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8
돌아온 탕아 (2)
구름조차 달을 감춘 밤.
곳곳에서 달라붙는 악의가 끈적하다.
“허억, 헉······.”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흐르는 핏줄기가 이마를 따라 미끄러진다.
그러나 노쇠해 버린 늙은 기사는 더는 손을 들어 닦아 내릴 여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시간은 늙은이들에게 특히나 더 잔인하게 다가오는 법이었다.
“······이런.”
막다른 길에 막히고만 늙은 기사는 그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베어내고 달려오며 길을 열었건만 결국은 이들이 의도한 곳으로 이끌리고 말았다.
“그냥 편히 쉬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사내들을 헤치며 다가오는 남자.
“그러라고 은퇴까지 시켜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달빛이 그의 모습을 비치고 있었다.
“······귀하신 분이 오셨군.”
금발에 푸른 눈.
미끈한 외모는 누구에게나 호감을 줄 법했으나 눈동자 속에 담고 있는 기세만큼은 누구보다 흉악한 자.
“보잘것없는 늙은이 하나 때문에 여기까지 오느라 힘드셨겠어.”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스르릉-
사내의 손짓에 오귀스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이 검을 뽑아 들었다.
마치 마지막 예우를 갖추듯 정중한 모습으로.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닌가? 이빨은 빠졌을지 몰라도 아직 발톱은 날카롭다네.”
마지막을 각오한 오귀스트의 눈빛이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비록 은퇴했으나 하고자 했던 마지막 임무가 있었다.
엘프들은 막았으니 이제 자신이 가지고 온 증거들을 황실에 넘기기만 한다면 압실론에 대한 해악을 만방에 알릴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만 하면 되는 임무였건만.
“설마요.”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늙은 기사의 앞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직접 온 것 아니겠습니까?”
용살 기사단장 미르셰아.
그의 말과 함께 기사들의 검 끝이 오귀스트를 향해 치켜졌다.
용을 죽이는 자들의 살기가 늙은 기사를 향해 서늘하게 맺혀 들어가고 있었다.
“거창하지는 않지만 저희가 마련한 은퇴식이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푸른 눈동자 속에 감춰져 있던 흉악함이 꿈틀거린다.
검을 뽑아 들었을 때는 고귀한 기사의 모습이었으나 자신을 향해 겨눌 때는 이빨을 치켜든 짐승의 모습이었다.
‘금발······푸른 눈.’
그리고 잔인함.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한 꽃을 피워올렸던 그 강렬한 개성.
그 개성이 지금 푸른 눈동자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아.’
번뜩이는 악의들이 다가온다.
지치고 늙어버린 사자를 향해서.
그 사이에서도 가장 빛나는 악의를 보며 오귀스트는 엘프들의 숲에서 만났던 어린 기사를 떠올렸다.
‘개성이 아니었어.’
착각하고 있었다.
시작은 고귀했으나 끝은 잔인했던 그 아이의 흔적.
블라드가 내보인 잔인함은 스스로 개화한 개성이 아니었다.
끈적한 피를 타고 이어지는 포식자로서의 본능이었다.
구름이 다시 달을 감추었다.
달빛조차 없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허물어지는 누군가의 몸짓.
그 속에서 초록색의 찻잎들이 애처롭게 흩날리고 있었다.
누군가가 찾아온 진실들이 그렇게 덧없이 흩어지고 있었다.
※※※※
도시 마르시아.
로즈미츠 남작령의 유일한 도시.
특별히 오래되지도 그렇다고 영지 자체에서 딱히 내세울 만한 것도 없는 이 도시는 그야말로 평범 그 자체인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블라드와 고트는 도시 마르시아를 향해 걸어가고······있지는 않았다.
“고마워 대장.”
“뭐, 어차피 슬슬 돌아가려고 생각하던 중이었어.”
블라드는 자신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고트를 보며 머쓱하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행은 지금 마르시아가 아닌 그곳에서 나흘 거리는 떨어져 있는 외딴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으니까.
마땅한 붙여진 이름도 없어 그저 등나무 마을이라 불리는 그곳은 고트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었다.
“얼마나 된 거야?”
“뭐? 집 떠나온 지? 어디 보자 한 6년은 된 거 같은데.”
“꽤 오래됐네.”
스물 중반은 되어 보이는 고트였으니 6년 전이라고 한다면 아마 성인이 되자마자 뛰쳐나온 것일 테다.
아니면 블라드처럼 그전에 나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엄마랑 동생들 잘 있는지만 확인하고 나올게.”
“······.”
일행의 대장은 어디까지나 블라드였고 고트는 어디까지나 종자일 뿐이었다.
