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0
세계수의 꽃이 피면 (1)
저택 어딘가에서부터 퍼지는 울음소리.
슬피 우는 여인의 목소리가 처량하다.
더는 나올 숨조차 없었음에도 꺼억거리면서 우는 여인의 눈가에는 마른 눈물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눈물샘에 담겨 있던 슬픔만으로는 자식 잃은 아픔을 전부 다 흘려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오귀스트 경.”
깨어진 창문.
여기저기 널브러진 다기들.
그러나 어지러운 주위와는 달리 찻잔 안에 담겨 있는 차만큼은 영롱한 초록빛이 감돌고 있었다.
“지금부터 현장은 저희가 관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국의 헌병 대장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화려한 금색 양각이 새겨진 갑옷.
저 갑옷은 제국에서도 오직 황제의 근위대만이 착용할 수 있는 갑옷이었다.
“······수도에서 일어난 범죄는 우리 헌병대의 관리 소임이다.”
“물론 저도 그렇다는 걸 압니다.”
헌병 대장 앞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품 안에서 둘둘 말려 있는 양피지 하나를 꺼내었다.
금인칙서(金印勅書).
오직 제국의 황제만이 내릴 수 있다는 황금색의 칙서를 펼쳐 든 중년의 남자는 고개를 까닥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직접 명령하신 일이라 저도 어쩔 수 없군요.”
“그분이 와병(臥病) 중이라는 것을 제국의 모두가 알고 있다.”
근위대의 갑옷을 입고 있던 중년 사내.
그는 오귀스트의 말을 듣고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을 뿐이었다.
“이 무슨 불경한 소리입니까. 분명 제가 오늘 아침에도 폐하를 뵙고 나온 참인데 말입니다.”
“······.”
오귀스트는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보며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황제를 지켜야 할 근위대장이 오히려 그의 이름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다니.
오귀스트의 분노를 알아챈 헌병대원들의 기세가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지금 당장 수사권을 이양하십시오.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
그러나 살벌해지는 기세 속에서도 중년의 남자는 펼쳐진 양피지를 둘둘 말아 넣을 뿐이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지금부터 이곳의 현장은 저희 황실 근위대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검보다 무거운 명분.
고귀한 황금색을 휘두르는 근위대장의 앞에서 오귀스트는 그저 분함 감정과 함께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어두운 저택 안에는 자식 잃은 어미의 슬픈 울음이 가득할 뿐이었다.
※※※※
“그런데 어떻게 막을 건데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
깊은 숲속을 헤매는 일행은 말에서 내려와 고삐를 붙잡은 채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발걸음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도 블라드의 눈빛만큼은 회색 두건의 사내를 향해 있었다.
“마차만 계속 약탈한다고 차가 안 팔리겠어요? 엄청 잘나간다면서요.”
정확히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는 모르겠으나 황실과 관련 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목소리의 검술까지 알아본 사람이었으니 블라드가 그에게 호기심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8살이라는 나이는 아직도 한참 경험과 지식을 갈구할만한 나이였다.
“······네 말대로 팔리는 건 못 막긴 했지.”
회색 두건의 사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블라드의 말처럼 손발이 잘려버린 헌병대로서는 제국 내에 깊게 뿌리 박힌 거미줄을 걷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냅다 후려쳐 본 거다.”
“뭐를요?”
“벌집을. 안에 뭐가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저 깊숙한 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파낼 수 없다면 끌어내야만 한다.
그것을 알고 있던 오귀스트는 스스로를 미끼 삼아 비츠카야의 마차를 약탈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백작이 용살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했었다고 했지?”
“그랬다고 하더라구요.”
비록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끌려 나온 것은 블라드라는 애송이 기사였을 뿐이지만 그래도 눈앞의 애송이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 하나를 물어와 줬다.
벌집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몰락한 용에 대한 정보였다.
‘황실을 통하지 않고 바로 드라굴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라······.’
지방의 영주가 버거운 일을 해결하기 위해 용살 기사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그리 낯선 일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일에서는 순서와 절차가 있는 법이었고 오귀스트는 비츠카야 가문이 그 절차를 밟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용살 기사단은 왜요?”
