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33
바다에도 있었다 (1)
촛불이 내는 희미한 빛만이 가득한 천막 안.
그곳에서 지그문드는 고딘이 올린 보고서를 보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깃발까지 빼앗겼다고?”
“그렇습니다.”
“······그것도 고작 열 명 남짓한 애송이와 야만인들한테?”
웃고 있었으나 깊이 묻어나오는 서늘함.
이미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 아득한 곳까지 뻗쳐 있는 지그문드로서는 그저 차갑게 짓는 웃음만이 유일한 표현 방법이었을 것이다.
죄인 된 심정으로 서 있던 제3 기병대장 와그너는 감히 그의 웃음을 마주하지 못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도시 나사우는 실컷 물고 뜯다가 멀쩡한 범선들만 골라서 날라버렸고······.”
내뱉는 한 글자 한 글자마다 쓴맛이 올라온다.
불타버린 항구 도시. 나사우.
전쟁을 시작도 하기 전에 파산해버린 이즈니크 남작의 소식은 이미 서부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상태였다.
아마 조금씩 늦어지고 있는 각 가문의 합류 소식은 이 일과 전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바예지드 백작께서 그동안 어떻게 참고 계셨는지 모르겠군.”
지그문드는 들고 있던 술잔을 돌리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기민하게 움직이는 바예지드의 손길들.
여태까지 페테르가 내놓은 계책들은 분명 즉흥적인 발상만으로는 해냈다기에는 너무나 뼈아픈 것들이었다.
“하긴 그동안 너무 쉽기는 했지.”
돌아가는 양상을 보며 이제는 지그문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쟁을 기다려온 것은 자신들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흔들리는 난세 속에서 바예지드 또한 기회를 엿보고 있던 자들이었다.
“······역시나 어렵지만 옳은 길이었군.”
지그문드는 들고 있던 술잔을 들이켜며 한숨과도 같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페테르 바예지드. 역시나 쉽지 않은 상대다.
일개 가문도 아니고 서부의 군세들을 모아 올라가고 있건만 흔들리기는커녕 오히려 전쟁의 주도권을 쥐려 하고 있었으니.
“역시 이 정도는 되어야지.”
그러나 힘겨운 상대임에도 지그문드가 기꺼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만큼 바예지드가 가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잡아낸 사냥감이 빛날수록 사냥꾼의 가치는 높아지는 법.
바예지드라는 거물을 잡아내기만 한다면 서부뿐만 아니라 그 어떤 가문도 더는 자신들을 찬탈자라 부르지 못할 것이다.
“고딘. 전보를 보낼 준비를 해라.”
“어디로 준비를 시킬까요?”
흔들리는 촛불 끝.
들어오는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려대는 촛불을 보며 지그문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라굴리아. 용혈공에게로.”
마지막 라브노마를 데려간 이유를 안다.
불안정한 서부의 후방에 불씨를 놓고 싶었겠지.
그러나 바예지드는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때가 되었다고 말이다.”
후방에 먼저 불씨를 지펴놓은 쪽은 북부가 아닌 드라굴리아였다는 것을.
바예지드의 뒤쪽, 우트만 남작령에 말뚝처럼 박혀 있던 중앙의 군세들이 조금씩 깃발의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
“진짜 넓긴 넓구나.”
블라드는 갑판 위 난간에 기대어 하늘 아래 가득한 푸른 물결을 보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바다였다.
언젠가는 나가겠다 다짐했던 쇼아라의 회색 성벽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크기.
블라드는 끝없이 펼쳐져 있는 바다를 보며 또다시 세계의 넓음에 감탄할 뿐이었다.
‘이거 안 보고 죽었으면 진짜 억울할 뻔했네.’
세차게 불어오는 짠 바람과 함께 가슴 속까지 다다르는 것만 푸른 파도들.
난생처음 보는 짙은 푸른색의 물결이 하얀 포말을 만들며 조금씩 블라드의 세계로 밀려들고 있었다.
“우웨에에엑.”
한참 바다의 푸르름에 감탄하고 있던 블라드.
그러나 같은 바다를 바라볼지라도 각자가 느끼는 감상은 다른 모양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홀쭉해진 볼과 어제와 비교해 확연히 창백해진 피부.
