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2
세계수의 꽃이 피면 (3)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겨우 몸을 들이미는 오전의 햇빛.
그 햇빛에 의지해 어두운 숲속을 헤매는 자들이 있었다.
유려한 외모, 길게 솟아오른 귀.
그들은 아우슈린의 근방을 지키는 수색 대원들이었다.
“정지.”
가장 앞서 있던 대장의 지시와 함께 수색대원들이 발걸음을 멈추며 숨을 죽였다.
꽉 쥐고 있는 대장의 주먹이 그들의 앞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피 냄새······.’
청각만큼은 아니었으나 인간보다는 뛰어난 후각.
수색 대장은 새까만 숲 안에서부터 퍼져오는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눈썹을 찌푸렸다.
‘흩어져.’
눈짓과 손짓.
서로가 정한 신호를 따라 재빨리 근방으로 흩어진 엘프들은 곧 주위와 동화되어 사방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만 간다.’
수신호와 함께 홀로 조금씩 앞으로 나서는 수색 대장.
그의 뒤를 따르는 대원 중 몇몇이 조심스레 화살을 꺼내 시위를 먹이기 시작했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가지들.
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어두운 숲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은 오직 을씨년스러운 나뭇가지들의 부딪힘뿐이었다.
“······이런.”
그러나 누군가의 탄식과 함께 여태껏 지켜오던 침묵은 깨지고야 말았다.
마치 거미줄처럼 어지러이 얽혀 있는 덤불 위.
그곳에 양팔을 벌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엘프가 한 명 있었다.
“복부의 관통상 확인.”
“상처가 얼어붙어 있습니다.”
“사망한 지 최소 하루는 지난 것 같습니다.”
수색 대장은 들려오는 보고를 들으며 착잡한 표정과 함께 시체에 다가갔다.
날카롭게 꿰뚫려 버린 커다란 구멍 사이로 조금씩 흘러내린 내장 조각들이 매달려 있었다.
“너무 늦었군.”
수색대장은 한쪽 무릎을 꿇고는 시체에 만들어져 있는 상처를 바라보았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만들어 낼 수 없는 커다란 구멍.
아직도 부릅뜨고 있는 두 눈이 얼마만큼의 고통이었을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니드호그.”
수색대장은 시체에 커다랗게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숲 너머를 바라보았다.
검붉은 통로를 통해 바라본 숲의 모습.
차마 빛이 닿지 못한 그곳에는 오직 어둠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저 깊은 숲속에서부터 아련히 들려오는 메아리 같은 외침이 있었다.
마치 굶주려 있는 듯한 목소리.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용이 이제 곧 꽃을 피울 어린 세계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
“······.”
블라드는 지금 마치 자신이 정원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정작 본인이 서 있는 곳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었음에도 말이다.
‘이게 무슨 동굴이야.’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다.
축축해야 할 바닥은 마치 금방 새로 깐 짚처럼 푹신하였고 어두워야 하는 안은 벽면에 빼곡히 붙어 있는 이끼들로 인해 밝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반딧불?’
게다가 곳곳에서 떠다니는 반딧불들까지.
마치 일행을 반긴다는 듯 주변을 떠도는 발광체들을 보며 블라드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계절과 장소에 맞지 않는 분위기가 블라드의 상식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 호박석을 보면 정말 좋아할 거야. 요즘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거든.”
뿌리를 향해 뚫려있는 동굴을 통해 세계수의 근원으로 향하는 일행들.
동굴이었음에도 밝고, 겨울이었음에도 따뜻한 이곳은 안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현실의 풍경과는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걔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당황해하고 있었거든.”
봄이 온다.
그리고 꽃이 핀다.
다가오는 봄에 맞추어 기지개를 켜는 어린 세계수는 이번이 태어나 처음으로 피워보는 꽃이라 했다.
하지만 세계수는 자신이 하고 있는 개화가 옳게 맞아들어가고 있는지 걱정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많이 우울해하고 있었는데 네가 마침 이곳으로 온 거야.”
가끔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에도 불안해질 때가 있다.
