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4
안개 속의 남자 (1)
목소리의 세계는 색이 진한 세계.
그 세계를 통해 보았던 알리시아의 호박석 안에는 가을의 풍경이 담겨 있었다.
너른 밀밭 사이에서 우뚝 솟아 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
블라드는 붉은 황혼 속으로 떨어지던 낙엽들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강렬했으며 아름다웠고 또한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던 풍경이었다.
“그래도 이제 조금은 보이네.”
블라드는 왼쪽 눈을 감고는 손잡이 끝에 박혀 있는 호박석을 바라보았다.
비록 목소리의 세계에서만큼 진하고 명확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단풍나무의 모습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일까.”
어느새 혼잣말이 입에 붙어버린 블라드는 침대 위에 앉아 조용히 중얼거렸으나 이제 더는 그의 말에 대답해주는 존재는 없었다.
오직 창가를 통해 들어오는 푸른 달빛만이 블라드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을 뿐이었다.
빠직-
감고 있던 블라드의 왼쪽 눈에서 자그마한 번개가 튀어 올랐다.
블라드는 목소리가 좀 더 깊은 세계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 차마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만약, 지금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물어본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겠노라고.
좀 더 깊고 넓은 세계에서 다시 만나자고.
달빛만이 비치는 어두운 방, 블라드의 눈에는 하얗게 내리치는 번개 한 줄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
“어떠한가?”
야채와 과일이 가득한 상을 물린 비츠카야 백작은 따뜻한 찻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엘프들이나 먹을 건강한 식단과 함께하는 그였지만 정작 식사를 마친 그의 얼굴에는 잔뜩 찌푸린 주름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블라드라는 기사가 용살자인 것은 확실했습니다.”
일에 대한 확인은 두 번 세 번해도 모자라다.
특히 수상한 인물을 확인하는 작업이라면 더욱더.
“그리고?”
“······실력 또한 확인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던 저희의 기사 중 블라드라는 기사에게 대적할만한 기사는 없었습니다.”
대련을 가장해 블라드에게 들이민 기사만 다섯이었다.
그리고 그중 셋은 당분간은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흠씬 두들겨 맞고 말았다.
만약 실전이었다면 목이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자네라면 어떠한가?”
기사단장은 마치 도발하듯 물어오는 백작의 질문에 입술을 깨물었다.
“십중팔구는 제가 승리할 겁니다.”
“······열 번 싸우면 한두 번은 질 수도 있다는 말이로군.”
비츠카야 백작은 지금 자신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기사가 얼마만큼의 황금을 받는지 잘 기억하고 있었다.
‘고작 18살짜리가······.’
젊었을 적, 나름 명성을 날리던 자신의 기사단장도 완벽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오러도 쓰지 못하는 쭉정이들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경비병들 목이라도 매달아보는 것은 어떨까?”
“네?”
진짜배기 기사였지만 알아보지 못했다.
차가운 밖에다 세워뒀을 정도로 첫인상은 처참했으니 쉽게 움직여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좀 깨어있는 놈이라면 좋을 텐데······.”
기사란 명예를 중시하는 자들.
자신이 한 행동은 분명 무례했으나 아직 기회는 있을 터였다.
백작은 그 어린놈의 기사가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기를 바랄 뿐이었다.
※※※※
“······.”
블라드는 자신의 앞으로 또르르 떨어져 내리는 찻물을 바라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영롱한 초록의 빛.
찻잔의 밑바닥까지 비쳐보이는 차(茶)의 색깔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무엇을 우려냈는지는 몰라도 짙은 풀잎의 냄새가 코를 통해 들어와 눈까지 시원해지게 했다.
“북쪽에서는 이렇게 차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뭇잎 우려낸 걸 마실 바에야 술병을 집어들겠죠.”
말은 퉁명스럽게 했어도 시선만은 차에서 떼지 못하는 블라드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미개한 북부인이라 할지라도 이 차를 본 순간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엘프들의 차(茶)일세. 동쪽 끝에 있는 숲에서 따와 특별히 가공한 물건이지.”
“엘프······.”
블라드는 백작의 입에서 엘프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혀로 입술을 쓸어내었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세를 바로 하며 백작을 바라보았다.
