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08
서로를 모르는 사람들 (2)
압실론.
엘프들의 차(茶)라는 뜻의 제국어.
그러나 이제는 엘프들의 차라기보다는 제국의 차를 지칭하는 단어가 된 지 오래였다.
“젊은 귀족 자제들의 자살이 부쩍 늘기 시작했지.”
퍼져오는 향기는 숲을 떠올릴 정도로 청량하며 입안에 닿는 맛은 눈을 밝게 만들 정도로 알싸하다.
단순한 유행이 아닌 실용적인 용도로도 효용이 뛰어난 압실론은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부터 입소문이 퍼져나갔었다.
“그러나 이게 원인인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회색 두건의 사내는 손안에 들려있는 주머니를 내려보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자살이라니, 압실론이라는 차가 무슨 환각 같은 거라도 보여주나 보죠?”
“아니.”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그런 심각한 부작용이 있었다면 진작에 알아챘을거다.”
마약이라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정신적인 착란은 물론이고 각종 육체적 악영향을 유발시켜 도저히 사회에서 정상적인 활동을 불가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마약이다.
“그럼 압실론의 부작용이 뭔데요.”
심각한 부작용이 없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은가?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당연한 물음에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높은 의존성, 지나칠 정도로 뛰어난 각성효과, 그리고 우울감.”
“뭘 겨우 그것 가지고.”
블라드는 압실론의 부작용을 듣고는 그만 웃음 짓고 말았다.
이 정도의 부작용 가지고 그렇게 심각하게 이야기했단 말인가.
그러나 대수롭지 않아 하는 블라드의 반응과는 다르게 회색 두건의 사내는 진중할 뿐이었다.
“어미가 보는 앞에서 창문 밖으로 뛰어내려야 할 정도의 우울감이지.”
“······음.”
별 것 아니라 생각했던 블라드는 그만 턱하고 막히는 숨과 함께 입을 닫고 말았다.
들려오는 대답의 무게는 감히 비웃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무거운 것이었으니까.
“요즘 젊은 녀석들은 항상 우울해하고는 했어. 시절이 그러니까 말이야.”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스스로의 세계로 표현할 수 있는 어린 것들은 귀한 것이다.
그렇기에 너희는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줘야 할 것이다.
“그래서 알아채 주지 못한 거야.”
초대 건국왕 프라우센.
그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가능성을 아끼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국은 초대왕의 의지와는 달리 더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었다.
헐거워지는 제국의 상황은 미래의 동량들을 계속해서 위험한 전장으로 내몰고 있었으며 이미 자리를 차지해버린 자들은 더는 젊은이들에게 영광된 자리를 남겨주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모두가 우울한 시절이었다.
“그럼 법으로 금지라도 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법이라는 것은 잘 몰랐지만 그렇게 위험한 물건이라면 어쨌거나 금지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회색 두건의 사내는 블라드의 순진한 물음에 그만 한숨 같은 웃음을 내비치고 말았다.
봐라, 여기 순진한 젊은이를.
이 세상에 깊게 뻗어있는 어두운 거미줄을 몰라보는 아이를.
“······누군가의 불행은 곧 누군가의 행복이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주머니의 입구를 열고는 엘프들의 찻잎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찻잎들.
마치 잿가루 같이 흩날리는 엘프들의 찻잎들이 천천히 뒷골목 더러운 진창 사이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미 압실론의 이권은 제국 깊숙한 곳까지 뿌리 깊게 박혀있다. 몇몇 녀석들의 죽음만으로는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말이야.”
압실론은 돈이 된다.
그리고 돈은 권력이 된다.
이 시대의 권력자들은 젊은이들의 죽음으로 빛나는 황금을 사는데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멈추고 싶다.”
정체 모를 약탈자.
초라한 두건을 뒤집어 쓴 은퇴자.
그러나 그는 약탈한 찻잎의 무게만큼이나 누군가를 살려낸 사람이었다.
그날 돌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사내의 검은 감히 블라드가 받아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것이었다.
※※※※
어두운 밤.
블라드는 혼자서 조용히 도시 어귀의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 높지는 않았지만, 도시의 정경이 내려다보이는 곳.
그곳에서 도시 타노보를 내려다보던 블라드는 회색 두건의 사내가 하던 말이 맞았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네.”
어느 도시에서나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있기 마련이었다.
빈민가의 유무는 통치자의 능력과는 상관없이 자연스레 생겨나는 현상이었으니까.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어.”
그러나 지금 블라드의 눈에 보이는 광경은 조금은 달라 보였다.
빈민가의 중심과 외곽 사이에 마치 선처럼 구분된 경계.
천천히 쌓이고 쌓여 같은 색깔로 물들어진 것이 아닌 갑작스레 색이 달라진 외곽의 빈민가가 블라드의 눈에 띄었다.
“······.”
갑작스레 빈민가의 크기가 커진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딛고 있는 땅에서 밀려날 때는 그만한 사연들이 있는 법이었으니까.
그것을 알고 있던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빈민가 근처에 있는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인데도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4층짜리 건물.
건물 위에 달린 굴뚝 위에서 우울한 연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디나 다 똑같네.”
도시 타노보는 시간이 갈수록 부유해지고 비츠카야 가문은 새로운 중부의 실세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 혜택을 같이 누려야 할 영지민들은 점점 도시의 외곽으로 밀려나 마약을 만드는 데나 동원되고 있었다.
