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3
이제는 너의 차례다 (1)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붉은색 단풍잎 하나.
그 단풍잎이 마침내 바위 위에 꽂혀있는 검에게로 내려앉았다.
고고하게 빛나는 은색의 검.
누구라도 탐낼 수밖에 없을 것만 같은 검은 지금도 블라드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었다.
“······.”
다만, 블라드는 느낄 수 있었다.
바위 위에 의연히 서 있는 은색의 검이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음을.
누군가를 지켰던 수호검이자 수많은 적을 학살한 피의 검.
그리고 가장 완벽했던 용의 심장을 꿰뚫은 용살검.
그 검이 지금 블라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파란 날을 세운 채로.
더는 다가오지 마라.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아이야.
내가 너를 베어버리기 전에.
※※※※
“허억!”
어두운 밤을 가르며 부릅떠진 푸른 눈동자.
이제 막 악몽에서 깨어난 블라드의 눈빛이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끄응.”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땀이 가득한 이마를 쓸어내려 하였지만, 양손에 둘둘 감겨 있는 붕대에서부터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들어 왔다.
거꾸로 날을 잡았던 어제의 상처는 지금도 블라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꿈자리 한번 사납네.’
블라드는 생생했던 방금의 악몽을 떠올리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어제의 광경.
고고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어제 보았던 은색의 검에서는 분명 꺼림칙한 무엇인가가 느껴졌었다.
지금 이렇게 악몽으로 떠올릴 정도로.
“더 자지 그랬냐.”
“······오셨네요.”
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려 있는 창문.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오는 창가에서 오귀스트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어때요. 차밭은 다 조사한 건가요?”
블라드가 세계수의 꽃을 피워내는 데 도움을 주는 동안 오귀스트는 엘프들의 영역에서 투존이라는 찻잎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친 두 사람은 각자의 단서를 찾아냈음에도 고민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밭이 나뉘어 있더군.”
“네?”
“······인간들한테 팔 찻잎과 자신들이 마실 찻잎을 구분해 놓았다는 이야기다.”
인간용과 엘프용으로 구분해 놓은 두 개의 차밭.
단순히 원활한 판매를 위해 구분해 놓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밭에 가까이 다가간 오귀스트는 알 수 있었다.
두 찻잎의 품종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애초에 시작부터 악의에 가득 차 있었다는 이야기지.”
“······.”
엘프들의 차. 압실론.
동쪽에서부터 시작된 초록색의 악의는 어찌 보면 제국의 원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들을 향한 엘프들의 독심은 온전히 제국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세계수를 불태운 것은 가장 완벽했던 용이었으나 그들을 숲에서 밀어낸 자들은 다름 아닌 제국이었기에.
“사방이 적이로군.”
찬란히 빛나는 제국의 밑에는 수많은 이의 피와 눈물이 묻혀 있다.
제국은 그들의 세계를 짓밟고 서 있는 또 하나의 용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리고 이제 제국은 그동안 자신들이 흩뿌렸던 원죄의 씨들을 수확해야만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저 멀리 밤하늘 아래서 지금도 스스로 빛나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점점 저물어가는 제국과는 반대로 새로이 피어나는 세계수를 보는 늙은 기사의 눈에는 어쩔 수 없는 착잡함이 깃들 수밖에 없었다.
※※※※
“그러길래 왜 검을 거꾸로 들고 그랬어.”
“······.”
이제야 겨우 해가 떠오른 이른 아침.
소녀는 엉망으로 감겨 있는 붕대를 풀어내며 툴툴대고 있었다.
자신이 감아놓았음에도 쉽게 풀리지 않는 붕대의 모양새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이 그렇게 돌아갈 줄 알았다면 검집으로 들었겠죠.”
“변명하는 사람은 믿음직스럽지 못해.”
자신의 검에 상처 입은 기사.
그것도 검을 거꾸로 들고 있다 얻은 상처라면 그 누구에게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말 좀 해주시지 그랬습니까.”
“나도 처음이었단 말이야.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개화식(開花式)이었다고.”
그저 호박석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두 그루의 세계수들은 자신의 세계를 통로 삼아 기억과 현실을 오갔으니 블라드 또한 이를 악물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검을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구를 탓하겠어.’