“아니다.”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궁금하겠지만 때로는 모르는 것이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몰락한 용이 목줄을 물어뜯는 중이라면 단순히 아는 것만으로도 큰 화가 미치고 말 테니까.
“저기 봐 대장! 저긴가 봐!”
“······와.”
한참 오귀스트와 대화를 나누던 블라드는 고트가 내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뭐가 이렇게 커?”
숲이 있었다.
겨울임에도 녹색을 잃지 않은 숲이.
비록 내리는 눈에 의해 하얗게 물들어 있었지만, 차가운 눈조차도 어찌하지 못했던 따뜻함이 저 앞에 있는 숲에서부터 느껴지고 있었다.
“저기가 바로 엘프들의 숲이다.”
깊은 곳에 숨어 누구에게도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엘프들의 숲.
블라드는 마치 끝없이 펼쳐진 것만 같은 녹색의 지평선을 보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저게 세계수라는 건가요?”
“그래.”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녹색의 바다 위에 우뚝 선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햇빛이 가득한 누군가의 집무실.
온통 갈색의 나무로 뒤덮여 있는 그곳에서 소녀의 백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오빠.”
“네. 신녀님.”
의자가 있었으나 굳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백금발의 소녀는 바라디스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가느다란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됐네요.”
토라지듯 말했으나 본인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슴 한구석에서부터 차오르는 섭섭함은 어쩔 수 없었는지 자그마한 볼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갈 때 이것도 가져가.”
“네?”
바라디스는 소녀가 내민 바구니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느새 방 안을 돌아다니며 쌓여있던 과일들을 담은 바구니.
윤기 나는 과일의 빛과 함께 소녀의 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배고파하는 거 같더라고.”
“······누가 배고파합니까?”
바라디스는 바구니를 받아들면서도 의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어렸을 때도 엉뚱한 면이 있긴 했었지만 세계수의 신녀가 된 후부터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소녀였다.
“바라디스 님.”
“음?”
그러나 방금의 질문에 대한 답은 소녀가 아닌 다른 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찰 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인간들을 발견했습니다.”
“쫓아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보고.
그러나 보고를 하러 들어온 엘프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것이······.”
“뭐냐,”
소녀를 마주할 때와는 전혀 달라진 바라디스의 표정.
어느새 바라디스의 얼굴에는 냉정한 관리자이자 통솔자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침입자들이 바라디스 님을 찾고 있습니다.”
“······뭐?”
“정확히는 바라디스 님에게 초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바라디스는 눈썹을 찌푸리며 눈앞의 보고자를 바라보았다.
말로 전하지는 않았으나 눈으로 통하는 물음을 알아본 엘프는 자신이 가져온 이름 하나를 그의 앞으로 꺼내놓았다.
“침입자는 자신을 쇼아라의 블라드라고 소개했습니다.”
“······.”
부관의 말을 들은 바라디스는 자신도 모르게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배가 고프다고 하던가?”
“네?”
바라디스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소녀는 어서 가보라는 듯 발을 까닥이며 웃고 있었다.
※※※※
“엘프들도 감옥이 있네요.”
“나도 처음 들어와 봐서.”
“얘네는 못을 안 쓰나? 뭐 이어진 흔적도 없어.”
침울한 표정으로 구석에 쭈그리고 있는 고트와는 달리 블라드는 여기저기를 누비며 엘프들의 감옥을 기웃거렸다.
“대장. 진짜 초대받은 거 맞아?”
“맞다니까.”
“그럼 엘프들은 초대받은 사람들한테 다짜고짜 화살을 날리는 게 예의야?”
“······그래도 맞지는 않았잖아.”
블라드는 자신을 바라보는 회색 두건의 사내와 고트를 보며 멋쩍은 듯 손가락으로 볼을 긁었다.
초대를 받았으니 당당히 들어갈 수 있을 줄 알았으나 정작 그들을 반기는 것은 살의 어린 화살과 차가운 감옥뿐이었다.
“네 목숨값은 아직 못 갚은 거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잖아요.”
