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19
돌아온 탕아 (3)
한 번, 두 번, 세 번.
스튜의 물을 맞추는 어머니의 손놀림이 분주하다.
어렸을 적부터 고트는 요리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녀의 손끝에서부터 만들어지는 향긋한 음식의 냄새를 기다려왔었다.
아마 지금의 농도가 딱 맞을 텐데.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고트가 기억했던 맛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고트는 기억하고 있었다.
부엌 앞에서, 마치 들켰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어머니의 모습을.
“······.”
늘어나는 양만큼이나 사라지는 스튜의 향기.
그때 어머니의 표정을 본 순간 고트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고 말았다.
서늘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어린 고트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고 있었다.
가난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서로에게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사람을 쪼그라들게 만들고 밑바닥만을 쳐다보게 한다.
고트는 그래서 떠나기로 했다.
이 빌어먹을 마을에서는 더는 고개를 들 기회가 없었으니까.
기도하던 용병을 만나기 전까지 등나무 마을의 고트는 그렇게 위를 바라볼 기회를 찾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
포크조차 필요 없어 보이는 단출한 식탁.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스튜 안에서 큼지막하게 썰려 있는 감자 덩어리들이 블라드를 반기고 있었다.
“어찌 기사님의 입맛에 맞을지······.”
있는 것을 다해 차려놓은 상이었으나 고트의 어머니는 초라한 재료가 영 마음에 걸렸는지 연신 앞치마에 손을 쓸어내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기사님. 오신다고 기별을 주셨으면 미리 고기라도 한 덩이 준비해놓는 건데······.”
아들과 함께 나타난 젊은 기사.
보이는 모습만 본다면 어디 근사한 귀족가의 자제였으니 시골 아낙네의 솜씨로는 만족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닭은 안 키웠던 것 같은데.’
블라드는 자신의 앞에 놓여있는 달걀을 보았다.
분명 들어왔을 때 닭 울음소리는 듣지 못했으니 어디선가 다급히 꿔온 달걀들일 것이다.
한눈에 봐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으니 아들을 위해 무리를 한 것일 테다.
“드세요. 기사님.”
고트의 앞에는 두 알.
블라드의 앞에는 세 알.
그러나 차이 나는 이 하나의 달걀도 결국 자신의 아들을 위한 것임을 안다.
블라드는 스튜를 입에 대기도 전부터 어머니의 맛을 느끼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블라드는 일부러 스튜의 국자를 크게 휘두르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이럴 때는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는 것이 주인에게 부담을 덜어주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정말 다행이구나. 이렇게 때마침 오다니.”
거리낌 없이 수저를 뜨는 블라드를 보며 안심한 고트의 어머니는 곧 아들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여지껏 연락도 없던 애가 여동생의 결혼식에 맞춰서 오다니, 분명 아버지랑 형이 너를 이곳으로 부른 게 틀림없어.”
눈과 입은 스튜에 박아 두고 있었으나 귀만큼은 열고 있던 블라드는 들려오는 이야기에 귀를 쫑긋 세우고 말았다.
“······.”
들고 있는 스튜 그릇 너머로 어색하게 눈이 마주친 갈색 머리의 여자.
그야말로 평범한 시골 처녀답게 생긴 갈색 머리의 여자는 바로 고트의 여동생이었다.
“마리의 결혼식은 보고 갈 수 있지? 혹시 바로 가야 하니?”
“아니, 이게······.”
오랜만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공교로운 시기에 찾아온 아들이었으니 그녀의 감회도 남다를 법했다.
그러나 고트는 여정의 책임자가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기사 옆에 딸린 종자의 신분이었을 뿐이었다.
“내가 바로, 바로 가야 하나?”
“······.”
차마 블라드를 마주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허공을 맴도는 고트의 눈동자.
그 눈동자를 바라보던 블라드는 그만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별수 없지.’
의도치 않은 사정에 끌려다니는 것은 원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의 일이라면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차피 하루 이틀 정도는 이곳에서 머물 생각이기도 했으니까.
“스튜가 정말 맛있네요. 요 며칠간 종종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기사님.”
