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7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1)
귀가 먹먹하다.
아무래도 처음의 부딪힘에서 무언가 잘못된 듯싶었다.
“누, 누아르······.”
가물거리는 시야를 잡고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블라드는 저 멀리 나가떨어져 있는 누아르를 향해 걸어갔다.
히이이이힝-
비척거리며 다가오는 블라드를 알아보고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검은 말.
다행히 기력은 쇠해 보였어도 어딘가 부러진 곳은 없어 보였다.
“······젠장.”
누아르의 고삐를 붙잡고 선 블라드는 저 앞에 보이는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내려앉은 앙상한 돌다리 위.
이제 막 부서져 가는 갑옷의 파편이 어지럽게 흩날리고 있었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파편들 사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좀 더 누워있지 그랬나.”
그리고 돌다리 위에 서 있는 한 사람.
마침내 남은 기사까지 쓰러뜨려 버린 정체 모를 남자는 블라드의 기척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블라드가 갈라버린 두건 사이에서 남자의 백발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물어볼 것이 많을 것 같은데 말이지.”
정체 모를 사내의 말에 블라드는 다시 한번 검을 치켜들었다.
단 한 번의 내지름을 위해 극단적으로 검을 잡아당긴 자세.
마치 쏘아지기 직전의 화살과도 같은 블라드의 자세를 본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
달빛 아래서 두 사내가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같은 듯 다른 검을 치켜든 채로.
※※※※
“수고했네.”
환한 빛이 내리쬐는 집무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화초들이 창 너머에서 흘러들어오는 태양 빛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려운 일인데 잘해주었군. 정말 고맙네.”
블라드는 백작의 말을 들으며 앞에 놓인 찻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청명한 초록빛을 내는 엘프들의 차.
이 한 모금을 얻기 위해 일주일이 넘는 거리를 걸어왔다.
“쉽지 않았던 대결이라 들었네. 놈의 시체를 찾지 못한 것이 아쉽군.”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백작을 바라보았다.
바짝 마른 얼굴 위로 주름이 깊게 새겨진 남자.
본래의 나이보다 열 살은 늙어 보이는 몸뚱이에서 제 나이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형형하게 빛나는 두 눈뿐이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하하하! 운도 좋았던 거겠지.”
백작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과 함께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목을 기대었다.
“자네는 모를 거야. 내가 그놈 때문에 얼마나 골치를 썩였는지를.”
백작은 마치 앓던 이가 빠졌다는 듯 홀가분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감았다.
여태껏 도시의 주 산업이 정체 모를 한 명에게 위협받고 있었으니 그의 고충도 이해할 만했다.
그러나 백작을 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차가울 뿐이었다.
“제가 실패했다면 누구를 불러오실 생각이었습니까?”
“음?”
백작은 갑작스러운 블라드의 질문에 감았던 눈을 떴다.
“수준이 매우 높은 자였습니다. 붙여주신 백작님의 기사들로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이었죠.”
블라드는 찻잔의 주둥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맑디맑은 찻잔 위로 자그마한 파문이 일어나고 있었다.
“운이 좋았다고 말한 것은 단순히 겸손의 의미만은 아니었습니다.”
블라드의 찻잔으로 붉은색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치열했던 전투 속에서 수없이 얻어낸 상처 중 하나가 블라드의 손가락 속에 숨어있었다.
각오했던 일이었으나 다리 위에서 만난 사내는 백작이 말한 것보다 훨씬 터무니없는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작의 의뢰는 시작부터 블라드를 기만하고 있었다.
“이래서 기사단장을 파견하지 않으셨군요.”
백작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빼어난 실력을 가진 자신의 기사단장조차도 정체 모를 약탈자의 상대가 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무언가를 책임지는 사람은 언제나 뒷일을 생각해놓아야만 하지.”
백작은 대답과 함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상처투성이의 얼굴, 퉁퉁 부어오른 한쪽 눈.
그러나 초라해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강인한 인상을 주는 이유는 아마 흔들리지 않는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덕분일 것이다.
“수도에 있는 용살 기사단의 기사들을 요청하고 있었네.”