거래를 하는 도중에는 원하는 것을 내비쳐서는 안 될 것이다.
쇼아라의 장미, 마르셀라가 그렇게 말해주었었다.
“우리 영지의 주된 사업 중 하나가 바로 이런 엘프들의 특산품을 다루는 일이지. 아무래도 중앙에 계신 분들은 엘프들에 관련된 물건이라면 사족을 못 쓰셔서들 말이야.”
그동안은 시골의 한미한 가문이나 다름없었던 비츠카야 백작 가문이었으나 현 비츠카야 백작이 작위에 오르고 나서부터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다.
그는 몰락해가는 가문을 위해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엘프들과 인간들을 연결해주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자네 앞에 있는 차는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더 비싸게 취급받고 있지.”
“······.”
엘프들은 장수하는 종족이며, 그들의 신비로운 생태는 중앙 귀족들에게 충분히 호기심을 끌어낼 만하였다.
당장 블라드 앞에 놓여있는 차만 하더라도 수명을 늘려준다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니까.
“황금이라니,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겁니까?”
“정말 수명을 늘려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몸에 좋은 것은 확실하지. 특히 기침에는 특효약이랄까.”
소문은 부풀려지기 마련이고 엘프들의 차는 수명을 늘려주는 신비한 약초가 아니다.
다만 눈앞에 있는 금발의 기사는 엘프들의 차와는 달리 소문대로 정말 용을 죽인 기사였으니 진짜를 대하는 백작의 태도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나 챙겨드릴까?”
블라드는 백작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몸에 좋을뿐더러 기침에는 특효라는 말에 잠시 딴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제가 그만한 값어치를 하겠습니까?”
블라드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백작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백작이 자신을 부르고, 호의를 보여주려 하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과연 북부의 기사들은 호탕하기 그지없군! 내 그것이 마음에 드네!”
백작은 블라드가 자신의 제안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웃으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북쪽에서 왔다고 하길래 꽉 막힌 놈일 줄 알았더니 의외로 말이 통하는 녀석이었다.
“용까지 잡았다는 자네의 실력을 높이 사네. 그래서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수작은 얄팍하고 행동은 변덕스럽다.
그러나 서로가 내어줄 것이 있다면 손을 잡는 것을 거리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요근래 교역로에 숨어 나의 물건을 약탈하는 놈이 있어. 참 골치 아프지.”
“산적입니까?”
블라드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셔보았다.
맛이 없었다.
“아마 산적은 아닐걸세.”
비츠카야 백작은 찻잔을 든 채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북부의 기사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실로 많은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왜냐하면, 상행을 호위하던 내 기사들이 다 나가떨어졌거든.”
어쩌면 치부일 수도 있겠으나 백작의 말에는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는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이 무시하던 기사에게도 손을 내미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사들까지 말입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골치가 아프다고 하는 걸세.”
기사들까지 어찌 할 수 없었다는 말에 블라드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대련을 통해 가늠해봤던 비츠카야 기사들의 실력은 분명 크게 대단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번의 대련을 통해 바예지드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실감하게 될 정도였으니까.
“백작님의 기사들도 감당하지 못했는데 저라고 하겠습니까?”
그래도 블라드는 앓는 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눈앞의 백작과 마찬가지로 뒷골목 출신 기사는 자신의 값을 높이기 위해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 정도는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백작은 미소 한 번으로 블라드의 허튼 수를 잘라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그리고 린드부름의 살해자.”
“······.”
“산 로지노뿐만 아니라 북부 여러 가문의 인정을 받은 자네라면 충분히 해줄 거라고 나는 믿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자그마한 검은 주머니를 내밀었다.
일부러 조금 열어놓은 주머니 안에는 반짝이는 황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정체 모를 약탈자를 물리쳐만 준다면 더한 것도 내어주지.”
“저 혼자만으로는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좋네.”
비츠카야 백작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백작은 마르지 않는 황금줄이 있지만, 정체 모를 약탈자는 바로 그 줄을 틀어막고 있었다.
