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3
북쪽보다 차가운 곳 (2)
창살 위에 쌓여 있는 눈송이들.
움직인 적도 없고 움직일 생각도 없는 저택의 문을 블라드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굳게 닫힌 문을 보는 것은 사실 익숙한 일이었다.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해 문을 활짝 열어준 곳은 오히려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우습나?”
“네? 아니······그것이 아니라.”
북부에서 온 뜨내기 기사를 바라보는 문지기들의 반응이 차갑다.
감히 기사를 업신여기는 그들의 태도가 비츠카야 백작가의 위세를 짐작하게 한다.
그 위세를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알아봤어야 했고 미처 몰라본 것은 분명 나의 잘못일 것이다.
“나는 그저 대답을 바라는 것이다. 허락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은 너희들의 잘못이 되어야 할 것이다.
블라드는 말을 마침과 동시에 짐에서부터 자그마한 깃발을 꺼내고서는 단숨에 땅에다 박아넣었다.
까앙-!
자그맣게 튀어 오르는 불꽃.
단단하게 얼어붙은 땅에서 마치 검과 검이 부딪히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뭐 하시는······.”
블라드는 방금의 행동으로 자신의 수준을 내보였다.
그 모습을 본 문지기들은 이제야 블라드가 여태껏 보아왔던 기사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기사는 백작에게 무언가를 구걸하러 온 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일개 기사라 할지라도 백작님의 대답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북부에서부터 시작된 차가운 바람이 얼어붙은 땅에 꽂혀있는 깃발의 고개를 들게 했다.
그리고 블라드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했다.
흩날리는 깃발 속 새겨져 있는 가문과 단체들의 문장들.
그리고 그 문장들 가운데서 문지기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표식이 하나 있었다.
“용······살자.”
“이런······.”
문지기들이 북부 가문의 문장 모두를 알아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블라드의 깃발 안에는 그들의 눈으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표식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대륙 어디에 있다 해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표식이었다.
“나는 지금부터 그 대답을 기다리겠다.”
불을 뿜고 있는 용의 고개 아래로 짙게 그어진 선 하나.
용살자의 표식.
그 표식을 알아본 문지기들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가기 시작했다.
비츠카야 백작령 안에서 자그마한 북부의 깃발 하나가 휘날리고 있었다.
이유 없는 무시와 차별을 부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그것은 오직 스스로에 대한 증명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저택 앞에 서 있는 기사는 가장 완벽했던 피로 스스로를 증명한 사람이었다.
깃발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지만, 기사의 푸른 눈동자는 굳건할 뿐이었다.
※※※※
쟁반 가득 쌓여 있는 야채와 과일들.
그 위에 듬뿍 뿌려진 소스가 형편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이가 몇이라고?”
“올해로 18살입니다.”
한참 식사를 하던 중이었던지 비츠카야 백작의 앞에는 산더미 같은 샐러드들이 쌓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식으로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꾸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18살인데 용을 잡았다고?”
“그때 당시에는 17살이었습니다.”
“······허.”
가장 빠른 북부의 용. 린드부름.
비츠카야 백작은 자신의 앞에 있는 어린 기사가 그것을 잡아냈다는 것에 깊은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표식은 진짜인데.’
명성은 헛된 것이나 명예는 어디서나 그 빛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애송이 기사가 들고 온 깃발에는 분명 무시할 수 없는 명예로운 표식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저 표식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용살 기사단의 허락이 있어야만 할 터.
“그 표식의 사용을 누가 허락했는가?”
블라드는 들려오는 물음에 자신을 바라보는 중부의 영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깃발에 새겨져 있던 문장과 표식은 하나가 아니었음에도 백작은 끊임없이 용살자의 표식에 관해 물어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알아챌 수 있었다.
북부의 영향력은 이곳까지 미치지 않는다는 것을.
“용살 기사단장인 미르셰아 드라굴리아 경입니다.”
그리고 용살 기사단의 위용이 중부를 아우르고 있다는 것까지.
“미르셰아······용살 기사단장.”
