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26
새로운 둥지 (1)
오랜만에 마주한 검은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웃을 듯 눈꼬리는 살짝 휘어져 있었으나 어딘가 불편한 듯한 표정.
블라드도 그 표정을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째서 너는.”
겨울에 떠났으나 여름에 마주한 자신의 주군.
조금은 더 짙어진 듯한 요제프의 눈그늘이 블라드를 향해 날카롭게 치켜 떠졌다.
“이곳에만 오면 사건을 저지르는 거냐.”
“······죄송합니다.”
요제프의 질책에 블라드는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데어마르에서의 전적이 화려하다는 것은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하이날 가문의 가보를 깨 먹다니······. 진짜 어이가 없군.”
자신이 말해놓고도 황당하다는 듯 의자에 크게 기댄 요제프는 그만 한숨을 푹 내쉬고 말았다.
큰 전쟁을 앞두고 데어마르와의 관계를 돈독히 해도 모자랄 판에 하이날의 가보를 깨 먹고 오다니.
아직도 요제프는 블라드의 말에 눈물을 글썽거리던 알리시아의 모습이 선한 것만 같았다.
“동쪽 끝까지 다녀왔다면서 변한 것은 하나도 없군.”
할말을 잃은 요제프를 대신해 입을 여는 애꾸눈의 기사.
자중하라는 의미에서 추방까지 시켰건만 여전히 사고를 치고 다니는 제자를 향해 자야르는 하나 남은 눈으로 매서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
블라드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내뱉을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평생을 눈치를 보며 살아온 것이나 다름없던 블라드는 지금만큼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함을 자각했다.
“이 멍청한 놈.”
짧은 호통과 함께 마치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자야르의 신형.
그의 토대나 마찬가지인 신묘한 발걸음을 발동한 자야르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블라드의 정강이를 후려쳤다.
“······!”
“힉!”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누군가의 비명은 들려오지 않았다.
매섭게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
허공을 가르는 자신의 발길질만이 공허하게 돌아올 뿐이었다.
“······.”
“······.”
자야르의 발길질을 피해 어느새 뒤로 물러나 있는 블라드.
당황한 듯한 표정과는 달리 확실히 간격을 벌려낸 그의 모습을 보며 요제프가 놀랐다는 듯 의자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아.”
자신을 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요제프와 아직도 한쪽 발을 든 채 멈춰있는 자야르.
데굴데굴 눈을 굴리며 집무실의 분위기를 살피던 블라드는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이거 맞아야 하는 거였죠?”
“······아무래도 그렇지.”
은근슬쩍 다시 정강이를 내미는 블라드의 모습을 보며 자야르도 이제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 녀석은 예측할 수 없는 놈이었다.
처음 만났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역시나 멍청한 놈.”
따악-!
집무실 안으로 경쾌한 타격음이 들려왔다.
크게 출렁이는 블라드의 금발.
내민 정강이가 아닌 뒤통수를 후려치는 데 성공한 자야르.
“항상 후속타를 대비하라고 했잖냐.”
자신을 향해 슬그머니 미소짓는 자야르를 보며 블라드는 조금은 따라 웃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예전과 같았다.
햇빛을 등진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요제프도, 그의 옆에서 가만히 서 있는 자야르도.
비록 꾸중을 듣는 와중이었지만 변한 것이 없는 지금의 모습에 블라드는 왠지 안심이 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알리시아 남작님은 이번 일을 조용히 넘어가 준다고 하셨다. 너그럽게 용서해준 그녀에게 감사하도록.”
“네.”
요제프와 일행은 저택 밖으로 빠져나와 영지 안에 임시로 마련된 주둔지를 시찰하고 있었다.
사방에 깔린 천막과 모닥불들.
병사들이 모여있는 곳마다 올라가는 가느다란 연기를 보며 블라드는 어쩐지 데어마르와는 어울리지 않은 광경이라 생각했다.
“오늘부터 너는 공식적으로는 내 휘하가 아닌 알리시아 님의 기사로써 활동하게 될 거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하나요?”
“지금은 조심해야 할 때거든.”
이번 전쟁에서 블라드는 쇼아라의 블라드가 아닌 알리시아의 블라드로서 활동해야만 했다.
아직 블라드는 교황청에 눈 밖에 나 있는 존재였으며 그 교황청의 군세가 북부 한가운데 틀어박혀 있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을 테니까.
“언제까지 알리시아 님의 휘하에서 움직이게 됩니까?”
“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나?”
“그런 건 아니지만······.”
블라드는 요제프의 물음에 말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아무리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블라드도 잘 이해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저는 아무래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칭호가 좀 더 마음에 들거든요.”
“흠.”
