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1
세계수의 꽃이 피면 (2)
새하얀 안개가 낀듯한 탁한 눈.
그 안에서 간신히 색을 유지하고 있는 녹색 눈동자가 유심히 알리시아의 호박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귀한 손님이셨군.”
호박석 안에 담겨 있던 풍경을 알아본 오래된 엘프의 얼굴에서 한 줄기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엘프들의 대장로.
그 옛날, 환란의 시대에서 살아남은 늙은 제로니모는 블라드가 가져온 호박석을 통해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 호박석은 어디서 났는가?”
“하이날의 가문의 가보라고 들었습니다.”
소년의 푸른 눈동자를 마주하는 대장로의 눈길이 기꺼워졌다.
실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귀한 인간 손님이었다.
“하이날, 하이날이라······.”
과거의 푸르름을 떠올리는 늙은 나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노인의 쇠한 기력으로는 오랜 세월 동안 켜켜이 쌓여있던 기억들을 들추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소드마스터.”
그러나 아무리 세월의 무게 밑에 깔려 있던 기억이라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있다.
걸어왔던 발걸음 하나하나가 역사가 되었던 사람들.
지금의 시대는 모두 그들의 흔적 위에 세워진 것들이었다.
“······그의 뒤를 따르던 기사 중 하나가 그런 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군.”
오귀스트는 블라드의 뒤에 가만히 선 채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숨조차 죽인 채 그렇게 가만히.
평생을 제국을 위해 헌신해 온 기사에게 있어 건국왕의 흔적을 듣는다는 것은 여전히 가슴 뛰는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는 이 안에 있는 단풍나무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대장로님.”
늙은 제로니모는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희뿌연 눈동자로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푸른 눈빛.
자신도 모르게 꽉 쥐고 있는 주먹에서부터 어린 기사의 간절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이 안에 있는 단풍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네. 그렇습니다.”
반짝이는 푸른 눈이 마치 별빛과 같다.
이제야 형태를 갖춘 가능성이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 안에 담겨 있는 풍경이 단풍나무인지는 어찌 알았고?”
“······네?”
그러나 아무리 반짝인다 해도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을 세계를 어찌 엿보았는가.
갑작스러운 대장로의 질문에 블라드는 그만 숨이 턱하고 막히고 말았다.
“······.”
혹시 몰라 생각해놓았던 변명들도 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늙은 엘프의 앞에서는 왠지 모르게 거짓을 꺼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경험도 지식도 아닌 오직 본능에서 비롯되는 경고였다.
“하긴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입을 다문 채 대답하지 못하는 블라드를 수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엘프들.
그러나 늙은 대장로만큼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희미한 미소와 함께 다시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제로니모는 사소한 하나하나의 결함보다 바로 앞에 보이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 안에 새겨져 있던 단풍나무는 서쪽에 있었지.”
“서쪽입니까.”
마침내 들려오는 장로의 대답.
그 대답에 블라드는 흥분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억눌린 소리로 되묻고 말았다.
“그래. 서쪽. 대륙에서도 가장 푸르른 숲이 있던 곳.”
그러나 블라드는 들려오는 제로니모의 말을 들으며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말았다.
“서쪽에 그런 숲이 있습니까?”
서쪽에 있는 것은 오직 기나긴 황무지뿐.
거친 흙과 메마른 바람이 가득한 제국의 서쪽에는 노인이 말한 푸르른 숲 같은 것은 없었다.
“있었었지.”
블라드의 물음에 늙은 나무의 얼굴 위로 주름 하나가 새겨져 갔다.
마치 깊게 새겨진 상처와도 같은 주름이었다.
“아주 예전에 있었던 우리들의 숲이.”
꿈에서도 그리던 풍경 하나.
그러나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 그 날의 기억이 있었다.
황금빛으로 가득했던 밀밭이 있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고개를 뉘던 밀들이, 어디서 끝나는 것인지 모를 커다란 숲이.
붉게 물든 황혼 녘을 따라 뛰놀던 아이들이.
그리고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이 모든 것들을 내려다보던 붉게 물든 단풍나무가 한 그루가 있었다.
