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36
뻐꾸기 우는 날에 (2)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알리시아는 홀로 등불을 든 채 저택 뒤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휴우······.”
가벼운 차림새와는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한숨.
방금까지만 해도 침대 위에서 뒤척이다 나온 것인지 그녀의 옷차림은 하늘하늘한 옷 위에 그저 숄 하나를 걸친 모양새였다.
아무래도 쉽게 잠이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긴장된 공기가 그녀를 붙잡고 놔주지 않고 있었으니까.
“앗.”
언덕 어귀에 발을 딛자마자 갑작스레 불어오기 시작하는 여름밤의 바람.
알리시아는 그녀의 눈가로 파고들어 오는 바람에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예상치 못한 갑작스러운 바람에 알리시아의 물빛 머리카락들이 밤하늘 위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으으. 요즘 자꾸 이러네.”
짓궂다 느껴질 정도의 세찬 바람에 눈을 비벼댄 알리시아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투덜대고 말았다.
요즘 들어 알리시아가 언덕 위로 오를 때마다 자꾸 계절에 맞지 않는 바람이 불어오고는 했었다.
다른 고용인들은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다 말하는 바람이었기에 알리시아는 그저 자신이 운이 없는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응?”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바람을 맞이하자 방금과는 무언가 달라 보이는 언덕 위 풍경.
아무리 밤하늘의 달이 밝다 해도 기이할 정도로 밝아 보이는 주변 풍경 속에서 낯익어 보이는 금발 머리 하나가 그녀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흥. 아주 괘씸해.”
나무 밑에 기대어 앉아 있는 블라드를 확인한 알리시아는 새침하게 입술을 찌푸리고는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아주 말로만 떠벌이지 나한테 와닿는 게 하나도 없어.”
이제는 아예 자기 자리라도 되는 양 개의치 않고 올라와 대는 블라드.
그런 그를 보며 알리시아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투덜대고 말았다.
아무리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라 말하면 뭐 하나 불러야 겨우 한 번 찾아올까 말까인데.
자그마한 저택에서 어찌 그리 잘 숨어다니는지 발걸음 닿는 곳마다 흔적조차 보이는 않는 블라드였다.
“······.”
서운한 만큼이나 서둘러 언덕을 올라간 알리시아였지만,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무 밑동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블라드였을 뿐이었다.
마치 자는 것만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용케 검만큼은 껴안고 있는 모습에 알리시아는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팔자도 좋으시네.”
밤이니까 졸리기야 하겠지.
그런데 보통 기사들이 이렇게 정신을 놓을 정도로 깊게 잠이 드나?
자신이 왔다는 기척을 내는데도 미동도 없는 블라드를 본 알리시아는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리고 말았다.
“······잘도 자네. 긴장도 안 되나?”
며칠 후면 치열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평온히 잠들어 있는 블라드의 모습에는 어떠한 고민이나 걱정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태평히 자고 있는 블라드의 모습은 알리시아에게 있어 자그마한 평온함을 안겨주고 있었다.
“레이디도 못 알아보는 괘씸한 기사.”
말로는 괘씸하다 말하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깰까 싶어 조용히 블라드의 옆에 앉는 알리시아.
나풀거리며 떠오르는 반딧불들이 그녀의 착지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고요한 여름밤 위로 떠오른 푸른 달 하나.
한참을 블라드의 옆에서 달을 올려다보고 있던 알리시아는 이내 결심했다는 듯 가만히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래도 지금 잠든 모양새로 보아 무슨 짓을 해도 쉽게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블라드는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다.”
잠들어 있는 블라드의 귓가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알리시아의 목소리.
“그러니까 앞으로는 알리시아를 자주 찾아온다.”
오직 둘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누가 들을까 봐 조용히 손바닥을 세워 입술을 가리는 알리시아.
오직 언덕 위에서 맴돌고 있는 바람들만이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있을 뿐이었다.
“요제프 님보다 알리시아를 더 자주 찾아온다. 알았지?”
마치 최면이라도 걸듯 계속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하는 알리시아.
