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1
두더지는 함부로 건들지 마라 (3)
불타는 건물들.
무너지는 석상들.
마치 전쟁이라도 난 듯 곳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는 요란했으나 정작 부수는 사람들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숨죽인 침묵만이 있었을 뿐.
도시를 바삐 뛰어다니는 드워프들의 얼굴은 본래 피부색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만 재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들의 자랑이던 수염은 열기에 의해 바짝 타들어 갔으며 평생을 갈고 닦았던 장비들은 지금 빛나는 선조들의 유산을 부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한 번의 망치질을 내려칠 때마다 그들의 눈에서는 차마 담아둘 수 없는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빛나는 것을 갖고 있다면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드워프들은 그것에 실패했다.
남은 것은 오직 처참한 몰락뿐이며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하지 못할 방랑을 시작해야 한다.
그것을 알고 있던 드워프들의 눈물은 새까만 잿더미와 섞여 까맣게 흘러내렸다.
“······아직 이곳의 불은 꺼지지 않았군요.”
모든 것이 비통하게 무너지는 이 순간, 그래도 아직 빛을 잃지 않은 용광로가 하나 남아있었다.
석상처럼 굳은 채 용광로를 바라보는 노인의 눈빛과 함께.
“누군가 하나쯤은 마지막을 봐줘야지.”
늙은 드워프가 말하는 마지막이라는 말은 단순히 용광로만을 뜻하는 말을 아닐 것이다.
찬란히 빛났던 시대는 끝나고 있고 노인은 그 시대의 마지막을 지켜볼 사람이었다.
“그렇습니까.”
이제는 끝나버릴 찬란한 문명의 끝을 보며 사내는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내가 너무 늦지 않아서.
“의뢰를 하러 왔습니다.”
“······지금 말인가?”
쿠과가가강-!
저 멀리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광산들.
평생을 함께했던 도시의 모든 것들을 부수는 눈물 섞인 망치 소리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스스로 부수고 있는 이 비극의 순간 속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오직 정체 모를 사내와 마지막 용광로의 주인뿐이었다.
“영원한 불꽃만이 다스릴 수 있는 금속을 가져왔습니다.”
사내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낡은 배낭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늙은 드워프에게 보여주었다.
“······그것은.”
사내가 덮여있던 천을 벗기자 그곳에는 은은한 빛을 내는 은색의 괴가 놓여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용광로의 불길 앞에서도 스스로의 빛을 잃지 않는 금속은 지금 이 상황 속에서도 늙은 드워프의 눈길을 잡아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만들어 주십시오.”
옷깃 사이로 얼핏 보인 사내의 손은 새로 생긴 상처로 가득했다.
시절이 이러해서일까.
희귀한 금속만 보면 흥분하고 마는 드워프였지만 노인은 눈앞의 은색 괴보다도 상처투성이인 사내의 손에 더욱 눈길이 가고 말았다.
“무엇을 만들어달란 말인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답을 들은 사내는 자세를 단정히 하며 늙은 드워프를 바라보았다.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 여기까지 찾아온 사내는 이제야 자그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용을 죽일 수 있는 검이 필요합니다.”
나는 이 세상 가장 완벽한 용을 죽일 것이다.
지금 무너져 내리는 드워프들의 도시처럼 밑바닥에 깔린 채 울부짖는 세계들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용광로의 주인을 바라보는 사내의 두 눈은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보다 뜨거웠다.
※※※※
어스름한 새벽, 영주관에 마련되어 있는 마구간 앞.
“······.”
그곳에서 블라드는 고민스러운 표정과 함께 여물 한 가닥을 빼물고는 질겅질겅 씹고 있었다.
누아르는 그런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왜 인간이 여물을 씹고 있는지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정작 대답을 해줘야 하는 블라드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대장이야?”
“어.”
졸린 눈을 비비며 새벽같이 나온 고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블라드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을 좀 설쳤어.”
고트는 어느새 자신의 할 일을 미리 다 해놓은 블라드를 보며 기쁜 듯 손을 비비고는 우리에 몸을 기댔다.
“하긴 트롤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니까 잠을 설칠 만도 하지. 여기 영주도 트롤이라는 말에 엄청 놀라더라고.”
어젯밤 울려 퍼졌던 트롤의 강렬한 포효는 영지민들의 심령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비록 멀고도 깊은 숲에서 울려 퍼진 소리였지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 트롤의 포효는 달마티아 남작으로 하여금 몇 안 되는 병사들까지 소집해놓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조금 아쉬운 건 시체까지 있었다면 더 완벽했다는 거였겠지. 트롤의 피는 비싸게 판매되는 물품이거든.”