블라드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하나에 백작뿐만 아니라 주위에 서 있던 기사들까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갑작스러운 그들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이 말이 거짓일 경우 너는 여기서 죽는다.”
미르셰아의 이름을 들은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블라드에게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감히 북부의 뜨내기 주제에 드라굴리아 가문과 용살 기사단을 거론하다니.
감히 사칭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의 이름이 들려오자 비츠카야 백작의 눈빛이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 안에 깃든 귀족의 푸른 피가 블라드를 사정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제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백작님. 저는 분명 린드부름을 죽였고 그 모습을 미르셰아 경이 똑똑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는 백작의 날카로운 경고조차도 태연히 받아넘길 뿐이었다.
거만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블라드의 자세는 비츠카야 백작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들게 했다.
‘······누가 키웠는지는 몰라도 물건을 만들어놨군.’
백작이라는 작위가 가지는 압박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앞에서도 전혀 흔들림 없는 애송이 기사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쯤 되면 설령 사기꾼이라 할지라도 인정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래. 마법사를 빌리고 싶다고?”
“그렇습니다. 쇼아라에 있을 저의 주군께 급한 소식 하나를 전하고 싶습니다.”
임무 중 전보를 빌리러 오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있는 일이기는 했다.
만약 블라드가 북부가 아닌 중부의 기사였다면 백작은 흔쾌히 수정구를 빌려주었을 것이다.
“무슨 일로 전보를 쓰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꽤나 급한 일 같아서 말이지.”
“······.”
그러나 북부의 기사가 중부, 그것도 동쪽 부근에 자리 잡은 영지까지 내려와 전보를 빌린 일은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비츠카야 백작은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 아닌 군주로서의 의무 때문에라도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가 무슨 소식을 전하려 하는지 알 필요가 있었다.
범상치 않은 자가 전하고자 하는 급한 소식은 분명 중요한 일일 테니까.
“······며칠 전 도브레치티의 숲에서 사특한 존재를 발견했습니다. 트롤의 형상이었고 죽여도 죽지 않았습니다.”
내막을 말하라는 백작의 말에 블라드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굳이 여기서 말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알려진다 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일일 것이다.
악하고 사특한 존재를 경계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특별한 일은 아닐 것이다.
“죽여도 죽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북부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정체 모를 것이 서서히 기지개를 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웅성거리던 로비가 사특한 존재를 설명하는 블라드의 말에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지고 말았다.
그만큼 흑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는 사람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이었다.
“······죽지 않는 놈이 어디 있었다고?”
“달마티아 가문의 영지인 도브레치티입니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가 바로 이곳 타노보이죠.”
나의 일도 있지만, 너희에게도 경고해주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그런 나를 이렇게 홀대하다니.
비츠카야 백작은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북부에서 온 손님에게 수정구를 빌려주어라!”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의 눈빛에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백작은 재빨리 블라드의 신분을 북부의 불청객에서 귀한 손님으로 격상시켰다.
일개 기사에게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백작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남자였다.
“감사합니다.”
“밖에 세워둔 것은 미안하게 되었네. 요즘은 자리를 구하러 오는 기사들이 많아서 말이지. 자네도 그런 기사 중 하나인 줄로만 알았었네.”
백작의 신분이었지만 직접 사과를 구하는 태도를 보며 블라드 또한 적잖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도 열어주지 않은 채 자신을 무시했던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빠른 태도 전환이었으니까.
“이해합니다. 백작님.”
“그래. 어서 보고하러 가보게.”
깔끔한 인사, 교육받은 자세.
북부에서 왔으나 중부의 태도가 깃든 블라드를 보며 백작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백작은 그렇게 블라드의 마지막 모습까지도 눈에 새겨두고 있었다.
“당장 알아봐라.”
“네. 지금 당장 도브레치티에 사람을······.”
“그거 말고!”
블라드가 나가고 어느새 조용해진 로비.
그 위에서 비츠카야 백작의 작았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문밖에도 없을 블라드를 의식하는 백작의 목소리가 긴박했다.
“저 자식이 진짜 용살자인지. 바예지드의 기사인지 알아내란 말이다!”
“네, 넵!”
