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20
너 정도면 어디쯤이냐 (1)
“······나 같으면 당장 무릎부터 꿇을 겁니다. 촌장.”
저 앞에서 늑대가 미소 짓고 있다.
자신에게 몰려드는 가련한 양 떼들을 바라보는 늑대가.
슈테판은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블라드의 서늘한 눈빛을 보자마자 뒷덜미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저놈은 한 명이고, 우리는 수십이오. 당신들이 앞장만 서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소!”
촌장의 어이없는 제안에 슈테판은 자신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아무리 평화롭게 살아왔다 한들 바로 앞에서 웃고 있는 위협을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이 자는 촌장의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럼 우리는 빠지도록 하지.”
“······뭐?”
그 말과 함께 슈테판과 용병들이 서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사는 용병들은 앞에서 웃고 있는 잔인한 늑대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고 그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뭐야. 왜들 그래.”
“너희들 애초에 이럴 때 쓰려고 고용된 거 아니야! 왜 뒤로 빠지는 거냐!”
각자 창 하나씩을 꼬나 들고 모여있던 자경 대원들은 망설임 없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용병들을 보며 당황하고 말았다.
“저 사람 기사야.”
“뭐?”
“저 사람 진짜 기사라고.”
블라드를 알아본 용병 중 몇몇이 물러나는 와중에도 조용히 마을 사람들에게 귀띔해주었다.
네놈들이 아무리 모여봤자 눈앞에 있는 사내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당장 무기 버려. 이 병신들아.”
“······.”
점점 얼어붙어 가는 분위기.
하나였음에도 수십을 압도하는 기세가 푸른 눈동자 속에 있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마을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키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운이 좋다.”
검은 말의 입김이 거칠어진다.
당장이라도 앞에 있는 인간들을 밟아버릴 정도로 거칠게.
자신과 맞닿은 세계가 그만큼 요동치고 있었기에.
“왜냐하면, 나는 이곳에 조용히 휴가를 보내러 왔기 때문이다.”
이 검이 뽑히면 돌이킬 수 없다.
나를 둘러싸고 가르쳤던 세계들이 검을 뽑으면 끝날 때까지 멈추지 말라 말해주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참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이다.
“내가 제안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마라. 촌장.”
아무리 작디작은 세계에서만 살아왔다 하더라도 이제는 알아봐야 할 것이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그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분노와 당황, 그리고 편견을 뚫고 이제야 현실을 마주한 마을 사람들은 그만 파랗게 입술이 질려버렸다.
흔들리고 있는 창끝만큼이나 그들의 눈동자도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
“······.”
무거운 침묵이 앉아 있는 촌장의 집.
마을에서 가장 크고 넓은 집답게 안의 공간은 쾌적했지만 정작 감도는 공기의 무거운 만큼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저희가 감히 기사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 놈당 3골드다.”
“네?”
멍청히 반문하는 촌장을 보며 블라드의 차가운 눈빛이 그를 훑고 지나갔다.
“창을 들이댄 녀석들까지는 봐주도록 하지. 다만 고트의 집까지 쳐들어온 놈들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방금 자신에게 창을 들이댄 마을 사람만 해도 수십이었다.
다만 그들 모두를 자신을 적대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여버린다면 단순한 살인마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리 권리가 있다 해도 상식에 맞게 행사해야 하는 법이었다.
“한 놈당 3골드.”
“하, 하지만 기사님. 저희 같은 작은 마을에서 3골드는.”
“당신 아들은 10골드다.”
그렇다 해도 모욕당한 처사를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법.
블라드는 이 마을의 주인인 로즈미츠 남작이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보상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비록 직접 지불해야 하는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과도한 금화였지만 말이다.
“정말 돈을 내지 못하겠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말씀만 하십시오!”
촌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금화 말고 다른 방안을 찾아보려 하였지만, 그는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일은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싸게 먹힌다는 것을.
“그놈들의 왼팔 하나씩을 잘라와라.”
“······기, 기사님.”
험난한 곳에서 자라왔고 평생을 날카로운 검을 들기로 맹세한 사람이었다.
