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28
최후의 라브노마 (1)
좁은 산길을 걷고 있는 병사들.
무언가를 잔뜩 실었는지 삐걱거리는 마차 소리가 산속으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런데 요즈음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무슨 소문?”
평온하다 못해 지루한 행군길.
데어마르로 향하는 보급대는 그만큼 평화로운 길을 걸어왔고, 누구랄 것도 없이 하나씩 긴장이 풀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데어마르로 가는 보급대들이 약탈을 당하고 있다고 하더라고.”
“약탈?”
병사 중 하나가 걷는 길이 지루했던 모양인지 옆에 있던 사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말을 들은 병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웃을 뿐이었다.
“뭔 놈의 산적들이 병사가 잔뜩 있는 보급대를 턴다고 그래.”
“진짜라니까. 저번 마을에 있을 때 거기 사람들이 하던 말을 들었다고.”
감히 누가 무기를 가득 들고 있는 군인들을 습격한단 말인가.
아무리 보급대라는 병과가 일반적인 군대 행렬보다는 취약하다 할지라도 일반적인 산적들이 목표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일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애초에 군인들을 털 정도의 무리라면 소문이 나도 진작에 났겠지.”
“······그건 그렇긴 한데.”
말을 걸던 병사도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전시 상황.
설사 보급대를 털만 한 산적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창 군사들이 오가는 지금만큼은 고개를 숙인 채 숨을 죽여야 할 때일 것이다.
“응?”
그러나 불행이라는 존재는 언제나 인지와 상식 밖에서 다가오는 법이었고.
“화살이다! 불화살!”
“마차에 불이 붙었다!”
불길한 존재는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가까이 다가오는 법이었다.
“나무가 쓰러집니다!”
수풀 사이에서부터 악의를 가득 담은 불화살들이 쏘아지고 그와 동시에 행렬의 앞뒤로 나무들이 쓰러져 내리기 시작했다.
“습격이다! 습격!”
“모두 무기를 들어라!”
순식간에 막혀버린 길목.
마차 위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새까만 그을음과 놀란 말들의 비명 소리. 서부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린 바예지드의 악의가 이빨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다들 침착해라!”
갑작스러운 돌발상황이었지만 보급대의 대장은 재빨리 휘하의 기사와 병사들을 독려해 사태를 진정시키고자 했다.
“전원 정지! 화물을 지켜라!”
중년의 나이에 근엄해 보이는 기사.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경험이 있는 그는 재빨리 사태를 수습하고 다가올 기습을 대비하려 하였으나.
“······!”
그러나 달려드는 악의는 그의 생각보다 빠르고 날카로울 뿐이었다.
가공할만한 속도.
그러나 보았을 때는 늦었고 반응했을 때는 이미 지나간 뒤였다.
“컥, 커억!”
서늘한 감각과 함께 뜨끈한 액체가 울컥거린다.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급대의 대장은 목을 부여잡은 채 꺽꺽거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의 심장에서 출발한 박동은 목을 통해 쉴새 없이 밖으로 뿜어져 나오는 중이었다.
“······반응조차 못했다라.”
갑작스러운 상황에 병사들이 굳어 있는 가운데, 흩날리는 핏물들을 뒤로한 누군가가 웃고 있었다.
결투 아닌 전투.
그럼에도 일격필살의 묘리는 어느 전장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할 만하겠는데.”
나는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상대할 수 있는가.
경험 없는 어린 기사는 수많은 교차 검증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자 애썼고 그리하여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너희 둘도 덤벼봐.”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강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이런 미친! 대장이······.”
“네 이놈! 너는 누구냐!”
대장의 죽음에 당황한 기사 둘이 다급히 검을 뽑은 채 블라드를 둘러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를 상대하는 둘.
그러나 정작 전장을 압도하고 있는 것은 둘을 상대하는 하나였다.
“내가 누구냐고?”
조용하지만 울림 있는 목소리.
모두가 주목하는 가운데 금발 머리의 사내에게서 천천히 한 줄기의 세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고귀한 분에게 정당한 권한을 받아온 사람이자.”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확연히 빛나는 오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깃발, 이름, 그리고 세계.
이제 블라드는 이 세상에 자신의 세계를 새길 정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 블라드다.”
숲 가운데 고요하게 울려 퍼지는 외침 하나.
그 외침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숲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전부 다 죽여버려!”
흉악한 용병들, 굶주린 야만인들.
블라드의 부름과 함께 정체 모를 사내들이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문신 사이로 하얗게 빛나는 이빨들이 선명했다.
“이 개자식들아! 왜 이렇게 늦게 왔냐!”
“이제야 나무가 아니라 사람 좀 찍어보겠네!”
비명 하나에 함성 하나.
흉측한 도끼 아래서 터져나가는 병사들의 투구들.
