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24
그녀가 너를 부른다 (2)
내리쬐는 햇볕은 따듯하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한 그런 날.
어느새, 계절을 따라 올라온 여름이 느껴지자 데어마르의 하얀 뱀은 오랜만에 나무 아래로 내려가기로 했다.
일광욕을 즐기기에는 이만한 날씨가 없을 테니까.
조용한 만큼 외로운 언덕 위.
오직 침묵할 뿐인 비석들을 보며 가만히 눈을 감은 하얀 뱀.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꼬리가 살랑거렸다.
—-?
순간, 이제야 막 자리를 잡은 하얀 뱀은 무언가를 느끼기라도 한 듯이 조용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저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확연한 감각 하나.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각이었기에 하얀 뱀은 혹시나 싶은 마음에 코를 킁킁거려보았다.
—-!
냄새를 알아본 하얀 뱀의 눈이 치켜 떠졌다.
저 멀리서부터 꽃의 향기가 났다.
아주 어린 꽃들의 향기.
오랜 세월 동안 느껴보지 못해 잠시 잊고 있었지만, 영혼 속에 박혀있던 향수를 자극하는 향기였다.
하얀 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몸을 세우고는 더 먼 곳을 바라보았다.
바로 앞에 있는 하이날의 저택을 넘어 영지 밖 너머까지.
그곳까지 시선을 넓힌 하얀 뱀의 시야로 낯익은 사내의 모습이 맺히기 시작했다.
영지 밖 먼 곳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는 금발의 기사가 한 명 있었다.
별로 만든 검에 어린아이들의 숨결을 잔뜩 싣고서.
기사의 검을 타고 온 아이들이 입을 모아 말해주고 있었다.
세계수의 가능성은 아직 죽지 않았다고.
어린아이들을 알아본 하얀 뱀의 꼬리가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작고 오래되었지만 관리만큼은 세심하게 되어있는 하이날의 저택.
그곳 가장 높은 곳에 마련되어 있는 집무실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구요.”
마치 바닷물이라도 쏟아진 듯 책상 위에는 풍성한 물빛 머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알리시아 하이날.
그녀는 지금 어찌할 수 없는 피곤함에 책상 위에 쓰러지듯 엎어져 있는 중이었다.
지금 창문 밖에서 흥분한 듯 마구 고개를 까닥이고 있는 하얀 뱀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알고 계신 만큼 준비하시지 않았습니까.”
비록 귀족 영애가 보일만 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속내를 짐작하고 있던 던칸은 그저 조용한 목소리로 달래줄 뿐이었다.
“준비요?”
던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들어 올린 알리시아.
풍성한 머리카락 때문에 가려진 얼굴이 조금은 스산해 보였다.
“이 정도 준비로는 어림도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
힐난 아닌 자조에 던칸은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후.”
대답 없는 던칸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찬찬히 머리를 쓸어올리는 알리시아.
엎어져 있던 그녀의 머리맡에는 빼곡한 글씨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하이날 가문의 병력 구성을 정리해 놓은 보고서였다.
“······고작 7백 명 가지고는 가이다르에게 대적할 수 없는걸요.”
마른걸레를 쥐어짠다는 심정으로 모아놓은 병력이었지만 고작 7백 명일 뿐이었다.
평범한 영지전을 치른다면 몰라도 상대는 서부의 패자 가이다르였고 이 정도의 숫자로는 대적할 수 없으리라는 것은 동네 꼬마들도 알 수 있는 사실일 것이다.
“용병들은 어떤가요? 요즘 값이 많이 올랐다면서요?”
“그렇습니다. 알리시아 님.”
한숨과도 같이 흩어지는 알리시아의 말끝.
그녀가 얼마나 과중한 부담감에 직면해있는지 잘 알고 있던 던칸이었으나 오늘만큼은 알리시아에게 힘을 북돋아 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저희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전쟁의 전조가 감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용병들의 값이 많이 올랐고······.”
가이다르의 목적은 분명했고 이제 더는 피할 수 없었다.
영지뿐만 아니라 가문의 운명을 건 일전이 다가오고 있었고 알리시아는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쳐 볼 생각이었다.
“따로 이름 있는 용병 단장들을 만나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다들 저희 쪽에 서는 것을 꺼리는 것 같더군요.”
“······역시 그렇겠죠.”
