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4
이제는 너의 차례다 (2)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그곳에는 니드호그가 내지르는 흉악한 포성이 가득했다.
그아아아아!
니드호그는 지금 분노하고 있었다.
지금도 사납게 눈을 파고든 화살촉 하나가 니드호그에게 분노와 고통을 안겨주고 있었으니까.
“바라디스······. 지금부터는 네가 지휘해라.”
중년의 엘프가 피로 물든 어깨를 부여잡고는 힘겹게 외쳤다.
이미 그의 어깨에는 니드호그의 가시가 깊숙이 박혀있었다.
“돌파당하면······안 된다.”
엘프들의 대전사이자 이번 작전의 책임자.
바라디스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와중에도 그의 입술은 점점 새까매지고 있었다.
날카로운 용의 악의가 지금도 그의 핏줄을 타고 심장을 꿰뚫고 있었으니까.
“······부탁한다.”
점점 창백해져 가는 대전사를 보며 바라디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세계수의 밑에서 태어났다던 대전사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눈을 부릅뜬 채 바라디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 모여라! 화력을 집중하겠다!”
그리하여 이제 남아있는 지휘자는 레인저들의 대장인 바라디스.
누구도 원치 않았던 세대교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말았다.
“대장! 저 자식 너무 단단해! 오러를 사용해도 무기가 제대로 피부를 뚫지 못하고 있어!”
“저희의 예상과는 다르게 이미 저 용은 성장을 마친 성체(成體)인 것 같습니다. 마법에 대한 면역력이 강력합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절망적인 보고에 바라디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엘프들은 니드호그를 저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완연히 눈을 뜬 용의 가능성은 그 누구도 막아내기 버거운 것이었다.
“후퇴합니까?”
그렇다면 이제 남은 방법은 세계수가 있는 곳까지 후퇴해 본진과 합류하는 방법뿐.
세계수와 함께 늙은 장로들의 힘까지 죄다 끄집어낸다면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안 돼. 여기서 결말을 지어야 한다.”
그러나 지켜야 할 대상을 방패로 삼은 채 싸우는 것은 어불성설.
지금도 어린 세계수의 가지 위에는 아직 날갯짓할 준비가 되지 않은 어린 정령들이 매달려 있었다.
그 아이들을 앞세울 수는 없었다.
“우리가 해야 한다.”
저 앞에서 으르렁대고 있는 니드호그와 바라디스의 눈이 마주쳤다.
지금도 니드호그의 한쪽 눈에 매달려 있는 자신의 화살.
얕았기에 끝을 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니드호그를 괴롭히고 있는 화살의 존재는 분명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 번만 더 틈을 만들어다오.”
화살이 얕았다면 더 가까이서 쏘면 될 일이다.
그리고 바라디스는 얼마든지 날카로운 악의를 향해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뇌까지 꿰뚫어낼 테니까.”
각오를 마친 바라디스의 눈동자 안에서 자그마한 오성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엘프들 중에서도 소수의 인원만이 가질 수 있다는 마법안(魔法眼)이 그의 눈동자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우슈린의 바라디스.
분노로 달궈진 그의 세계가 니드호그만큼이나 날카롭게 세워지고 있었다.
※※※※
“도와주세요······도와주세요.”
마치 발작하듯 몸을 떨고 있는 소녀가 블라드의 소매를 붙잡고는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용이 와요······.”
비록 소녀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블라드를 붙잡은 손아귀만큼은 하얗게 물들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세계수의 신녀는, 아니 어린 세계수는 그만큼 눈앞의 있는 기사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과정을 뛰어넘은 저 너머의 결과를 볼 수 있는 세계수는 오직 블라드만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게 그러니까 지금······.”
“계시입니다.”
여태껏 입 한 번 연적 없던 호위 엘프에게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녀는 세계수와 엘프들을 잇는 통로.
필멸자의 한계 저 너머를 바라볼 수 있는 신령스러운 나무의 계시는 절대 무시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용이 온다.”