어디서나 힘없는 자들은 거대한 세계에 깔려 허우적댈 뿐이었다.
블라드는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씁쓸한 기운을 땅바닥에 뱉어내며 언덕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하긴 해야겠는데.”
돌다리 위에서 목숨을 빚졌다.
목소리에 대한 단서도 그에게 있다.
그리고 비츠카야 백작에게는 갚아야 할 개인적인 빚도 있다.
회색 두건의 사내가 건넨 제안을 고민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용도 잡고, 황실의 검도 사용하고, 여기저기 정령들이랑도 안면도 터놓고.’
그러나 블라드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따로 있었다.
‘도대체 뭐하던 사람이야?’
정령과 관련 있으며 용을 죽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황실의 검을 사용하는 사람.
블라드는 목소리에 대한 단서를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대단할 것이 분명한 사람이 어쩌다 검은 번개를 타고 나에게로 꽂혀 들어왔을까.
블라드는 이제 목소리의 정체보다도 그가 이렇게 된 이유가 더 궁금해지고 있었다.
※※※※
겨울이었음에도 푸르게 우거진 숲속.
고개를 아무리 들어 올려도 차마 눈에 담기 힘들 정도로 커다란 나무 아래로 빼곡히 들어찬 집들이 있었다.
아니, 집처럼 생긴 나무들이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리나.
세계수가 내려다보는 그곳에서 지금 바쁘게 움직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바라디스 님! 신녀님께서······.”
“······나도 안다.”
평소의 냉막한 인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지금도 그의 감색 눈동자는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중이었다.
“문을 열어라.”
“네.”
부하들의 호위와 함께 세계수 아래 가장 큰 나무로 들어선 바라디스.
인간들의 건물로 따지자면 10층은 넘어 보일 듯한 거대한 나무 안에는 누가 손을 대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레 집의 형상을 갖춘 나무 한 그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왔는가. 바라디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세계수에 가장 가까운 곳.
나무의 가장 높은 장소까지 뛰듯이 달려온 바라디스는 이미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장로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계시입니까?”
“그렇다고 보네.”
장로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자.
마치 나무 고목처럼 갈라진 늙은 엘프가 지팡이를 짚은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오래된 세월에 의해 딱딱하게 굳어있었을지라도 어찌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어려있었다.
“······실로 오랜만에 받는 계시로군.”
고난과 시련의 역사.
인간들에게는 영광으로 가득 찬 시대였겠으나 점점 대륙의 변방으로 밀려나고 만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치욕의 세월이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도 세계수의 계시는 손에 꼽을 만큼밖에 내려오지 않았으니, 그동안 엘프들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두운 망망대해를 헤쳐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그러나 기대하고 있는 장로들과는 달리 바라디스는 얼굴에 한껏 걱정을 여미고는 장로들의 벽을 헤치고 안으로 걸어갔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향들.
그 향들 사이사이에서 타오르는 수많은 촛불들.
그 가운데 누워있는 소녀는 지금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었으니까.
“신녀로 임명되고 나서 처음 받는 세계수의 계시야. 아무래도 부담이 있을 수밖에 없을걸세.”
바라디스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을 듣고는 조심히 땀에 절어있는 소녀의 백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바들거리는 손과 발. 그리고 동공 없이 하얗게 돌아가 있는 두 눈까지.
“······.”
바라디스는 마치 간질이라도 걸린 듯 부들부들떨며 세계수의 기운을 버거워하는 자신의 여동생을 위해 두 손을 꽉 붙잡아주었다.
마주 잡은 소녀의 손이 너무 차가웠다.
“온······다.”
소녀는 이제야 바라디스의 온기를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과 함께 주위에 있는 촛불과 향들이 어지럽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두 조용히 해라.”
가장 오래된 장로의 말 대로 숨조차 조심히 내쉬는 장로들.
모두가 숨을 죽이는 가운데 곳곳에 꽂혀 있던 촛불들이 터질 듯 환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계시였다.
“용이······온다.”
바라디스는 소녀의 양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듯 잔뜩 찌푸려져 있는 소녀의 인상이 안쓰러웠다.
“그런데 용이 봤어. 어떡해.”
내뱉을 때마다 달라지는 목소리.
세계수의 계시와 소녀의 목소리가 번갈아 나오는 가운데 점점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보여줘라.”
헐떡이며 말하는 소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대장로 님.”
점점 안색이 창백해져 가는 소녀를 보며 바라디스가 다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무엇을 말입니까?”
그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대장로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들고 있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아직 이번 신녀는 어리고 경험 없으니 그렇기에 아껴줘야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가장 오래된 이는 가장 어린 소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세계를 열어 계시를 나눠 들기로 했다.
“무······엇을. 무엇을 보여주면 되겠습니까······.”
질문을 통해 세계수의 계시를 이끌어내는 대장로.
기도하듯 모은 두 손 위로 땀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검을!”
미처 소녀의 입을 통해 전해지지 못한 계시들이 가장 오래된 장로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크윽!”
대장로의 뇌리로 선명한 장소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무뿌리 아래.
축축한 동굴, 종유석, 그곳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바위.
그 바위 위에 꽂혀 있는 검 하나.
“······이런.”
오랜 세월 속에도 빛을 잃지 않은 검.
그 검을 알아본 대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