블라드는 고트의 말을 듣고는 혀를 쯧 하고 찼다.
고트의 말대로 트롤의 시체를 확보하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게 그렇게 타 버릴 줄 몰랐지.”
어젯밤 해치웠던 트롤의 시체는 손 쓸 틈도 없이 순식간에 타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장작을 높게 쌓아도 그렇게 태울 수는 없을 만큼 깔끔하고 흔적 없게.
누가 보아도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도가 보일 만큼 노골적인 뒤처리였다.
“······아무래도 이번 일은 요제프 님께 보고를 해야겠는데.”
오직 새까만 재만이 남은 트롤의 흔적을 보며 블라드는 우트만 남작령에서의 일이 떠올렸다.
수상했고 불길했으며 익숙한 느낌이 드는 도브레치티의 목 없는 트롤은 분명 요제프에게 보고해야 하는 사건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는 마법사가 없잖아. 파발로 보낼 생각이야?”
“아니.”
파발로는 안 된다.
지금은 움직이기 힘든 겨울이었던데다 사태가 심히 수상해 보이니 가능한 한 빨리 알리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동쪽에 있는 도시 중에 가장 가까운 곳은 어디야.”
“도시라······. 어디 보자.”
블라드의 마음을 헤아린 고트는 달마티아 남작에게 받은 지도를 펼친 뒤 재빨리 다음 목적지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있을 만한 가장 가까운 도시는 타노보야. 비츠카야 백작령에 있는 도시인데. 지도만 보면 일주일은 걸리겠어.”
“좋아.”
마법사들이란 세계의 신비를 다루는 자들이다.
비록 그들은 교회가 좋아하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같이 전보를 통해 빠르게 소식을 전한다던가 또는 각종 잡학다식한 지식을 통해 영주들에게 조언해주고는 하였으니 귀족들의 입장에서는 꼭 한 명씩은 옆에 두고 싶어 하는 존재들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타노보로 하자. 길 좀 알아놔 봐.”
“알았어.”
달마티아 남작은 가난한 영지의 주인답게 마법사는커녕 순례자의 표식을 증명해 줄 변변한 사제조차 초빙하지 못한 영주였다.
그렇기에 블라드는 이곳보다는 더 큰 도시로 나가 그곳의 영주에게 마법사를 빌려볼 생각이었다.
비록 다른 가문에 속해있지만, 자신은 신분이 확실한 기사였으니 여차하면 지금처럼 무언가 일이라도 하나 도와주면 될 것이다.
길을 알아보겠다는 말과 함께 고트가 마구간에서 떠나가자 블라드는 또다시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새벽같이 마구간으로 나온 이유는 어제 힘을 써줬던 누아르를 위함이기도 했지만, 쉽사리 다시 잠에 들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꿈을 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러나 잠을 뒤척이게 했던 강렬한 꿈은 지금 신기하게도 신기루처럼 기억에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지금에 와서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아련히 들려왔던 망치 소리와 흩날리는 잿더미들. 그리고 결연히 내뱉었던 사내의 마지막 한마디뿐.
“용을 잡는다라.”
블라드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꿈속에서 들려왔던 사내의 마지막 말은 분명 그동안 익숙히 들어왔던 목소리가 분명했다.
어쩌면 자신이 꾸었던 꿈은 꿈이 아니라 목소리의 잔재가 남겨두었던 기억의 파편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어두웠던 겨울의 새벽은 가고.
저 멀리서 산등성이에서부터 오늘의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밝아오는 아침만큼이나 빛나기 시작하는 블라드의 검 끝.
예전과는 달리 조금은 더 명확해진 블라드의 오러 주위에서 반짝이는 하얀색 번개들이 있었다.
그것들 모두가 블라드의 세계 주위를 떠돌고 있던 목소리의 잔재들이었다.
그날 목소리는 블라드에게 좀 더 깊은 세계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고 블라드는 오늘의 오러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있었다.
좀 더 깊은 세계를 향해 기사는 그렇게 왼쪽 눈을 감았다.
※※※※
“왜 벌써 가려고 하나? 눈이라도 멈춘 다음에 가지 그러나?”
추운 날씨였음에도 직접 영주관 앞까지 배웅하러 나온 달마티아 남작은 실로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흉흉한 사건이 있었으니 당분간은 떠나지 않았으면 하는 심정이었으나 남작의 얼굴 한구석에서는 어서 빨리 떠났으면 하는 상반된 감정 또한 같이 떠오르고 있었다.