세계수와 신녀는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미래에 있을 위협을, 악의에 가득 찬 용의 눈동자를.
“······용이 왔는데.”
그렇기에 엘프들은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주변을 경계하고 수상한 것들을 배제하며 저지선을 세워냈다.
그렇기에 지금 바라디스와 엘프들은 나름의 준비를 갖춘 채 니드호그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용이 아직도 보고 있어.”
용이 온다.
용이 본다.
세계수와 신녀는 앞으로 있을 미래를 최대한 읽어보았지만, 그들은 아직 어리고 경험 없는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알아차리지 못했다.
세계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는 오직 한 쌍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아아아아아!
순간, 마을에 가득 울려 퍼지는 소름 끼치는 포효.
엘프들이 세워놓은 저지선의 반대편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용의 포효가 있었다.
“······이런.”
흉포한 포효를 들은 블라드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계시가 아니라도 누구라도 알아챌 수 있었다.
쿠과가가강!
겨우 뿌리를 내린 엘프들의 마을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경계선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또 한 마리의 니드호그였다.
“도와주세요. 제발.”
소녀의 볼을 따라 한줄기의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간절히 소매를 붙들고 있는 소녀의 손가락이 가련하다.
“······.”
눈가에 맺혀있는 소녀의 눈물을 본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오귀스트를 돌아보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를 보면 어떡하나.”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는 요제프도 자야르도 아니었다.
주군도 선임기사도 없는 지금. 지금 이 자리에서 블라드에게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
“네가 결정해야지.”
오직 자신뿐.
블라드라는 기사의 주인은 오직 블라드 뿐이었다.
“······맞아요.”
창가로 비치는 하얀 달빛이 블라드를 비추고 있었다.
그 달빛이 머무는 블라드의 한쪽 가슴에는 자그마한 글귀가 쓰여 있었다.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흘러내리는 소녀의 눈물을 닦아준 블라드.
달빛이 가리키는 그의 가슴에는 산 로지노가 적어준 명예로운 글귀가 적혀 있었다.
“저 쇼아라의 블라드. 신녀님의 요청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쇼아라의 블라드.
아이들의 숨결을 지켜낸 기사.
이제는 비어버린 블라드의 폼멜이 달빛에 비쳐 반짝이고 있었다.
※※※※
꺄아아아악!
용이다! 용!
모두 도망쳐!
거대하고도 날렵한 몸체는 마치 파도를 가르듯 엘프들의 집을 헤치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쏘아지는 경비병들의 화살이 있었으나 니드호그에게 있어서 그들의 공격은 간지럽지도 않을 뿐이었다.
가장 날카로운 용에게 닿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은 세계를 품은 검이 필요했다.
“왜 따라오세요?”
“당연히 내 마음이지.”
니드호그를 따라 달려나가는 두 명의 기사.
블라드와 오귀스트는 건물들을 뛰어넘으며 니드호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엘프들은 제국의 적이잖아요.”
“적이 어디 있고 아군이 어디 있나. 세상에는 오직 문제와 해결만이 존재할 뿐이야.”
압실론의 유통을 막는다.
그리하여 제국에 마약이 풀리는 것을 막는다.
오귀스트는 오직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블라드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은혜를 입힌 다음에 엘프용 차만 유통해달라 말해볼 생각이다. 괘씸한 잘못은 나중에 갚아도 되겠지.”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보다는 일단은 터져나가는 댐의 구멍을 막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정당한 분노를 풀어놓지 못할 정도로 제국은 심약해져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디냐.’
니드호그를 바라보는 전 제국헌병대장의 눈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직 평생동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해 온 오귀스트만이 시도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약점 간파.”
그 누구라도 숨기고 싶은 부분이 있다.
자신의 약한 부분, 드러내고 싶지 않은 치부, 한 번 찔리면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그런 치명적인 약점.
그렇기에 사람들은 거짓과 위압으로 자신의 약한 부분을 감추고는 한다.