블라드의 대답을 알아들은 고트의 어머니가 가슴에 손을 모으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즈넉한 시골 마을.
다가오는 봄기운과 함께 스튜의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이 마을에서 블라드는 오랜만에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보기로 했다.
※※※※
식사를 마친 블라드는 집 밖으로 나와 조금씩 주변을 거닐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가족과의 회포를 풀 고트를 위한 배려였으며 주변의 풍경을 살펴보고자 하는 오래된 버릇 때문이기도 했다.
“이 집에는 마구간이 없나 본데.”
히이이잉-
블라드와 함께 나선 누아르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자신이 머물 곳이 보이지 않자 주둥이로 블라드의 등을 툭툭 쳐대고 있었다.
인간은 싫지만 인간들이 만든 것은 좋다.
자유로운 초원의 영혼은 비바람을 막아줄 문명의 이기들을 마음껏 즐기는 중이었다.
‘애써 만들어놓고 사용을 안 한다라······.’
산책을 하며 조용히 마을을 살피던 블라드의 눈에 쓰러져가는 방앗간이 하나 보였다.
고트의 집 옆에 있으니 아무래도 그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었으나 이미 인기척이 끊긴 지 오래되어 보이는 방앗간이었다.
천천히 허물어져 가는 방앗간은 내려앉아 있는 거미줄만큼이나 많은 사정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너 잘 곳 하나는 마련해줄 테니까 그만 좀 건드려.”
푸르르륵-
블라드의 투덜거림에 이제야 기분이 풀렸는지 누아르가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굳이 누아르의 투정이 아니더라도 블라드도 고트의 집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머물 생각이었다.
낡은 만큼 작은 고트의 집.
그곳 자그마한 손님방에 일가족을 몰아넣고 잠을 청한다면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을 테니까.
“때마침 오네.”
저 멀리서 고트의 집을 향해 언덕을 오르는 몇몇 마을 남자들이 보이고 있었다.
아마 촌장이 보낸 사람들이겠지.
마을에 들어선 낯선 이방인이 기사라는 소식을 알게 되었으니 촌장의 입장에서는 쉽게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고트 놈이 뭔가 단단히 눈 밖에 나긴 한 모양인데.’
그러나 블라드는 이곳을 향해 올라오는 마을 청년들을 보며 그만 이맛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손에 각자 무언가 하나씩 집어 들고 언덕을 오르는 남자들
아무리 보아도 오랜만에 돌아온 마을의 일원을 환영하는 자들의 모양새가 아니었다.
“어이 고트!”
산책을 위해 밖을 나선 블라드의 귀까지 들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
마치 마을의 모두가 들으라는 듯 건장한 체격의 사내가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몰래 야반도주나 했던 빚쟁이가 무슨 낯짝으로 다시 기어들어 온 거냐!”
누구랄 것도 없이 건들거리는 태도.
거기다 별로 사용감이 없어 보이는 반짝이는 검집까지.
전형적인 불량배들의 모습을 한 남자들을 보며 블라드는 그들이 온건한 목적을 가지고 고트를 찾아 온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토마스.”
오랜만에 가족 간의 회포를 풀고 있던 고트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집 밖으로 나섰다.
갑작스럽고도 무례한 호출이었지만 이미 예상은 하고 있었다는 듯 고트의 태도는 침착할 뿐이었다.
“야반도주라니, 그냥 밤이 좋아 달을 보고 떠난 것뿐인데.”
“갚을 돈을 안 갚고 밤 중에 내뺐으면 그게 야반도주지 새끼야!”
고트의 여유로운 대응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무리의 대장인듯한 사내가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동안 밀려 있던 방앗간 사용료나 지불해라!”
“하는 말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구만. 이 발전 없는 놈들 같으니.”
무기를 꼬나들고 찾아온 무리를 보며 고트는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예전에야 이 위협에 몸을 떨었던 때도 있었으나 블라드와 같이 넓은 세상을 경험했던 고트에게 있어 지금의 상황은 그저 애들 장난 같을 뿐이었다.
“그동안 밀린 이자까지 다 합해서 총 2골드······.”
