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6
부서지는 목줄 (2)
끔찍한 악몽의 흔적이 남아있는 세계수의 아래.
니드호그의 시체를 처리하기 위해 작업이 분주한 곳으로 늙은 기사가 찾아왔다.
“내가 잠시 이 녀석의 시체를 보아도 괜찮겠소?”
“······그러시죠.”
한참 용의 시체를 갈라내던 엘프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불청객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길을 내주었다.
인간들의 기사 오귀스트.
그는 분명 세계수를 지켜준 은인이기는 했지만, 엘프들의 입장에서는 대하기 미묘한 존재이기도 했다.
“이것 참 고맙군. 용의 사체를 관찰할 기회는 얼마 없어서 말이오.”
반가운 존재이지만 동시에 꺼려지는 존재.
평생을 무언가를 조사하던 늙은 수사관은 너무나 익숙한 반응에 그저 웃음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어디 보자. 시작은 왼쪽 눈부터군.”
이곳에서의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한 오귀스트는 이제야말로 은퇴한 기사다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자신의 흥미가 생기는 일을 따라온 것에 불과했지만.
“······내가 말한 대로 피막 안쪽까지 베어내었고.”
니드호그의 눈동자에서부터 시작된 검의 흔적은 마치 물결치듯 흘러나가 피막 안쪽에 있는 겨드랑이까지 닿고 있었다.
“이게 치명타였군.”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심장까지.
오귀스트는 이것이 니드호그의 숨을 끊어놓은 치명타임을 간파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았단 말이지.’
승리를 확신했음에도 블라드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이어진 상처는 마치 뼈와 살을 발라내듯 결을 따라 그어나가 오귀스트가 반쯤 잘라놓았던 꼬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끝을 확신했음에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검술이라 할지라도 뻗어낼 때는 각자의 개성을 가지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보이는 블라드의 검에도 아직 피어나지 못한 강렬한 개성이 잠재되어 있었다.
오귀스트가 알아본 그 개성의 이름은 바로 잔인함이었다.
“이거 골 때리는 놈이로군.”
오귀스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동안 많은 임무를 수행하면서 보아왔던 인간 군상 중에서도 이 녀석만큼 판단하기 힘든 녀석은 없었다.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하다.
황실의 검을 쓰는 북부의 어린 기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흔만큼이나 모순적인 존재였다.
※※※※
창가를 넘어 들어오는 햇살이 따사롭다.
이제는 완연히 느껴지는 봄의 기운을 느끼며 블라드는 서둘러 머리 위를 털어내었다.
“이제 너희들 집으로 가면 안 되냐? 제발 좀.”
블라드의 손놀림에 테이블로 철퍼덕하고 떨어진 작은 털 뭉치 하나.
병아리처럼 생긴 정령 하나가 화가 난 듯 뭐라 삑삑 대기 시작했지만 블라드는 어린 정령의 몸짓을 무시한 채 그저 웃옷을 벗어낼 뿐이었다.
“조용해지니까 속이 다 시원하네.”
보이기는 하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마치 폭풍처럼 불러일으켰던 심상 세계가 이제야 좀 잠잠해진 것을 느끼며 블라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좀 더 확연한 오러를 내뿜기 위해 깊은 세계에만 집착해왔던 블라드였으나 이번 일을 겪고 나서부터는 평정을 유지하는 것도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거 약이 너무 좋은데.”
자신에게 달라붙던 어린 정령들을 다 털어낸 블라드는 몸 곳곳에 두르고 있던 붕대를 풀어내며 혀를 내둘렀다.
검날을 잡았을 때 생긴 손바닥의 흉터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으며 니드호그와의 대결에서 얻은 상처들도 이제는 붕대가 필요 없을 정도가 되었다.
‘나중에 좀 달라고 해야겠다.’
훌륭한 약은 여벌의 목숨과도 같다.
평생 자잘한 상처를 달고 살아온 블라드는 엘프들의 약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아. 그걸 벌써 풀면 어떡하지?”
작은 것들이 여기 좀 보라며 계속해 북적대었으나 들려오는 소리만큼은 하나도 없는 조용한 방.