이렇게 한다 해서 블라드가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줄은 알았지만 그럼에도 알리시아의 읊조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듣지 못하기에 오히려 편하게 전할 수 있는 말.
그러나 그녀의 말은 그 어느 때보다 블라드의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거 듣고 있는 거 아냐?”
그저 장난삼아 한 행동이었겠지만 아마 알리시아는 몰랐을 것이다.
지금 블라드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귀는 왜 쫑긋거려?”
깊이 들어가야 했기에 활짝 열어놓은 블라드의 세계 안으로 알리시아의 읊조림이 파고 들어가고 있었다.
다가올 일전을 대비해 명상을 통해 세계를 정비하고 있던 블라드.
예민한 작업이었기에 누가 오면 깨워달라 신신당부했었지만, 정작 부탁을 받았던 언덕 위의 하얀 뱀과 어린 정령들은 그저 자신들은 모르는 일이라는 듯 시치미를 떼고 있을 뿐이었다.
※※※※
“흐음.”
다음 날 아침.
요제프는 성벽 위로 올라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가이다르 군을 확인했다.
“용케도 이탈자가 몇 없었나 보군.”
숱한 방해 공작 속에서도 용케 군세를 흩트리지 않았던 가이다르 백작.
그가 이끌고 오는 서부의 군대가 데어마르의 푸른 초원 끝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요제프 님.”
“······미리 사기를 올려놓기를 잘했군.”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전장의 공기.
5천 대 1,300명.
아무리 성안에 있다 할지라도 자신들의 배는 넘는 군세가 다가오고 있다면 그 누구라도 평정심을 유지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날 군의 사기는 동요는 할지라도 크게 흔들리지는 않고 있었다.
“당연히 이 상황까지 내다보고 한 일이었겠지?”
“······아마도요.”
블라드는 무심히 자신을 바라보는 요제프에게 재빨리 고개를 끄덕여 대었다.
어찌 보면 먼저 한 방 날린 것이나 다름없던 강렬한 도발.
하이날 군의 병사들은 뒤에 도착할 바예지드 군의 존재와 함께 블라드라는 기사에게서 적잖은 안도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남작님께 문안 인사를 드렸다 들었다.”
“네.”
망원경을 접고는 천천히 성벽 위를 걷기 시작하는 요제프.
그를 따르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다.
“잘한 일이다. 아무리 명목상이라 할지라도 이번 전쟁의 사령관은 알리시아 님이니 그녀의 격을 높여주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
성안에 있는 누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알리시아가 이번 방어전의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명목상일 뿐이라는 것을.
실제로 이 전쟁을 움직이는 것은 가이다르와 바예지드였으며 실제로 이곳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요제프였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알리시아에게 보여주는 블라드의 존중은 분명 하이날 군에게 있어 사기를 높일만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바예지드가 아끼는 기사임에도 자신들의 군주에게 고개를 숙이는데 개의치 않는 기사.
그녀를 존중하는 블라드의 태도는 분명 고단수의 정치적 행위라 할 만한 것이었다.
“이제는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하는군.”
“······.”
만족했다는 듯 미소를 짓는 요제프를 보며 블라드는 그만 뒤통수를 긁적이고 말았다.
그냥 오늘만큼은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어 했을 뿐인데 이게 이렇게까지 이어지다니.
요제프의 말을 들어보니 어쩐지 고작 인사였을 뿐인데도 알리시아나 던칸이 크게 기꺼워했던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잘 봐둬라.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네가 맡을 구역이다.”
요제프의 지시에 따라 한 명씩 떨어져 나가는 그레고리, 케이드, 막심.
그리고 이제는 블라드의 차례.
한 명 한 명에게 세심히 구역을 지정해 준 요제프는 마지막으로 블라드가 담당할 구역을 알려주며 입을 열었다.
단순히 회의를 통해 알려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전쟁을 처음 겪어보는 블라드를 위해 특별히 하는 배려이기도 했다.
“가이다르 군이 공성 병기까지 갖추고 오고 있다는 첩보를 들었다. 분명 성벽을 타고 오르려 할 테지.”