쉴새 없이 흔들리는 서부의 깃발 아래서, 마차에 실려있던 곡물들이 새빨간 피를 삼키며 마른 목을 축이기 시작했다.
“빨리 시작하자고. 이러다가 당신 부하들 다 죽겠어.”
“이, 이······.”
여유로워 보이는 블라드의 표정과는 다르게 두 명의 기사들은 그저 당황하고 있을 뿐이었다.
등 뒤에서 쉴 새 없이 들려오는 비명들.
그럼에도 기사들은 눈앞에 있는 침입자를 향해 쉽사리 검을 내뻗지 못하는 이유.
“안 들어올 거야?”
지금 이곳은 블라드의 전장이었으니까.
자연스레 흘러나오고 있는 세계가 천천히 이 세상을 그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으니까.
※※※※
“수고했다.”
“아닙니다. 아버님.”
바예지드의 역사와 함께 하는 도시. 스투르마.
그곳에 있는 두 명의 바예지드가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하신 대로 북방한계선에 있던 모든 요새의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대략 1천 정도의 병사들입니다.”
“좋다.”
루트거의 보고를 들은 페테르는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언자 라그무스가 건네준 지도를 받아들었다.
“적들은 현재 데어마르를 향해 북상하고 있다. 대략 5천 정도의 규모이지.”
지도와 함께 상세하게 전황을 설명하는 페테르.
지금 같이 군사들이 대놓고 움직이고 있다면 못 알아차릴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에 대항하는 우리는 하이날의 군사를 합쳐도 약 3천 정도.”
“······네.”
가이다르는 혼자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따르는 6개 가문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으며 올라오고 있었으니 이 정도라면 차라리 서부 연합군이라 불러도 무방할 만한 군세였다.
“강철공께서는 무어라 하십니까.”
“혹시 모를 야만인들의 위협은 막아주겠다고 했지만······. 역시나 직접적인 참전은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서부의 강력한 도발에도 북부의 수호자인 강철공 티무르 바라노프는 이번 가이다르의 북상에 참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우트만 남작령의 사특한 존재를 해결하는 문제였을 테니까.
여전히 뭉그적대며 가시처럼 박혀있는 중앙의 군세는 강철공의 사지를 묶어놓는 중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어디까지나 데어마르와 가이다르의 대결이니 직접적인 동맹인 우리를 제외한다면 다른 북부 영주들은 참전할 만한 명분이 없기도 하겠지.”
마치 누군가가 짜 맞춰놓은 듯한 불리함의 모양새에 페테르는 눈썹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7개 가문과 2개 가문의 전쟁.
단순한 숫자로 보자면 승부의 향방은 이미 정해진 셈이나 다름없는 상황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뚫고 들어갈 만한 틈은 분명히 있다.”
페테르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부의 뒤쪽.
아직 노선을 확실히 정하지 않은 서부의 가문들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가이다르는 아직 완전한 서부의 지배자가 아니며 그들의 연합군은 헐거운 띠로 묶인 짚단과도 같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노린다.”
가이다르가 북부를 노리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체제의 안정.
모자란 자원을 획득함과 동시에 강력한 군세를 통해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것이 이번 전쟁의 최우선 목표일 것이다.
“너에게 8백의 병사를 주겠다.”
“명하십시오. 아버님.”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페테르는 자신들의 강점과 더불어 이미 가이다르가 가지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간파해 놓은 상태였다.
“너는 내가 준 병사들을 이끌고 배를 타고 내려가라.”
“······배를 탑니까?”
갑작스러운 남하 지시.
당황하는 루트거와는 달리 페테르의 손가락은 쇼아라에서 시작되는 강줄기를 굳건히 가리키고 있었다.
“적들은 모래알과 같으니 우리는 그 틈새를 후벼판다.”
전쟁의 향방은 준비 단계에서부터 결정된다.
애초에 페테르는 이번 전쟁의 승패를 5천과 3천이 맞붙는 대회전에서 결정지을 생각이 없었다.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이즈니크 남작령의 도시 나사우를 점령해라.”
“······!”
페테르의 손가락이 강줄기를 따라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바예지드가 병사들을 빼내어 선제타격을 할 것이라고는.
“점령하지 못해도 좋다. 대신 철저하게 파괴해라.”
배가 많은 이즈니크의 항구로 곧바로 진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인근 부분까지 성공적으로 떨어지기만 한다면 도시 나사우로써는 루트거의 병사들을 막을 방법이 마땅치 않을 것은 분명했다.
그들의 남은 육상 병력은 가이다르를 위해 보급대를 운영하기에도 바빴으니까.
“알겠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페테르의 의도를 파악한 루트거는 그가 넘겨준 명령서를 받아든 채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저희는 이번 전쟁을 통해 부동항(不凍港)을 얻을 수도 있겠군요.”
“······아직은 이득을 따질 때가 아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전쟁.