지금의 니드호그처럼.
‘앞발······. 피막의 안쪽.’
비늘은 단단하고 세워져 있는 가시는 흉악하다.
이마에 세워진 뿔은 무엇이든지 찢을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지만 니드호그는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피막 안쪽의 겨드랑이 부분이 약점인 것 같다. 그곳을 공략해라.”
하늘을 향한 욕망을 버리지 않은 동부의 용은 여전히 날개에 대한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고집과 아집으로 붙어있는 너저분한 피막이 바로 니드호그의 약점이었다.
오귀스트가 비춰본 눈동자의 오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까아아앙!
크아아아아!
순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니드호그의 전진이 가로막히고 말았다.
부서지는 건물들, 밀려 나가는 지면의 돌덩이들.
갑작스레 등장한 거대한 마법진이 니드호그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법이로군!”
블라드는 오귀스트의 말을 듣고는 재빨리 세계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세계수의 앞에 모여 있는 몇몇 엘프들이 보였다.
엘프들의 장로들이었다.
“잘 됐다. 이 틈을 살려서······.”
그아아아아아!
장로들이 만들어낸 마법진은 분명 고매한 술법에 의해 설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니드호그는 이미 성체가 된 상태.
완벽에서 떨어져 나온 용들은 세상을 속이는 마법에 현혹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뭔 놈의······.”
마치 마법진이 고깃덩어리라도 되는 양 물어뜯기 시작하는 니드호그.
용의 우악스러운 치악력과 함께 마법진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젠장!”
하늘 위에서 깨어져 나가는 마법진들.
블라드는 유리 조각처럼 떨어져 내리는 마법진의 잔해를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이것이 용인가.’
성체가 되지 않았던 어린 데스웜.
이제야 막 용임을 깨달았던 린드부름.
두 마리의 용을 상대해봤던 블라드였지만 눈앞에 있는 니드호그는 그 녀석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녀석이었다.
용살 기사단은 정녕 이런 용들을 상대해왔단 말인가.
그아아아아!
1중, 2중, 3중.
깨어질 때마다 새로이 생겨나는 마법진들은 분명 늙은 장로들의 기력을 쥐어짜 만들어지는 것일 테다.
그러나 새롭게 만들어지는 마법진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곳곳에서 날아드는 발사체들은 계속해서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다.
마법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대.
전사들이라도 있다면 어찌 방법이라도 찾아보려만 용이 들어오기 전에 밖에서 요격하겠다던 엘프들의 판단은 지금 치명적인 실수로 돌아오고 있었다.
“블라드! 달려라!”
“빌어먹을!”
거대한 몸체가 마침내 세계수의 앞에 다다랐다.
늙은 제로니모는 마지막까지 양팔을 펼쳐 니드호그를 저지하려 하였으나 그의 오래된 육체는 더는 선명한 의지를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처 삼켜내지 못한 검붉은 핏줄기가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그아아아아!
모든 방해를 떨쳐낸 잔악한 포식자.
마침내 니드호그의 발톱이 어린 세계수를 찍어눌렀다.
—–!
달빛 아래서 어지럽게 흔들리는 가지들.
저 멀리서 고통스럽게 튀어 오르는 소녀의 육체.
어린나무와 신녀 모두가 용의 발끝에서부터 전해지는 탐욕을 느끼며 공포에 떨고 있었다.
파멸이 내뱉는 숨소리가 바로 옆에 있었다.
“내가 유인하마!”
“알겠어요!”
세계수의 끝에 있는 어린 정령들.
니드호그의 시선이 잠시 그곳으로 쏠려 있는 동안 블라드와 오귀스트가 재빨리 양옆으로 달려들었다.
“흐읍!”
왼쪽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세계를 불러일으킨 오귀스트.
그의 검에서부터 찬란히 빛나는 새벽의 여명이 맺히기 시작했다.
전 제국헌병대장 오귀스트.
그의 빛은 거짓을 밝히는 여명이었다.