단단하게 보수해놓긴 했지만, 규모상 작을 수밖에 없는 데어마르의 성벽.
지그문드는 충분히 그 성벽을 뚫을 수 있다 판단했고 들고 오는 공성 병기들을 통해 그에 대한 진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치열할 거다. 어느 때보다 너의 판단이 필요한 순간일 테고.”
“······.”
셀 수 없는 접전 속에서 어느 쪽이 밀리는지 뚫리는지.
그 모든 것들을 판단하는 것은 이제부터 블라드의 몫이 될 것이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성벽 위 구역이었지만 지금부터 블라드는 이곳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었다.
“언제나 상대 기사들을 눈여겨봐라. 너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얼마든지 변수를 창출할 수 있는 자들이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사뿐.
경험이 없는 블라드는 언제나 자신만큼이나 날카로운 자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
더 전해줄 말이 있었지만, 요제프는 이만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이미 자신의 기사는 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조심해라.”
“알겠습니다.”
짧은 인사말과 함께 헤어지는 두사람.
좁디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던 요제프는 추웠던 겨울날을 떠올려 보았다.
“둘이 붙겠나?”
“아마 기회만 있다면 할 겁니다.”
“······그래.”
비루한 뒷골목의 소년이었음에도 당당히 서부의 달을 부술 거라 말하던 녀석이었다.
그때야 그저 희미한 가능성이었을 뿐이었지만 이제는 의미 있는 가능성이 되었다.
“블라드가 이길 수 있겠나.”
“······아직은 아닙니다.”
요제프는 그 당돌한 소년에게 약속했었다.
네가 복수할 수 있는 기회, 만들 수 있다면 만들어주겠다고.
그때의 그 말은 그저 빈말이 아닌 언젠가는 맞붙을지도 모르는 가이다르를 상기한 조건이었다.
“위치를 내 반대편에 박아두기를 잘했군.”
그러나 지금과 같이 필패가 약속된 상황에 올리겠다는 약속은 아니었었다.
가이다르의 고딘과 쇼아라의 블라드는 아직 만나서는 안 되는 인연.
요제프는 같은 전장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구분된 공간 속에 둘을 갈라놓을 생각이었다.
“생각대로 잘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영민한 지휘관이라 할지라도 전장의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는 없는 법.
저 멀리 황혼과 함께 다가오는 가이다르 군을 바라본 요제프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따라 서쪽에서 다가오는 그림자가 길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
이제는 완연한 여름이 다가온 북부의 초원.
수많은 천막들이 나부끼는 곳에서 당당히 병사들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남자가 있었다.
“비켜라.”
자신을 노려보는 수많은 기사 앞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는 남자.
평범한 사람이라면 숨조차 내쉬지 못할 압박감 속에서도 강철공 티무르와 북부의 기사들은 평온히 앞길을 열뿐이었다.
“공작님. 오셨습니까?”
천막 밖에서도 느낄 수 있는 강렬한 기세였지만 용살 기사단의 라두는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듯 태연히 머리를 긁적이며 나왔을 뿐이었다.
“너무 일이 늦어지는 것 같아서 내가 직접 왔지. 역시 버거운 짐이었나 보오?”
강철공 티무르.
북부의 지배자라 할 수 있는 그는 더 이상의 견제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짐이라도 좀 덜어드리러 왔지. 인제 보니 진작 올 걸 그랬군.”
반년이나 계속된 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의 군세들을 우트만 남작령에 발끝조차 들이밀지 않았으니 누가 보아도 의도는 뻔한 일이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끌려다니지 않겠다.
티무르는 교황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우트만 남작령을 칠 작정으로 이곳으로 왔다.
이래저래 반발이 있기야 하겠지만 아예 빌미의 근원을 제거해 용살 기사단을 몰아내겠다는 의도였다.
“하하! 그동안 이 못난 후배를 걱정해주셨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작님.”
그러나 정작 이 원정의 사령관인 기사 라두는 태연할 뿐이었다.