“옜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날아오는 반짝이는 동전들.
아무렇지도 않게 금화를 튕기는 고트를 보며 사내들이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거 먹고 얼른 떨어져. 이 지긋지긋한 새끼들아.”
“······이 새끼가.”
예전과는 다르다.
자신들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고트는 이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커져 버린 고트는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토마스라 불린 무리의 대장은 그 눈빛에 분노하고 말았다.
“이 돈이 무슨 돈인 줄 알고 받겠냐. 이 사기꾼 새끼야.”
“······뭐?”
“네 아비처럼 어디서 사기 쳐 온 돈인 줄 어찌 알고 받느냐고.”
빚도 갚았으니 더이상 대화를 주고받을 이유도 없다.
그러나 눈앞의 사내는 고트의 상처를 후벼가며 쉽게 자리를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마도 오랫동안 꼬이고 꼬인 감정의 실타래가 지금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 것일 테다.
“이번에는 무슨 기사 나부랭이까지 데려오셨다며? 아주 당당하게 깃발까지 들고 왔다던데.”
“그 입 닫지. 더 나불거리면 너 가지고는 감당 못 해.”
“왜. 네놈의 같잖은 연극이 들통날까 봐 그러냐?”
토마스라 불린 남자는 주위를 한 바퀴 돌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네 놈이 기사의 종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을 바에야 차라리 데려온 놈이 가짜라는 것을 믿는 것이 낫지. 다들 안 그래!”
“암. 당연하지!”
“그놈이 가짜가 아니고서야 왜 고트 같은 놈을 종자로 삼겠어!”
“칼도 제대로 못 쓰는 무지렁이를 종자로 삼을 정도면 그 수준도 알만하지!”
패거리의 비웃음을 듣는 고트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블라드까지 싸잡아 모욕하는 저들의 행패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의 아들로서, 종자로서 서 있을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이 미친 새끼들이.”
고트는 들고 있던 검을 뽑으려 검집에 손을 얹었다.
저들의 말처럼 제대로 검을 배우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고트는 용병 생활을 통해 거친 세상을 경험하고 온 남자였다.
“양아치들이네.”
“······뭐?”
검을 뽑기 전 일촉즉발의 상황.
집안에서 가만히 숨죽이고 있던 고트의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뛰쳐나와 말리려 하는 순간, 저 뒤에서부터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있었다.
“하는 짓이 되게 익숙한데.”
검은 말의 고삐를 붙잡은 채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 명의 남자.
작았지만 모두의 행동을 멈추게 하는 그런 힘이 담겨 있는 목소리였다.
“······네 놈이 고트가 데려왔다던 가짜 기사냐?”
대접을 받기 위해 잠시 갑옷을 벗어놓은 블라드는 누가 보아도 새파란 애송이의 모습이었다.
입고 있는 은색의 웃옷과 데리고 있는 말의 기세는 범상치 않아 보였으나 평생을 작은 마을에서 제 잘난 맛에 살아왔던 사내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만한 식견이 존재하지 않았다.
“가짜 기사라.”
블라드는 사내의 말을 듣고는 뒤통수를 긁고 말았다.
이럴 때는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 걸까.
오랜만에 마주한 동류들을 보며 뒷골목의 양아치가 불쑥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내가 진짜면 어떡하려고 그래.”
“뭐?”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의 종자를 무시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무시당했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여기는 고트의 고향이니까.
둥글게 휘어 들어가는 푸른 눈만큼 사내들을 압박해 들어오는 기세가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난생처음 맞이하는 진짜의 기세에 우물 안 개구리들은 모두 울음을 멈추고 말았다.
“살려는 드릴게.”
아마 스튜 때문일 것이다.
스튜와 몽글하게 피어올랐던 기억은 그리웠던 어머니의 모습뿐만 아니라 어두웠던 뒷골목의 냄새까지 같이 떠올리게 했다.
“덤벼봐. 새끼들아.”
굳이 기사가 아니더라도 블라드는 예전부터 진짜였었다.
쇼아라 뒷골목 최고의 유망주.
창녀의 배 속에서 태어난 순수혈통의 스트릿 출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시골 양아치들을 향해 사납게 이빨을 들이대었다.