“여기다!”
아무리 약점을 알아냈다 한들 그것을 들춰내지 않고서는 의미가 없다.
갑작스러운 오귀스트의 등장에 나무를 올라타려던 니드호그의 주둥이가 재빨리 자신의 겨드랑이를 가리고 있었다.
“고놈 참 못생겼다.”
사나운 입김을 마주한 오귀스트의 눈빛이 강렬해졌다.
그래도 여기서 자신이 이 녀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면 분명히 반대편에 있는 블라드에게는 빈틈이 보일 것이다.
“뭐?”
그러나 니드호그는 오귀스트를 상대하려 들지 않았다.
그저 날카로운 가시들을 뿜어낸 채 서둘러 위로 올라가려 했을 뿐.
늙은 기사의 머리 위로 독을 가득 품은 빗줄기가 뿜어지기 시작했다.
“젠장!”
반대쪽에서 달려들던 블라드는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오귀스트를 보며 재빨리 왼쪽 눈을 감았다.
가능하다면 완벽한 기회를 포착하고 싶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저놈이 올라가기 전에······.”
시간이 없었기에 깊은 세계까지 끌어올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블라드는 목소리의 잔재만큼은 확실하게 담아내었다.
블라드의 감은 왼쪽 눈으로부터 하얀색의 번개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 개자식아!”
어느새 세계수를 밟고 위로 올라가려는 니드호그.
새까맣게 물든 발톱의 끝에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정령들이 있었다.
용은 가능성을 먹는다.
좀 더 완벽해지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야 갓 태어난 어린 정령들은 분명 용이 탐할 만큼의 가능성의 덩어리들이었다.
“여기다! 이 새끼야!”
니드호그의 의도를 알아챈 블라드는 망설임 없이 빠른 쇄도를 통해 세계수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땅에서부터 시작된 한 줄기의 번개가 니드호그의 옆구리를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빠르고 날카롭고 그리고 누구보다 매섭게.
“됐다!”
땅을 구르던 오귀스트마저도 손을 불끈 쥐고 만 완벽한 타이밍.
약점을 향해 내뻗는 블라드의 검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
그러나 니드호그의 움직임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기민했다.
그 어떤 세계보다 민감하게 와닿았던 블라드의 세계.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었다.
그아아아아!
블라드의 시선 가득히 어두운 그림자가 내려오고 있었다.
독을 가득 품은 니드호그의 꼬리였다.
퍼억!
무언가가 깨져나가는 소리.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세계수의 아래에서 흩날리는 조각들이 가득했다.
마치 깨어진 별빛과도 같은 조각들이었다.
※※※※
세계수의 가장 깊숙한 곳.
근원이 자리 잡은 따뜻한 뿌리 안.
그곳에서 고개를 숙인 채 홀로 무릎을 꿇고 있는 은색의 기사가 있었다.
······.
자아는 없지만, 의지는 있다.
은색의 검은 밖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에 날카롭게 검날을 세우고 있었다.
하나는 탐욕스러운 동쪽의 용.
또 하나는 차가운 북쪽의 바람을 품고 온 어린 용.
그러나 은색의 검은 쉽사리 판단할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을 품고 온 어린 용에게는 분명 낯설지 않은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그 기운은 분명 자신과 함께 했었던 누군가의 잔재였다.
······.
나는 세계수를 지키는 부적이지만 본래는 검이다.
검은 뽑혀야만 제 검신을 드러낼 수 있는 법.
그러니 너는 나에게로 와라.
너라면 나를 뽑을 수 있을 테니까.
달빛 아래 서 있던 은색의 검이 고고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맞닿는 세계를 통해 조용히 별빛을 품은 어린 용을 부르고 있었다.
오늘의 달빛은 푸른색이었다.
별을 품은 푸른 눈동자
밤하늘 위로 깨어진 파편들이 요란하다.
그와 함께 요란히 빛나는 하얀 뱀의 가호.