그 방의 고요함을 깨트리며 방으로 들어오는 소녀가 있었다.
“이제 거의 다 나은 것 같은데요.”
“상처가 깊숙했단 말이야. 뼈에 금도 가 있었다고.”
소녀가 하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만약 블라드의 상처를 평범한 방법으로 상처를 치료했다면 최소한 한 달은 넘게 정양해야 했을 부상이었다.
“빨리 다시 누워. 일주일은 더 여기에 있어야 한단 말이야.”
어떨 때는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지나치게 어려 보이지만 또 어떨 때는 현숙한 눈빛이 어려있다.
아직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세계수의 신녀는 귀한 손님이라는 것을 제쳐두고라도 블라드를 과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약이 좋네요. 이거 나중에 조금 얻어갈 수 있을까요?”
어울리지 않게 인상을 찌푸리는 소녀를 보며 블라드는 화제를 돌려보려 애썼다.
“그리고 혹시 기침에 좋은 약이 없을까요? 부작용이 없는 걸로다가.”
청명한 녹색빛을 지닌 압실론을 보며 맨 처음 떠올린 사람은 바로 요제프였다.
항상 기침을 달고 살던 자신의 주군은 언제나 북부의 차가운 공기에 고통스러워하고는 했었으니까.
분명 엘프들이라면 요제프에게도 맞는 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귀한 약이라면 분명 돌아가는 길에 훌륭한 선물이 되어주겠지.
“기침······약?”
약을 내어달라는 블라드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소녀.
블라드를 마주하던 소녀의 황금색 눈동자가 아주 잠시 반짝였다.
“······.”
블라드는 소녀가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자신의 눈동자를 통해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달라면 주겠는데 크게 의미는 없을 거야.”
어느새 약병으로 고개를 돌린 소녀는 다시금 블라드가 알고 있던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네가 이렇게까지 일찍 회복할 수 있었던 건 어디까지나 가지고 태어났던 생명력이 강렬하기 때문이야.”
소녀는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약을 가져가 봐도 그 사람에게는 큰 소용이 없을 거야. 우리의 약은 그런 거거든.”
“······그렇군요.”
마치 누구에게 줄지 알고 있다는 말투.
블라드는 소녀의 말을 들으며 그만 기묘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무언가 확연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납득이 되고 마는 그런 느낌이었다.
똑똑똑.
소녀의 신비로운 기운에 한참 알 수 없던 상념에 빠져있던 블라드는 옆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여전히 이름을 알 수 없는 소녀는 그렇게 순간순간 블라드를 환상과도 같은 분위기 속으로 데려가고는 했다.
“누구십니까?”
벌컥벌컥 문을 열어대는 소녀와는 달리 정중하게 자신이 왔음을 기별하는 소리.
손님이었으나 방의 주인 된 도리로 문을 연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감청색 눈동자를 지닌 엘프였다.
“잘 지내고 있었나? 그동안 일이 바빠서 들여다보지 못해 미안하군.”
레인저들의 대장. 바라디스.
그가 문턱에 기대어 서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리 자네 방이라도 해도 옷은 좀 입고 다니지 그래. 신녀님도 계시는데 보기가 좋지 않군.”
바라디스의 눈동자가 블라드를 넘어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여기에 있다는 듯 양손을 흔들며 바라디스를 반기는 소녀.
방 안에 오직 블라드와 소녀밖에 없는 것을 확인한 바라디스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약을 좀 바르느라······.”
“그래. 거동이 불편하니 그럴 수도 있겠군.”
들어오라는 말이 없었음에도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온 바라디스는 곧 침대 위에서 웃옷을 집어 들고는 블라드에게 건네주었다.
“아직 다 안 발랐는데.”
“괜찮아. 그 정도면 다 나았어.”
웃옷을 받아든 블라드는 멍한 눈빛으로 바라디스를 바라보았다.
“어서 입으라니까?”
웃고 있었으나 어딘가 미묘하게 굳어 있는 바라디스의 표정.