분명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이것을 뒤집어 생각해본다면 이번 전쟁에서의 모든 전리품은 바예지드의 것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페테르라는 군주는 최악뿐만 아니라 최상의 수까지도 대비하는 군주였다.
“가봐라.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아버지.”
건조한 말투 속에 담겨 있는 진심을 알아챈 루트거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집무실을 떠나갔다.
까악- 까아악-
루트거가 떠나간 집무실.
조용히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페테르와 라그무스에게로 창문을 두들겨대는 까마귀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리낌 없이 두들기는 것으로 보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드디어 왔군요.”
“음.”
기다렸던 소식을 물고 온 까마귀.
기사단만큼이나 페테르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암행단이 보낸 편지였다.
“······이번에는 마커스로 개명했나 보군.”
전보를 보낼 때마다 달라지는 이름이었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안에 쓰여있는 내용이 페테르를 만족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일 테니까.
“좋군.”
쉽사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페테르였지만 이번만큼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그무스. 요제프에게 수정구를 비출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실로 만족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페테르를 보며 라그무스는 전보 안에 적혀진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그무스의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는 수정구의 빛.
그 빛을 가만히 바라보는 페테르의 시선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시작은 그쪽이 했으니 끝은 우리가 내주어야 도리겠지.”
북부의 기둥이자 명문. 바예지드.
그 가문의 수장인 페테르 바예지드의 시선이 데어마르를 넘어 북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서부의 찬탈자를 향하고 있었다.
북부의 냉혹함은 자신들을 침략해 온 자들을 절대로 곱게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
어느새 고요해진 전장.
간간이 들려오는 신음을 따라 가차 없이 내리쳐지는 칼질만이 가득한 이곳.
그곳에서 블라드는 반쯤 무너진 마차 위에 앉아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었다.
“그거 맛있습니까?”
“고소하지. 나름.”
반쯤 그을린 밀 껍질을 벗겨내는 손놀림이 분주하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어이 부관. 식량들은 다 태웠어?”
“다 태웠지.”
“화살도?”
“당연히 그것도 태웠지. 이 일 한두 번 해보나.”
아게는 블라드의 물음에 자신 있다는 듯 떵떵대며 보고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약탈과 방화는 야만인들의 특기 중 하나였으니 말이다.
“금화도 다 털었어?”
“······.”
“가져와. 남김없이.”
아게는 어서 내놓으라는 듯 흔들대는 블라드의 손바닥을 보며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기사가 아니라 이쪽이 어울리시는 것 같은데.”
“빨리 가져와. 나중에 다 분배해 준다니까?”
초원의 마적을 자연스레 삥 뜯는 뒷골목의 양아치.
요제프의 인선은 너무나도 정확한 것이었다.
악(惡)을 악으로 제압하는 현장을 보며 슈테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다 털었으면 이제 가자.”
어느 가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블라드의 타격대는 지령에 따라 보급대를 급습하는 데 성공했다.
블라드의 지시에 따라 곳곳에서 불이 붙기 시작하는 마차들.
활활 불타기 시작하는 밀의 고소한 냄새가 아주 조금은 비릿한 피 냄새를 감춰주는 것만 같았다.
“대장. 저기. 까마귀 온다.”
“흐음.”
눈이 좋은 야만족답게 하늘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까마귀를 발견한 아게.
그 모습을 보며 블라드는 삐딱하게 고개를 까닥일 뿐이었다.
“쟤네는 도대체 어떻게 매번 나를 찾아오는 거야?”
정체 모를 기사. 마커스가 보냈을 것이 분명한 까마귀는 천천히 원을 그리며 내려와 블라드에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려앉은 검은색의 깃털들이 흉터 가득한 그를 떠올리게 했다.
“······까마귀는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던데.”
“그런데?”
아게는 블라드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했다.
“금발이 빛나지 않아? 내가 까마귀라도 쉽게 찾을 것 같은데.”
“······이제 보니 까마귀 전문가셨구만.”
아게의 실없는 말에 이죽거림으로 답하던 블라드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까마귀 발목에 달린 전서구를 꺼냈다.
“다음은 또 어디려나.”
임무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일거리가 들어왔으나 이곳에 있는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어디까지나 지금은 전쟁 중이었고 자신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일 때마다 바예지드가 유리해진다는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바예지드는 대가를 후하게 지불해주는 몇 안 되는 고용주였다.
“까마귀를 따라가라고?”
자그마한 쪽지에 적혀있는 두 개의 지령.
하나는 까마귀를 따라 움직일 것.
그리고 남은 하나의 지령.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
그곳에서부터 마지막 남은 라브노마를 구출해 올 것.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굵게 쓰여 있는 필체가 이번 임무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까아악-
마지막 지령을 읽어내린 블라드는 자연스럽게 들고 있던 밀을 훔쳐먹고 있는 까마귀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빛이 마치 이제 떠날 준비가 되었냐는 듯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