점점 퀭해지는 루트거의 눈가를 보며 블라드는 요제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눈그늘만 달아놓자마자 기가 막히게 비슷해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너는 왜 멀쩡한 거냐.”
“바다 체질인가 보죠.”
“평생을 도시에서 산 녀석이 무슨.”
루트거는 블라드의 대답에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다시금 난간 위로 널브러질 뿐이었다.
“어차피 살 거면 좀 더 큰 배를 사지 그랬냐······.”
원망할 이유는 없었지만 원망하고만 싶었다.
작기에 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디작은 코그선.
거기에 말과 사람들까지 한계치로 때려 실었으니 멀미에 약한 루트거가 받는 부담은 배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제가 돈이 더 있었으면 큰 배를 샀겠죠.”
“······그러니까 요제프 말고 내 밑으로 오라고 했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는 루트거의 말.
그러나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두 남자는 가만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기다려 주셔서.”
블라드는 자신이 무사히 하벤의 배에 올라탈 수 있었던 이유가 전부 루트거 덕임을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수백 명을 가로막은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도 쉼 없이 황무지를 떠돌며 도망 다니고 있지 않았을까.
“할만하니까 했을 뿐이야.”
그 말과 함께 늘어진 루트거는 마지막 기력을 다했다는 듯 갑판 위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바예지드가 자랑하는 기사조차도 안에서 올라오는 뱃멀미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할만하다라······.’
블라드는 루트거의 대답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수백 명을 앞에 두고도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으려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춰야 하는 걸까.
“아직은 모르겠네.”
뒤돌아 난간에 기댄 블라드는 고개를 올려 배 가장 높은 곳을 바라보았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휘날리고 있는 붉은 색의 깃발.
따끔한 햇빛 때문인지 한쪽 눈을 찡그린 블라드는 깃발을 보며 조용히 읊조리고 말았다.
“나중에 쇼아라로 돌아가면 배 이름부터 바꾸라고 해야겠어.”
잔잔한 파도를 가르며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는 자그마한 배.
붉은 머리 제미나 호는 지금 데어마르 근처에 있는 작은 항구 마을로 향하는 중이었다.
※※※※
밤하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세 명의 사내.
도시의 밤하늘보다 더 많은 별이 모여 있는 바다의 밤하늘은 굳이 등불을 들고 오지 않아도 환해 보였다.
“누아르가 힘이 많이 빠진 것 같아. 아무래도 바다와는 안 맞나봐.”
“······그렇겠지.”
블라드는 오타르가 하는 보고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배가 좁아 짐칸에 실을 수밖에 없었던 누아르.
지랄 같은 성정이고 뭐고 간에 누아르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너도 참 신기하다. 이렇게 멀미를 안 하는 사람도 있구나.”
블라드는 자신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하벤을 보며 조용히 성질을 참을 뿐이었다.
마지막까지 항구에서 기다려 준 하벤이었으니 이번 일 만큼은 조용히 넘어가야만 했으니까.
“······그래도 배에다가 제미나의 이름을 달은 건 좀 그렇지 않아?”
“내가 하고 싶어서 했나. 제미나가 해야 한다니까 한 거지.”
대답과 함께 능청스럽게 조타륜을 돌려대는 하벤.
머리 위에 써놓은 선장모만큼이나 배를 모는 그의 모습이 이제는 익숙해 보였다.
“이 배에 자기 지분이 있다잖아. 이게 다 자기가 준 검에서부터 시작된 거라 그러면서.”
“하!”
블라드는 하벤의 말을 듣고는 그만 콧방귀를 뀌고 말았다.
아니, 그런 논리라면 앞으로 자기가 하는 일에 다 한 발씩 거치겠다는 말인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틀렸어.”
“뭐 그건 둘이서 알아서 해결하시고.”
둘이서 해결하라 말하고 있었지만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심히 수상했다.
아무래도 제미나가 자기 이름으로 지으라 했을 때 옳다구나 하고 받아들였을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나는 장미의 미소 마르셀라 호로 짓고 싶었다니까.”
“······왜 도대체 선원 놈들은 배 이름을 여자 이름으로 짓지 못해 안달이야?”