그러나 알리시아의 각오와는 달리 세상은 그녀에게 쉽게 손을 내밀어주지 않고 있었다.
가난한 군주.
그리고 강대한 적.
아무리 기회를 찾아 움직이는 용병들이라 할지라도 침몰하는 배에 올라타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저희 쪽에서는 1천조차 준비하지 못하겠네요.”
“그렇습니다.”
던칸의 대답에 드리워져 있던 알리시아의 그늘이 깊어져 갔다.
요제프가 보낸 정보에 따르면 가이다르는 그들을 따르는 가문들과 함께 북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했다.
전부 합쳐서 5천은 될 병력.
고작 7백일 뿐일 자신의 병사들로는 그저 중과부적일 뿐일 것이다.
“그래도 한 번에 달려들지는 않겠죠? 그들에게는 저희를 칠 명분이 부족하니까.”
“그렇습니다. 중앙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뿐더러 저희에게는 바예지드라는 동맹도 있습니다.”
서로가 붙어있기에 이런저런 명분들로 얽혀있던 서부와는 달리 데어마르는 전혀 다른 세력권에 속해있는 영지였다.
만약 그들이 정당한 명분 없이 데어마르로 침공해온다면 황실이나 중앙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문이 그들을 비판하게 될 것이었다.
“알리시아 님.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손님이요?”
정중한 노크와 함께 들어온 집사.
여태껏 무거운 분위기로 가득했던 알리시아의 집무실이었지만 그가 들어온 문으로 신선한 공기가 불어오고 있었다.
“바예지드에서 오신 분들입니다.”
“바예지드!”
집사의 말에 잠시 체면조차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알리시아.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책상에 무릎이 부딪히고 말았지만 아픔보다는 반가움이 앞서고 있었다.
“어서 여기로 모시세요.”
“알겠습니다.”
알리시아는 거리낌 없이 이제 막 저택에 도착했다는 사람들을 자신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모든 이들이 하이날을 외면하고 있는 지금, 손을 내밀어주고 있는 유일한 자들이었으니까.
“역시 요제프 님께서도 이 사태를 주시하고 계신 모양이군요.”
“다행이네요.”
알리시아는 한시름 놓았다는 듯 의자에 깊게 등을 기대었다.
“이제 숨통이 좀 트이려나요?”
아무리 가이다르라 한들 바예지드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북부의 기둥 중 하나인 바예지드는 분명 그만한 힘이 있는 가문이었으니까.
‘······같이 왔겠네.’
그러나 알리시아는 그들이 들고 올 반가운 소식보다는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사방이 꽉 막힌 듯한 지금의 상황에서 잠시 숨을 쉴 수 있을 만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를 떠올리는 알리시아의 입가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하세요.”
집사의 보고에 재빨리 머리를 쓸어넘긴 알리시아는 어느새 당당한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느새 돌아온 그녀의 눈빛이 곧이어 열릴 문을 향해 초롱초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남작님.”
알리시아의 기대와 함께 열린 문.
그 문을 열고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남자가 있었다.
요제프가 보낸 기사이며 종종 그에게 꾸지람을 듣지만 언제나 결과로 보장해주는 남자.
“저는 바예지드에서 온 보르단이라고 합니다.”
“······아.”
인사와 함께 더운 듯 연신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내고 있는 늙은 기사.
그를 보며 알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내밀고 말았다.
창밖의 하얀 뱀은 아직도 고개를 치켜들고는 이리저리 방정맞게 까딱이고 있을 뿐이었다.
※※※※
검은 두건을 뒤집어쓴 남자들.
블라드와 가시나무 용병단은 그들과 함께 데어마르로 향하는 중이었다.
“저 때문에 이곳까지 내려오신 건가요?”
“······나한테는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다.”
자신의 물음에 확실한 답변을 해주지 않는 흉터투성이의 남자.
블라드는 그런 그를 보며 자신을 데려가는 것 말고도 다른 임무를 맡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엔데르 하이날의 때처럼 또 다른 누군가의 목을 노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제가 뭐라고 불러드려야 하죠? 선배님?”
정체도 모르고 의도도 모르겠다.
그런 의문투성이의 남자에게 계속해서 정보를 캐내려 하는 블라드의 행동은 생존 본능에서부터 비롯된 자연스러운 태도라 할 수 있었다.
“흠. 호칭의 문제가 있었군.”