그런 풍경들이 있었었다.
“용이 불태우기 전에는 말이야.”
가장 완벽했던 용.
단 한 번의 숨결만으로 이 모든 것들을 불태워버린 저주받을 존재.
이제는 불타버린 기억을 헤매는 그의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어찌 찾겠나.”
오래된 기억을 말하는 노인의 입에서부터 검은 잿가루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전부 다 불타버려 재가 된 지 오래인데.”
노란색 호박석에 담겨 있던 가을의 풍경.
그곳에 새겨져 있던 것들은 이제는 모두 불태워져 버린 잿더미와 같은 기억들일 뿐이었다.
존재하지 않던 것을 찾고 있던 어린 기사의 눈동자가 쉼 없이 물결치고 있었다.
※※※※
엘프들이 내어준 방 안.
그곳에서 블라드는 창틀에 기대앉은 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동쪽 끝까지 뻗어있는 초록빛은 여태껏 태어나 한 번도 본 적 없던 푸른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했었다.
“그럼 나는 투존의 잎을 살펴보러 가지.”
회색 두건을 뒤집어쓴 오귀스트는 이곳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압실론의 근원에 대한 면밀한 조사.
오직 피할 수 없는 확고한 증거만이 제국에서 벌어지는 광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있으라던데요?”
“있었다고 말 좀 해다오.”
블라드는 오귀스트에게 목숨을 빚졌고 그에 대한 대가로 인간이라면 쉽사리 들어갈 수 없는 엘프들의 숲까지 그를 이끌었다.
그러니 오귀스트의 지금 행동은 블라드가 감히 제지할 수 없는 그의 고유한 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분위기도 왠지 모르게 어수선하던데.”
“걱정하지 마라. 왕년에는 숱하게 해본 일이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다녀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 말하던 오귀스트는 방문이 아닌 창틀을 부여잡고는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역시 네 스승은 황실과 관련된 인물인 것 같다.”
“······그런가요.”
“내가 봤을 때는 그렇다.”
블라드는 그 말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던 황실의 검.
그리고 이제는 아주 오래전에 불타버리고 만 엘프들의 숲, 엘븐하임의 풍경까지.
이제는 계약이 아니라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으로도 목소리가 누군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건국왕 프라우센께서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가장 낮은 자가 되셨지.”
가장 낮은 자.
여태껏 쌓아왔던 모든 칭호를 벗어던진 채 그저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못다 한 일들을 마치며 은퇴를 준비하는 기사들.
그 영광된 시초는 바로 기사들의 왕, 건국왕 프라우센이었다.
“전설의 시작답게 마지막 또한 신비롭게 알려지지 않으신 분이지. 나는 어쩌면 네가 알려지지 않았던 프라우센 님의 마지막과 연결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다.”
건국왕 프라우센의 마지막은 바로 명예로운 은퇴였다.
그러나 가장 낮은 자 프라우센의 마지막은 소문만 무성할 뿐 그 누구도 제대로 아는 자가 없었다.
엘프들의 말을 들어본다면 지금 창틀에 기대앉아 낙심하고 있는 어린 기사가 그 영광된 끝과 이어진 흔적이지 않을까.
“그러면 뭐 해요. 여기서 단서가 끊겼는데.”
“끊기기는. 내가 보기에는 이제 시작인데.”
블라드가 앉아 있던 창틀에 발을 올린 오귀스트는 웃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해 보이는 지면.
점점 어두워지는 주위가 오귀스트의 시야를 가리고 있었지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때로는 스스로를 어둠 속으로 내몰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이제 시작이라뇨?”
블라드의 질문에 오귀스트가 두건을 뒤집어쓰고는 창틀에 발을 올렸다.
“만약 네 스승이 프라우센 님의 유지를 이은 자라면 그분의 흔적을 따라 가보면 될 거라는 이야기다.”
끝을 모른다면 시작부터 따라 가보면 된다.
