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5
안개 속의 남자 (2)
2대의 마차, 30명은 넘는 인원.
짐을 싣고 내릴 짐꾼들보다도 검을 찬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이는 상행은 누가 보아도 기이한 구성을 보이고 있었다.
중간중간 보이는 기사들의 흉흉한 눈빛까지 합한다면 차라리 어딘가를 쳐들어가는 모습이나 다름없어 보였으니까.
“이러려고 저를 데려오신 겁니까?”
“······뭐 이래저래, 겸사겸사.”
따가운 뒤통수를 긁던 슈테판은 블라드의 성의 없는 대답에 그만 허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어쩐지 의뢰비를 크게 제시하더라니, 이런 함정이 숨어 있었다.
“저희가 이 도시에 자리 잡은 지 이제야 겨우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그런데 벌써부터 눈 밖에 나겠군요.”
“백작님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겠다고 말씀하셨네.”
“그렇다 해도 위의 분들이 살펴보지 못하는 그런 영역이 있기 마련이죠.”
그 말과 함께 슈테판은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신과 블라드를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고 있는 비츠카야의 기사들이 있었다.
“한탕 크게 하고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용병들의 생리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맞는 말을 틀린 상황에서 말씀하시니 뭐라 할 말이 없군요.”
슈테판은 이제 자신이 투덜거려도 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이 어수룩한 기사는 이미 비츠카야의 기사들과 크게 한판 벌인 뒤였고, 자신들은 그 사실을 모른 채 블라드에게 고용된 뒤였다.
다시 말해 블라드가 만들어 놓은 원한을 같이 덤터기 쓰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내 몫도 조금 떼어줄 테니까 잘해보자고. 앞으로도 이만한 건수는 별로 없을 거야.”
“······미치겠구만.”
블라드는 일부러 슈테판의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체하였다.
그가 내뱉는 불평불만 정도야 얼마든지 받아줄 용의가 있었으니까.
슈테판은 충분히 그만한 값을 하는 사내였다.
‘데려오길 잘했네.’
실력 있는 용병들답게 능숙하게 상행을 통제하는 가시나무 용병단.
마치 군인처럼 빠릿하게 움직이는 그들 덕분에 블라드는 수월하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역시 비협조적일 비츠카야의 기사들을 억지로 다루기보다는 차라리 용병들을 고용하겠다는 생각은 옳은 선택이었다.
“이 상태라면 3일 안에는 도착할 겁니다.”
“좋아.”
블라드는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버릇처럼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어루만졌다.
목소리가 남겨준 유일한 단서.
그 안에 새겨진 풍경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정령들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엘프들뿐일 것이다.
‘······3일 후라.’
신비에 감춰져 있으며 누군가에게는 동경의 대상인 엘프라는 종족.
블라드는 앞으로 3일 후면 그들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가슴이 뛰었다.
평생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지만 지금 느껴지는 심장의 떨림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시작은 목소리의 이름을 찾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의 여정은 분명 블라드의 세계를 넓혀주고 있었다.
※※※※
3일이라는 여정의 마지막 날.
빽빽이 들어선 나무 때문인지 들이마시는 공기의 냄새가 달라진 것만 같았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점점 없어지는 길 때문에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블라드 경, 지금부터는 저희가 인솔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기사가 보내는 날카로운 눈빛 때문에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블라드는 어디까지나 정체 모를 약탈자를 막기 위해 따라왔고, 이곳까지 무사히 상행을 인솔해왔으니 임무의 절반은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 셈이었다.
“역시 들은 대로 차를 실은 마차만 습격하는 모양이야.”
“음.”
자연스레 빠져나와 행렬의 뒤로 자리 잡은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고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트의 말대로 여태까지의 여정 중 단 한 번도 무언가의 습격을 받은 적은 없었다.
심지어 찻값을 지불할 은괴들이 실려있는 마차였음에도 말이다.
‘경계하는 건가?’