그리고 바로 앞에서 엉망으로 금이 가 있는 마법진 하나.
‘이건······.’
어지러이 깨어진 마법진 너머로 창백한 안색의 제로니모가 팔을 뻗고 있었다.
새하얀 입술 위로 물든 그의 붉은색이 선명하다.
“블라드! 정신 차려라!”
시야가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
뜨끈한 무언가가 이마를 타고 흐르는 것이 아무래도 당한 것 같다.
“젠장!”
자신을 질질 끌어내는 오귀스트의 말소리도 저 멀리에서 들리는 것만 같다.
조금씩 돌아오는 시야로 니드호그에게 달려드는 엘프들의 모습이 보인다.
“끄으으······.”
“몇 개로 보이냐? 내 손가락 몇 개로 보여?”
단단하고 날카로우며 또한 교활하다.
여태껏 마주했던 적 중 가장 강력한 존재.
니드호그는 블라드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과 같이 다가왔다.
“손가락은 잘 모르겠고 일단 저 자식 발톱은 세 개였어요.”
“······좋아. 일어나.”
흔들렸으나 다시금 초점을 잡은 푸른 눈동자를 보며 오귀스트는 블라드를 잡아 일으켰다.
이 어린 기사는 아직 기개를 잃지 않았다.
“녀석이 위로 올라간다!”
“올가미를 던져!”
고함과 함께 곳곳에서 던져지는 올가미들.
그러나 고작 몇십 명의 엘프들만으로는 니드호그의 거친 전진을 막을 수 없었다.
그아아아아!
울려 퍼지는 니드호그의 포효와 함께 엘프들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말았다.
목이며 발이며 이곳저곳에서 밧줄들이 얽혀들어 갔지만 굶주림에 미쳐 있던 니드호그의 기세를 틀어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밧줄을 잡아당기고 있던 엘프들이 사정없이 끌려다니고 있었다.
“할 수 있겠냐?”
“······한 번 정도는요.”
오귀스트의 말에 블라드는 재빨리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갑옷은 반쯤 부서졌으나 아직 하얀 뱀의 가호는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길하게 흔들리는 루트거의 검은 삐걱대고 있었지만, 아직 예리함을 잃지는 않았다.
아마 한 번 정도라면 자신의 역할을 다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무타기 좀 할 줄 아나?”
“도시 출신이라서요.”
“그러면 이번에 배워두면 좋겠군.”
오귀스트와 블라드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 아래서 세계수를 타고 오르는 끔찍한 것.
저 위에서 들리는 정령들의 비명이 애처로웠다.
“지금!”
밧줄을 붙잡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엘프들.
그들의 사이로 늙고 어린 기사가 뛰쳐나갔다.
땅에서부터 시작했으나 시선은 하늘에 있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왼쪽 눈을 감았다.
하늘을 향해 기어 올라가는 용의 뒤로 두 개의 별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네 이놈!”
직선을 타고 먼저 도착한 오귀스트는 재빨리 니드호그의 꼬리 부근으로 뛰쳐올라가 검을 꽂아 넣었다.
약점이라고 할 수는 없는 부위였으나 그나마 제일 약한 부분이 이곳이었다.
아마 이곳이라면 녀석의 시선을 잡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아아아아!
뒤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끔한 기운에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세로로 좁혀졌다.
“큭!”
어지럽게 다가오는 꼬리가 매섭다.
가뜩이나 한 손은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 상황에서 오귀스트는 최선을 다해 회피를 시도했다.
퍼어어억!
간신히 피한 니드호그의 꼬리.
그러나 쉴 새도 없이 흩날리는 나무 파편 너머로 가시들이 날아온다.
오귀스트는 이미 한 번 겪었던 니드호그의 공격을 보며 찬찬히 숨을 내쉬었다.
“그게 왜 안 나오나 했지.”
치켜떠진 오귀스트의 두 눈이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약점 간파의 본래 의도는 바로 최적의 길을 찾아내는 것.
