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7
돌아온 탕아 (1)
겨울의 끝자락이 저물고 있었으나 이곳만큼은 지금도 차가운 냉기가 가득했다.
다가오는 봄의 온기조차 데울 수 없는 차가운 자리.
그곳에 앉아 있는 남자의 눈빛이 마치 검과 같이 날카롭다.
“겨우 그딴 말을 지껄이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북부 유일의 공작.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
그가 지금 냉막한 표정으로 앞에 있는 남자를 내려보고 있었다.
“용의 조각을 내어주면 돌아가겠다니. 지금 나에게 협박이라도 하는 것인가?”
서부의 로마노프는 이미 멸문했다.
맹약을 주시하던 순례자들은 로마노프가 보관하던 용의 조각을 가져와 북부의 손에 맡겼고,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중 하나를 내어달라 말하는 중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용의 가능성은 모일수록 완벽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린드부름도 그 가능성에 이끌리지 않았습니까?”
“······.”
역시 용에 관한 일만큼은 이들에게 숨길 수 없다.
용살기사단에서 보내온 집사장 데비어스는 이미 티무르가 두 개의 조각들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였다.
“그 부담을 저희 드라굴리아가 나눠지겠습니다. 부디 저희의 제안을 곡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깊이 고개를 숙이고 있으나 그 안에서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저 착각일까.
데비어스를 바라보는 티무르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강철공께서 용이 아닌 북부에 대해서만 온전히 신경을 쓰신다면 이번의 일도 충분히 바라노프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데비어스의 제안을 들은 강철공 티무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결국, 드라굴리아는 지금 자신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중이었다.
용의 조각이냐 아니면 우트만 남작가이냐.
그러나 둘 중 무엇을 선택한다 한들 티무르에게 있어서는 뼈아픈 손해일 뿐이었다.
“강철은 변하지 않는 법이지.”
저 아래 고개 숙인 남자의 눈빛이 불길하다.
용이 보낸 비둘기.
그 비둘기가 내뱉은 전서구에는 지금도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소드마스터께 한 맹세 또한 그럴 것이다.”
고민을 떨쳐내듯 머리를 쓸어올린 티무르.
결정을 마친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데비어스를 향해 내려왔다.
“가서 용혈공께 전해라.”
북부의 지배자이며 맹약의 수호자.
소드마스터가 인정한 가문 바라노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데비어스에게 다가간 북부의 사자는 차가운 입김과 함께 입을 열었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그 너절한 발톱을 치워라. 몰락한 용아.
강철은 용에게 굽힐 생각이 없으니까.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은 너희가 걱정할 일이 아니지.”
단순히 맹약 때문이 아닌 냉정한 군주로서의 판단도 이 결정이 맞다고 말하고 있었다.
목줄 잡힌 용에게 가능성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우트만 가문에 대해서는 우리도 지원하도록 하지. 사특한 존재를 받아들인 자들과는 어깨를 마주할 수 없을 테니까.”
공고했던 북부 연합 중 한 축을 담당하던 가문은 거멓게 썩어버렸다.
그러니 잘라내야만 한다.
온전히 북부의 힘으로 일어서기 위해서는.
어느 곳에서나 봄이 찾아오고 있었으나 여전히 북부에는 차가운 기운만이 감돌뿐이었다.
※※※※
창가로 들어오는 빛이 이리저리 퍼져나간다.
테이블 위에서 이리저리 산란하는 햇빛을 보며 블라드는 살짝 눈을 찌푸리고 말았다.
“검, 검집, 갑옷······.”
고트는 햇빛을 따라 반짝이는 엘프들의 무구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게 다 얼마야?”
“저리 꺼져.”
감히 자신의 무구에 값을 매기는 불손한 종자를 보며 블라드는 고트를 발로 쳐 테이블 밖으로 밀어내었다.
“아니, 잠깐 생각해 볼 수는 있는 거잖아.”
“너 방금 눈깔 돌아갔었어. 이게 어디서 사기를 치려고.”
“······그랬어?”
고귀한 기사 속 여전히 존재하는 뒷골목 양아치의 모습에 고트는 그만 풀이 죽고 말았다.
겉으로만 보았을 때는 매끈한 귀족의 모습이었지만 평생을 투쟁하며 살아온 블라드의 안에는 여전히 잠재우지 못한 사나움이 깃들어 있었다.
“그나저나 목숨 건 보람이 있다. 그렇지 대장?”
“······조용히 좀 해봐.”
자신이 모시는 기사가 두둑이 보상을 받았으니 기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엘프들에게 받은 보상은 고트와 나눌 수 없는 물건들이었다는 것이다.
“검집은 세계수의 파편으로 만들었다 했고.”
단단해 보이는 검은색 검집에는 가공을 했음에도 여전히 선명한 나무결이 남아있었다.
만들어낸 장인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가지고 있는 재료의 기운이 강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독특한 감성을 안겨주고 있었다.
“관절 부분이 유연하네?”
“게다가 얇아.”
엘프들이 내어준 판금 갑옷은 분명 철로 만들었음에도 날렵해 보였다.