어쩌면 많은 무장인원이 부담되어 나서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약탈자는 차가 실려있는 마차가 있을 때만 나타난다고 했으니 돌아가는 길까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도착했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군요.”
생각을 마친 블라드는 슈테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빽빽한 숲속, 그 사이를 헤치듯 세워진 작은 건물들 몇 개가 있었다.
마치 벌목꾼들이 기거하는 캠프같이 생긴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주위에 둘러쳐진 울타리들이 꽤 견고해 보였다.
“저기가 거래할 장소인가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거래는 허락하지만 우리들의 숲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
엘프들은 인간들에게 쉽사리 자신들의 영역을 내어주지 않았고 비츠카야 백작은 배타적인 엘프들의 태도에 나름의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비록 지금 보이는 건물은 작아 보이지만 그 안에는 백작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엘프들이 먼저 와 있는 모양이군요. 블라드 경은 잠시 짐을 지켜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비츠카야의 기사들은 노골적으로 블라드와 엘프들의 만남을 방해하고 있었지만, 충분히 이해할만한 행동이기도 했다.
엘프들과의 인맥은 비츠카야 가문의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귀중한 일에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판단일 것이다.
물론 블라드에 대한 반감도 한몫했겠지만 말이다.
“엘프라는 거 한번 보고 싶었는데······.”
블라드는 고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의 지붕 위로 올라탔다.
춥다기보다는 시원한 바람이 블라드의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있었다.
“별수 있나. 지켜야지. 다들 경계해.”
기사가 좋은 점은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
고트와 용병들에게 지시를 내린 블라드는 다리를 꼬고는 지붕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평생을 사람이 가득한 도시에서 살아온 블라드에게 있어서 지금 같은 청량한 공기는 처음이었다.
북부의 평원에서도, 칸노르 가문의 목장에서도 느껴본 적 없던 그런 공기였다.
※※※※
자그마한 통나무 집 안, 기다란 테이블을 사이에 둔 남자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지급할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입니다.”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쳐지는 상자 하나.
상자 안의 얄팍함을 알아차린 사내의 귀가 날카롭게 세워졌다.
“약속이 다르군.”
작았지만 크게 울리는 목소리.
비츠카야의 기사는 그만 절로 침을 삼키고 말았다.
감히 가늠하기 힘든 깊은 울림이 그 목소리 안에 있었으니까.
“투존의 잎을 차로 만드는 과정은 많은 노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한둘의 노동력이 들어가는 게 아니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디스 님. 하지만······.”
바로 앞에 의자가 놓여 있었으나 기어이 서 있는 엘프들.
최대한 빨리 지금의 대화를 마치고 싶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비츠카야의 기사는 지금 자신들의 교역로를 틀어막고 있는 정체불명의 습격자에 대해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대금의 지불이 조금 늦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정도 함께.
“······차는 잘 팔리고 있나?”
협상이 엎어질 수도 있다.
까탈스럽기 그지없는 엘프들이었으니 나름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나 돌아오는 것은 그저 차가 잘 팔리고 있냐는 물음이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신다면 충분히 대금을 지급할 수 있을 겁니다.”
“중앙 말고도 다른 지역들은 어떻지? 그쪽도 우리들의 차를 좋아하나?”
“중앙의 귀족들 사이에서 충분히 화제가 되고 있으니 분명히 다른 곳의 귀족들도 좋아할 겁니다. 유행이란 그런 것이니까요.”
바라디스라 불린 엘프는 기사의 설명을 듣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의 지급이 늦어서 역정을 낼 줄만 알았더니만 엘프들도 지금의 사업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부디 우리가 다른 영주를 찾게 하는 수고를 만들지 말았으면 좋겠군.”
“······감사합니다.”
얼마든지 달리 거래할 영주를 찾을 수도 있다.
그런 협박과도 같은 바라디스의 마지막 말과 함께 테이블 위에 있던 상자가 엘프들 쪽으로 건네졌다.