그런 블라드가 내뱉는 말에는 누가 들어도 알아들을 수 있는 스산한 진심이 담겨 있었다.
“물론 당신 아들은 양팔을 잘라와야겠지.”
블라드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촌장은 더는 입을 열 기력조차 사라지고 말았다.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이 모든 제안을 거부할 경우 너의 아들과 시건방진 놈들의 목숨은 없을 것이다.
“더 할 말은?”
“······없습니다.”
“그럼 나가봐라.”
잘못된 판단을 통해 마을을 위기에 몰아넣었으나 그래도 마지막 눈치는 있던 촌장은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밖으로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한 것은 다름 아닌 자신들이었으니까.
“······이런 면모도 있으셨군요.”
“나서지 않기를 잘했어. 슈테판. 안 그래도 본보기로 누구 하나 썰어버릴까 고민하고 있었거든.”
슈테판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블라드의 말에 그만 목덜미에 있는 웃옷을 잡아 내리고 말았다.
아직 분노가 채 가시지 않은 블라드의 어투에는 쉬이 넘기기 힘든 가시들이 섞여 있었다.
“저희야 기사님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블라드는 촌장이 내어준 차를 밀어놓고서는 자리에 일어섰다.
장식장에 놓여있는 수많은 술병을 바라보며 블라드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거지? 이런 시골구석까지 밀려날 실력들이 아닐 텐데.”
이건 벌꿀주인가?
꽃이 귀한 북부에서는 쉽사리 볼 수 없었던 술병을 찾아낸 블라드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뭐, 어떻게 보면 저희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기사님의 덕도 있는 것이지요.”
“······아.”
블라드는 슈테판이 말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는 그만 침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오랜만에 시골 구경하니 콧속도 시원하고.”
“이걸로 한잔하지. 내가 따라 드릴 테니.”
블라드는 자신의 것인 양 거리낌 없이 촌장의 벌꿀주를 열고서는 슈테판에게 따라주었다.
타노보에서 비츠카야 백작과 사이가 틀어져 버린 블라드.
어차피 떠날 생각이었던 블라드야 별문제는 없었지만, 그곳에서 새로이 자리를 잡아볼까 했던 가시나무 용병단은 또다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의뢰를 찾아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슈테판이 한 말은 그저 엄살이 아닌 진실이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무슨 의뢰로 온 건데?”
“흐음······. 의뢰내용은 고용주의 허가가 없이는 발설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기는 합니다만.”
블라드는 슈테판의 너스레에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맛있는 술과 인연이 닿았던 지인.
여태껏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살려줬잖나.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그렇죠. 그때 다리 위에서도 기사님이 아니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죠.”
용병대장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칼밥 좀 먹었다 해서 오를 수 있는 위치는 아니었다.
바로 블라드를 마주한 지금처럼 분위기를 편안히 만들고 고용주에게 자신들을 홍보해야 하는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딱히 비밀도 아니긴 하죠. 어차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블라드가 내어준 술을 들이켠 슈테판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블라드에게 고개를 가까이하고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만간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전쟁?”
“영지전 말입니다. 귀족들끼리 하는 땅따먹기요.”
슈테판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블라드는 술잔을 내려놓고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여태껏 경험해보지 못했던 세계가 슈테판의 혀끝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계속해봐.”
“······저희가 로즈미츠 남작에게 받은 의뢰는 산적으로부터 이 마을을 보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이 뿌리내릴 지역을 찾던 가시나무 용병단은 일종의 자경 업무를 위탁받아 이곳 등나무 마을로 찾아왔다.
요근래 남작령의 경계 근처에서부터 산적들의 약탈 행위가 빈번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산적이랑 영지전은 무슨 상관인데?”
“바로 그게 핵심인 부분이죠.”
아무도 없는 촌장의 집이었지만 슈테판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조용히 몸을 가까이 기울이고는 블라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약탈을 하고 다닌다는 그놈들, 암만 봐도 산적이 아닌 것 같습니다.”
“······.”
촌사람들이야 모를 수 있어도 용병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슈테판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근방에서 날뛰고 있는 산적들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것을.
“치고 빠지는 모양새가 너무 깔끔하고 정련되어 있습니다. 마치 훈련을 받은 병사들처럼요.”