미신에 민감한 선원들의 세계.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미신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레이디들이 바람을 가르며 바다 위를 누비고 있을 것이다.
“글쎄올시다. 그것은 나는 잘 모르지.”
“······.”
언제나 조금은 주눅 들어 있었던 하벤.
그러나 지금 옆에 놓인 럼주병을 자연스레 들이켜는 그의 모습에는 그저 웃음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이제는 지팡이가 아닌 조타륜을 의지하는 그의 모습에는 조금의 구김조차 없어 보였다.
이름이야 괘씸하지만 역시 배를 사주길 잘했다.
“그나저나 장사는 잘돼?”
“우리야 사정이 괜찮지. 고정 고객이 있으니까.”
블라드는 쇼아라에서 떠나기 전 칸노르 가문과 하벤을 연결해 놓았었다.
아마도 동물들을 능숙하게 다루는 솜씨는 칸노르와의 무역에서부터 얻은 경험에서 비롯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겨울은 어쩔 수 없어. 강이 얼어붙으니까.”
차가운 북쪽이기에 어쩔 수 없는 일.
바다와 통하는 넓은 강을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쇼아라가 딱히 해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나사우 때 쇼아라의 상인들이 죄다 몰려나간 거야. 거기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부동항이니까.”
“그런 거였나.”
전쟁은 곧 기회.
쇼아라의 상인들은 혹시라도 생길지 모를 기회를 잡기 위해 이번 일에 자원했다고 들었다.
만약 바예지드가 이번 전쟁을 통해 나사우를 확실하게 지배하게 된다면 이번 약탈 때 따라나선 상인들은 새로운 북부의 항구에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받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사우만 가지게 된다면 북부 상행길이 상당히 다채로워질 거야. 우리에게도 기회란 이야기지.”
강 끄트머리 자그마한 방 안에서 썩어가고 있던 하벤은 이제 저 너머를 보고 있었다.
기회에 굶주려 있던 뒷골목의 소년은 오직 블라드 혼자만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기사님.”
“앞으로도 부탁하고 싶으면 상납이나 잘하시지.”
왠지 모를 머쓱한 기분에 하벤의 술병을 빼앗아 든 블라드.
“응?”
조타륜 근처에서 잔잔한 바다의 흐름을 따라 시선을 멀리하던 블라드는 이윽고 배 주위에서 빛나는 발광체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벤. 저게 뭐야?”
“뭐, 어디?”
블라드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마치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배 주위로 달라붙기 시작하는 빛무리들이 보였다.
조용히 하벤의 곁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오타르는 재빨리 갑판을 지나 밑을 확인해 보았다.
“오타르 그거 뭐야!”
“······음.”
오타르는 하벤의 말에 대답을 하는 대신 재빨리 작살 하나를 쥐어 들고는 배 밑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언제나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검은 피부의 남자.
“흡!”
그의 손에서부터 힘차게 떠난 작살 끝에는 힘없이 발버둥 치는 무언가가 매달려 있었다.
“오징어.”
“뭐?”
“이거 오징어야.”
검은 손 위에서 꾸물거리고 있는 하얀색의 바다 생물.
오타르의 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은 보기에도 실해 보이는 사람 팔뚝만 해 보이는 오징어였다.
“······오징어?”
처음 보는 바다 생물에 호기심이 동한 블라드는 부리나케 오타르에게 달려갔지만 정작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하벤의 눈썹은 좁혀져 있을 뿐이었다.
“요거 술안주로 괜찮나! 바다 고기는 진짜 처음인데!”
신난다는 듯 오타르에게 오징어를 받아들고는 흔들어대는 블라드.
그러나 하벤은 그런 블라드를 보면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지금은 여름인데.”
비록 바다 경력은 적었지만, 그에 대한 상식만은 확실히 배워놓았던 하벤은 지금 이 시기에 오징어가 남쪽에 있을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차가운 물을 따라 움직이는 한류성 어족인 오징어.
그러나 지금 창백한 빛으로 발광하며 붉은 머리 제미나 호를 감싸고 있는 것들은 분명 오징어들이었다.
그것도 감히 눈으로는 셀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숫자로.
오징어를 들고 기뻐하는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주인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반짝이는 꽃가루들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