만약 두 사람이 평범한 기사와 종자 사이였다면 고트는 감히 고향 마을에 들렀다 가자고 말조차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고트는 블라드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중이었다.
“어머니가 요리는 잘하시냐?”
“······그럼! 우리 어머니가 해주시는 감자 스튜는 웬만한 여관에서 하는 거랑 차원이 다르거든.”
“그래?”
날씨는 따뜻했고 바람은 선선했다.
아우슈린에서 목소리에 대한 단서도 찾아냈고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목표도 잡은 상황이었으니 이번에야말로 잠시 휴가 같은 기분을 내도 될 테지.
“그렇게 맛있으면 한 이틀은 머물러도 되겠네.”
“······흐!”
타인을 냉정하게 대하는 블라드였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호르헤가 블라드를 보며 어느 골목에서나 대장을 할 녀석이라 평했던 것은 그저 실력이 뛰어남만을 보고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기야.”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고향을 가리키는 고트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마을의 입구 옆으로 흐트러지게 쏟아져 내린 푸른 나뭇잎들.
조금 있으면 자주색으로 물들 꽃망울들이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의 탕아를 반기고 있었다.
※※※※
“정지!”
무장은 별거 없었지만, 눈빛만은 매서운 경비병이 블라드와 고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누구냐. 무슨 일로 우리 마을에 왔지?”
척 봐도 작은 마을이었으니 당연히 상비병은 아닐 것이다.
아마 마을의 젊은이 중 하나가 자경대의 역할을 하는 것일 텐데 이방인을 멈추는 솜씨가 꽤나 능숙해 보였다.
“톰슨. 나야 고트.”
“누구? 고트?”
말 위에서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고트를 보며 경비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있잖아. 언덕 위에 방앗간 집.”
“아아. 그 고트!”
이제야 고트를 알아본 톰슨이라는 경비병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게 몇 년 만이야. 그동안 어디 있다가 온 거야.”
“그냥 뭐 여기저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며 블라드는 조용히 누아르의 목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어색한 둘의 모습.
그리고 주위에서 멀뚱히 서 있는 다른 경비병들의 모습까지.
‘딱히 환영받고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낯선 곳에 올 때마다 분위기를 살피고는 하는 블라드는 지금 고트를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미적지근한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마을에서 나올 때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 어머니랑 동생은 잘 있지?”
“그렇지. 별일은 없었지.”
그러나 고트는 이들의 반응에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익숙해 보이기까지 하는 고트의 태도에 블라드는 가만히 턱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돌아온 건 반갑기는 한데. 조용히 있다가 갈 거지?”
“······금방 있다가 갈 거야. 하루 이틀 정도.”
오랜만에 본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을 먼저 내세우는 톰슨을 보며 고트는 애써 웃음 지어 보였다.
“촌장님한테 들러서 먼저 인사부터 해.”
창을 치워낸 경비병들의 사이로 조용히 고트가 고개를 숙이며 걸어 들어갔다.
“정지.”
“······?”
그러나 금세 다시 길을 가로막는 창들.
고트가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경비병들은 다시금 블라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봐. 톰슨. 그분은 내 손님이야.”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톰슨!”
큰 도시의 경비병들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행동이었지만 이곳은 작은 마을이고 이들은 그저 자경대일 뿐이었다.
마을의 주민이었던 고트가 신원을 보증했으니 그냥 넘어가 줄 법도 했으나 이어진 반응은 차가울 뿐이었다.
“너 이름 뭐야.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하아.”
고트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그가 나고 자라온 마을의 앞에서.
블라드 안에 있던 뒷골목의 소년은 불쾌하고도 낯익은 공기를 느끼며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내 이름은 블라드다.”
옥사나가 내어준 망토를 크게 젖혀낸 블라드는 허리에 매달려 있던 검에 손을 얹었다.
반짝이는 정령들의 검은 눈앞에 있는 자가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흉포한 포식자의 기세.
마치 늑대 앞에 서 있는 토끼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톰슨은 등허리에 땀이 가득 차고 말았다.
이건 잘못 건드렸다.
“다시는 네놈 따위가 내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죄송합니다!”
이제야 블라드가 쏘아낸 주박에서 풀려난 톰슨은 허리를 크게 굽히며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기사가 느낀 것만큼이나 흉포한 인성을 지닌 자라면 당장 검이 휘둘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무례였으니까.
기세만으로 가볍게 경비병들을 제압한 블라드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고트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대장.”
경비병이 가로막았기에 생긴 짜증이 아니었다.
언제나 넉살 좋게 웃고 있던 고트였지만 지금은 그저 쓴웃음만이 맺혀 있을 뿐.