비록 평소의 반밖에 되지 않는 대금이었으나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말씀하시지요.”
이제야 협상이 끝났나 싶어 속으로 한숨을 내쉬던 기사는 어느새 저 밖을 향해 눈을 가늘게 뜨고 있는 바라디스를 보았다.
나무로 막힌 벽이었으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이 마치 밖이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한 모양새였다.
“지금 자네들과 같이 온 녀석은 뭐지?”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마차 위에 누워있는 녀석 말이야.”
“······지금 마차 위에 누가 누워있습니까?”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에게 차갑게 시선을 돌린 바라디스는 가만히 자리에 서서 밖에서부터 전해지는 기이한 기운을 느껴보았다.
무어라고 확실히 말하기 힘든 어지러운 기운은 분명 자신의 감각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도 힘들었을 텐데 내가 차 한 잔 대접하지.”
“네?”
“따로 대금을 청구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비츠카야의 기사는 갑자기 살갑게 자신을 대하는 바라디스를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그러나 엘프의 눈은 바로 앞에 있는 기사가 아닌 저 멀리에 떨어져 있는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밖에 있는 자들도 불러와서 같이 마시지.”
낯설지만 낯익은 기운.
숲의 수호자는 무언가가 잔뜩 섞여 있는 저 수상한 기운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
잠들진 않았지만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는 실로 오랜만에 보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흩날리는 낙엽들의 색깔이 진했다.
“······뭐야. 이거.”
차가운 겨울에 눈을 감았으나 가을의 잔 숨결이 느껴지는 언덕 위에서 눈을 뜬 블라드는 당황하고 말았다.
꿈이라 하기에는 너무 생생한 풍경 속에서 블라드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노을이 흔들리는 밀밭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거 꿈 아닌 거 같은데.”
블라드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를 확실히 자각했다.
이제는 기억으로밖에 의지할 수 없는 호박석 안의 풍경.
목소리가 가본 적이 있다던 풍경이 있는 곳이었다.
블라드는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처음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다는 듯 굳건히 서 있는 단풍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꽃?”
그 나무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단풍나무에는 필 리가 없는 꽃이었으나 분명히 꽃들이 가득했다.
저물어 가는 낙엽들 사이로 자신들의 모습을 숨긴 색색의 꽃들이.
흔들리는 바람을 따라 그곳에 있던 꽃 중 하나가 낙엽과 함께 블라드에게로 떨어져 내려왔다.
새하얀 백금색을 가진 꽃송이였다.
“······미치겠네.”
떨어질 때는 꽃이었으나 내려올 때는 나비가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블라드는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하늘하늘 노을을 타고 내려오는 나비의 날갯짓이 잔망스러웠다.
모든 것이 저물어 가는 풍경 속에서 오직 한 송이의 나비만이 제 빛을 갖춘 채 그렇게 블라드의 콧잔등 위로 내려앉았다.
천천히 날개를 접는 나비를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자신의 오른쪽 눈을 감았다.
심상을 퍼 올릴 때는 왼쪽 눈으로.
현실을 떠올릴 때는 오른쪽 눈으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으나 세계의 새겨진 규칙을 이해한 블라드는 천천히 감은 눈을 통해 자신이 눈을 감았던 풍경을 떠올렸다.
“대장······대장!”
마치 꿈을 꾸듯 아련하게 들려오는 고트의 목소리.
물결치듯 여전히 흔들리는 잔상 속에서 마침내 현실로 발을 디딘 블라드.
“······.”
감은 눈을 뜬 블라드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산 너머로 넘어가는 황혼의 마지막 숨결이 소녀의 백금발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거 뭐야?”
하얀 뱀의 가호가 깃든 갑옷,
“이거랑.”
두더지의 가호가 깃든 알리시아의 호박석.
“그리고 이거.”
그리고 자신의 콧잔등을 가만히 누르는 하얀 손가락.
쫑긋거리는 귀와 함께 금색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뜬 이곳에서도 한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