블라드의 스승은 소드마스터의 흔적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니 프라우센의 마지막 흔적을 따라 가보면 결국 스승의 정체까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프라우센 님이 마지막에 어떻게 됐는지 아무도 모른다면서요?”
“인간들은 그렇지.”
웃으며 블라드를 바라보는 오귀스트.
그의 가려진 얼굴 사이로 저물어가는 오늘의 황혼이 맺히고 있었다.
“하지만 엘프들은 알지도 모르지.”
그 말을 끝으로 저물어가는 황혼과 함께 밖을 향해 뛰어내리는 오귀스트.
블라드는 펄럭이는 두건과 함께 저 아래로 떨어지는 그를 보며 놀라고 말았다.
“뭔 고양이도 아니고.”
전직 소매치기이자 도둑이었기에 더욱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기민한 움직임.
아무런 소리 없이 지면에 착지한 늙은 기사는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걸어가 엘프들의 숲 사이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 여기서 좀 더 있어 봐야겠네.”
고트도, 오귀스트도 없는 방 안에 홀로 남은 블라드.
적막해진 방 안에서 블라드는 무릎에 고개를 기댄 채 고민에 빠져들어 갔다.
‘분명 봤다고 했는데.’
목소리는 분명 호박석 안에 풍경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확신할 수 없는 불명확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목소리도 직접 본 것이 아닌 자신처럼 호박석을 통해 본 기억일 수도 있다.
애초에 직접 봤다고 하기에도 몇백 년 전 일이었으니 시간대도 맞지 않을 것이다.
“뭐하던 사람이야. 진짜.”
차라리 요제프와의 7년짜리 계약이 더 지키기 쉽겠다.
목소리의 흔적은 따라가면 따라갈수록 거대한 성벽 앞에 가로막히는 것만은 기분이었으니까.
똑똑똑.
“······?”
한참을 고민하던 블라드의 귓가로 방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끼이이익-
들어오라고 말하기도 전에 조심스레 열리는 문.
자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환히 백금발이 보였다.
자신을 환상 속으로 끌어들였던 정체 모를 소녀.
“잠깐 시간 좀 있어?”
고개만을 방안으로 빼꼼히 들이민 소녀는 블라드를 알아보자마자 미소 짓고 있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인 것 마냥.
※※※※
가능하다면 무시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엘프들의 경고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소녀의 말에는 무언가 거부하기 힘든 기이한 끈적거림이 있었다.
마치 엘프들의 대장로가 보여줬던 눈빛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건데······. 겁니까.”
생글생글 웃는 소녀와는 달리 딱딱히 굳어있는 블라드의 표정.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도 소녀의 뒤를 따르고 있는 두 명의 엘프들은 블라드를 보며 마뜩잖다는 표정을 짓는 중이었다.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서.”
“무엇을 보여주고 싶으신데요?”
블라드는 최대한 행동을 조심히 하기로 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호위까지 끌고 다닐 정도라니.
지금 신난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는 소녀는 엘프들의 세계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는 소녀가 분명할 것이다.
“그 호박석.”
“호박석?”
“응. 그거.”
소녀는 손가락으로 블라드의 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거! 꼭 보여주고 싶어.”
여전히 주어를 제대로 말하지 않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속으로 자그맣게 한숨을 쉬고 말았다.
“엄마를 보고 싶대. 쟤는 태어나서 한 번도 엄마를 본 적이 없거든?”
“엄마?”
이해할 수 없는 말.
마치 어딘가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돈되지 않은 말이었으나 소녀의 눈동자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쟤가 누군데요?”
블라드의 물음에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의 끝.
그곳에는 아직 물들지 않은 푸른 잎을 가진 거대한 단풍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세계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을 확인한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소녀를 바라보았다.
“엄마를 꼭 한번 보고 싶대.”
“······.”
비록 머리로는 이해할 수는 없는 말이었으나 가슴으로는 와닿는 말.
마치 사람을 대하듯이 말하는 소녀의 태도 때문인지 다시 본 세계수의 모습은 무언가 달라 보였다.
저 멀리서 보이는 푸른 단풍나무의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에게 어서 와달라고 손짓하는 듯.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