검은 두건의 남자는 블라드의 말을 듣고는 턱을 쓰다듬고는 잠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선배님은 좀 그렇지. 가능하면 나랑은 모르는 척하는 것이 좋을 테니까.”
“왜죠?”
“서로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남자의 미소와 함께 얼굴에 가득한 흉터가 일그러진다.
비언어적인 신호로 블라드에게 더는 깊게 들어오지 말라고 조용히 경고를 보내는 정체 모를 남자.
블라드는 그가 보내는 경고를 알아채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이름으로 불러.”
“이름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블라드의 질문에 잠시 침묵하던 남자는 이윽고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커스로 하지. 너는 앞으로 나를 마커스라고 부르면 된다.”
“······방금까지는 마커스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이름 짓는 것이 제일 어려워. 이 정도면 꽤 괜찮게 뽑힌 거다.”
방금 이름을 지어냈다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 검은 두건의 남자.
이제는 마커스라고 불러야 하는 남자는 고개를 돌려 슈테판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일손이 모자랐는데 잘 끌고 왔군. 고용한 상태인가?”
“아니요. 아직.”
“지원금을 내어주지. 저들을 고용하도록 해.”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용병 한 무리를 끌고 오는 블라드를 보며 마커스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보는 사람들에게는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흉측한 미소였지만 말이다.
“가시나무 용병단이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실력도 그렇고 무엇보다 임무완수율이 좋은 녀석들이더군.”
“그런가요?”
블라드는 마커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명예, 용병은 신뢰.
이것들이 각자의 영역에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최우선 덕목이었고 슈테판은 높은 임무완수율을 통해 자신의 신뢰를 증명하고 있었다.
“어쩐지 도망을 안 치더라고요.”
“그래?”
잠시나마 용병업계에 몸을 담고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용병이라는 녀석들은 걸핏하면 내빼는 녀석들이라는 것을.
그러나 가시나무 용병단은 오귀스트와의 일전 속에서도 도망가지 않았었다.
그 자세가 마음에 들었기에 얄팍한 의도를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데리고 다녔던 것이었다.
“혹시, 앞으로도 계속 데리고 다닐 생각이라면 여자관계는 좀 주의시키라고.”
“네?”
마커스는 블라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저만한 실력을 가지고도 떠도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지.”
“······아하.”
마커스의 말을 완벽히 이해한 전직 창관의 초팔이.
블라드는 고개를 돌려 뒤에서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슈테판을 바라보았다.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슈테판은 블라드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재빨리 미소를 지으며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반대쪽 눈은 찌푸리지도 않은 것이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음?”
슈테판과 의미 없는 눈싸움을 하고 있던 블라드의 머리 위로 까마귀 하나가 뱅뱅 맴돌기 시작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있나 보군.”
하늘 위를 빙빙 돌고 있던 까마귀는 마커스가 팔을 내밀자 익숙한 모습으로 그의 팔뚝에 내려앉았다.
‘비둘기도 아니고 까마귀를 쓰네.’
발목에 매달아 놓은 편지통도 새까맣게 칠해진 것이 그 누구도 이 까마귀가 전서구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만 같았다.
“으음······.”
블라드는 까마귀를 보며 호기심에 눈을 반짝이고 있었지만 정작 그 까마귀가 보내온 소식을 접한 마커스의 표정은 점점 굳어만 갈 뿐이었다.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지.”
“네?”
데어마르까지 같이 가겠다던 마커스와 그의 무리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무언가 놓고 온 물건이라도 있다는 양 서둘러 말머리를 돌릴 뿐이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한테 그런 거 물어보면 안 된다니까.”
마커스는 또다시 천연덕스럽게 질문하는 블라드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이놈은 영악한 놈이다.
순진한 척, 모르는 척하며 또다시 자신이 경고한 선을 넘고 있으니까.
역시 페테르님께 이 녀석을 달라고 했어야 하는 거였는데.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마커스가 보내는 무거운 눈빛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 속에 담긴 경고는 자신을 향해 있지 않았으니까.
“어서 데어마르로 가라.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어서 가라. 레이디의 기사야.
그녀가 너를 애타게 부르고 있으니까.
“너무 늦으면 안 될 거다.”
“······.”
그러니 어서 가서 너의 의무를 다하길 바란다.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하늘이 그녀를 향해 덮쳐들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