※※※※
“그런 일이 있었다면 저에게 먼저 말씀을 하셨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작은 마을치고는 훌륭하게 지어진 촌장의 집.
그러나 지금 그 안에서는 억눌린 고성 하나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슈테판. 진정하시게.”
점차 사나워지는 용병 대장을 향해 마을의 촌장이 진정하라는 듯 의자를 빼주며 말을 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 무슨 놈의 기사가 찾아왔겠는가. 게다가 데리고 온 녀석이 고트였어. 그 녀석은 진짜 기사를 데리고 올 만한 그릇이 되지 못해.”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촌장님.”
주홍색 머리의 사내.
가시나무 용병단의 대장 슈테판은 경고하듯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촌장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이 마을의 치안에 관련된 부분은 무조건 저를 통해 이뤄져야 합니다. 이건 영주님의 뜻이기도 한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분노와 함께 섞여 들어온 슈테판의 경고는 아무리 경험 많은 촌장이라 할지라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기세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 앞으로 무조건 그렇게 함세.”
슈테판은 모처럼 맡은 일을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쩌면 새롭게 자리 잡을지도 모르는 이 지역에서 시작부터 꼬이게 된다면 가시나무 용병단은 또다시 기약 없는 방랑을 시작해야 할 테니까.
“자네의 말대로 앞으로 이런 일은 없을 거라······.”
“촌장님!”
차분히 슈테판을 진정시키려 했던 촌장이었으나 갑작스레 열린 문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큰일, 큰일났습니다!”
마치 문을 부술 듯 갑작스레 들이닥친 사내.
무언가 잔뜩 일그러져 있어 알아보기는 힘들었으나 그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몰려다니는 패거리 중 한 명이었다.
“그 기사가, 가짜가, 아니 진짜가.”
“······아니, 네가 왜.”
촌장은 그를 바라보고는 놀란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낳아준 부모가 보아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새파랗게 부어오른 얼굴.
형편없이 부러져 버린 앞니 사이로 새 나오는 숨소리가 힘겹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놈이 토마스를 죽일지도 모릅니다!”
“······!”
청천벽력같은 보고를 들은 촌장은 자신도 모르게 슈테판을 제치고는 서둘러 열려있는 문으로 뛰쳐나갔다.
촌장에게 있어 단 한 명뿐인 아들의 안위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으아아아아아!”
마침 저 위에 있는 언덕에서부터 미끄러져 내려오는 비명 하나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목소리가 과연 자신의 아들인 토마스였다.
“빌어먹을······.”
슈테판은 이를 꽉 물고는 촌장의 뒤를 따라나섰다.
결국, 껄렁이던 촌장의 아들놈이 무언가 사고를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살려줘어어어어!”
저 멀리서부터 가련한 비명과 함께 피어오르는 흙먼지가 있었다.
말 뒤에 발이 묶인 채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는 토마스가 만들어 내는 흙먼지였다.
“토마스! 토마스! 누가 좀 막아봐라!”
그 모습을 확인한 촌장이 이성을 잃은 채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으나 마을의 그 누구도 쉽사리 날뛰는 말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터져나가는 토마스의 상처를 통해 마을 이곳저곳에 피로 만든 흔적들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촌장이 누구냐.”
그렇게 한참을 날뛰던 검은 말이 마침내 마을의 광장 앞에서 멈춰 섰다.
아직도 씨익 거리는 모양새가 분이 다 풀리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이 마을의 촌장은 내 앞으로 나와라.”
금발에 푸른 눈.
그리고 기사라 하기에는 너무 흉악하고 일개 불한당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당당한 사내.
먼발치에서 보이는 이방인을 알아본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그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군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사람이었지만 적이었을 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감히 이딴 너절한 녀석을 보내 기사의 명예를 무시한 촌장은 누구냐!”
뇌성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작은 악(惡)은 더 큰 악(惡)에게 잡아먹히고 마는 법.
여태껏 같잖은 권력으로 마을을 주름잡고 있던 촌장의 아들은 지금 진짜배기 양아치의 발치 앞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