오귀스트의 눈에는 빽빽이 날아오는 가시 사이로 반짝이는 하나의 길이 보였다.
날아오는 니드호그의 가시들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흡!”
악의 어린 가시들 사이로 늙은 몸이 삐걱댔다.
교묘하게 화살보다 빠른 가시들을 피해내는 오귀스트의 움직임은 이미 신기에 가까웠다.
“······!”
곡선을 타고 크게 돌아온 블라드.
니드호그의 위에 도착해 있던 블라드는 감고 있던 왼쪽 눈을 통해 오귀스트의 움직임을 보았다.
용의 울부짖음과 세계수의 떨림.
그리고 처연히 내려앉은 달빛 아래서 빛나는 그의 세계는 강렬한 한 장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블라드의 세계에 깊이 각인되고 있었다.
“지금이다! 블라드!”
“······!”
오귀스트의 잔상이 아직 남아있다.
블라드는 그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재빨리 니드호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그아아아아!
보인다.
그림자처럼 희미했지만 네 녀석에게로 닿는 길이.
부릅뜨고 있던 블라드의 오른 눈이 푸른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뭐?”
오귀스트의 당황과는 상관없이 블라드는 차분히 니드호그의 뿔을 향해 달려들었다.
까아아앙!
기어이 산산이 조각나 버리는 루트거의 검.
자신의 가시를 잃어버린 블라드를 보며 니드호그의 입술이 바짝 올라갔다.
인간을 향한 비웃음.
그러나 그 비웃음이 향하고 있는 대상은 여전히 자신을 차갑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
비록 삐걱거리고 있었지만 역시 한 번은 버텨줄 줄 알았다.
그것이 내가 본 유일한 길이었다.
“흐아아압!”
흩뿌려지는 검의 파편 사이로 블라드의 오른손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블라드의 손에서 시작된 하얀 번개가 탐욕스러운 눈동자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쳐졌다.
“또 비웃어봐라!”
날카롭게 파고드는 날붙이의 느낌.
짧았기에 강렬한 검.
어느새 뽑혀든 호르헤의 단검이 니드호그의 눈동자를 파고들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마침내 니드호그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 세계수 사이에서 높게 울려 퍼졌다.
푸른 눈동자의 기사가 완벽을 향하는 존재에게 기어이 흠집 하나를 만들어냈다.
자신을 가로막는 거대한 벽을 향한 블라드의 휘두름이었다.
“죽어—!”
쇼아라의 블라드도 나지만 뒷골목의 블라드 또한 나다.
블라드는 자신의 뿌리를 이루는 어두운 기억을 숨기지 않았다.
반짝이는 호르헤의 단검.
블라드의 손짓 한 번에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터져나가고 있었다.
그아아아아!
죽어 이 새끼야!
각자가 가진 상처 속에서 두 마리의 용이 서로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오늘 너를 죽인다.
죽이고 말겠다!
“이런!”
고통스러운 발버둥은 강렬하고 당황하는 몸짓은 커다랗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발산하며 발버둥치는 니드호그에 의해 오귀스트는 그만 자신의 길을 놓치고 말았다.
디딜 공간마저 빼앗겨버린 오귀스트는 더는 블라드를 도와줄 수 없었다.
“조심해라!”
외마디 경고와 함께 어린 기사에게 길을 열어준 별빛 하나가 세계수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베어낸 곳에서 흘러내리는 검붉은 핏물과 함께.
“젠장!”
블라드는 떨어져 내리는 오귀스트를 걱정할 틈도 없었다.
이제 하나 남은 적을 향해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사납게 빛나고 있었으니까.
쾅! 콰앙! 쾅! 쾅!
세계수가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저히 자신의 머리 위에 있는 블라드를 떼어낼 재간이 없던 니드호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뿔과 함께 어린 세계수를 들이받고 있었다.
격렬히 흔들리는 블라드와 함께 터져나간 눈동자에서부터 피가 흩날리고 있었다.
“크으윽!”
