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ing in the Spotlight since Birth RAW novel - Chapter (94)
94. 나는 레서판다다~
“안녕? 내 이름은 레슈야~”
응?
어색하다.
시우는 뭔가 모르게 낯설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인사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위화감이 들었다.
조금 더 신경 써서 두 번째 대사를 쳤다.
“왜 놀라는 거야?”
‘……뭐지. 내 목소리가 붕 뜨는 기분인데.’
고개를 갸웃거린 시우는 연이어 대본과 영상에 맞춰 다음 대사들을 입에 담았으나, 역시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광고나 드라마에서 녹음을 할 때와는 약간 달랐다.
테스트 녹음을 마치고 밖으로 나온 시우에게 감독이 말했다.
“잘했어, 시우야. 발음도 좋고, 목소리도 너무 귀엽다.”
감독과 몇몇 관계자들이 칭찬의 말을 던졌다.
“감사합니다~”
시우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감독은 처음 치고 충분히 잘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여덟 살 아이에게 전문 성우와 같은 노련함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맑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캐릭터에게 입혀 주면 OK였다.
시우와 현주, 태우는 사무실에서 감독과 잠시 대화를 더 나누고, 집으로 돌아갔다.
3월.
시우는 다시 녹음실을 찾았다.
그동안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며, 틈나는 대로 갓 엔터 녹음실에서 더빙 연습도 한 시우였다.
그 결과 전보다는 많이 능숙해졌지만,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부분은 남아 있었다.
뭐랄까.
연기할 때와는 다르게 캐릭터에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할까.
주변 사람들은 다들 잘한다고 하니 괜히 자기 혼자 예민하게 구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어딘가 흉내만 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시우는 연습 흔적들이 빼곡하게 남아 있는 대본을 품에 안고, 녹음실로 들어가 인사를 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아이들의 히어로 핑크포로로의 성우들이 시우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어머, 어서 와! 바다아이 잘 봤어!”
“애가 실물이 더 이쁜데? 이쪽으로 앉아. 너 차기작은 뭐 하니? 영화하니? 드라마? 기대된다.”
“시우야, 여기 앉아. 저 아저씨 옆자리 말고 이모 옆자리로 와.”
‘헐…… 대박.’
시우는 깜짝 놀랐다.
바다아이를 잘 봤다고 말하는 주인공 핑크 아기 사자 포로로의 목소리.
자신의 차기작을 묻는 까칠한 꼬마 코뿔소 리노의 목소리.
그리고 이모 옆자리로 오라고 소파를 팡팡 치는 까불이 햄스터 핑크롱의 목소리까지.
TV에서만 듣던 목소리들이 현실로 튀어나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수도 없이 봐 온 핑크포로로 애니메이션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오자 시우는 무척이나 신기했다.
시우를 위해 일부러 더빙 때의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던 성우들은 시우의 놀란 표정을 보고 너무 귀여워 다들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이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할 때가 이 일을 하면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우리 시우는 핑크포로로에서 누굴 제일 좋아해?”
포로로의 중년 여자 성우가 물었다.
시우의 손이 반사적으로 핑크롱 성우를 가리켰다.
시우의 선택을 받은 삼십 대 후반의 여자 성우는 승리의 세리머니를 펼쳤다.
“감사합니다~ 우리 시우 전문가네. 원래 이 만화 처음 보는 아이들이 포로로 좋아하고, 어느 정도 봤다 싶으면 다들 핑크롱으로 갈아타는 거야. 호호호.”
잠시 후-
다른 성우들도 속속 도착을 했고, 장난을 치며 놀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성우들은 진지한 얼굴로 목을 풀며 녹음을 준비했다.
시우는 성우들이 하는 행동을 유심히 보면서 따라 했다.
곧이어 실전과 똑같은 리허설이 시작됐다.
캐릭터의 입모양과 성우의 대사 타이밍을 최종적으로 맞춰 보는 것이다.
시우도 연습을 많이 해 오긴 했지만 막상 녹음 시작을 앞두니 꽤 긴장감이 느껴졌다.
영화나 드라마는 자신의 행동이나, 표정, 눈빛 등 표현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었으나 더빙은 오직 목소리 하나로 자신의 역할을 소화해 내야 했다.
시우에게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다만 이것을 제대로 해내고 나면 향후 미국에 가서 낯선 영어로 긴 대사를 긴 호흡으로 치는 일에 있어서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우는 우선 전문 성우들을 보며 뭐든 흡수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아직 시우가 있는 동화나라로 들어오기 전인 핑크포로로의 성우들은 각자 맡은 역할을 완벽하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내가 간식을 가져올게!”