그리고 그의 어깨 뒤에서 어느새 다시 평범한 눈빛으로 돌아온 소녀까지.
블라드는 왜인지 모르게 그 둘의 얼굴이 묘하게 겹쳐지는 것 같았다.
※※※※
“늙은 기사가 자네보다 먼저 면담을 신청했어. 그래서 그 일을 처리하느라 장로님들이 조금 늦게 부르신 것 같네.”
“그런가요.”
손님에게 내어주었던 건물에서 나와 세계수 쪽으로 향하는 블라드와 바라디스.
그 둘을 보는 엘프들의 눈이 둥글게 휘어 들어갔다.
정확히는 블라드를 졸졸 따라다니는 어린 정령들을 보며 다들 흐뭇한 미소를 짓는 중이었다.
“그러니 너무 섭섭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장로님들이 자네를 잊으신 게 절대 아니야.”
“바쁘셨겠지요. 이해합니다.”
블라드는 기억하고 있었다.
니드호그의 발톱에 맞서 자신에게 마법진을 씌워주었던 늙은 제로니모를.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엘프들의 대장로를 보았던 블라드는 충분히 엘프들의 난감함을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나저나 자네의 검과 갑옷이 다 깨져나가 안타깝게 되었군.”
엘프들의 타격도 분명 컸지만 블라드 개인에게 있어서도 니드호그의 토벌은 큰 손해를 안겨준 일이었다.
기사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는 검과 갑옷을 잃어버렸으니 말이다.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가호는 제쳐두고라도 그 둘의 값만 따져도 20골드는 족히 나가는 물건들이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블라드는 바라디스의 말과 함께 들고 있던 은색의 검을 바라보았다.
차마 허리춤에는 찰 수 없었던 소드마스터의 검.
그러나 블라드는 그 검의 무게가 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무거워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니드호그를 향해 뻗었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무게는 블라드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지.”
세계수 앞에 세워진 건물 중에서도 가장 높은 건물.
그곳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힌 바라디스는 내뻗는 손을 통해 블라드를 안으로 안내했다.
“······.”
곳곳에 햇살이 비치는 거대한 건물 안.
마치 나무의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에 블라드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숲의 향기가 났다.
“올라가지.”
마치 계단처럼 새겨진 그루터기들.
그것들을 하나하나 밟아가며 올라선 그곳에는 거대한 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라디스입니다. 세계수의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시게.”
끼이이익-
안에서 들려오는 허락의 의사와 함께 누가 밀지 않았음에도 저절로 열리는 문.
“······.”
그 안으로 들어선 블라드는 곳곳에서 비치는 햇빛에 잠시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친숙한 기분이 들었으나 모든 것을 크기로 압도하는 거대한 공간.
그 안에서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장로들의 눈이 조용히 블라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시게. 인간들의 기사. 블라드.”
블라드를 대하는 장로들의 태도가 온화하다.
증오해 마지않는 제국민이자 어리디어린 인간이었음에도 세계수를 지켜주었다는 사실은 완고한 장로들의 태도를 바꾸게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그동안 편하게 지내셨는지 모르겠군.”
“제집같이 편안한 밤이었습니다.”
무기도 갑옷도 잃은 채 상처를 입고 누워있던 기사.
단순한 예의로써 말하는 것이 아닌 그동안 블라드에게 보여주었던 엘프들의 관심은 극진한 것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로군.”
그러나 아무리 극진한 대접을 해주었다 할지라도 블라드에 대한 은혜의 값이 다 치러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그날, 블라드가 니드호그에 맞서 세계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지금 아우슈린에 울려 퍼지는 것은 뚝딱거리는 망치 소리가 아닌 슬픈 울음뿐이었을 테니까.
“검도, 갑옷도 모두 잃었다 들었네. 물론 우리는 거기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줄 생각일세.”
대장로를 대신해 회의를 주관하고 있던 장로는 손을 뻗어 옆에 걸려 있던 무구들을 가리켰다.
“이건.”
“갑옷일세. 하나는 밖에 입을 갑옷이고 또 하나는 안에 받쳐 입을 갑옷이지.”