지금이야 버틸 만하지만, 이 줄이 계속해서 틀어막힌다면 결국은 자신의 목줄까지 쥐어잡히게 될 것이다.
“잠시만이라도 쫓아만 준다면 만족하네.”
눈앞의 애송이가 아무리 용살자라 한들 중부에는 이만한 실력을 갖춘 기사는 여럿 있다.
완전히 해결해준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어차피 싼 맛에 쓰는 것이니 진짜 고명한 기사를 초빙해올 때까지 버텨만 주어도 좋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백작님.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블라드는 이제야 본심을 비춘 백작을 향해 마주 웃어주었다.
“대신 저는 금화보다는 다른 것을 받고 싶습니다.”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열려있는 주머니에서 금화 몇 개만을 꺼내고는 조용히 백작에게 되돌려주었다.
“······나에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나?”
가치란 상대적인 것이다.
백작에게 있어 금화란 넘치도록 많은 것이지만 블라드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방랑하는 기사로써 넓은 세계를 보고 싶습니다.”
뒷골목 진창에 서 있을 때도 블라드는 자신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더러운 시궁창에 적셔지더라도 소년의 영혼만큼은 밝은 것을 바라보고자 노력했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엘프들의 도시에 한 번 안 들어가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목소리에게 이름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저 앞에 있는 금화 주머니보다도 무거운 것이었다.
“몸에 좋다는 엘프들의 차도 한 상자 주시면 좋구요.”
지금도 쇼아라에서는 데운 와인으로 기침을 억누르는 사내가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의를 바치겠다 맹세한 사람이었다.
요제프의 가녀린 기침 소리는 언제나 블라드의 마음 한구석을 무겁게 했었다.
“······엘프들의 도시에 들어가고 싶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을 요구하는 블라드를 보며 비츠카야 백작은 등받이에 깊게 등을 기대었다.
역시 흔들리지 않는 진짜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은 반짝이는 황금으로는 유혹되지 않는 놈들이었다.
“그 조건이라면 단순히 정체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네.”
백작은 곤란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비록 블라드는 쉽게 말하고 있었지만 고작 사람 하나 넣어주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엘프들과의 교류는 가문의 미래와 자신의 평생을 걸쳐 뚫어낸 작은 구멍이었고 그렇기에 블라드가 요구한 보상은 백작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해결하겠습니다.”
그러나 블라드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엘프들의 도시에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 지금, 백작에게서 어떻게든 협조를 얻어내야만 했다.
“그 정체 모를 약탈자가 다시는 백작님의 교역로를 탐내지 않게 말입니다.”
중부의 백작과 북부의 기사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서로가 내어줄 것만 있다면야 쓴 차를 마셔도 웃을 수 있고 무시하는 대상 앞에서도 호의를 베풀 수 있을 것이다.
“좋네.”
그것이 바로 거래이니까.
맞잡은 둘의 손이 금화 주머니 위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
어두운 밤, 까마득히 높은 절벽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위.
숨 쉬는 것만으로 축축한 짙은 안개 속에서 마부는 몸을 떨었다.
마부가 몸을 떠는 이유는 단순히 분위기가 으스스해서만은 아니었다.
“으, 으으······.”
바로 앞에서 마치 죽은 듯 다리 위에 널브러져 있는 사내들.
그들 사이로 꺾여져 있는 비츠카야의 깃발이 나뒹굴고 있었다.
쓰러져 있는 모두가 백작이 골라 보냈던 기사들이었다.
“엘프들의 물건이 안에 담겨 있나?”
“히, 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회색빛 두건을 뒤집어 쓴 정체 모를 남자.
마치 쇠를 긁는듯한 날카로운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거부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맞습니다! 살려주십시오!”
마부는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며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짙게 깔린 안개가 마치 자신의 목소리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으니까.
끼이이이익-!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지만, 마부는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눈을 떼지 않았다.
혹시라도 눈을 뜨면 두건을 뒤집어 쓴 남자와 마주칠까봐서.
짙은 안개 속 가느다란 돌다리 위에서 희미한 불빛 하나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짐을 잔뜩 실은 마차와 함께.
희미한 불빛마저도 다리 위에서 사라지자 곧 돌다리 위에는 다시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