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23
그녀가 너를 부른다 (1)
이제는 잔디가 무성해진 북부의 초원 위로 세워져 있는 주둔지.
수많은 천막 사이에서 휘날리고 있는 깃발에는 교황청과 용살기사단을 나타내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째서 진입하지 않는 것입니까. 라두 경.”
가장 화려하게 치장된 지휘관의 막사 안.
그곳에 선 피에르 주교는 주인이 내어준 찻잔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앞에 있는 사내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사를 일으킨 지 어언 두 달째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숨만 죽인 채 바라만 보고 있다니요.”
말투는 정중하지만, 그 안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담겨 있다.
쇼아라의 주교이자 이단 심문관.
피에르는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강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의 불성실한 태도는 저 위에 계실 신께서도 그리 달가워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라두 경께서는 지금이라도······.”
“할 겁니다.”
피에르의 말에는 감히 무시하지 못할 만큼의 분노가 어려있었지만 정작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태연할 뿐이었다.
“지금은 그저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머릿기름으로 말끔하게 넘긴 붉은 머리카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마주치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분명 라두라는 자가 용의 피를 이었다는 것을 증언해주고 있었다.
마치 사람 같지 않은 기세를 품고 있는 푸른 눈동자였다.
“언제까지 하겠다고 확언한 바는 없지 않습니까?”
“······.”
용살기사단의 라두 드라굴리아.
용혈공의 피를 이은 남자가 지긋이 피에르 주교를 노려보며 그의 기세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언제 검을 빼 들 생각이십니까.”
“그거야 간단하지 않겠습니까.”
교황청이 내세우는 주교 앞이었지만 라두의 태도는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가 이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존재는 오직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저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때입니다.”
“······.”
테이블 위에 두 발을 올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두.
그 여유로운 모습에 피에르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부디 신의 뜻에 인간의 의도를 섞지 마십시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교님.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테니까요.”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리는 라두.
마치 이제 나가보라는 듯한 그의 태도에 피에르는 속으로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목줄 풀린 용의 기세는 어느새 교황청까지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 보겠소.”
“배웅은 안 하겠습니다. 주교님.”
결국, 피에르 주교는 입술을 깨문 채 천막을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 이름으로 세운 깃발이나 결국은 인간의 검으로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으니 라두의 허락 없이는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하자고 합의한 계약이었으니까.
‘당했군.’
천막을 빠져나온 피에르의 눈가로 정오의 태양이 내려앉았다.
부신 눈을 손으로 가리자 보이는 광경.
바람에 따라 휘날리는 깃발들.
그 사이로 정연하게 자리 잡은 천막들이 가득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렇게까지 준비했건만 결국은 용혈공의 의도에 놀아나고 말았다.
어느새 명분은 빼앗겨버렸고 검 자루는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
어째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지를 안다.
북부를 견제하고 싶었겠지.
모처럼 몸을 일으킨 중앙의 군세들은 사특한 존재를 명분 삼아 북부 한가운데에 말뚝처럼 박혀 있었다.
그렇게 용혈공이 박아놓은 말뚝은 강철공과 북부연합의 움직임을 찍어누르는 중이었다.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랍니다. 용혈공.’
다만 피에르는 너무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
주둔지가 마주하고 있는 곳.
그곳에서 퍼져나오는 불길한 기운은 어느새 형체를 갖춰 검은색의 안개처럼 내려앉고 있었으니까.
다가오는 여름의 기운도, 오후의 햇살도 닿지 않을 만큼 짙은 안개였다.
※※※※
어제와는 달리 텅 비어버린 마을이 을씨년스럽다.
모두가 떠난 듯 그렇게 조용해진 마을에는 미처 챙겨가지 못한 가재도구들만 뒹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 마리 잘 따라가고. 거기 가서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서서히 떠나가는 사람들 속에서 고트는 어머니의 손을 꽉 붙잡고는 신신당부를 해대고 있었다.
“우리 엄마랑 마리 좀 잘 부탁해. 같은 가족이라고 생각하고, 아니 이제는 같은 가족이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님.”
등나무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는 마을 사람들.
그 앞에서 촌장이 떠나지 말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귀담아듣는 사람들은 없었다.
바로 코앞까지 들이닥친 전쟁의 전조를 보았는데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마르시아로 가서 콕 박혀있어요. 아무리 영지전이라도 도시까지 함락시키는 경우는 드무니까.”
“조심해라 고트야. 엄마는 항상 나보다는 네 걱정뿐이다.”