굳이 따지자면 아무런 경고도 해주지 않은 소녀의 잘못이겠지만 블라드의 잘못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방금 소녀의 말마따나 기사의 변명만큼 초라해 보이는 것은 없을 테니 블라드는 이제 입을 다물기로 했다.
“됐다.”
이제야 감겨 있던 붕대를 다 풀어낸 소녀는 환한 미소와 가져왔던 나무함을 열었다.
색색의 가루약과 액체가 담겨 있는 함.
마치 화장품들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소녀의 나무함 안에는 화려한 색깔들이 가득했다.
“기다려 봐. 이거랑 이거 쓰면 된다고 했거든.”
“실제로 해보신 적은 없나 보네요.”
“괜찮아 옆에서 많이 봤었어.”
블라드는 가능하다면 숙련자의 손길이 있었으면 했지만, 소녀는 그런 바람들을 무시한 채 약병들을 집어 들 뿐이었다.
“손 대.”
“······.”
막무가내인 소녀의 태도에 블라드는 하는 수 없이 양손을 펼쳐 앞으로 내밀었다.
깊게 베여 있는 블라드의 손바닥.
아직도 검붉은 피가 샘솟고 있는 기사의 손바닥을 보며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오므리고 말았다.
“아팠겠네.”
“별로요.”
비록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있었으나 자신의 능력이 모자라 블라드가 다친 것을 안다.
그러나 소녀도 세계수도 개화는 처음이었으니 누군가는 뒤에서 그들의 실수를 감당해주어야만 했다.
블라드의 상처는 그런 흔적이었다.
“장로님들이 너한테 쓰라고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셨어. 효과가 좋을 거야.”
아무리 인간들을 배척하는 엘프들이라 할지라도 귀중한 개화식을 도와준 존재이니 블라드를 섭섭지 않게 대할 생각이었다.
게다가 들고 왔던 가문의 가보까지 잃었다고 했으니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금의 약은 앞으로 있을 보상에 대한 작은 조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거기에 있던 검 말인데요······.”
“응. 소드마스터의 검.”
소녀는 가볍게 대답했지만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만 크게 움찔하고 말았다.
오귀스트뿐만 아니라 옆에서 거들던 고트까지도.
소드마스터라는 단어는 그만큼 제국민에게도 각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걔는 왜?”
“······그게 왜 거기에 꽂혀있었는지 궁금해서요.”
범상치 않은 검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소드마스터의 검일 줄은 몰랐다.
은퇴한 기사에서부터 마구간지기까지.
방 안에 있던 세 명의 인간들은 모두 자신도 모르게 목을 길게 빼며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소드마스터가 줬다고 들었어.”
“그 검······을 소드마스터가 줬나요? 직접?”
“응.”
블라드와 마주친 소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한 치의 거짓도 깃들어 있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제국은 나쁜데 소드마스터는 착했거든. 그래서 검을 주고 간 거야.”
“······그게 무슨.”
뜬구름을 잡는 듯한 소녀의 대답에 오귀스트마저 평정을 잃고 되묻고 말았지만 되돌아오는 것은 호위 엘프들의 차가운 눈빛뿐이었다.
이 자리에서 소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블라드 단 한 명뿐이었다.
“거기 있는 검은 용살검이거든. 세계수를 지키는 부적.”
소녀의 눈동자가 창밖에 있는 어린 세계수를 가리켰다.
지금도 조금씩 빛을 내며 꽃을 피워내는 아우슈린의 세계수.
오귀스트와 고트는 보지 못했겠지만, 목소리의 잔재를 흡수한 블라드에게는 희미하게나마 보이고 있었다.
세계수 위에서 뛰놀고 있는 자그마한 정령들이.
“······무엇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킵니까?”
현상 속에 숨겨진 진의를 봐야 한다.
요제프는 언제나 경험 없던 소년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했었다.
어째서 소드마스터는 자신의 검을 남겨두고 떠났는가.
무엇으로부터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서 그리했는가.
그것을 말해줄 사람은 오직 눈앞에 있는 소녀뿐이었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가장 완벽한 용살검이거든.”
고고한 은색의 검.
가장 완벽한 용살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용들은 그 검을 무서워해.”
어제 보았던 검은 블라드에게 말하고 있었다.
어서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내가 너를 베어버리기 전에.
“······그렇군요.”
블라드는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어제 느꼈던 기이한 감각은 그저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검이 블라드에게 보냈던 날카로운 경고였다.