일의 우선순위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단장.
그 모습을 보는 백작의 눈빛이 매서웠다.
“다들 나가봐!”
어서 알아보라는 듯 손짓까지 하며 축객령을 내리는 백작의 모습에 로비에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나가기 시작했다.
다들 빠릿한 모습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조급해 보이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비츠카야 백작의 성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하!”
이제야 혼자가 된 백작은 앞에 놓여 있던 샐러드를 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건방진 데다가 당당하기까지 하군.”
갑작스러운 불청객 때문에 이제야 늦은 식사 자리에 앉은 백작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당당할 만한 실력이 있는지 알아봐야겠군.”
백작이 들고 있는 은수저 위로 하나의 형상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아직도 백작의 뇌리에는 깃발에 새겨져 있던 용살자의 표식이 선명했다.
※※※※
“엄청 비싸네······.”
난생처음 보내보는 전보였다.
마법적인 술식을 이용해 먼 곳으로 소식을 보내는 전서는 분명 대체할 수 없을 만큼 유용한 것이었지만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얼마나 비싼데 그래?”
“한 글자당 1골드라던데. 멀면 더 비싸고.”
“······몇 글자를 썼는데?”
고트는 블라드의 설명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달마티아 백작에게 갖은 수단을 다해 뜯어낸 비용이 겨우 10골드 남짓.
그러나 방금 블라드의 말대로라면 겨우 열 글자나 보내면 홀랑 날아가는 돈이라는 말이었다.
“비용은 걱정하지 말라던데.”
“아이고······다행이다.”
비용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백작의 마법사는 전보를 특정 장소에 보내기 위해서는 그 지역에 해당하는 파장 번호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나 난생처음 시도하는 전보에 대해 블라드가 알고 있을 리가 만무.
결국, 백작의 마법사는 한숨을 푹 쉬며 자신이 직접 쇼아라에 해당하는 번호를 알아보아야만 했다.
“그냥 아무 마법사만 찾아갔으면 손 놓고 있을 뻔했네.”
“······.”
고트의 말에 머쓱한 기분이 든 블라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저택의 복도를 걸어갔다.
곳곳에 새겨져 있는 화려한 조각이나 장식들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는데 무슨 기사야 기사는.’
그냥 무턱대고 전보를 보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알아야 하는 지식과 상식들이 있었다.
아마 쇼아라에 가만히 붙어있었다 할지라도 제대로 된 기사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저 검만 다룰 줄 안다고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 여기에서의 시작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백작님과 안면을 터놓은 건 잘한 거 같아.”
자책과 상념에 빠져 점점 굳어져 가는 블라드의 얼굴을 보며 고트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려 애썼다.
직접 검으로 도움을 줄 수 없는 자신이었기에 이런 역할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고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잠시 생각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방금의 말에 대해 되물었지만 고트는 어깨를 으쓱이며 주위에 있는 장식물들을 가리킬 뿐이었다.
“이게 뭔데.”
깊은 생각에 빠져 여태껏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저택의 조각과 장식품들.
비록 이런 사치품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문외한인 블라드가 보기에도 상당히 이국적인 정취가 느껴지는 장식들이었다.
“엘프들이 선물한 거라고 하더라고.”
블라드가 백작을 만나는 동안 고트도 놀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훌륭한 사기꾼은 언제나 주위 동향에 민감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여기 시종들한테 물어보니까 엘프들은 아무나 자신들의 땅에 들여보내지 않는다던데.”
중부에서도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영지 비츠카야 백작령.
예전에는 도브레치티만큼이나 시골 영지나 다름없던 곳이었지만 이번 영주 대에 들어서 평범한 무역의 거점 중 하나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 백작님만큼은 어떻게 교역로를 뚫어냈다는 거 아냐. 다시 말해 엘프들과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거지.”
“······.”
블라드는 들려오는 고트의 말에 정신이 확 드는 기분이었으나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벽에 새겨진 벽화 중 한 곳을 만져보았을 뿐이었다.
블라드의 손이 닿은 곳.
그곳에는 평범한 인간이라 하기에는 귀가 너무 기다란 사람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