주름진 어머니의 얼굴을 보는 고트 눈에는 걱정이 가득하다.
너무나도 가득해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내가 준 돈 잘 챙기고. 도착하자마자 쇼아라로 편지 보내. 거기면 연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야.”
“오빠도 조심해야 해.”
이제야 겨우 만난 가족이었건만 또다시 헤어져야만 한다.
그것도 험하디험한 피난길 속으로 가족을 보내야 하니 고트는 그만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쯧.”
안타까운 배웅에 정신이 팔려있는 고트를 보며 블라드는 혀를 차고 말았다.
어머니와 이별을 준비하는 아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라드는 괜스레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야. 고트.”
“······.”
“야. 안 들리냐.”
점점 멀어지는 사람들을 보며 가만히 손을 흔드는 고트.
블라드는 한참 배웅에 열중하던 고트의 목덜미를 잡아채고는 자신의 얼굴 앞에 가져다 놓았다.
“왜, 왜 대장.”
어째서인지 사나워 보이는 블라드의 표정.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그의 표정에 고트는 움츠러들었지만 들려오는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너도 따라가.”
“응?”
어차피 쇼아라로 돌아갈 뿐일 여정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고트의 안내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무슨.”
“휴가다. 길게 줄게.”
아주 잠깐이었지만 블라드는 고트의 가족을 통해 옛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그 모습을 온전히 기억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은 너무나 오래되고 낡아 제대로 떠올리기도 힘들 정도였으니까.
“대신 무급 휴가야.”
“······대장.”
블라드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고트는 당황한 듯 얼어붙고 말았다.
눈치 빠른 사기꾼은 무언가를 알아챘다는 듯 떨리는 고트의 손가락.
“나 잘렸어?”
“······휴가라니까. 이 미친놈아.”
“길게 주는 무급 휴가라니, 원래 고용주들은 해고를 그런 식으로 말한단 말이야.”
블라드는 들려오는 대화 속에서 고트가 살아왔던 인생 역정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얼른 따라가. 나중에 쇼아라에서 보자.”
“으. 응!”
그제야 블라드의 의도를 파악한 고트가 서둘러 말 위로 올라탔다.
차가운 말투 속에 담겨 있는 배려.
블라드의 배려는 어젯밤 어머니의 앞에서 휘휘 젓던 국자 속에서도 느껴지던 것이었다.
“고마워 대장!”
저 멀리 언덕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행렬이 어째서인지 희뿌예 보였다.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을 것이지만 고트는 쉽사리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머니만 안전한 곳에 모시고 바로 찾아갈게!”
“그때까지 네 자리가 남아 있겠냐.”
진심을 타박으로.
그러나 오해는 없을 것이다.
겨울날에 만났었던 두 사람은 어느새 서로를 이해할 정도의 사이가 되어있었으니까.
“······너는 하벤처럼 배 받기는 글렀어.”
가족에게로 떠나가는 고트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만났을 때는 사기꾼의 모습이었으나 떠나갈 때는 진실된 모습으로.
등나무 마을의 고트는 그렇게 가족의 품으로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래 빨리 가봐.”
금방 오겠다 말하긴 했지만 아무리 못해도 몇 달은 걸릴 이별이었다.
어쩌면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르지.
이별이란 그렇게 덧없는 것이라는 걸 블라드는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맛없더라. 감자 스튜.”
떠나가는 고트의 뒷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차마 하지 못했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엄마의 맛이었지만 맛은 없었다고.
하늘 한가운데 걸려 있는 오후의 햇살이 블라드의 눈을 간지럽혔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손바닥으로 가린 푸른 눈동자.
떠나가는 사람들을 보는 눈동자의 색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온기만큼은 따뜻해 보였다.
※※※※
“역시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춥군요.”
자그마한 숲길을 걷고 있는 사내들.
슈테판은 너스레를 떨며 블라드의 옆으로 말을 가까이 붙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누아르의 사나운 눈총에 그저 벌벌 떨 뿐이었다.
아무래도 고트와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블라드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디까지 따라올 셈이야.”
“북쪽까지요. 쇼아라까지 이제 일주일 남았나요?”
슈테판과 가시나무 용병단.
지금 그들은 블라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는 중이었다.
“왜 굳이 쇼아라까지 따라오는데?”
“아직 자리를 못 잡았으니까 그러지요.”
동쪽 도시 타노보에서부터 시작된 그들의 방황은 아직 끝을 맺지 못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용병의 가치는 높아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아무 데나 눌러앉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아무래도 하나뿐인 목숨으로 장사하는 입장이니까요. 고용주를 고르는 데는 민감할 수밖에 없거든요.”