블라드의 말에 요제프와 자야르가 일리가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대었다.
기사 앞에 붙는 명예로운 칭호는 소속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드러내는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블라드가 데어마르라는 영지와 인연이 있다 할지라도 쇼아라의 블라드라는 칭호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꺼려지는 일일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조금은 애착을 가져보는 게 좋을 거다.”
그러나 요제프는 묘한 말을 남긴 채 군영을 둘러볼 뿐이었다.
“알리시아 님은 조용히 넘어가 준다고 했지 그냥 넘어 가준다고는 말하지 않았거든.”
가문을 처음으로 세운 선조부터 내려온 귀한 가보였다.
아무리 블라드가 데어마르의 은인이라 할지라도 여기에 대해서만큼은 나름의 책임을 져야만 하는 그런 물건이었다.
“남작님께서는 너에 대한 우선 협상권을 요구하셨다. 우리의 7년 계약이 끝난 다음에 말이야.”
“협상권이요?”
요제프와 블라드는 평생의 충성을 맹세한 계약으로 묶인 관계가 아니었다.
기회와 신의를 맞바꾸기로 한 7년짜리 계약은 이제 3년 차에 접어들었고 그 계약이 끝난 후에는 블라드는 엄연히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었다.
“제가 거부할 수도 있나요?”
“그러면······ 아마도 슬퍼하시겠지.”
어차피 계약을 강제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다른 영주를 찾아가기 전에 자신과 먼저 이야기 해달라 하는 것뿐이었다.
하이날의 영주 알리시아는 그만큼 블라드라는 기사를 자신의 밑에 두고 싶어 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말은 아직도 잘 있나?”
“누아르 말씀이신가요?”
“그래 그 녀석 말이다. 말 안 듣기로 유명한 너의 말.”
그러나 이 모든 대화는 결국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나 일어날 일.
블라드의 소속은 겉으로는 하이날에 가깝게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명령권은 요제프가 쥐고 있는 상황.
요제프는 이미 블라드라는 기사를 어찌 쓸 것인지 머릿속으로 구상을 마쳐놓은 상태였다.
“데어마르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들은 어디까지나 수성(守城)을 위주로 움직이게 되겠지만 그렇다 해서 가만히 숨죽인 채 기다리고만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이겠지.”
곳곳에 세워져 있는 천막들을 헤치며 변두리까지 나아간 일행들.
그곳에는 다른 천막과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또 하나의 천막이 세워져 있었다.
마치 섞이지 못하고 있다는 듯 홀로 외로이 서 있는 천막이었다.
“아니-! 이게 누구신가!”
하나의 색깔로 통일되어 있던 요제프 군의 천막과는 확연히 다른 모양새의 천막.
그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를 확인한 블라드의 눈썹이 찌푸려지고 말았다.
“저 녀석이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애초에 그렇게 하기로 한 계약이었거든.”
요제프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블라드를 바라보았다.
“인사하지. 앞으로 같이 움직여야 할 사이일 텐데.”
어째서인지 불길하게 들리는 요제프의 말을 들으며 블라드는 앞으로 바라보았다.
누가 보면 친한 사이라 착각할 만큼 자신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사내.
땋아 내린 머리, 곳곳에 새겨진 문신들.
“오랜만이오!”
부다아트 족의 아게가 블라드를 보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출세하셨군요. 기사님.”
“시끄러.”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블라드.
그런 그를 보며 슈테판은 육포를 질겅거리며 실실 웃을 뿐이었다.
“애초에 직위 하나 올리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인 겁니다. 게다가 기사님은 전쟁 자체가 이번이 처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블라드는 슈테판의 말을 들으며 마구간 안에서 푸르릉거리는 누아르를 바라보았다.
푸힝힝힝-
말 안 듣고, 거칠고, 그리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녀석.
그러나 그 모든 단점을 상쇄할 만큼 빠른 초원의 아들.
“게다가 그냥 정찰대도 아니고 타격대라니요. 제 경험으로 비추어봐도 이건 진짜 괜찮은 기회거든요.”
요제프는 블라드와 누아르가 가지고 있는 기동성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동성에 알맞은 병사들을 붙여 한 번 정도는 가이다르를 휘저어 볼 생각이었다.
“일개 평기사가 아니라 하나의 분대를 맡으셨으니 분명 이번 전쟁에서 큰 활약을 펼치실 수 있을 겁니다.”
“······야만인 놈들이 내 말을 잘 들어준다면 말이지.”
그렇게 요제프에 의해 부다아트 족의 전사들을 떠맡게 된 블라드.
요제프가 데리고 온 기사 중 야만인들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었으니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인선도 아니었다.
“어디 가십니까.”