블라드의 눈길이 장로의 손짓을 따라 움직였다.
오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은색의 갑옷.
산 로지로에서 준 갑옷과 흡사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날렵하게 생긴 것이 척 봐도 가벼워 보이는 갑옷이었다.
기민함을 중시하는 엘프들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난 갑옷이었다.
“그래도 부서진 갑옷 중에 멀쩡한 부분이 하나 남아있어 새로운 갑옷에 부착해보았네.”
장로의 설명을 따라 블라드의 시선이 따라 움직였다.
왼쪽 가슴의 흉갑 부분.
그곳에 새겨져 있는 문구가 낯익었다.
“아이들의 숨결을 지켜준 기사. 자네에게 참 어울리는 문구라고 생각하네.”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부터 이곳 세계수에 이르기까지.
어린 기사의 발걸음은 언제나 똑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검 말이네만······.”
갑옷을 주었으니 이제는 검을 내어줄 차례.
그러나 다음을 말하는 장로의 말끝은 희미하게 옅어질 뿐이었다.
어린 기사가 들고 있는 은색의 검.
아무리 자신들이 다른 것을 내어준다고 해도 대체할 수 없을 검.
오랫동안 세계수를 지켜왔던 소드마스터의 검을 바라보는 장로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자네가 원한다면 가져가도 좋네. 아쉽지만 우리가 다룰 수 없는 검이기도 하니······.”
소드마스터의 검은 세계수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자신들의 눈앞에 있는 어린 기사는 그 검을 뽑아 세계수를 지켜내었으니 충분히 이 검을 휘두를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여기서 블라드가 검을 가져가겠다고 말해도 어쩔 수······.
“돌려드리겠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존재.
가능성과 의외성의 덩어리.
그가 지금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은색의 검을 천천히 내려놓고 있었다.
“······아니, 어째서.”
장로들은 천천히 검을 내려놓는 블라드를 보며 그만 입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소드마스터의 검은 인간들뿐만 아니라 엘프라 해도 탐낼 수밖에 없는 기물이었다.
“싫다고 하네요.”
“······뭐?”
“여기서 떠나기가 싫다고 합니다. 이 검이.”
땅에 내려놓자마자 척하니 달라붙는 은색의 검.
바닥에 딱 붙어버린 은색의 검을 보며 장로들과 바라디스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검을 내어주실 거라면 새로 하나 만들어주시죠.”
가장 좋은 검은 필요 없다.
나는 오직 나만의 검이 필요할 뿐.
온전히 나만의 의지를 담을 수 있는 그런 검이 가지고 싶다.
“제 말을 잘 듣는 검이었으면 좋겠네요.”
밤하늘에 떠있는 수많은 별보다 소년은 대장간에 걸려 있던 희미한 별 하나가 가지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의 검.
블라드는 아직도 장식 없는 검이 그리웠다.
노인의 꿈으로 만들고 소녀의 눈물로 샀었던 그 검이.
별을 불러온 어린 것들
늦은 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북소리.
그 소리에 맞춰 빙글빙글 돌고 있는 소녀의 하얀 치맛자락이 넓게 퍼져간다.
곳곳에 세워져 있는 횃불들보다도 소녀의 치맛자락으로 안기는 빛들이 더욱 선명하다.
“떠올리게.”
늙은 제로니모의 말대로 블라드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자신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는 소녀의 숨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떠올리게나.”
주문을 외우는 장로들.
무기를 든 채 지키는 전사들.
그리고 어린 세계수에서부터 내려오는 빛방울들.
블라드는 자신의 어깨로 맺히는 정령들을 느끼며 깊은 내면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가져가려 하는가.
그것에 대한 답은 오직 스스로에게 있을 것이다.
블라드의 명상과 함께 너풀거리는 비단에 감겨 있던 푸른 금속이 조금씩 허공으로 떠올라 빛나기 시작했다.
블라드는 그 빛과 반짝임과 함께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
그러자 보이는 풍경 하나.
그리운 대장간의 모습 위로 밝게 떠 있는 장식 없는 검이 보이고 있었다.