까칠한 꼬마 코뿔소 리노가 말했다.
자주 불평을 늘어놓는 투덜이지만, 마을 최고의 요리 솜씨를 가진 코뿔소였다.
“해바라기씨도 가져올 거야~?”
햄스터 핑크롱이었다.
“으휴, 알았어! 다들 기다려. 나 놔두고 먼저 책 읽으면 화낼 거다!”
코뿔소 리노가 떠났다.
사자, 햄스터, 고슴도치, 양은 조용히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안경을 쓴 똑똑이 양 민디가 헛기침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얘들아, 우리 먼저 읽을까? 리노가 간식을 만드는 동안 기다리면 너무 심심하잖아.”
아기 사자 포로로가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우리…… 앞부분만 쪼끔만 읽자~ 리노가 오면 같이 또 읽으면 되지~”
“안 돼! 난 해바라기씨를 먹으면서 책을 읽을 거야. 리노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햄스터 핑크롱은 사람들이 영화를 볼 때 팝콘을 먹듯이, 자신은 책을 볼 때 해바라기씨를 꼭 먹어야 하는 규칙이라도 있는지 강력하게 주장했다.
핑크롱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던 아기 고슴도치 호기가 자신의 주머니에서 숨겨놨던 해바라기씨 하나를 슥 내밀었다.
해바라기씨를 받은 핑크롱은 정신없이 해바라기씨를 갉아 먹었다.
“갈갈갈갈갈갈갈-!”
시우는 멍한 얼굴로 핑크롱 성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한 마리의…… 햄스터였다.
성우는 마이크를 붙잡고 햄스터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진짜 핑크롱처럼 갉아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먹는 연기를 마친 성우는 손으로 입을 슥 닦고 태연히 방긋 웃는 얼굴로 다음 대사를 쳤다.
“책 볼까?”
영상 속의 핑크롱이 책 앞에 가서 앉았다.
얼마 후, 네 명의 친구들은 마법의 책에 의해 동화 속 세상으로 빨려 들어갔고 뒤늦게 해바라기씨 봉지와 간식들을 들고 포로로의 집에 들어온 리노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뱉었다.
“뭐야? 다들 어디 갔지? 책만 펼쳐져 있네? 얘들아~! 내가 간식을 가져왔어! 숨바꼭질하는 거야?”
내레이션을 하는 성우가 장면을 정리했다.
“리노는 친구들이 책 속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어요~”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성우들은 긴장을 풀고 길게 숨을 내쉰 뒤, 밖으로 나왔다.
분위기에 익숙해지기 위해 함께 들어가 있던 시우도 성우들의 뒤를 쫓아 나왔다.
뭔가를 깨달았는지 시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시우야, 아저씨 아줌마들 하는 거 보니까 어때?”
“멋있어요~”
“그래? 시우는 하던 대로 편하게 하면 돼. 워낙 목소리가 맑고 예쁘니까 억지로 힘주고 그러지 말고, 힘 빼고 편안하게~ 연습하던 대로만 해. 알겠지, 시우야?”
“네!”
알겠다고 대답한 시우였으나, 연습하던 대로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방금 전, 성우들의 열정적인 연기를 눈앞에서 목격한 시우는 자신이 착각하고 있던 뭔가를 알아챘다.
목소리로만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온몸으로 연기를 하고, 그것을 응축해서 목소리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지금까지 연기를 할 때 그 캐릭터를 자신에게 입히는 방식으로 연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자신을 그 캐릭터에게 입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본에 있는 캐릭터를 불러내 빙의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빈 껍데기인 레서판다 속으로 들어가 빙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도 있구나.’
시우는 이미 옛날에 싹 다 외운 대본을 홀린 듯이 다시 들여다봤다.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시우의 연기 이해도가 레벨업되고 있었다.
“자, 이제 동화나라 첫 장면 가 볼게요.”
성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우도 대본을 들고 녹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해바라기씨 대신 마이크를 갉아먹을 기세로 엄청난 열연을 보여 준 핑크롱의 성우가 시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따뜻하게 말했다.
“우리 레슈, 잘해 보자. 틀려도 괜찮으니까 즐겁게 자신 있게 해.”
“네~!”
시우는 밝은 표정으로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발성이나 발음은 원래부터 뛰어났기에 캐릭터와의 싱크로가 관건이었는데, 감을 잡은 시우였다.