자신이 가는 방향이 맞는 것인지, 이대로 계속 가도 되는 것인지.
혹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지.
해야 함에도 쉽게 발을 내뻗지 못하는 것은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럴 때는 누군가가 옆에서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주기만 해도 좋으련만 불행히도 어린 세계수에게는 그럴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랬군요.”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블라드는 소녀라는 존재를 통해 세계수가 품은 고민을 깊이 이해하는 중이었다.
나무와 기사는 서로 닿지 못할 세계에 있음에도 말이다.
“다 왔다.”
소녀의 말과 함께 길고 길었던 통로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앞에 보이는 밝은 빛들.
그 빛은 푸른 이끼가 만들어내는 빛이 아닌 오늘의 태양이 비추어주는 빛이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마 네가 여기까지 온 최초의 인간일 거야.”
그 말과 함께 소녀를 호위하던 엘프들의 얼굴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인간은 알까.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엘프 중에서도 몇몇만이 들어올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인 것을.
그러나 세계수의 신녀는 푸른 눈의 기사를 이곳으로 인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는 푸른 눈의 기사가 이곳에 와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대한 공동(空洞).
곳곳에 자리 잡은 세계수의 뿌리들이 어지럽게 얽혀들어 가며 커다란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여기로 들어갑니까?”
“그럼. 얼마든지.”
마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듯 양팔을 벌리는 소녀.
블라드는 소녀의 환대와 함께 조심스레 공동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바닥에 깔린 잔디들이 블라드의 발걸음을 따라 스스로 눕혀주고 있었다.
세계수의 확고한 초대이자 환영의 의사를 보며 호위하던 엘프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게 세계수.’
딛고 있는 발끝으로부터 자그마한 심장 박동이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 박동과 함께 블라드의 세계도 조금씩 넓어지는 것만 같았다.
맞닿은 세계가 이제야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네가 와서 기쁜가 봐.”
뒤에서 들려오는 소녀의 말에 블라드는 고개를 돌렸다.
호위를 하러 따라온 엘프들은 공동의 입구에 서서 가만히 서 있었을 뿐.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사람은 블라드와 소녀, 그리고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 세계수뿐이었다.
“보여 줄 수 있지? 부디 그래 줬으면 해.”
어린 나무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세계수의 신녀.
그녀는 기도하듯 양손을 모은 채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을 가지고 온 기사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부디 아이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보여달라고.
한 번도 나아가지 못한 세계로 향해야 하는 어린 세계수를 위해서.
“알겠습니다.”
소녀의 부탁과 함께 블라드는 검을 뽑아 들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낫겠죠?”
차가운 검날은 날카롭지만 집어들 손잡이는 부드러울 것이다.
그렇기에 기사는 마땅히 자신이 날카로운 쪽을 잡아 주기로 했다.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어린나무에는 어울리지 않는 쪽이었으니까.
—–.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발끝에서만 느껴지던 세계수의 심장 소리가 이제는 공기를 통해서도 전해진다.
천장을 통해 내려오는 빛에 알리시아의 호박석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린 세계수는 그 빛 사이로 비치는 가을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너른 들판.
넘실거리는 밀밭.
그리고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는 커다란 단풍나무.
기억 속의 단풍나무가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비?”
“나비다.”
블라드는 자신의 주위로 날아드는 나비들을 보았다.
소녀의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때의 나비들이었다.
꽃과 같은 나비들이 블라드와 소녀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뿌리에 닿고 있는 블라드의 발과 거꾸로 들고 있는 검을 통해 기억과 현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블라드는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그 둘을 잇는 통로이자 세계가 되었음을.
“꽃이 핀다······.”
자신을 휩싸는 빛과 함께 블라드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기억 속의 세계수가 천천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자신의 어린아이를 향해 마치 이렇게 하라는 듯이.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어머니를 보며 어린 세계수는 자신도 모르게 가지를 뻗어 그녀를 안으려 했다.
얽혀지는 가지들 사이에서 그 옛날의 가을의 풍경과 오늘의 풍경이 서서히 겹쳐지고 있었다.
※※※※
“······오오.”