‘짜증나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왔는데 왜 그렇게 움츠려 있는지.
블라드는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들어.”
“응?”
고트는 갑작스레 자신에게 날아드는 하얀색을 보며 다급히 잡아냈다.
“······이건 왜.”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하얀 깃발.
그 안에 새겨져 있는 수많은 귀족과 단체들의 문양이 고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앞장서. 다시는 이런 일 없게.”
무심히 말하는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고트를 위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떠날 때의 모습은 모르겠으나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당당해야 할 거 아니냐.
“······안내하겠습니다. 블라드 경.”
“좋아.”
눈치 빠르게 자신의 의도를 알아들은 고트를 보며 블라드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예를 담은 깃발.
그 깃발을 치켜든 기수를 보는 마을 젊은이들의 눈이 아득해지고 있었다.
“실례했습니다. 기사님. 환영합니다!”
천천히 열리는 목책이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빛나는 깃발을 든 명예로운 기수.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떠나갔던 마을의 탕아는 지금 빛나는 깃발을 든 기수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 줄기의 미소와 함께 앞장선 고트의 가슴이 서서히 펴지고 있었다.
※※※※
저게 누구야. 누군데 저렇게 출세했대.
걔 있잖아. 방앗간 집 둘째 아들.
그 반푼이가 돌아왔어? 아이고 밖에서 성공했나 보네.
오는 사람만 오는 자그마한 마을.
그렇기에 새로운 이방인이 당도했다는 소식은 조용하지만 빠르게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너 반푼이였어?”
“······.”
“하긴 모자란 반푼이보다는 사기꾼이 낫지.”
들려오는 웅성거림에서 고트의 대한 평가를 확인한 블라드는 자그맣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 극악무도한 자이거나 과거가 복잡한 녀석이었다면 오랫동안 옆에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푼이 정도라면 괜찮겠지.
“이쪽으로면 가면 촌장의 집인데······.”
“너희 집부터 가자.”
“응?”
블라드는 요제프의 옆에서 보고 배우면서 자신이 어떠한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확실히 자각해냈다.
블라드는 이제 추레했던 뒷골목의 소년이 아닌 당당한 기사로서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촌장보고 너희 집으로 오라고 해. 찾아가기 귀찮으니까.”
과도한 예의는 자신을 낮출 뿐이다.
자리에 맞게 행동할 줄 알아야 그만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법이었다.
“알았어.”
“너도 직접 가지 말고 아무나 잡고 말이나 전해.”
“응.”
어차피 고트 때문에 온 마을이었다.
그러니 이곳에 있는 동안은 녀석을 조금 띄워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저기, 저기 언덕 위에 있거든.”
“가 봐.”
자신의 앞에 다른 말이 있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누아르도 이번만큼은 조용히 고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기사와 말은 그렇게 맞닿은 세계를 통해 서로의 의사를 확인했다.
“······점심 준비하나 봐.”
“그러게.”
저 앞에 보이는 외딴집 하나.
이제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은 낡은 방아 하나가 보이는 집에서 굴뚝 위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엄마······. 엄마. 나 왔어요.”
조심스레 울타리에 달린 문을 열어젖히는 반푼이.
떠날 때와 다름없는 고향 집의 모습에 고트의 목소리가 조금씩 잠겨 들어갔다.
“엄마.”
문이 열리는 소리에 부엌에서 나온 아낙네.
그녀의 모습이 고돼 보인다.
머리 위로 단단히 여민 스카프는 깨끗했으나 형편없이 낡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차마 숨길 수 없는 세월의 주름들이 새겨져 있다.
못난 아들이 차마 펴주지 못한 깊은 주름들일 것이다.
“고트? 고트니?”
여인이 들고 있던 주걱이 땅으로 떨어졌다.
“아이고 고트야!”
“엄마.”
마을의 모두가 무시하고 있었지만, 그녀만큼은 두 팔을 벌려 고트를 환영해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는 사고나 치는 탕아였지만 이 여인의 눈에는 누구보다 귀한 아들일 것이다.
“······오늘 점심은 감자 스튜인가.”
눈물을 흘리며 서로 얼싸안는 두 모자를 보며 블라드는 괜스레 땅바닥을 툭툭 쳐댔다.
“그러고 보니 가정식은 진짜 오랜만인데.”
무거워지는 눈망울을 애써 들어 올린 블라드는 물끄러미 굴뚝 위로 퍼져 올라가는 연기를 보았다.
알싸하게 퍼져나가는 주방의 냄새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 같았다.
오늘 블라드가 먹을 점심은 어머니가 아들을 위해 내어주는 따뜻한 스튜일 것이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그런 맛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