“산책.”
“같이 가겠습니다.”
“아냐. 따라오지 마.”
야만인들이야 처음 보는 이상한 놈들보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블라드가 대장이 되니 좋았고 슈테판은 고용되자마자 블라드의 부관으로 승진하게 된 격이었으니 모두가 좋은 일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블라드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데가 아니거든.”
“알겠습니다.”
블라드는 한참 헝클어진 머릿속이나 풀어볼 겸 잠시 바람이나 쐬기로 했다.
애초에 목이 빠져라 자신을 찾고 있는 존재도 있었고.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따라 병사들이 북적거리는 주둔지를 빠져나간 블라드.
그렇게 한적한 저택의 뒷마당까지 걸어 들어간 블라드는 언덕 위에서 까딱거리고 있는 하얀색의 형체와 시선을 마주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나를 찾는 건데?”
야트막한 언덕 위, 하이날 가문의 문양에 박혀 있는 거대한 나무.
그곳에는 블라드를 향해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 하얀 뱀이 서 있었다.
※※※※
“······훌쩍.”
넓은 방 안에서 홀로 꿈틀거리고 있는 하얀 굼벵이 한 마리.
창밖에서부터 시작된 달빛이 침대 위에서 이불을 돌돌 말고 있는 알리시아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줬다고 진짜 그걸 깨부수면 어떡해.”
빨갛게 달아오른 코끝과 침대 위로 널브러져 있는 손수건들이 그녀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무리 단단한 둑이라도 자그마한 균열 하나에서부터 무너지게 되는 법.
사방에서 달려드는 악의들에서도 여태껏 잘 버텨왔던 알리시아였지만 결국 호박석이라는 계기 하나 때문에 그동안 참아왔던 것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건데.”
선조 때부터 내려온 가보이기도 했지만 알리시아에게 있어서는 아버지를 떠올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물품 중 하나였다.
그런데 깨부수다니.
아니 녹아들었다고 했었나.
“크응.”
아무래도 상관 없는 일이었다.
이제 아버지의 흔적 중 하나는 영영 볼 수 없게 되었으니까.
눈물을 훔치며 일어선 알리시아는 그래도 사람들이 있는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위안받기로 했다.
“됐어. 어차피 이렇게 쓰라고 준 거니까.”
그녀의 아버지는 노란색 호박석에 이해할 수 없는 가호가 깃들어 있다고 했었다.
그렇기에 빌려주었던 것이고 결국은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니 된 것이다.
알리시아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보았다.
“그래도 깨 먹기만 한 건 아니네.”
침대 옆, 화장대에 앉은 알리시아는 퉁퉁 부은 눈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는 블라드가 호박석 대신 내밀었던 편지들을 꺼내 들었다.
“아우슈린······ 엘프들이라.”
엘프들의 숲, 아우슈린.
도무지 인간들에게는 곁을 내주지 않기에 소문만 무성한 곳이었지만 요즈음 중앙에서부터 엘프들의 물품이 비싸게 팔린다는 소식은 들었었다.
‘······이거 잘하면’
비록 블라드는 호박석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대신 엘프들이 보내는 친서를 가지고 왔다.
어쩌면 지금 들고 있는 편지가 아버지가 물려주신 호박석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아닐까.
알리시아는 지금 자신이 들고 있는 편지의 가치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해 보았다.
‘읏!’
엘프들이 보냈다는 편지 봉투를 열어본 순간,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불어오는 바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이거 뭐야.”
가뜩이나 우울해 있던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날아온 바람에 당황하며 창가로 다가가 마구 눈을 비벼대기 시작했다.
알리시아가 눈을 비비는 사이 봉투 안에서 시작된 바람은 곧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녀의 방을 청량한 숲의 향기로 장식하기 시작했다.
“······.”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밤바람에 겨우 눈을 뜬 알리시아.
곧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내리쬐는 달빛을 받으며 언덕 위로 올라가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이젠 아주 제집처럼 드나드네······.”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색깔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아챈 알리시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언덕을 올라가는 블라드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묘비들을 향해 목례 한번.
하이날의 나무를 향해 손 한 번을 흔들고.
그리고 언덕 위에 올라선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
“응?”
순간 알리시아는 갑작스레 보이는 광경에 당황하며 다시금 눈을 비비고 말았다.
“저 언덕에는 반딧불이 없는데?”
반딧불들이 보이고 있었다.
블라드에게서부터 시작된 빛의 가루들이.
멀리서 보고 있기에 확실히 구분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 알리시아의 눈에는 언덕 위에서 떠도는 불빛들이 보이었다.
분명, 이제야 막 태어난 것만 같은 아주 작은 반딧불들이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빠져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