그의 미소가 짙어 보이는 것은 그저 티무르만이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안 그래도 이제 곧 여기에서 떠난다고 보고를 드릴 예정이었죠.”
“······떠난다고?”
예상치 못한 라두의 말에 티무르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미소로부터 전해지는 알 수 없는 낭패감이 티무르의 발끝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임무를 완수했으니 이제는 움직여야지요.”
티무르에게 희미하게 감도는 당황을 알아본 라두는 과장된 행동으로 기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라두의 손짓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레들.
그 위에서 흔들거리는 정체 모를 것들이 티무르에게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다행이었습니다. 쉬운 전투는 아니었지만 역시 신께서는 저희를 굽어살피고 계셨습니다.”
“······.”
티무르는 라두의 이죽거림은 무시한 채 조용히 수레 위에 실려있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눈길을 따라 쉼 없이 마주치는 희미한 시선들.
수많은 머리들이 몸을 잃어버린 채 마치 짐짝처럼 수레 위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여기 보시면 아마 낯이 익을 겁니다. 우트만 남작님도 계시고 그의 부인과 기사들도······.”
“지금 이게.”
흔적만으로도 사태를 파악한 티무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갑작스레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주위의 공기.
기사 중의 기사. 티무르 바라노프가 내뿜는 거친 기세에 주위에 있던 모두가 숨을 멈추고 말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지?”
실체가 없었음에도 짓눌리고 있는 잔디들.
아무런 반항의 흔적이 없는 머리들과 출격한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군사들의 모습을 보며 티무르는 이 상황이 자연스러운 결과물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정하시지요. 공작님.”
심상치 않은 티무르의 기세에 이제야 비릿한 미소를 지워낸 라두.
그러나 그는 미소는 지웠을지언정 여유로운 모습은 잃지 않고 있었다.
오랫동안 맞대왔던 가장 오래된 용의 기세는 이것보다 훨씬 찐득이고 매서운 것이었으니까.
“우트만 남작이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굽히지는 않았지만 떨릴 수밖에 없는 손끝으로 전해지는 물건 하나.
“이건 뭐냐.”
“압실론입니다. 요즘 한참 중앙에서 말이 많은 물건이지요.”
티무르가 상자를 열자 느껴지는 청량한 냄새가 있었다.
아직은 북부에 유통되지 않은 엘프들의 차. 압실론이었다.
“마약입니다. 이것을 통해 북부를 병들게 하려고 했다는군요. 사특한 존재가 그것을 요구했다 합니다.”
아니었고 아니었다.
그러나 진실이란 것은 힘 있는 자들의 앞에서는 깨어진 조각이나 마찬가지.
세상을 움직이는 자들을 흩뿌려진 조각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맞추는 데 능숙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지금 북부에서 그 차를 가장 먼저 받아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그렇게 맞춰진 조각에서부터 강철공에게 전하는 가장 오래된 용의 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예지드의 옥사나 백작 부인이라 하더군요.”
“······.”
어서 용의 조각들을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들의 북부를 깨뜨려버릴 테니까.
“아무래도 수상하지요?”
사납게 마주 보는 용과 사자.
티무르는 자신의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용의 발톱이 다다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천히 진형을 거두고 있는 용살 기사단과 중앙의 군세들.
그들의 깃발이 천천히 바예지드의 주도. 스투르마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쇼아라로 보내는 편지
곳곳에서 날아드는 까마귀들.
지금도 계속해서 반짝거리고 있는 도로테아의 마법구까지.
데어마르로 향하는 바예지드의 군세를 향해 불길한 소식들이 속속들이 날아들고 있었다.
“바예지드에서 보내는 긴급 전보에요.”
수인족 특유의 삐쭉한 귀를 쫑긋거린 도로테아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루트거를 바라보았다.
“옥사나 님께 지금 교황청의 소환 문서가 날아왔다고······.”
병약한 아들을 위한 어머니의 노력이었지만 누군가의 시선에서는 사특한 행위로 보였을 뿐.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누군가들에 의해 옥사나라는 사람은 그렇게 멋대로 재단되어 버렸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는데도.