겨우 박아넣은 호르헤의 단검을 의지한 채 깃발처럼 이리저리 휘날리는 블라드.
뒤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세계수의 파편이 따가웠다.
“이 개자식이!”
호르헤의 단검은 최선을 다했지만 얕았다.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검만 있다면 좋았겠으나 이것이 블라드의 최선이었다.
콰아아앙!
기어이 니드호그의 머리통이 세계수의 몸통을 뚫어내었다.
질기게 버티고 있었지만, 피로 미끄러워진 단검의 손잡이는 오래 붙들고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계속되던 강렬한 충격에 마침내 니드호그의 머리에서 떨어져 나가버린 블라드.
“······!”
순간 아찔하게 다가오는 낙하감을 느끼며 블라드는 양손을 허우적거리고 말았다.
그때 소녀와 함께 보았던 세계수의 안은 비어있었다.
뿌리까지 떨어지는 햇빛과 달빛을 받기 위해 스스로를 비워낸 세계수.
그 신령스러운 뿌리를 향해 별빛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저 위에서부터 들려오는 용의 울부짖음이 블라드의 귓가에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머릿결을 휘감는 공기가 서늘하다.
“······.”
힘겹게 눈을 뜬 블라드에게 보이는 것은 사납게 치켜떠진 니드호그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여기는.”
흩날리는 새빨간 단풍잎들.
지금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는 것은 호박석 안에 담겨 있던 가을의 풍경이었다.
[많이 아프냐.]블라드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단풍나무 아래 서 있는 누군가.
비록 뒷모습뿐이었지만,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지만, 누구인지 알 것만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상처투성이의 어린 기사.
블라드를 보는 사내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최선을 다했는데요. 잘 안됐어요.”
블라드는 천천히 일어나 절뚝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걸어가도 걸어가도 그에게 더는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아직도 안 돼요?”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그렇게 목소리와 블라드의 사이는 좁혀지지 못했다.
이렇게나 열심히 걸어왔는데 아직도 닿을 수 없단 말인가.
어린 기사는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제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안 되잖아요. 뭘 해도 안 되잖아요.”
뒷골목의 소년이 기사가 되어 용과 대적하고 있다.
그 한 단계 한 단계가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의 걸음이었지만 여전히 블라드의 앞에는 높은 벽과 거대한 세계뿐이었다.
아무리 올라가도 자신에게 쥐어지는 것은 그저 보잘것없는 한 줌의 성공일 뿐이라는 것에 어린 기사는 그만 지치고 말았다.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리는 블라드의 울먹임에 그만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도전했음에도 가지지 못하는 서러움을 무어라 위로해 줄 수 있을까.
[그래도 난 네가 자랑스럽다.]세상은 할 수 있는 것보다 하지 못하는 것이 더 많은 곳이다.
그럼에도 뒷골목의 소년은 대장간 위에 걸려 있던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목소리는 소년의 눈 안에서 비치던 그때의 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위를 바라보던 네가 자랑스럽다.]세상은 너보다 거대하고 잔혹하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네가 바라보는 곳이 곧 너의 세계가 되리라는 것을.
그러니 고개를 들어라. 어린 기사야.
“······제가 잘하고 있었어요?”
[그럼.]“너무 힘든데요.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지금까지 충분히 잘해왔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하면 돼.]목소리의 격려 한 번마다 어린 기사의 고개가 올라가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걸어봤기에 네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고 있다.
어린 기사야. 너는 정말 훌륭히 잘 해내고 있다.
[네가 맞고, 네가 옳다.]목소리는 그 말과 함께 자신의 허리에 달려 있던 검집을 블라드에게 던져주었다.
은색의 검.
고고한 빛을 뿜는 소드마스터의 검이었다.
“이건······.”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목소리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자신을 향해 돌아서 있는 사내.
비록 사내의 얼굴은 짙은 그림자로 가려져 있었지만, 입술만큼은 보이고 있었다.