‘나는 레서판다다~ 나는 레서판다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레서판다 레슈다~ 가자!’
시우는 자신의 키에 맞춰진 작은 마이크 앞에 가서 당당히 자리를 잡고 섰다.
감을 잡았으면 이제 자신의 실력을 보여 줄 차례였다.
* * *
2월부터 4월까지.
광고 활동과 더빙 활동 등으로 시우가 시간을 보내는 사이 계절은 따뜻한 봄이 되었다.
시우는 그 기간 동안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유치원 졸업식에서는 지호를 포함한 같은 반 친구들과 부채춤 공연을 했는데, 시우가 건강하게 자라 어느덧 유치원을 졸업한다는 사실에 현주는 계속 울컥한 마음을 참다 참다-
마지막에 아이들이 다 같이 손을 잡고 부모님을 위한 노래를 부르자, 결국 도진의 품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그리고 현주의 눈물은 새빛초등학교 대강당에서 열린 입학식 때도 이어졌다.
시우는 좋은 날인데 자꾸 우는 엄마가 안타까워 일부러 더 밝게 활기차게 졸업식과 입학식을 마쳤다.
시윤이도 두 번 다 참석을 했는데, 자기 형아 있다고 계속 좋다고 소리를 질러 대다 어느 순간 아기 띠 안에서 좌우로 번갈아 고개를 꺾으며 잠이 들었다.
그렇게 입학한 초등학교 생활도 벌써 한 달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친 시우는 유치원부터 같이 올라온 지호와 잠깐 공놀이를 하다 학교 후문으로 나갔다.
초등학교 1학년생들의 경우, 수업 마치는 시각에 보호자들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이들이 갓 입학한 3월에는 거의 학교 앞이 미어터질 정도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찻길을 건너야 하는 아이들의 보호자들만 보이게 되고, 집이 가까운 아이들은 차츰차츰 혼자 통학하는 연습을 시작하곤 했다.
학교가 단지 내에 있었기 때문에 후문만 나오면 바로 아파트였다.
시우와 지호는 둘이 같이 사이좋게 하교를 했다.
“시우야, 잘 가! 미국 갔다 와서 꼭 전화해~”
“알았어. 안녕! 학교 잘 다니고 있어~”
지호와 작별 인사를 한 시우는 집으로 돌아와 밥과 간식을 먹고 조금 쉬다가, 엄마와 함께 짐을 챙겼다.
“아부~ 형아~ 나두~ 나두~”
“시윤이도 가고 싶어? 이번에는 형아만 갔다 올게~ 미안해.”
“후응…… 나두우…….”
짐 가방 안으로 기어 들어간 시윤이가 가방 문을 닫으려는 것을, 시우가 막았다.
“시윤아~ 형아가 장난감 사 올게! 엄청 멋있는 거! 알았어?”
“우웅…… 까까~”
“아, 그래. 먹는 게 더 좋구나? 형아가 까까도 많이 사 올게. 대신 엄마 말 잘 듣고 있어야 된다~”
“웅~! 아쪄~”
시윤이는 해맑게 웃으며 안아 달라고 시우에게 손을 뻗었다.
시우는 짐 가방에 들어가 있는 시윤이를 꺼내고, 시윤이를 따라 짐 가방에 들어가고 있는 네로도 빼낸 뒤 짐 가방을 얼른 잠갔다.
현주가 시우의 겉옷을 들고 오며 말했다.
“시우야, 가서 이모랑 태우 아저씨 말 잘 듣고. 위험한 행동 절대 하지 말고. 알겠지?”
“응! 알았어. 엄마도 아프지 말고 잘 있어야 해~”
“그래. 엄마도 가고 싶은데, 시윤이 조금만 더 크면 그때는 엄마랑 같이 가자.”
“네~!”
짐을 다 꾸리고 기다리자 매니저 태우에게 전화가 왔다.
시우는 태우, 희주, 그리고 뒷좌석에 숨어 있다가 짜잔~ 하고 나타난 갓 엔터 대표 영민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
다른 직원들은 미국에 이미 도착해 있다고 했다.
태우가 운전하는 차는 한참을 달려 인천 공항에 다다랐다.
멀리 보이는 공항을 바라보며 시우는 생각했다.
두 번째 미국행이었다.
첫 번째는 단역만 하고 돌아왔지만,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
시우는 시골에서 들었던 할아버지 석호의 강렬한 외침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시우야. 뿌셔~ 버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