“아버지.”
“······.”
이제 곧 데어마르가 지척인 상황.
반나절만 걸어가면 전장으로 다다를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도 불길한 소식들은 계속해서 날아들고 있었다.
곳곳에 뿌려놓았던 간자들, 이빨을 들이미는 교황청, 그리고 영역을 접하고 있는 주변의 영주들까지.
모두가 한 소리로 지금 스투르마에 큰 변고가 생길 거라 경고하고 있었다.
“돌아가야겠군.”
북부의 가장 끝에서 보내온 까마귀까지 받아든 페테르는 진중히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백작님. 지금 저희가 돌아가 버리면 홀로 있는 요제프는 고립되고 맙니다.”
루트거는 돌아가야겠다는 페테르의 말을 듣고는 이대로는 안 된다며 강경히 반대하기 시작했다.
“데어마르는 몰라도 요제프만은 빼 와야 합니다. 저에게 군사를 내어주신다면······.”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일까.
아주 조금이었지만 루트거에게서 번져 나오는 진심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싸울 수밖에 운명일 수밖에 없는 형제였지만 그래도 지금만큼은 같은 바예지드였다.
“걱정하지 마라. 요제프를 혼자 두지는 않을 테니.”
“네?”
루트거는 페테르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백작가의 안 주인은 교황청에 소환당했고 중앙의 군세가 스투르마를 위협하는 지금, 페테르의 모습은 그저 여유로워 보일 뿐이었다.
“본래 전쟁이라는 것은 적이 하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핵심이지.”
전쟁의 승리는 어디까지나 형성된 전선에 얼마만큼의 자원을 밀어 넣느냐에 따라 달려있다.
그렇기에 지그문드와 드라굴리아는 바예지드의 본대와 하이날 군을 떼어놓으려 지금 같은 수작을 부려온 것이었다.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중대한 위협을 통해서.
“이제 적들의 의도를 확실히 알았으니 대응하기도 쉬워졌군.”
강철공이 보내온 마지막 편지를 꾸깃하게 접은 페테르.
그의 검은 눈동자에서부터 여태껏 고이 담아두고 있던 분노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크게 돌아가야겠다. 조금은 늦을지도 모르겠구나.”
말을 마친 페테르의 시선이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태껏 나아갔던 방향과는 조금은 틀어진 방향이었다.
※※※※
“······이런 이유로 바예지드의 요제프는 어서 나와 그동안의 무례를 사과하고! 알리시아 남작은 이번의 혼인으로 서부에 대한 존중심을 보이길 바라오!”
전령을 뜻하는 하얀 깃발을 든 채 큰소리로 성벽 앞을 뛰어다니는 서부의 기사.
블라드는 비록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수많은 적 앞에서 당당히 개소리를 지껄이는 그 용기만큼은 높게 평가할만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 뭐?”
그러나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하나둘씩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하는 하이날의 병사들.
마치 여기서라면 네가 나서서 한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표정들이었다.
“······흠흠. 저 죽일 놈. 저 자식 이름이 뭐야.”
그저 묘하게 다가오는 압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지휘관으로서 병사들의 사기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감히 남작님을 능멸하다니! 이름을 밝혀라! 이 무례한 놈아!”
“블라드 님이 네 놈의 이름을 물어보신다!”
블라드의 조용한 웅얼거림에서 시작된 말은 파도가 되어 병사들을 타고 성벽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지켜보고 있다! 레이디 알리시아의 기사가! 너를!”
“전장에서 만나면 오체를 분리시켜주마!”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갑작스레 터져나가는 병사들의 욕지거리를 보며 선전포고를 하러 왔던 기사뿐만 아니라 블라드조차 당황하고 말았다.
이렇게까지 불붙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멀리에서부터 요제프의 눈빛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컥!”
분노하는 데어마르의 군사들을 보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갑작스레 날아드는 화살.
목숨을 노리지는 않았지만 말 엉덩이에 꽂혀버린 화살은 충분히 전령을 당황하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저 같잖은 놈이 떨어졌다!”