소리가 들려온다.
늙은 대장장이가 검을 내려치는 소리가.
※※※※
“그래, 너는 여기에 조금 더 있어야 한다고?”
“일주일은 걸릴 거라고 하던데요. 의식을 통해서 검을 만든다고 하던데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행장을 꾸려놓은 오귀스트는 블라드의 말을 들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래도 받을 건 받아 가야지.”
임무의 마무리를 위해 이제는 떠나야 하는 오귀스트와 받을 것이 있어 남아있어야 하는 블라드.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이곳으로 들어왔으니 떠나는 시기가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나도 궁금하군. 너의 스승이 누구인지 말이야.”
태어난 뿌리는 몰라도 들고 있는 검의 뿌리는 찾고 싶은 어린 기사.
블라드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오귀스트는 떠나기 전 그에 맞는 조언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황실의 검은 몰라도 용살자를 기록한 명단은 수도인 브리간테스로 가면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드라굴리아 가문은 용에 관련된 것이라면 뭐든지 철저하게 기록하고 있거든.”
용을 죽이기로 맹세한 용들.
용과 관련된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드라굴리아 가문에는 여태껏 용을 살해했던 모든 용살자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마 블라드의 이름도 가장 밑부분에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 명단 안에 네 스승이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황실의 검을 사용함과 동시에 용을 살해한 남자.
현재까지 그 두 개의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사람은 공식적으로 단 한 명뿐이었다.
가장 고귀한 검으로 가장 날카로운 용에게 맞선 기사.
건국왕 프라우센.
티잉-
“······?”
둘 사이에 내려앉은 잠시간의 침묵을 오귀스트가 손가락 사이로 쇠붙이 하나를 튕겨내었다.
낡고 녹슨 보잘것없는 동전 한 닢.
“내 이름은 오귀스트다.”
오직 가장 낮은 자들만 건네줄 수 있다는 동전.
블라드는 라문드가 건네준 적 있는 두카트를 받아들고는 오귀스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중에 네 검을 보고 뭐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 이름을 대도 좋다.”
황실의 검을 사용하는 어린 기사.
비록 개성이 꽃피고 있다 할지라도 아직은 많이 미숙한 그를 위해 오귀스트는 자신의 색깔까지 덧칠해주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블라드의 근원을 알아볼 정도라면 자신의 기술인 약점 간파까지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가능하면 걸리지는 말고.”
비록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던 이름이었지만 그래도 전 헌병대장의 이름값이라면 최악의 상황까지 가는 것은 막아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오귀스트 님.”
“너한테 내 이름을 들으니까 기분이 이상해지는군.”
오귀스트는 자신을 향해 묵례하고 있는 블라드를 보며 자그맣게 미소 지었다.
짧았지만 강렬한 만남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저 제국에 충성했던 인생이었지만 그래도 마지막에 희미한 흔적 하나만은 남긴 것 같아 무언가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나중에 브리간테스에 오면 한번 찾아와라.”
그 말과 함께 오귀스트는 망설임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떠나가는 늙은 기사.
들어올 때는 무거운 의심을 지니고 왔으나 나갈 때는 한결 가벼워진 그의 어깨가 경쾌해 보였다.
“······.”
블라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손바닥에 놓인 낡은 동전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두 닢이 된 두카트.
보이는 것보다는 무거운 동전을 쥔 블라드는 품속으로 명예의 값을 집어넣었다.
※※※※
“할아버지는 갔어?”
“네.”
이제는 블라드와 고트만이 머무는 손님방.
그러나 정작 이곳에 있어야 할 고트는 항상 어디론가 쫓겨나고 블라드와 마주하는 사람은 이름 모를 소녀뿐이었다.
“다행이다.”
“왜요?”
“······말 안 할래.”
가끔씩 내뱉는 소녀의 말은 두서가 없다.
주어가 없고 목적어가 없으며 누구를 지칭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말할 뿐인 소녀였으니 그녀 또한 자세한 사정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데 데어마르라는 곳에 정말 하얀 뱀이 있어?”
