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92)
92. 은돌이
“종수야~!”
마치 동네 어린아이가 친구를 부르듯 종수 할배네 집에 도착한 석호는 종수의 이름을 외쳤다.
시우는 대문 앞에서 5년 만에 다시 찾은 종수 할배네 집 마당을 들여다봤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넓은 마당 한가운데 평상이 놓여 있었다.
‘그 녀석은 잘 컸으려나?’
이름이 뭐였더라?
영수?
언어 신동 자격으로 저 평상 위에서 자신과 말 배틀을 벌인 조그만 아기가 떠올랐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워떠빠악~~?”으로 자신이 상황을 정리했다.
시우는 이럴 때 추억이 돋는다는 표현을 쓰나 보다 생각하며 무심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야야, 우리 손주 춥다. 빨리 문 열어라.”
덜컹.
대문이 열리자 석호는 시우의 손을 잡고 마당으로 들어갔다.
집 뒤편에 있는 축사에서 소를 돌보다 이제 막 집에 들어가 몸을 녹이던 종수 할배가 슬리퍼를 신고 뛰쳐나왔다.
“와아~ 이게 뭔 영광이래! 슈퍼~ 스타께서 오셨구먼! 내가 온다는 말 듣고 아까 찾아가려고 준비 딱 했는데, 갑자기 금순이가 새끼를 낳으려고 하더라고~ 그래서 못 갔어.”
“금순이가? 낳았는가?”
“낳았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진통이 오다 말더라고. 의사 말로는 오늘 저녁에나 나올 거 같다네~ 나는 오늘 잠은 다 잔 거 같어.”
“고생하겠구먼.”
“어여 들어와! 시우야, 할아버지 기억나냐? 종수 할배여. 종수 할배.”
동네 어르신의 ‘기억나냐?’ 시즌2가 시작되었다.
“참말로 이쁘게도 컸다! 쪼그매가지고는 우리 손주랑 다슬기 구경하고 물장구도 치고 그랬는데. 잠깐만. 여기 딸기 있으니까. 이거 먹고 있어. 할아버지가 네 친구한테 전화 걸어 줄게.”
시우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온 종수 할배는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시우야, 아~”
“아~”
할아버지와 함께 뜨끈한 거실 바닥에 앉은 시우가 딸기를 얌얌 맛있게 먹고 있는데, 종수 할배가 휴대폰을 들고 왔다.
“시우야, 영수~ 네 친구 영수~”
……세 살 때 한 번 본 것뿐이라 친구라고 부르긴 많이 애매했으나, 아기 때 나란히 앉아 다슬기죽을 먹던 모습이 생생한 종수 할배 사이드에서 보자면 둘은 소꿉친구였다.
시우는 할아버지가 물려 준 딸기를 입안으로 쏙 집어넣고 휴대폰 화면을 봤다.
볼살이 빵빵한 똘똘하게 생긴 한 어린아이가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너도 낯설겠지. 어색할 거야.’
특히 그때 일을 기억하는 자신과 달리 영수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영상 너머에서 영수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수가 시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안, 안녀엉~ 나는 영수야. 반가워.]시우는 로봇처럼 인사하는 영수가 귀여워 그만 웃고 말았다.
“안녕! 나중에~ 시골 오면 같이 놀자.”
[그래. 좋아. 나 너…… TV에서 봤는데…… 활 진짜 잘 쏘더라~]“우리아이 예체능 봤어?”
[응. 그리고 게임 광고도 봤어. 엄청 멋있었어.]“고마워~”
시우와 영수가 통화하는 장면을 흐뭇하게 보던 종수 할배는 아이들이 작별 인사를 하자, 휴대폰을 받아 들고 말했다.
“영수야~ 명절 때 와서 시우랑 맛난 것두 먹구. 같이 썰매도 타고, 야도 바둑 배운다니까 둘이 바둑도 두고 혀~ 알겄지? 우리 강아지, 할아버지가 많이 사랑한다!”
전화를 끊은 종수 할배를 석호 할배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시우랑 영수랑 8살 때 바둑 대결하기로 한 거 기억하나?”
종수 할배가 껄껄 웃었다.
“그럼~ 내가 그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손주가 워낙에 똑똑해 가지고 바둑 학원에서 선생님이 아주 칭찬을 입이 닳도록 하신다더라고!”
종수 할배는 선제공격을 날린 뒤, 짓궂은 미소와 함께 석호 할배의 표정을 슥 살폈다.
“후후후.”
석호 할배는 웃고 있었다.
낮은 목소리로, 석호 할배가 입을 열었다.
“우리 시우는 말이여. 똑똑한 정도가 아녀. 천재여.”