“나가서 죽여버려!”
선전포고를 통해 상대를 압박하려던 가이다르의 의도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허둥지둥 먼저 도망쳐버린 말을 향해 뛰어나가는 가이다르의 기사.
낙마하며 어디가 다쳤는지 실룩거리며 뛰는 그의 뒷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이거 약을 바짝 올려버렸군.”
가장 화려한 깃발 아래, 성벽 위에서 전장을 살피고 있던 요제프는 저 끝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가이다르 군을 보며 곤란하다는 듯 이마를 긁적여대었다.
“아무리 봐도 저건 재능이야. 말 한마디로 5천을 움직였잖나.”
“······나중에 한마디 해놓겠습니다.”
초원의 끝에서부터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는 가이다르 군.
얼핏 보아도 성벽만큼이나 높게 조립해 놓은 공성탑이 눈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준비를 단단히 해놓으셨군.”
수십은 될 것 같은 공성 병기들.
그나마 바위가 없는 곳이기에 투석기를 쓸 수 없다는 점이 조금이나마 위안일까.
“화살에 불을 붙여라.”
그러나 준비를 단단히 해놓은 것은 가이다르뿐만은 아니었다.
횃불에 화살을 가져다 대 불을 붙이기 시작하는 궁수들.
이제야 떠오른 태양을 향해 하이날 군의 화살이 치켜 올려졌다.
“아직.”
냉정하게 거리를 재며 사정거리를 확인하는 요제프.
수성하는 입장에 있어 처음에 날리는 화살만큼이나 확실한 공격은 없다는 것을 요제프는 잘 알고 있었다.
가장 귀중한 기회를 가장 확실하게.
“옵니다.”
“아직이다.”
저 앞에서부터 가이다르 군의 함성이 들려온다.
각자 방패를 집어 들고 뛰어오는 서부의 약탈자들.
발이 빠른 몇몇은 이미 성벽 밑 지척까지 다다른 상황.
“지금!”
갑작스레 기우뚱거리는 공성탑의 끄트머리.
그 모습을 보며 때가 되었음을 눈치챈 요제프가 큰소리로 외치며 신호를 보냈다.
함정이다! 적들이 함정을 파놨다!
이런 미친! 아까까지만 해도 건너갔는데!
무게에 따라 발동되는 함정.
해자처럼 깊게 파인 함정들이 이제야 제 모습을 드러내며 가이다르의 공성 병기들을 한입에 삼키고 있었다.
하늘 위에서부터 새빨갛게 달궈진 불화살들이 비가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
“······저놈 이름이 뭐라고?”
“요제프라고 합니다. 바예지드의 둘째지요.”
지그문드는 말 위에 앉아 전장을 바라보고는 그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저놈도 제정신은 아니었구만.”
으아아악! 화살이다!
공성탑이 불타고 있다! 불부터 꺼!
제정신이 아니다 싶을 정도로 곳곳에 파놓은 수많은 함정들.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함정을 보며 지그문드는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하는 짓거리는 겁쟁이나 쓸 수법이었지만 이 정도까지 진심으로 틀어박혀 버리면 이제는 인정해줄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보니 눈을 가린 거였구만.”
페테르가 별동대를 풀어 후방을 교란했던 것은 단순히 보급을 차단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전장에서 눈과 같은 역할을 하는 정찰병들.
진작에 전장을 염탐했어야 했을 수많은 서부의 정찰병들은 블라드와 같은 별동대를 쫓아다니느라 지금과 같은 상황을 미처 발견해내지 못했다.
“무너진 곳만 피해서 다시 보내. 어차피 시간 끌기에 불과하니.”
“알겠습니다. 백작님.”
그러나 예상보다 큰 피해였음에도 지그문드는 침착을 잃지 않았다.
어차피 공성전에서 공격 측의 피해는 강제될 수밖에 없는 법.
지그문드는 과정에 압박받기보다는 결과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차피 성벽만 넘으면 된다.”
데머마르의 성벽은 낮으며 딱히 가로막는 지형도 없다.