아마 기민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곳저곳 비워놓은 부위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사슬갑옷······.”
그러나 갑옷에 비어있는 부분이 많다 해도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는 은색의 내갑의(內甲衣).
엘프들이 내어준 사슬갑옷은 멀리서 보면 그저 평범한 옷처럼 보일 정도로 촘촘하게 꿰매어져 있었다.
“이건 그냥 옷처럼 입고 다녀도 될 것 같은데.”
기존에 내갑으로 입고 있던 솜갑옷(gambeson)은 기능성은 좋을지 몰라도 편의성은 영 꽝이었다.
냄새며, 더위며, 무엇보다 날렵한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지금 들고 있는 사슬갑옷은 몸에 꼭 맞을 뿐만 아니라 가볍기까지 했으니 블라드의 마음에 쏙 들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고트. 안내해 드려.”
굳이 입으로 소리를 내며 문을 두드리는 소녀.
고트는 재빨리 표정을 정돈하고는 방문을 열며 소녀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신녀님.”
“블라드 어때? 마음에 들어?”
환한 미소로 맞이했건만 들어서자마자 블라드만 찾는 소녀를 보며 고트의 표정이 씁쓸하게 굳어져 갔다.
“너무 좋은데요. 제 평생 이런 장비들은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
마치 자신을 향한 칭찬인 양 소녀의 귀 끝이 조금은 빨개져 있었다.
“미안해. 내가 제대로 못 만들어서.”
소녀의 사과와 함께 블라드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검을 향했다.
옅은 푸른 빛이 감도는 장검.
세계수와 소녀, 그리고 어린 정령들이 운석을 두들겨 만든 검은 형태는 투박했을지라도 기세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검이었다.
“우리가 처음 해봐서 그래. 제대로 못 만들었어.”
그러나 형태는 갖췄을지 몰라도 눈앞에 있는 검은 완성품이라 할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희미한 기록을 따라 어린 것들이 처음 시도해 보는 의식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랬는데 날은 세웠는데 담금질은 제대로 못 했대. 그래도 쓸 만은 할 거라고······.”
자신도 모르게 톡톡거리며 바닥을 차는 발끝.
블라드는 끝으로 갈수록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에 소녀가 지금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닙니다. 신녀님”
소녀는 내구도에 문제가 있다고 했지만 늙은 대장장이는 분명 되었다고 했다.
혹시나 자신의 검이 블라드의 발목을 잡을까 걱정했던 그였기에 정말 쓰지도 못할 검이었다면 애초에 내어주지도 않았을 것을 안다.
“정말 마음에 드는 검입니다.”
장식 없는 검을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검은 블라드가 바라볼 때마다 미묘하게 색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 빛을 볼 때마다 블라드는 가슴 속 무언가가 채워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정말 다행이고.”
블라드의 말에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소녀는 재빨리 편지 하나를 건네며 웃음 지었다.
“이건?”
“하이날의 영주, 알리시아 님에게 보내는 내 편지야. 호박석에 대해 미안하다고 썼어.”
세계수를 지켜낸 블라드는 합당한 보상을 받았지만 정작 가보를 잃어버린 알리시아에게는 마땅히 내어줄 것이 없었다.
아마 이 문제는 개인 간의 협상이 아닌 하이날과 아우슈린의 영역에서 해결해야 할 것이다.
“혹시 신녀님 것만······.”
“대장로님 것도 들어있어.”
“그렇군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소녀의 편지만 전해주기는 불안하다.
그러나 현명한 대장로 제로니모의 편지까지 들어있다면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알리시아에게 민폐만 끼치는 그녀의 기사는 들고 있는 편지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것만 같았다.
“아마 조만간 우리들도 하이날이랑 도브레치티에 사신을 보낼 거야. 그곳에 있는 정령들도 만나보고 싶거든.”
“알겠습니다.”
어차피 엘프들도 인간들과 인연을 맺을 거라면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영주들과 맺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댈 곳이 몇 없는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도 비록 멀긴 하지만 아우슈린이라는 세력은 충분히 위안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이거.”
편지와는 다르게 꼬깃하게 접혀 있는 쪽지 하나.
마치 네잎클로버처럼 접혀 있는 쪽지는 분명 소녀가 개인적으로 전하는 물건이었다.
“이거는 나중에 갈림길에 들어서면 열어봐.”
“······갈림길이요?”
혹시라도 누가 들을까 싶어 블라드의 귀에 대고 조용히 속삭이는 소녀.
애써 들어 올린 까치발이 소녀의 진심을 전하고 있었다.
“그럼 잘 가. 내일은 배웅 못 할 거야.”
“······.”
그저 할 말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는 소녀.
그러나 반짝이는 황금색 눈동자에는 블라드의 모습을 가득 담아내고 있었다.
“여태까지 계속 궁금했던 건데요.”
“뭔데?”
이제는 이별이다.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소녀는 여전히 자신을 보며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성함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여태까지 이름도 모르고 있었거든요.”
인간들의 세계에서는 이름과 이름을 전하며 인연을 튼다.
당연히 블라드는 그러한 예의에 따라 소녀의 이름을 물어본 것이었지만.