“……뭔 소리를 또 할라고 그렇게 분위기를 잡는가?”
“아들이랑 며느리가 자랑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나도 오늘 알았는데…… 우리 시우는…… 학원에서 선생들을 가르친다더라고?”
종수 할배는 석호 할배의 무리수 발언에 할 말을 잃었다.
“…….”
“왜? 안 믿기는가?”
“아니, 이 친구야. 얘기에 조미료를 쳐도 정도껏 쳐야지. 갑자기 너무 막 나가 버리면 내가 받아치기가 곤란헌디?”
“긴 말 필요 없고. 바둑판 가져와. 네가 만약 우리 손주 이기면, 내가 네 소원대로 평생 종수 너를 내 형님으로 모신다!”
“푸하하하! 뭐여, 진심으로 하는 말이여?”
“그럼~”
“아이고, 좋다! 그래! 우리 손주가 나한테 아홉 점 깔고 두는데, 시우는 그럼 몇 점을 깔아 줘야 되나?”
“깔긴 뭘 깔어. 똑같은 조건으로 맞바둑 가자고.”
“뭐? 마, 마, 맞바둑? 여덟 살짜리 애랑 맞바둑을 두라고?”
“왜, 슬슬 무서워지는가?”
“……하 참, 살다 살다. 뭘 믿고 이렇게 허세를 심하게 부린다냐. 그래. 좋을 대로 하자고. 나 안 봐줄 거여. 내가 이기면 형님으로 모신다고 네 입으로 얘기했다?”
종수 할배는 석호 할배와의 오랜 라이벌 관계를 끝내고, 형님 소리를 들을 생각에 희희낙락 즐거운 얼굴로 바둑판을 가지러 갔다.
그사이.
시우는 포크로 딸기 하나를 콕 찍어 입에 넣고, 우물우물 귀엽게 씹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적당히 해요? 아니면 진짜로 해요?”
할아버지는 바둑판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종수 할배를 본 뒤, 짧고 명확하게 오더를 내렸다.
“시우야. 뿌셔~ 버려~”
할아버지와 손자는 어쩐지 닮은 듯한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고 손바닥을 맞부딪쳤다.
학원에서 윤슈슈 사범님이라고 불리고 있는 시우의 정체를 모르는 종수 할배는 해맑은 얼굴로 바둑판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우리 시우, 어디 얼마나 잘 두나 함 볼까?”
작은 손가락 사이에 바둑알을 끼고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시우를 할배 미소로 바라보던 종수 할배는 바둑돌이 쌓여 감에 따라 점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
딱 50수 부근.
시작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종수 할배는 더 이상 바둑알을 집어 들지 못했다.
처음에는 시우가 제법 어른들 두는 것처럼 흉내를 낸다 싶었다.
그러다 20수쯤 뭔가 심상찮음을 느꼈고, 30수에 전투 발생.
50수에 폭망.
끝났다.
일반적인 바둑이 200수 이상 두고 나서 끝난다는 걸 감안하면, 자리에 앉자마자 끝난 셈이었다.
“다, 다, 다시 둬 보자.”
연달아 두 판을 더 뒀지만, 시우의 위압감만 재차 느낄 따름이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시우와 바둑판을 번갈아 보던 종수 할배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천, 천재구먼…….”
석호 할배는 어깨를 쭈욱 펴고 말했다.
“우리 손주가 엄청나게 똑똑하다고 내가 말했잖어.”
“아니, 엄청나게 똑똑한 정도가 아니라! 이, 이, 이거는 천재지! 천재! 시우야. 너, 너는 인터넷인가 거기서 기력이 어떻게 되냐? 우리 손주는 23급이던데, 너는 혹시…… 혹시 단이냐?”
기분이 하늘까지 날아가 얼굴이 발갛게 변한 석호 할배는 짐짓 별거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툭 대답을 던졌다.
“9단이여.”
정확히는 9단 실력이라고 들었지만, 그냥 9단이라고 알아들은 석호 할배였다.
“흐어억!”
종수 할배가 놀라 까무러치려는 순간, 집 뒷마당과 연결되어 있는 부엌에 있는 문이 벌컥 열렸다.
종수 할배네 할머니가 외쳤다.
“영감~! 금순이가 아무래도 지금 새끼를 낳으려는 거 같어!”
“뭐여? 지금? 역시 내 감이 맞았구먼!”
종수 할배는 일어나 신발을 신고 축사로 갔다.
시우도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종수 할배를 따라갔다.
몸집이 큰 어미 소가 서서 새끼를 낳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석호야, 마침 잘됐다. 나랑 같이 좀 당기자. 시우는 할머니랑 여기 난로 앞에서 따뜻하게 있어.”