특히나 뒤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고트를 볼 때는 더욱.
“제가 해야 할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남작님.”
손에서 떠난 금화만큼이나 남작의 얼굴도 어두워졌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전직 소매치기와 사기꾼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산적 토벌, 보리 도둑 찾기, 트롤 사냥, 거기에 실종된 소녀까지.
그래도 악랄하게 뽑아내지는 않았으니 지금과 같은 배웅을 받는 것일 테다.
“부디 어제 제가 한 말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래. 내 새겨듣도록 하겠네.”
“이것은 그분에 대한 제 성의라 생각하십시오.”
블라드는 빛나는 두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대신 여러 가지 말들을 영주에게 당부해두었다.
“자네의 말대로 앞으로 보리밭을 넓히려 숲을 불태운다던가, 함부로 나무를 베지 않겠네.”
아무리 시골구석에 박힌 영지라 할지라도 대놓고 정령의 존재나 신령스러운 참나무를 말하기에는 어려운 시기였다.
지금은 오직 하나뿐인 신만이 진리가 될 수 있는 그런 세상이었으니까.
“그리고 가끔은 숲에 소소한 공물을 바치는 것도 좋을 겁니다. 분명 어젯밤 저는 숲에서 흐르는 그분의 뜻을 느꼈으니까요.”
그렇기에 블라드는 정령이라는 이름 대신 신의 존재를 빌려 두더지를 위한 배려를 해놓았다.
더는 굶주린 두더지가 보리 종자를 훔치지 않게 말이다.
“알겠네! 그렇게 해서 보리밭만 지킬 수 있다면!”
“여기 저의 승리를 축복해주신 신께 드리는 저의 공물입니다.”
블라드는 반짝이는 금화 한 닢을 달마티아 남작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렇게까지 성의를 표시했는데 자신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아. 북쪽에서 온 기사는 신실하기까지 하군!”
조금이나마 돈을 돌려받게 된 가난한 남작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져 있었다.
정확히 금화 한 닢의 반짝인 만큼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달마티아 남작을 본 블라드는 저 멀리 보이는 도브레치티의 숲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마을 사람들의 인사와 함께 떠나는 블라드의 안장 뒤에는 작은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달마티아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
아무도 없는 고요한 숲속.
트롤이 도끼로 후려갈긴 참나무에는 여전히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래도 그날 밤과 같은 참혹한 모습은 아니었다.
누군가 엉성한 솜씨로 상처 구석구석에 푸른 이끼들을 발라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상처 입은 나무에 효과가 있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참나무는 마음에 들었다는 듯 그저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를 가지런히 떨 뿐이었다.
뀨우!
조용히 흔들리던 참나무 밑에서 자그마한 바구니에 고개를 처박고는 뒷발을 바둥거리는 두더지가 있었다.
새빨간 산딸기가 가득한 바구니.
그 바구니에 있는 산딸기는 자신을 구해준 두더지를 위해 소녀가 마련한 것이었다.
정령은 실존하는 육체가 없기에 굳이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다만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바로 존재감.
자신들을 생각해주는 누군가의 기억, 또는 감정 같은 것들이 정령들을 이 땅 위에 존재하게 한다.
그렇기에 오늘 두더지는 실로 오랜만에 굶주렸던 존재감을 채울 수 있었다.
산딸기 안에 담겨 있던 소녀의 감정은 참으로 따뜻했다.
뀨우?
한참 산딸기에 정신이 팔려있던 두더지는 저 멀리에 있는 기척을 감지하고는 코를 쫑긋거렸다.
평소와는 다르게 도끼나 곡괭이가 아닌 자그마한 바구니를 들고 오는 사람들.
그들은 비록 신에게 바칠 공물을 들고 오고 있었지만, 숲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믿어주는 것만으로도 빛나는 두더지에게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안에 담긴 감정과 기억,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뀨뀨!
이제는 잊혀지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더지는 기분이 좋다는 듯 웃으며 자그마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손가락이 치켜진 방향.
그곳은 떠나가는 블라드가 있는 방향이었다.
오늘의 공물로써 힘을 조금이나마 되찾은 땅의 정령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숲을 떠나는 기사를 향해 작은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었다.
오늘, 도브레치티의 숲으로 신의 이름 아래 잊혀 있던 빛나는 노란 별 하나가 돌아왔다.
하이날의 레몬 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도브체리티의 참나무도 조금은 푸른색을 되찾은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