백작의 대답에 찻잔을 어루만지던 블라드의 손가락이 멈췄다.
“우리의 전력만으로는 그놈을 밀어낼 수는 없었을 거야. 지금까지 파악한 그자의 실력은 그러했네.”
수도에 있는 용살 기사단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합당한 근거가 필요하다.
용이 나타났다거나, 아니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적이 나타났다든가 하는 그런 이유.
만약 블라드가 이번 일에 실패했다면 그 또한 하나의 근거가 되어 백작의 보고서에 적혔을 것이다.
이 만큼의 기사도 대적하지 못하는 상대니 부디 용살 기사단을 파견해 달라는 근거로 말이다.
“그래도 자네가 일을 해결해주어 정말 다행이라 생각하네. 용살 기사단의 기사들은 정말 비싸거든.”
백작은 그 말과 함께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약속한 것보다 더 넣었네. 어쨌거나 마차를 무사히 끌고 와주었으니까.”
“······.”
묵직해 보이는 주머니.
그러나 그 주머니를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빛은 깊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미 엘프들의 초대까지 받았으니 내 추천서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그것에 대한 값도 들어있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있더라도 상관없다.
이 주머니에 들어있는 금화만으로는 자신의 목숨값을 대신할 수 없을 테니까.
어젯밤 블라드는 돌다리 위에서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감사히 받겠습니다. 백작님.”
그럼에도 블라드는 백작이 내어주는 금화를 받아들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정확한 액수를 알아야만 나중에 백작에게 더 청구해 낼 수 있을 테니까.
자신을 기만한 대가를 말이다.
“북쪽에서 썩기는 아깝지 않은가?”
집무실의 손잡이를 붙잡은 블라드의 등 뒤에서 백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것 없는 북부보다야 이곳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나? 물론 값은 더 쳐주겠네.”
자신을 등용하고 싶다 말하는 비츠카야 백작.
그의 목소리가 뱀처럼 블라드의 목덜미를 차갑게 타고 올라왔다.
“도시에서 추방당했다고 들었네. 자네를 버린 주군보다야 알아주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나?”
자신을 버려진 개 취급하는 백작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자신을 향해 찻잔을 들어 올리는 백작의 모습이 있었다.
“저는 신뢰할 수 있는 주군을 원합니다. 백작님.”
귀족의 피는 푸른색이다.
블라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을 사람으로 보고 있지 않았다.
“그것참 아쉽게 됐군.”
어깨를 으쓱하는 백작을 뒤로 한 채 블라드는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아직 김이 오르는 블라드의 찻잔은 조금도 줄어들어 있지 않았다.
※※※※
백작의 저택에서 빠져나온 블라드는 조용히 도시 외곽을 향해 걸어갔다.
낯설지만 익숙한 장소.
쇼아라의 뒷골목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블라드가 걷는 골목은 충분히 빈민가를 떠올리게 할 만큼 너저분했고 어지러웠다.
블라드는 재빨리 망토로 갑옷을 감추고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뒷골목을 걸어갔다.
반듯한 기사의 모습에서 순식간에 엉망인 불한당의 모습으로 변한 블라드를 보며 어둠 속의 누군가가 놀랐다는 듯 웃고 말았다.
툭-
약속한 장소에서 멈춰선 블라드는 곧 자신의 장화로 날아오는 작은 돌멩이를 느낄 수 있었다.
“······.”
보이지도 않았고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날아오는 바람 소리만 들려왔을 뿐.
자그마한 발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상대는 자신이 예민한 청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저번의 결투로 파악한 모양이었다.
툭-
투둑-
그렇게 블라드는 돌멩이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타노보의 빈민가 깊숙한 곳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도시에서 가장 어두운 곳.
각 도시의 정경은 모두가 달랐으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비슷해 보였다.
어둠 속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회색빛이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킬 줄 아는군.”
회색빛 사람들을 지나 마침내 도착한 어딘가의 막다른 골목.
검게 드리워진 그림자 사이로 듣기 싫은 쇳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꽁지 빠지게 도망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빈민가, 어둠, 그리고 듣기 싫은 목소리.