게다가 병력의 차이도 거의 5배의 차이인 1,300대 5천.
게다가 자신의 병사들은 숱하게 싸워오며 경험을 쌓아온 강병들이었으니 이 전투는 그저 시간의 문제일 뿐.
미친 듯 박아 넣은 함정들이 오히려 수비 측의 불안을 여실히 드러내 주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기다리던 아비는 오지 않을 텐데 말이지. 참으로 안타깝구만.”
어떤 영주라 해도 주도를 빼앗기는 것만큼은 막으려 할 터.
고작 남의 땅인 데어마르를 지키기 위해 스투르마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첫 번째 공성탑. 성벽에 안착했습니다.”
“그래. 봤다.”
고딘의 보고처럼 새까맣게 그을린 공성탑 하나가 용케 데어마르의 성벽 앞에 찰싹 붙어버리고 말았다.
당황한 듯 웅성이기 시작하는 성벽 위에 모습을 보며 지그문드는 두툼한 턱을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
공성탑이 온다!
화살 쏴! 넘어오기 전에 죽여버려!
“후······.”
블라드는 차분히 심호흡을 하며 바로 앞으로 다가오는 공성탑을 바라보았다.
불타고 있었지만 멈추지 않는 거대한 몸체.
악의를 가득 담은 공성탑의 위에는 방패를 치켜든 채 잔뜩 웅크리고 있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한가득이었다.
“블라드 님!”
“나도 알아.”
용병대장 슈테판은 자신의 경험을 십분 살려 블라드를 보조하고 있었다.
“근처에 쟤네 말고 달라붙은 딴 놈들은 없지?”
“네, 네! 없습니다!”
그러나 경험 없는 것이 확실한 자신의 상관은 예상보다 훨씬 침착한 모습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타고 났구만.’
간혹 이런 자들이 있고는 했다.
타고난 피가 전장에 맞는 사람들.
실전에 강하다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전장에 알맞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존재하고는 했었다.
“공성탑이 닿았다!”
“이 개자식들아! 다 죽어!”
마침내 성벽에 닿은 공성탑에서 불타는 나무문을 걷어차며 뛰쳐나오는 가이다르의 기사.
“나는 가이다르의 홈멜······. 컥!”
잔뜩 웅크려 있던 분노를 터트리며 포효하듯 외친 가이다르의 기사.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름조차 내뱉지 못한 채 거친 발길질에 탑 안으로 밀려들어 갈 뿐이었다.
“슈테판.”
“네!”
“문 닫아.”
“네?”
요란한 우당탕 소리를 내며 공성탑 안으로 밀려 들어간 기사.
곧 그를 따라 블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새빨갛게 달아오른 탑 안으로 뛰쳐들어갔다.
“공성탑 문. 걸어 잠그라고.”
비명과 고함, 그리고 아우성이 가득한 공성탑을 향해 블라드는 서슴없이 발을 올려놓았다.
“그래 아까 뭐라 하던 녀석. 이름이 뭐라고?”
불청객이 채 닿기도 전에 먼저 적들의 불청객이 되기로 한 블라드.
불길이 가득한 공성탑의 안에서 블라드의 왼쪽 눈이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
쇼아라에 있는 장미의 미소.
그곳에 있는 붉은 머리의 마담은 이제야 막 건네진 편지 한 장을 집어 들고는 숨기지 못하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니, 그놈이 굳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쓰겠다지 뭐야. 그동안은 너무 바빠서 못 썼다고 그러면서.”
“블라드가 퍽이나 그랬겠다.”
하벤은 날카롭게 날아드는 제미나의 핀잔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의자에 앉았다.
오직 귀한 손님들만이 앉을 수 있다는 4층의 테이블.
그곳에는 이미 반가운 소식을 들고 온 선장을 위해 향긋한 냄새를 풍기는 술 한잔이 올려져 있었다.
“어쨌든 걔가 쓴 건 맞아.”
“······흥. 내가 알게나 뭐야.”
말과는 다르게 떨리는 손끝으로 블라드가 보낸 편지를 뜯어내는 제미나.
