뭐라도 해야 재밌지. 좋아. 5개월 동안 성장한 나의 연기력을 보여 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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