두근-!
‘······?’
소녀의 말을 통해 어제의 검을 떠올리고 있던 블라드는 갑작스레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최근에는 느껴본 적 없었던 예고 없는 심장의 울림.
심장이 뛸 때마다 블라드의 안에서는 걷잡을 수 없는 불안감이 샘솟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울림이었다.
“신녀님.”
블라드가 갑작스러운 발작에 당황하고 있는 사이, 방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소녀를 호위하던 엘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서두르는 발걸음으로.
“지금 나가셔야 합니다.”
“모시겠습니다.”
호위 엘프들에게서 귓속말로 사정을 전해 들은 소녀.
블라드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망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
아우슈린의 숲 어딘가.
엘프들의 도시와는 조금은 떨어진 어두운 숲속에서 한 무리의 엘프들이 긴장한 채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끄아아악!”
그러나 아무리 경계한다 할지라도 피해 낼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다.
사방에서 날아오는 가시들.
마치 화살처럼 뿜어져 오는 날카로운 악의에 의해 방금 또 한 명의 엘프가 쓰러지고 말았다.
“진형을 갖춰라!”
“방호진이 소용없습니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에도 바라디스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더······.’
숲속에 도사린 어둠이 엘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어두운 눈동자 안에는 비웃음과 함께 애타게 타오르는 굶주림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게 놔둘 성싶으냐.’
이 세상 모든 용은 탐욕스럽다.
그들은 언제나 완벽해지기를 갈구하는 것들이었으니까.
스스로 완벽해지기 위해서 그 저주받을 주둥이 안으로 어떤 것이라도 처넣는 데 주저하지 않는 놈들이었다.
“숲에서 나옵니다!”
“방패 들어! 마법사와 궁수들을 보호해라!”
곳곳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했다.
엘프들은 가장 날카로운 용을 밖으로 끄집어내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오직 엘프들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와라.’
한쪽 눈을 감은 채 시위를 당기고 있는 바라디스.
엘프 최고의 레인저가 겨누는 화살촉 끝으로 자그마한 마법진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가득 담아서.
새빨갛게 달궈진 모습으로.
크아아아아아-!
쏘아지는 가시 끝에는 악의 어린 독이 매달려 있다.
내짖는 포효 속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끔찍한 존재를 앞에 두고서도 뒤돌아 도망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여기다 이 개자식아!”
“저주받을 용 같으니!”
이제 엘프들에게는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지금 그들의 뒤에 있는 어린나무가 이 세상 마지막 세계수였으니까.
“니드호그······.”
그렇게 단단히 전의를 다진 엘프들에게로 다가오는 숲의 어둠.
날카로운 가시로 잔뜩 뒤덮인 날렵한 몸체.
지금은 비록 추레하게 땅을 기고 있지만, 앞다리에 달린 얇은 피막이 한때는 이 용도 하늘을 꿈꿨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보다 너무 큽니다!”
“일단 멈춰 세워야 한다!”
곳곳에서 떠돌고 있는 마법진들.
그들이 좌표를 고정할 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저 용이 가만히 멈춰서 있어야 하는 시간이.
“막아라!”
그것을 알고 있던 엘프들이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니드호그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크아악!
놈이 방향을 튼다!
마법사들을 지켜!
동료들의 비명을 듣는 바라디스의 한쪽 눈이 충혈되기 시작했다.
녀석의 날카로운 가시 끝으로 이제는 독이 아닌 엘프들의 검붉은 피가 맺히고 있었다.
“바라디—스! 지금!”
누군가가 날린 올가미로.
누군가의 방패가 틀어낸 주둥이로.
그리고 방금 소리 지른 누군가의 시체가 겨우겨우 틀어막은 전진.
그아아아아!
그리하여 마침내 멈춰선 가장 날카로운 용.
희뿌연 먼지 사이로 저주받을 용의 눈동자가 사납게 치켜 떠졌다.
“······지금!”
마침내 좌표를 잡아낸 색색의 마법진들이 사정없이 니드호그를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바라디스가 내지른 한 촉의 화살과 함께.
붉은 화살촉이 바람을 담아 한 줄기의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다.
등 뒤에는 이제 막 태어난 어린 꽃들을 짊어지고서.
터져나가는 누군가의 핏물들 뒤로 저 멀리 어린 세계수의 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