그가 웃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너의 차례다.]단풍잎이 흩날린다.
어느새 시야를 가득 채운 새빨간 잎들이 손가락을 펼치며 안녕이라 말하고 있었다.
나무 아래서 웃음 짓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내 차례.”
흩날리는 단풍잎과 함께 환상 속의 가을은 지났다.
다시금 눈을 뜬 블라드에게 보이는 것은 가을날의 풍경이 아니라 하늘 위로 뜬 오늘의 달빛이었다.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 안으로 새하얀 달이 가득 맺혀 들어오고 있었다.
※※※※
그아아아아!
마침내 세계수의 꼭대기까지 오른 니드호그.
그의 탐욕스러운 눈빛이 가지 사이사이에 매달려 있는 어린 정령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니드호그는 공포에 질려 있는 수많은 어린 정령들을 보며 즐거운 듯 크게 웃어젖혔다.
터져나간 왼쪽 눈.
반쯤 잘려버린 꼬리.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올라왔지만 상관없다.
이제 저 아이들의 가능성을 취해 좀 더 완벽한 나의 모습이 될 테니까!
“그렇게는 안 되지.”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오는 단호한 목소리.
감히 완벽해질 자신을 향해 차가운 조소를 날리는 존재가 있었다.
그르르르-
푸른 눈동자의 기사.
치켜뜬 눈은 사나운 용이었으나 들고 있는 것은 기사의 검인 그런 존재.
함께 할 수 없는 두 개의 세계를 간직한 그의 이름.
쇼아라의 블라드.
그아아아아아!
눈앞에 서 있는 블라드를 보며 니드호그는 거친 분노를 터트리고 말았다.
떼어내도 떼어내도 달라붙다니.
푸른 눈동자의 어린 용은 끔찍하게도 질긴 놈이었다.
“여기서 내려가라. 이 개자식아.”
아우슈린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것은 오직 블라드와 니드호그뿐.
이제 자신의 뒤에는 정령들을 지켜줄 그 누구도 없다.
이젠 내가 해내야 할 차례다.
‘······좀 더 깊이.’
블라드는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감고 있던 왼쪽 눈을 떴다.
좀 더 깊은 세계.
그것은 자신의 눈이 아닌 가슴속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제는 나의 차례.
이제는 내가 지킬 차례.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빛 하나가 은색의 검과 함께 빛나기 시작했다.
“흐아아아아!”
그아아아아아!
어린 정령들을 뒤로한 별빛 하나가 용을 향해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빠르고 강렬하게.
오직 자신만의 의지를 담아서.
“······!”
애꾸눈의 기사가 알려준 날렵한 발걸음을 통해 날카로운 뿔을 피하고.
빠르게 날아오는 가시들을 하얀 뱀의 가호와 함께 갑주술로 받아내었다.
“크윽!”
살짝 밀렸으나 강체술로 강화한 발목을 통해 버텨내며.
오늘 누군가가 보여준 가장 최적의 길을 찾아 그렇게.
소드마스터의 검술 위에 얹힌 누군가의 세계들이 블라드를 위한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크아아아!”
니드호그는 자신에게 짓쳐 드는 어린 용을 보며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완벽해지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가능성을 짓밟은 채 올라서야 하는 법.
그러나 푸른 눈의 어린 용은 오직 자신만의 가능성으로 벽을 뛰어넘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자랑스러울 모습으로.
그아아아아아!
찢기는 피막 사이로 흉악한 가시들이 꺾이고 있었다.
혼자서는 날 수 없었던 너절한 가능성이 별빛과 함께 갈라지고 있었다.
완벽을 꿈꾸었던 용의 목소리가 비명과 함께 저물고 있었다.
“이제는 나의 차례다!”
오늘 새로이 떠오른 별 하나가 아우슈린의 가장 높은 곳에서 빛나고 있었다.
누구나 바라볼 수 있게, 누구나 올려다볼 수 있게.
그 빛은 여태껏 소년이 가슴속에 품었던 별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