그 누구라도 압박을 받을만할 요소들이었으나 정작 블라드는 태연하게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아무도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의미 없는 위협은 블라드에게 큰 감흥이 없었다.
코끝으로 와닿는 빈민가의 익숙한 냄새가 기사의 안에서 어느새 소년의 반항기를 끌어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이상한 소리 좀 그만 내시죠.”
“······그래?”
골목 끝 그림자 사이에서 멋쩍은 듯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아까 들려왔던 쇳소리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이게 다리 위에서는 잘 먹혔었는데 말이지.”
블라드의 핀잔과 함께 마침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사내.
그는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정체 모를 약탈자였다.
“우리 이야기 좀 할까?”
“그러려고 온 겁니다.”
검을 얹고 있는 손 모양까지도 비슷한 두 사람.
엉망인 얼굴의 기사와 얼기설기 꿰매놓은 회색 두건의 사내가 서로가 남긴 흔적을 보며 마주 서 있었다.
※※※※
“왜 내 이름을 안 물어보나?”
“물어봐도 안 알려줄 것 같아서요.”
블라드는 빈민가라면 으레 있는 노상 점포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문을 했다.
엉망인 얼굴에 걸맞게 사나운 기세를 흘리고 다니는 양아치 하나.
어느새 뒷골목의 어둠에 동화되어 있는 블라드를 보며 회색 두건의 사내가 헛웃음을 지었다.
“뭐 어디 빈민가 출신이라도 되나 보지?”
“물어봐도 말 안 해줄 건데요.”
“······.”
주문받은 음식들을 받아든 블라드는 근처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꼬치를 집어 들었다.
“은퇴한 기사들은 대개 자기 이름을 말 안 해주더라고요.”
“정확히는 가장 낮은 자가 된 사람만 그렇지.”
“대부분 돈도 없고.”
“······.”
블라드는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사내에게서 라문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범상치 않은 실력과 오직 경험 많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모습까지.
그날, 자신이 벗겨내었던 두건의 안에는 라문드와 마찬가지로 백발이 된 사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은퇴한 기사가 왜 거기서 산적질을 하고 있었어요?”
“······은퇴가 생각보다 너무 빨랐거든.”
회색 두건의 사내는 이제 되었다는 듯 두건을 걷고는 블라드를 바라보며 웃었다.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누구나 명예로운 은퇴를 꿈꾼다.
그러나 끝맺음이라는 것을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자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너는 나한테 목숨을 빚졌다. 맞지?”
“대충은요.”
“대충은 뭐야.”
“끝까지 붙어봤다면 몰랐을 거란 이야기죠.”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옆에서 같이 꼬치를 뜯고 있는 사내는 기사 5명에 용명 10명, 거기에 잡부들까지 후식으로 해치우고는 자신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댄 사람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 여태까지 검을 맞대본 사람 중 가장 압도적인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개소리 말고.”
은퇴한 기사는 블라드의 손에서 꼬치를 빼앗아 들고는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어쨌거나 물어볼 것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으니 당분간은 나를 도와줘야겠다.”
“무슨 할 일이 그리 많아요?”
블라드의 질문에 회색 두건의 사내는 품에서 자그마한 주머니를 꺼내 던졌다.
엘프들의 찻잎이 들어있는 주머니였다.
“엘프들의 찻잎이잖아요. 이게 왜요?”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투존의 잎.
블라드는 아직도 눈앞의 사내가 왜 백작의 마차를 약탈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그게 차로 보이나?”
블라드는 무심히 술잔을 들이키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누구에게 보내는 것인지 모를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스스로가 쌓아온 이름을 내려놓고 가장 낮은 자가 된 은퇴한 기사들.
그들은 순례와도 같은 여행을 떠나면서 그동안 땅바닥에 흘러왔던 자신의 명예들을 주워 담는 사람들이었다.
“그거 차 아니야.”
그리고 지금, 블라드의 앞에서 담담히 술잔을 기울이는 이름 모를 은퇴 기사.
“마약이지.”
그는 흔들리는 찻잎들 사이로 자신의 명예를 흘리고 만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