샹들리에 밑에서 반짝이는 그녀의 머리 장식이 화려했다.
그 누구라도 지금의 제미나를 보며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름답게 피워진 장미의 미소 앞으로 레이디 제미나에게 보내는 기사의 편지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삐뚤빼뚤한 글씨 속에서 그리웠던 누군가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
제미나에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저 미친 새끼 뭐야!
-죽여! 죽여버려!
흔들리는 배 위라 조금 어지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버틸 만은 하네.
-공성탑이 흔들린다!
-저 미친놈이 사다리를 부순다!
뭐 이런저런 임무가 있긴 했었지만 다 시시한 것들뿐이었고 조만간 전쟁이 있긴 할 건데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어차피 나는 요제프 님의 호위 기사 같은 거라 막 깊숙한 곳까지 안 나갈 거 같거든.
안전하다는 이야기지.
-블라드 님! 이제 나오셔야 합니다!
-공성탑이 무너집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말고 나중에 쇼아라에서 보자.
그럼 이만.
※※※※
낮이었지만 차가운 바람이 맴도는 벌판 위.
곳곳에 쓰러져 있는 깃발들 사이로 시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살아있는 자도, 죽어있는 자도 모두 침묵하는 가운데 오직 신음만을 내지르는 사내가 한 명 있었다.
“크윽! 컥!”
“다시 한번 묻는다. 여기가 어디지?”
새빨간 머리가 인상적인 기사.
그러나 라두의 머리카락은 본래 가지고 있던 색보다도 더 진한 붉은색으로 엉망이 되어있었다.
“북부······. 북부입니다.”
“그래. 이곳은 북부다.”
나이에 알맞은 희미한 머리 색깔.
그러나 짓고 있는 표정만큼은 생동감이 넘치는 북부의 사자. 강철공 티무르.
“그런데 북부에서 왜 나를 무시했던 거냐. 내가 우스웠나?”
“끅!”
라두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의해 다시금 습기 가득한 진창 위로 처박히고 말았다.
숨을 들이쉬지 못해 하얗게 질려가는 그의 목덜미가 다급하게 울컥거리기 시작했다.
“용의 피를 타고났음에도 반쪽밖에 못 물려받은 빨간 놈아. 잘 들어라.”
“끅! 끄읍!”
살기 위해 강렬히 뿜어져 나오는 오러에도 굳건히 버틸 뿐인 티무르의 팔.
하룻강아지에게 죽음의 경계를 선사하는 사자의 얼굴로부터 잔인한 미소가 맺히기 시작했다.
“지금 골골대며 누워있는 황제가 이미 송장이 되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
티무르의 말에 세차게 진흙을 움켜쥐기 시작하는 라두의 손.
거칠게 헤매는 그의 손이 점점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푸압! 커헉!”
고개를 짓누르던 묵직한 압박감이 사라지자 그제야 겨우 진창에서 빠져나온 라두.
“헉, 헉.”
다급하게 들어 올린 고개 주위로 각기 모양이 다른 색색의 깃발들이 가득했다.
북부의 영주들을 뜻하는 깃발들.
차갑게 용을 내려다보는 영주의 눈빛에는 자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티무르의 하얀 이빨이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용을 보며 비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후회는 일찍 해도 늦는 법.
스트루마로 향하던 수많은 병사의 시체들은 라두의 뒤늦은 후회에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이다.
“목숨은 살려주마. 그러니 네 아비에게 가서 전해라.”
“끄아아아악!”
감히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뽑혀 나간 티무르의 검.
그 검의 끝이 라두의 손바닥을 꿰뚫고는 땅을 향해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더는 정당한 황제 없는 제국에게 충성하지 않겠노라고.”
죽음의 위기 앞에서 울고 있는 용.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웃고 있는 북부의 사자.
오랫동안 숨겨왔던 그의 미소가 환히 밝혀지고 있었다.
억눌린 울음소리와 함께 차가운 침묵만이 가득한 이곳은 북부.
더는 제국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그들만의 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