“북부 놈들은 원래 이렇게 뻔뻔하냐?”
블라드는 들려오는 핀잔과 원망을 모른 체하며 두 손으로 창살을 붙잡았다.
‘이럴 거면 초대는 왜 한 거야?’
블라드는 목소리에 대한 단서를.
오귀스트는 압실론에 대한 단서를.
서로가 원하는 것이 이곳 엘프들의 숲에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할지라도 오긴 왔어야 하는 곳이었다.
‘······미묘하게 날카롭던데.’
그러나 블라드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것은 지금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의 처지가 아니었다.
위기에 민감해야 하는 뒷골목의 사람만이 맡을 수 있는 그런 낌새.
자신들을 마주했던 엘프들에게서는 그런 익숙한 낌새가 느껴졌었다.
끼이이익-
블라드는 저 앞에서부터 열리는 문소리를 들으며 얼굴을 창살에 바짝 가져다 댔다.
“미안하군.”
검은색이 감도는 푸른 머리에 감청색 눈동자.
냉막한 표정의 엘프가 부관들을 동원하고는 한 손에는 바구니를 든 채 다가오고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우리들의 숲에 온 것을 환영하네.”
“엘프들은 환영 인사를 감옥에서 하나 보죠?”
“그래. 일단 이거라도 들지.”
사람 말을 무시하는 것에 있어서는 블라드보다는 바라디스가 한 수 위였다.
“여기서 내보내는 줄 겁니까?”
“그거 먹으면서 하루만 기다리지. 자네들을 꺼내려면 거쳐야 할 절차가 있어서.”
하루나 더 기다리라는 말에 블라드의 눈썹이 좁아지고 말았다.
“이해해주길 바라네. 요즘은 모두가 날카로워질 시기라서 말이야. 한 번 감옥에 들어간 사람들을 꺼내기에는 절차가 복잡해.”
“그런데 다들 뭐가 그렇게 날카롭습니까? 오면서 보니까 근처는 조용하던데.”
지나치게 날 선 엘프들의 태도.
블라드는 그들의 차가운 태도에서 인간들에 대한 적개심보다는 무언가를 잔뜩 경계하는 듯한 기이한 경계심을 느꼈었다.
“······용이 오고 있네.”
굳이 인간들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으나 바라디스는 차분히 설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는 세계수의 신녀가 주목하는 존재였으니까.
바라디스는 분명 지금 시기에 이들이 아우슈린에 다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곧 세계수가 꽃을 피울 시기거든.”
“꽃?”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어루만졌다.
소녀가 보여준 호박석의 풍경 속에서 붉게 물든 단풍나무는 분명 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래. 꽃.”
하나 된 신의 이름.
그리고 제국의 야욕을 피해 간신히 뿌리 내린 어린 세계수.
그러나 어린뿌리와 향기로운 꽃을 노리는 존재는 오직 인간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날카로운 용은 언제나 세계수의 꽃들을 노려왔지.”
어린 꽃잎은 향기롭고, 젊은 뿌리는 탐스럽다.
그러나 세상 곳곳에는 향기롭고 탐스러운 것들을 탐내는 존재들이 수두룩했다.
이 세상 모든 어리고 여린 것들은 분명 꽃을 피울 수 있는 마땅한 자격이 있음에도.
“안 좋은 시기에 맞이하게 되어 미안하군.”
“······아닙니다.”
하나의 세계가 뿌리내려 안전하게 꽃을 피울 가능성은 얼마나 요원한가.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너희들은 마땅히 그 순간을 보호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겠다고 나의 규율 앞에서 맹세했다.
“말만이라도 고맙군.”
인간들의 영혼은 가볍고 입은 썩었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존재들.
그러나 지금 푸른 눈동자의 기사를 감싸고 있는 정령들은 말하고 있었다.
이 자는 지켜왔던 자라고.
갑옷 위의 하얀 뱀과 검 밑의 두더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바라디스의 눈동자로 호박석에 새겨진 나무의 기억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
새빨갛게 꽃피운 이제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세계수.
그 아래 서 있는 기사는 분명 낯익은 검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