“······말 들어보니까 굳이 내 잘못도 아니었네. 그렇게 까탈스러우니 지금까지 자리를 못 잡았지.”
“하하!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 아니겠습니까.”
슈테판은 블라드의 핀잔에도 그저 호탕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이 어린 기사의 마음에 들어야만 했으니까.
‘이 정도만 해도 얼마든지 받아줄 수 있지.’
말투는 까칠하고 태도는 냉정하다.
그러나 자신의 종자한테 하는 행동은 따뜻했으니 분명 나쁘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설사 성격이 개차반이라 해도 따라갈 만한 가치는 있다.’
도르레치티의 숲에서 헤매던 것을 구했을 때부터 등나무 마을에 이르기까지, 질기다 할 수 있는 인연으로 블라드와 함께 했던 슈테판이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은 더 크게 될 녀석이라는 것을.
블라드의 가치는 예전과는 달리 이제는 누가 보아도 쉽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빛나고 있었다.
“쇼아라에 들르시면 어떻게, 그곳에서 바로 임무를 받으십니까?”
“······몰라, 가봐야 알지.”
실력 좋고 인성 괜찮으며 장래성까지 훌륭하다면 지체하지 말고 올라타는 것이 맞을 것이다.
가장 강력했던 경쟁자조차도 알아서 떨어져 나가줬으니 이건 분명 기회였다.
“내 일은 왜 물어보는데?”
“흐흐. 이것도 인연 아니겠습니까. 쇼아라에서 어떻게 술이라도 한잔······.”
사람 좋은 웃음을 내보이며 너스레를 떨려는 슈테판.
그러나 그를 바라보고 있던 블라드의 눈가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잠깐.”
“네?”
바람결을 따라 들려오는 소리들.
블라드의 예민한 청각이 무언가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들.
말발굽 소리였다.
“누군가 오는군.”
“······!”
조용히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다 대는 블라드.
블라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본 슈테판은 재빨리 대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진형 갖춰!”
그의 신호에 따라 순식간에 타고 있던 말들로 슈테판과 블라드를 둘러싸는 가시나무 용병단.
블라드는 그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에 잠시 놀라고 말았다.
“보입니다.”
“음.”
자연스럽게 블라드의 옆에 붙어 보고를 하기 시작하는 슈테판.
그들의 시야로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사내들의 모습이 보였다.
‘20명은 되어 보이는군.’
일행보다 배는 많아 보이는 숫자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가시나무 용병단은 노련한 자들이었고 자신 또한 이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는지를 확실히 파악했으니까.
“정지. 앞에 있는 자는 신분을 밝혀라.”
감출 것도 없다는 듯 당당히 다가오는 검은 두건의 사내들.
평범한 듯 위장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범상치 않은 기세를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제야 좀 태가 나는군. 많이 컸어. 그때와는 영 딴판이야.”
“······나를 아는 모양이지?”
자신을 안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는 사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를 향해 블라드는 검을 치켜들었다.
나는 모르는데 나를 아는 자만큼이나 수상한 것은 없다.
“너는 누구냐.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해라.”
“······.”
날카로워지는 블라드의 기세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사내.
그는 조용히 품속을 뒤지며 빳빳한 종이 한 장을 끄집어낼 뿐이었다.
낯익은 인장이 새겨진 종이였다.
“요제프님이 보내셔서 왔다. 기사 블라드.”
“뭐?”
들고 있는 명령서와 함께 두건을 들춰내자 보이기 시작하는 사내의 얼굴.
그의 얼굴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깊게 새겨진 흉터들이 가득했다.
“너는 지금부터 쇼아라로 오지 말고 데어마르로 가라.”
“뭐?”
블라드는 그 흉터들과 함께 사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보았다.
딱 한 번의 마주침이었으나 잊을 수 없는 모습.
그는 얼굴만큼이나 강렬한 첫인상으로 블라드에게 기억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특별한 지시가 있을 때까지 쇼아라의 블라드가 아닌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로써 행동할 것을 명한다.”
요제프가 마차 안에서 보여주었던 가죽 주머니.
그 안에는 차마 감지 못한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던 사내의 목이 담겨 있었다.
“고귀한 북부의 핏줄, 요제프 바예지드 님의 명이시다.”
바예지드의 가문의 숨겨진 검.
엔드레 하이날의 목을 잘라왔던 이름 모를 기사가 지금 블라드의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