“······음.”
아마 로즈미츠 남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날뛰고 있는 산적들이 평범한 녀석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가 봤을 때는 이건 일종의 전초전이거든요. 마르시아로 들이닥칠 진입로를 확보하는 거죠.”
상대는 선전포고를 하기 전 주위의 마을들을 정리하면서 마르시아를 향한 진입로를 확보하는 중이었다.
“그러면 로즈미츠 남작은?”
“그 사람은 시간을 버는 거죠.”
그리고 로즈미츠 남작은 몇몇 마을들을 제물로 삼아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과 병력을 벌고 있었다.
공격하는 자와 수비하는 자.
둘 모두의 움직임은 전략적으로는 맞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일 뿐이었다.
“저희도 이번 주까지만 이곳에 있다가 돈 받고 떠날 생각입니다.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마시고 있는 벌꿀주가 쓰다.
휴가를 즐기기 위해 온 마을이었건만 또다시 무언가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아니, 어디에 가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상대는 누군데.”
“······아마도 필로스 남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쪽 방향에서부터 약탈이 진행되고 있거든요.”
“필로스?”
아직 귀족 가문들을 빠삭히 알아들을 정도로 상식이 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필로스라는 가문은 분명 블라드의 기억에 있는 가문이었다.
‘필로스, 필로스······.’
블라드는 눈을 감고는 최대한 기억을 헤집어보며 낯익은 이름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
기억 속 가라앉아 있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자 블라드는 코끝에서부터 희미한 레몬향이 맺히는 것만 같았다.
-역시 들은 대로 힘이 좋아.
-괜히 흙멧돼지라 불리는 게 아니야. 저기에 걸리면 뼈도 못 추릴걸?
기사가 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딘 땅이 있었다.
시작은 명예롭지 않았지만, 끝은 화려하게 꽃피웠었던 그때의 결투.
요제프가 빌려준 명예를 등에 지고 올라선 소년을 노려보던 시선이 있었다.
스승이었던 자야르에게 패한 분을 이기지 못한 채 씩씩거리던 기사였다.
※※※※
끄아아악!
살려주세요! 원하는 건 내드릴 테니까!
매캐한 연기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곳곳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자그마한 마을 안에서 더는 밖으로 새어 나갈 수 없는 소리들이 왱왱대며 메아리치고 있었다.
“콜린 님.”
“보고해.”
가득한 피비린내와 누군가의 울음소리.
그런 살육의 현장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질겅질겅 육포를 씹어먹고 있는 검은 피부의 사내.
“이 마을은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빼낼 건 다 빼냈나?”
불태울 마을이라면 쓸만한 것들은 빼놓는 것이 맞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는 주인이 없게 될 물건들일 테니까.
“······이것밖에 안 되나?”
“워낙 가난한 마을이었던 모양입니다.”
도시도 아니고 그냥 마을.
그것도 산골 구석에 박혀 있던 마을이었으니 이들이 만족할만한 전리품이 나올 리가 없었다.
콜린이라 불린 사내는 눈앞에 전리품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음에 갈 마을은 좀 다를 겁니다. 마르시아 근처에 있는 마을이기도 하고, 그곳에 있는 촌장이 전직 징수관이었답니다.”
“그래?”
원하던 금화의 냄새를 맡은 멧돼지의 표정이 이제야 기꺼워지기 시작했다.
전직 징수관이라면 이래저래 꿍쳐놓은 비자금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것을 허용해주는 자리이기도 했으니까.
“다음에 갈 마을이 어디라고?”
“등나무 마을이라고 합니다.”
고깃덩이를 자르던 단검을 집어넣은 콜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저물고 있는 황혼.
어쩌면 저 해가 지는 방향에 반짝이는 금화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빨리들 마무리 지어.”
“네 콜린 님.”
기사는 검이다.
그리고 검은 곧 도구다.
손잡이를 쥐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기사는 다양한 모습을 비치게 된다.
그리고 오늘, 주군의 명에 따라 명예를 내려놓은 필로스 가문의 콜린은 더는 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잔악무도한 산적의 모습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