“······엄청 크죠.”
애써 화제를 돌리려는 소녀의 의도를 읽은 블라드는 어깨를 타고 오르는 강아지의 목덜미를 붙잡고는 대답했다.
“여기 있는 애들은 전부 한입에 삼킬 정도로요.”
마치 놀아달라는 듯 헥헥거리며 눈을 빛내고 있는 강아지는 꼬리가 불로 만들어져 있었다.
“한번 보고 싶다. 굳이 따지자면 얘네들 삼촌 정도는 되는 정령이겠는데.”
“정령들 사이에도 족보가 있나요?”
“그런 건 잘 모르겠고 그냥 삼촌이라고 부르고 싶어.”
어머니 세계수에서 태어났을 것이 분명한 하얀 뱀.
어린 세계수의 신녀는 태어나 한 번 보지 못했던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에 관심이 많아 보였다.
그럴 만도 할 것이다.
지금 그녀는 잊혀 버린 흔적들을 곱씹으며 의식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저는 그냥 튼튼한 장검 하나만 있으면 돼요. 여기 보니까 대장간도 있어 보이던데.”
“싫어. 내가 해줄 거야.”
한참 오래된 고서를 내려다보던 신녀는 부루퉁한 눈빛으로 블라드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해주겠다는데 왜 그러는 거야. 다들 해주고 싶다잖아.”
소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어린 정령들이 각자 입을 열며 무어라 외치기 시작했다.
아마 낑낑, 짹짹거리고 있겠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어차피 무조건 한 번은 해봐야 한단 말이야. 내가 못하면 다 잊히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이어지지 않는다면 잊히고 만다.
선배가 후배에게, 전대가 후대에게 이어줘야 하는 수많은 의식은 이제 몇 권의 오래된 책으로만 남아있었을 뿐, 소녀에게 친절히 가르쳐줄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에 끊겨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다려봐. 우리가 이쁜 거로 하나 만들어줄 테니까.”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하는 사람은 오직 블라드만은 아니었다.
여기 이곳에도 스스로 길을 찾아 무언가를 이어야만 하는 소녀가 있었다.
“천천히 하세요.”
때로는 나눠들 수 없는 짐도 있는 법.
오직 홀로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짐을 짊어든 소녀에게 감히 손을 내밀어줄 수 없었던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옆에 있어 주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기름 먹인 천을 들고는 호르헤의 단검을 손질하는 블라드.
그런 블라드를 보며 소녀는 가만히 들고 있던 책을 치켜세웠다.
얼굴은 가렸으나 쫑긋거리는 귀와 황금색의 눈동자만큼은 블라드를 향해 있었다.
※※※※
새하얀 보름달이 뜬 밤에 아우슈린의 엘프들이 모두 세계수의 앞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거 부담되는데 대장.”
“그냥 축제 같은 거라고 생각해.”
마을의 온 엘프가 모여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에 블라드와 고트는 조금은 당황하고 말았다.
아직도 둘은 왜 검을 만드는데 대장간이 아닌 이곳에 서 있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양은 엄격하지만 달은 자애롭지. 그녀라면 아주 잠깐 정도는 눈을 감아줄걸세.”
잡고 있는 지팡이는 부들거렸으나 목소리만큼은 또렷했다.
이제 거동할 만큼은 회복되었는지 제로니모는 천천히 걸어와 블라드에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떠올려 보게나. 자네가 원하는 검의 형상을.”
“그냥 떠올리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블라드는 제로니모의 말을 들으며 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새하얀 천을 두른 소녀.
그 소녀의 머리 위에는 꽃과 풀로 엮은 자그마한 관(冠)이 얹혀 있었다.
“선명하고 강렬하게 떠올릴수록 좋겠지.”
“알겠습니다.”
볼 때마다 새롭고 달라 보인다.
아직도 이름을 모르는 소녀에게서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가득한 것을 느낀 블라드는 제로니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감고, 준비하게.”
블라드는 그 말과 함께 가만히 눈을 감았다.
삽시간에 조용해지는 주위의 공기.