늙은 제로니모는 떨리는 손과 함께 들고 있던 책을 덮었다.
세월의 무게 만큼이나 무거워진 육체였지만 그는 서둘러 옆에 있던 지팡이를 잡아 들고는 서둘러 창가로 다가갔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지는 향기가 그의 눈가를 뿌옇게 만들고 있었다.
“음?”
한참 집무실에서 서류를 뒤적이던 바라디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 어서 고개를 돌리라고 말하고 있었으니까.
조금 있으면 오직 지금만이 볼 수 있는 단 한순간이 있을 거라고.
밭을 일구던 엘프들도, 숲을 지키던 엘프들도.
마구간에 있던 누아르와 고트도, 차밭을 조사하던 오귀스트도.
인간과 엘프들 모두가 고개를 돌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새롭게 자리 잡은 그들의 땅 한가운데서 찬란히 빛나는 한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
“꽃이 핀다.”
그래.
나는 이제 안다.
어떻게 꽃을 피워야 하는지를.
그리고 이제는 기억 속에서밖에 없는 어머니도 그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잘하고 있었다고.
—–!
새하얗게 명멸하는 세계수 안에서 갖가지 가능성들이 고개를 들어 올리기 시작했다.
구름과 가까운 가지에서는 하늘을 좇는 꽃들이.
가장 멀리 뻗어진 가지에서는 바람을 따르는 꽃들이.
가장 아래에 있는 가지에서는 땅을 향한 꽃들이.
“오······. 오오.”
“정령들이 태어난다!”
한 송이 꽃보다도 작은 어린 새가, 말이, 뱀이, 두더지가.
그동안 세계수가 품고 있던 가능성들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나의 이름 아래 잊혀 있던 어린 것들이 세상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
태어나는 어린 세계가 있다면 마땅히 누군가가 지켜줘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푸른 눈의 기사는 자신이 날카로운 검날을 쥐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쉼 없이 흔들리는 검을 타고 흐르는 한 줄기의 핏물.
땅으로 떨어지고 있는 그 붉은색은 지금 막 태어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기사의 선물이었다.
오늘 아우슈린에는 봄이 찾아왔다.
이제는 없는 어머니의 인도와 기사의 인내 아래서.
※※※※
“······.”
터질 듯이 빛났던 세계수가 멈추고.
방금까지만 해도 어지러이 날아다니던 환상 속의 나비들도 이제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금.
뚝뚝.
모두가 멈춰 있는 지금, 오직 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블라드의 손에서 흐르고 있는 핏방울뿐.
초록색의 잔디 위로 떨어지는 붉은색이 처량했다.
“괜찮아? 미안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는 소녀는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름 모를 소녀는 꽃을 피운 기쁨보다도 눈앞에 있는 블라드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기사는 어린 세계수를 위해 기억을 받쳐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으니까.
“꽃이 핀 겁니까?”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밖을 향해 뚫려있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느샌가 붉게 물든 단풍잎 하나가 천천히 블라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고마워······. 고맙대.”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가만히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검날 사이로 흐르는 붉은 피.
그리고 있어야 할 곳에 없는 알리시아의 호박석까지.
하이날 가문의 가보는 오늘 자신의 효용을 다했다.
“하······.”
무언지 모를 벅찬 감정과 함께 블라드는 그제야 검에서 손을 떼어내었다.
깊게 베인 상처.
그럼에도 블라드는 세계수가 꽃을 피우는 그 순간에도 흔들리는 자신의 검을 놓지 않았었다.
맞닿은 세계를 통해 보이는 광경에는 어머니가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쓰다듬고 있었으니까.
블라드는 정말이지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음?”
지쳐버린 세계수 때문인지 조금은 어두워진 뿌리 안.
그렇기에 더욱 빛나는 오늘의 태양이 천장을 통해 한 줄기 빛을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이 비치는 곳에는 아까는 보이지 않던 바위 하나가 있었다.
“저건 뭡니까?”
마치 이제는 보여줘도 된다는 듯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 커다란 바위.
그 바위 위에는 태양 빛을 가득 담은 이름 모를 검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은색 빛이 감도는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