“네~”
시우는 종수 할배네 할머니와 같이 난로 앞에 서서 소를 지켜봤다.
“할머니~”
“응?”
“금순이 새끼 처음 낳는 거예요?”
“응. 처음 낳는 거야.”
‘힘들겠네. 체력이라도 회복시켜 줘야겠다.’
금순이는 고통스러운지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금순이를 가리킨 시우가 마법을 사용하자 은은한 기운이 뻗어 나가 금순이의 몸을 감쌌다.
‘겨울이니까 축사도 좀 따뜻하게 해 줄까?’
시우는 송아지가 태어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축사에 열기를 퍼뜨리고 있는데, 금순이가 시우를 쳐다보더니 한차례 울었다.
– 음메~
눈물이 맺힌 금순이의 눈을 본 시우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힘내~ 금방 나올 거야!”
금순이는 본능적으로 안전한 곳을 찾아, 시우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더니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힘을 주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종수 할배와 석호 할배가 분주해졌다.
시우는 불안해하는 금순이를 달랬다.
“잘하고 있어~ 무서워하지 마. 할아버지들이 도와주려고 그러는 거야.”
금순이는 언젠가부터 계속 시우만 바라보면서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종수 할배와 석호 할배는 금순이의 몸을 고정시킨 다음, 밖으로 나온 새끼의 발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볏짚을 감았다.
“너랑 파트너가 될 줄은 몰랐지만, 호흡이 중요하니까 잘해 보자. 석호야.”
“오냐. 지금은 내가 딱 네 지시만 따를 테니까 신호를 잘 보내라. 종수야.”
시우는 귀여운 두 할아버지들을 보며, 손주 미소를 지었다.
두 할배는 송아지의 발에 묶은 줄을 꽉 잡고 금순이의 상태를 주시했다.
그냥 냅다 잡아당기면 사람도 소도 힘만 빠지고 새끼의 발목이 다친다.
금순이가 힘을 줄 때, 박자를 맞춰 당겨야 했다.
“금순아~”
‘내가 하나, 둘, 셋! 할 때마다 힘줘! 알았지?’
금순이를 부른 시우는 금순이가 일정한 간격으로 힘을 줄 수 있도록 유도를 했다.
‘쉬러 왔다가 소 출산을 돕고 있을 줄이야.’
평생 이런 일을 겪을 기회가 또 있을까 싶었다.
시우와 금순이와, 두 할배의 노력에 의해 귀여운 송아지가 숨풍 무사히 세상에 태어났다.
– 음메에~
시우의 치유 마법으로 출산과 동시에 산후조리를 마친 금순이가 고마운 마음을 담아 힘차게 울었다.
종수 할배는 긴장한 탓에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고 시우에게 말했다.
“우리 시우도 계속 금순이한테 말 걸어 주고~ 아주 어른스럽고 착하네! 시우야, 송아지 이름 뭐라고 지을까. 우리 시우가 한번 지어 봐라~!”
금순이는 종수 할배가 뒷마당에서 그냥 반려동물처럼 키우고 있는 소였다.
“우으음~ 수컷이니까…… 은돌이?”
은돌이는 시우의 앞에서 휘청이며 걷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은돌아, 힘내! 너 눈이 진짜 예쁘다~!”
시우는 은돌이를 보자 할아버지 집에 두고 온 시윤이가 떠올랐다.
이따 가서 많이 놀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시우는 밝게 웃었다.
* * *
1월을 맞아 휴가를 떠난 것은 시우만이 아니었다.
매니저인 태우도 특별 휴가를 받아 서울을 떠나 있었다.
시우와는 달리 일주일간의 짧은 휴가였지만, 잠시 여행을 다녀오기엔 충분했다.
얼마 전에 구입한 카메라를 들고 태우는 제주도 북촌포구의 풍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겨울 제주도도 참 아름답지. 좋네.”
태우는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이 찍은 사진들을 감상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풍경 사진을 찍는 게 태우의 소소한 취미 생활이었다.
“내일은 한라산이나 올라가 볼까.”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카페들을 보면서, 어디로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회사에서 문자가 날아왔다.
시우와 관련된 소식은 휴가 중이라도 바로바로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하고 온 성실한 매니저 태우였다.
“음, 섭외가 진짜 끝도 없이 들어오네. 걸러야 할 게 태반이라는 게 문제지만.”
긴 설명들이 가득한 문자를 능숙하게 포인트만 짚어 내며 훑어 내리던 태우의 엄지손가락이 잠시 멈췄다.
“응?”
색다른 캐스팅 제안이 있었다.
“……애니메이션 더빙?”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