두려움이 아닌 기대감에 의해 긴장되는 분위기에 블라드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시작하시지요. 신녀님.”
거창한 시작은 없었다.
자그마하게 울려 퍼지는 북소리만이 존재했을 뿐.
그 소리에 맞춰 일어선 소녀는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고는 어린 세계수를 바라보았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엘프들의 언어와 함께 춤을 추기 시작한 소녀는 블라드에게로 다가와 들고 있던 천을 넓게 펼치기 시작했다.
마치 나비 한 마리가 날갯짓을 하는 것만 같은 형상이었다.
북소리가 커진다.
낭랑한 소녀의 목소리가 그 소리를 타고 넓게 퍼져나간다.
주위에는 어린 정령들의 수선함이 가득하다.
까앙- 깡-
그리고 그 소리들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어떤 망치 소리.
블라드는 그 소리에 집중하며 좀 더 깊은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
새까만 어둠.
블라드는 나풀거리는 나비의 인도를 따라 어두운 진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바닥에 와닿는 질척임이 낯익었다.
찐득거리며 달라붙는 진창은 어린 소년에게 있어 벗어나기 힘든 존재였지만 지금의 블라드에게는 그저 잠시간의 불쾌함일 뿐이었다.
까앙! 깡!
저 멀리서부터 그리운 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날아간 하얀색의 나비가 조용히 낡은 대장간의 문틈 사이에 앉아 있었다.
“······.”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나비가 앉아 있는 대장간을 바라보았다.
대장간의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별 하나.
이제는 검의 모습이 아닌 빛이 되어 있는 장식 없는 검이 가만히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블라드는 나비의 인도와 함께 대장간 앞, 깊게 새겨진 발자국을 넘어 문을 열어젖혔다.
그곳에서 느껴지는 후끈한 열기.
그리고 쉼 없이 들려오는 망치 소리.
“저 왔어요.”
“그래. 왔냐.”
블라드는 선명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똑바로 마주치면 사라질 것만 같은 신기루 속에서 늙은 대장장이가 자신을 향해 웃고 있었으니까.
“검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요.”
“검?”
노인은 이제 더는 검을 만들지 않겠다고 말했었다.
늙은 육체와 보잘것없는 화로로는 제대로 된 검을 만들 수 없다고 말했었다.
“그래 잘 왔다. 마침 좋은 재료가 들어왔거든.”
그러나 지금은 그리 해주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늙은 육체와 낡은 도구는 더는 걸림돌이 될 수 없었으니까.
“이게 운석이라는 건데, 별에서 떨어진 금속이라 불순물도 없고 아주 단단한 거거든.”
가래 낀 목소리가 아닌 힘이 넘치는 소리.
그 목소리를 들으며 블라드는 미소를 지었다.
“크기는 장식 없는 검정도였으면 좋겠네요. 처음 들었던 녀석이라 그런지 저도 그 녀석에게 길들었나 봐요.”
“사실 나도 그 정도밖에는 못 만들어.”
의뢰를 받아든 늙은 대장장이는 힘차게 망치를 들어 내리쳤다.
까앙-!
화로에서 불을 지피는 강아지의 자그마한 꼬리가 요란하다.
망치 위에서 노니는 작은 뱁새가.
물통을 차갑게 식히는 어린 복어가.
쉴새 없이 검에 모래를 퍼붓는 새끼 도마뱀이.
장식 없는 검은 소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값을 치러주었지만, 지금 만들어지는 검은 어린 정령들이 대신 값을 치러주고 있었다.
“다 됐다.”
“······벌써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기에 이곳에 좀 더 있고 싶었지만, 이곳에서의 시간은 무한하지 않았다.
문가에 앉아 있는 하얀 나비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봐서 좋았다. 이제 가 봐라.”
블라드는 어느새 묵직하게 들려오는 검의 감촉을 느끼며 조용히 눈을 떴다.
마치 날개처럼 나풀거리는 하얀 천 사이로 보이는 푸른 빛.
장식 하나 없었지만 푸르게 빛나는 검이 그곳에서 블라드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