“······이름?”
그러나 블라드의 물음을 들은 소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망부석처럼 굳어버렸을 뿐이었다.
파닥이는 귀가 점차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름은 왜?”
순식간에 가라앉은 침묵.
고트의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파악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인간의 상식과 엘프의 상식은 엄연히 다른 법이었다.
쫑긋 세워진 소녀의 귀가 점점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
“들어올 때는 눈밭이었는데.”
“아우슈린의 겨울은 짧지. 세계수는 추운 것을 싫어하거든.”
바라디스의 말을 들은 블라드는 고개를 들어 올려 저 멀리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언덕은 여전히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여기까지군.”
“배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프와 인간들의 세계를 경계선.
그 앞에 선 누아르가 나가기 싫다는 듯 푸르륵 대었지만, 이들의 세계는 아우슈린에 있지 않았다.
“아우슈린은 자네가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않을걸세.”
비록 감사하다 말하고 있지만 묘하게 딱딱해진 바라디스의 목소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소녀의 이름을 물어봤던 일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엘프들에게 있어 이름이라는 개념이 인간들보다 훨씬 민감한 부분이니까 앞으로도 조심하고.”
“······네.”
바라디스는 자신을 바라디스라 소개했지만 진정한 뜻을 지닌 이름은 아니라고 했다.
아마 그것을 내보이거나 물어보는 행위는 엘프들에게 있어서 꽤 민감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블라드는 원치는 않았지만, 또다시 실수를 통해 견식이 넓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바라디스는 블라드에게 가까이 다가와서는 진중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신녀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그녀의 말을 무시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바라디스는 혹시라도 모를 일에 대비해 블라드에게 자그마한 경고를 남겨주었다.
지금 세계수의 신녀이자 자신의 여동생인 소녀는 자리에 누워 앓는 중이었으니까.
분명 블라드라는 기사에게 건넨 계시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까지 걱정해줘서 감사한다고 전해주세요.”
“세계수를 지켜줘서 고마웠네. 다음에 또 볼 날을 기다리지.”
바라디스의 인사와 함께 누아르의 등 위에 타고 있던 정령들이 우르르 내려오기 시작했다.
날개, 꼬리, 머리 등등.
각자 흔들 수 있는 부위를 흔들어 대며 아우슈린을 나서는 기사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자신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드는 레인저들과 정령들.
블라드의 눈으로 그들의 뒤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 있어 희미해 보였지만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지들이 이리저리 흔들려대었다.
“가자.”
“응. 대장.”
말머리를 돌리는 기사와 종자.
검은 말 뒤에서 하얀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 깃발의 한쪽에는 지금 보이는 세계수와 꼭 닮은 문장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
“그런데 대장. 앞으로 어디로 갈 거야.”
종자인 고트가 블라드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여태까지의 목표를 정한 것은 블라드였으니까.
“······.”
세 갈래의 갈림길.
그러나 그 갈림길에 선 블라드의 분위기는 무겁기 그지없었다.
쪽지를 읽어내려가는 블라드의 미간이 점차 좁혀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어디지?”
“우리가 왔던 곳이잖아. 이곳으로 가면 타노보를 거쳐서 도브레치티까지 이어지겠지. 쇼아라로 돌아갈 거라면 이 길이야.”
내심 돌아가자 말해주길 바란 것 같은 고트였으나 블라드는 조용히 중앙의 길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로 가면?”
“중간 길로 가면······.”
고트는 재빨리 지도를 꺼내고서는 혀를 빼물었다.
“중부 지역을 관통하게 될 거 같은데. 일단 제일 가까운 도시는 마르시아야.”
“그럼 이곳으로 가자.”
소녀가 전해준 쪽지를 꾸깃하게 쥐어든 블라드는 누아르의 고삐를 잡고는 중간의 길로 나아갔다.
“왜 그 쪽지에 왼쪽으로는 가지 말라고 쓰여 있어?”
“······왼쪽으로 가면 뭐가 있는데.”
가장 넓은 길을 따라 움직이는 누아르와 고트의 말.
갈림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걸어온 블라드는 그제야 자그마한 목소리로 고트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봤는데. 왼쪽으로 가면 수도 브리간테스로 향하는 가도(街道)랑 만나더라고.”
“그래?”
“응. 영감님은 아마 그쪽으로 향하지 않았을까?”
고트의 말에 오귀스트를 떠올린 블라드는 괜스레 입맛이 써지는 것만 같았다.
그는 마지막 인사로 브리간테스로 오면 자신을 찾아오라 말했으니 아마 고트의 말대로 수도를 향해 나아갔을 것이다.
“용살자 명단은 나중에 봐야겠군.”
블라드는 조용히 왼쪽 눈을 감고는 소녀가 건네주었던 쪽지를 불태웠다.
바람에 따라 흩날리는 종잇조각들.
-절대 왼쪽으로는 가지 말 것.
불타오르는 쪽지에 적혀 있던 자그마한 글씨.
소녀가 블라드에게 마지막으로 건네준 것은 감사나 안녕의 의미가 아닌 단호한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