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37
격돌 (1)
벌떼같이 성벽으로 달라붙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그들을 향해 쏟아지는 끓는 기름의 냄새가 코끝을 매캐하게 찌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
저 아래서부터 차마 듣기 힘든 비명이 솟구쳐 온다.
녹아내리는 얼굴을 감싸 쥔 채 떨어지는 병사와 그의 몸부림에 휘말려 추락하는 사내들.
그 광경은 단 한순간일 뿐이었지만 전쟁에 관한 모든 감상을 담은 순간이기도 했다.
“젠장.”
케이드는 흐르는 땀을 닦을 새도 없이 또다시 화살을 메겨야만 했다.
이미 굳은살이 가득한 손가락이었지만 지금 그의 손끝에는 붉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3일이나 이어졌던 격렬한 농성은 깊게 박힌 굳은살도 벗겨낼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차라리 그때가 더 나을 지경이로군.’
케이드는 안개 가득한 마을에서의 경험을 떠올리며 묵묵히 다음 화살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에서 화살이 하나 떠나갈 때마다 어김없이 누군가가 고꾸라졌지만, 그 또한 잠시였을 뿐이었다.
5천 명 대 1,300명.
성벽과 함께라면 3배의 병력도 감당할 수 있다는 병법론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는 말이었다.
이 자그마한 성벽은 애초에 이러한 대규모 전쟁을 가정한 채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늘만큼은 데어마르를 함락시키고 말겠다는 지그문드의 굳은 의지가 점점 상황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다.
“네 이놈!”
케이드가 잠시 멍해져 있는 사이에 아무도 없는 사다리 위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손 하나.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손은 데어마르의 성벽을 쓸어올리며 기어이 위를 기어오르는 데 성공하고 말았다.
“이 너구리 같은 새끼. 아까부터 지켜 보고 있었다!”
으르렁거리는 사내의 왼쪽 눈 사이에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자. 그에 대한 증거.
오러였다.
“죽어라!”
“크윽!”
으지지직-!
최선을 다해 막았으나 결국 뚫려버리고 만 구멍 하나.
그 구멍에서 들어오는 거센 물결이 케이드를 향해 사납게 짓쳐 들기 시작했다.
“병신 같은 놈! 끝까지 검을 안 뽑는군!”
이름 모를 기사의 비웃음과 함께 점점 번져가는 활대의 균열.
케이드의 자부심이자 소중히 쌓아 왔던 세계의 단초가 부서지고 있었다.
“역시 근본 없는 북부 놈들답구나. 이딴 반푼이도 기사랍시고 들먹이고 있다니!”
검이 아닌 활을 쓰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가이다르의 기사.
그러나 그의 비웃음을 벗겨내기에는 케이드의 발버둥은 아직 미약할 뿐이었다.
“크윽!”
결국, 오러가 실린 일격을 버티지 못하고 쪼개져 버린 활대.
차마 막아내지 못한 검 끝이 케이드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거 소문만 자자했지 북부의 기사들도 별거 없구만.”
케이드를 내려다보는 이름 모를 기사의 눈빛에는 차마 감출 수 없는 희열이 감돌고 있었다.
약한 자를 통해 확인하는 나 자신에 대한 증명.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남을 통해 느낄 수밖에 없는 세계가 그의 검 끝에 맴돌고 있었다.
“이름이 뭐냐. 갈 땐 가더라도 서로 통성명은 하고 가야지.”
핏물 가득한 성벽 위에서 침을 내뱉는 가이다르의 기사.
그 위로 다시 덧칠될 붉은색을 기대하며 기사의 검 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름이 뭐냐고 묻잖냐. 이 활쟁이 자식아.”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순간에도 어째서인지 웃음 짓고 있는 케이드.
힘겹게 벽에 기댄 채 기사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조금은 먼 곳을 향해 있었다.
“쇼아라의 블라드.”
“······뭐?”
스걱-
앞을 향해 물었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뒤에서부터였다.
서늘한 대답과 함께 반전하기 시작하는 세상.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빙글빙글 돌던 기사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저 멀리서 휘날리는 가이다르의 깃발을 담아내었다.
철퍽-
“케이드. 괜찮아요?”
“흐, 흐흐······.”
벽에 기대 있던 케이드는 블라드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빨리 가요. 우리 쪽도 뚫렸어요.”
“······성벽이 너무 작아. 애초에 농성할 수 있는 시설이 아니었어.”
케이드를 부축한 블라드는 웅얼거리는 그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뒤에서부터 따라오는 슈테판과 블라드의 병사들.
그들이 물러나는 자리로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한둘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일단 합류하죠.”
바닥에서 굴러다니던 이름 모를 기사의 머리를 멀찍이 발로 차낸 블라드.
블라드는 끝까지 그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블라드의 귓가에는 쉼 없이 성벽으로 달라붙는 사다리 소리가 요란히 들려오고 있었다.
※※※※
“우측 성벽이 함락되었습니다! 현재 가이다르 군이 성벽을 타고 성문으로 오는 중입니다!”
“성문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충차를 부수지 못한다면요.”
요제프는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귀를 열고 있었다.
굳이 곳곳에서 들려오는 보고가 아니라도 알 수 있었다.
불길한 공기와 함께 섞여 들려오는 둔중한 소리.
가이다르의 충차가 계속해서 성문을 두들겨 대는 소리였다.
“도대체 지원군은 언제나 오는 겁니까? 저희는 3일이나 버텼습니다!”
하이날의 기사 중 하나가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책상을 성벽을 내리치며 울분을 토하고 말았다.
적의 피로 끈적해진 그의 갑옷.
베어도 베어도 끝없이 달려드는 가이다르의 병사들이 그의 인내심까지도 갉아먹은 듯해 보였다.
“조금 늦는군요.”
“······.”
그러나 그의 울분에 답하는 목소리는 너무나 평온할 뿐.
“우측 성벽은 포기하겠습니다. 성안으로 내려오는 계단을 파괴하십시오.”
“하지만!”
“지금부터 시가전을 준비하겠습니다. 준비했던 대로 성벽과 가까운 민가들에 불을 붙이겠습니다.”
쉼 없이 들려오는 비명 속에서도 요제프의 대처는 차분할 뿐이었다.
요제프 바예지드는 언제나 최악을 준비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성벽을 포기하실 겁니까?”
“미안합니다. 던칸 경.”
요제프의 사과에 던칸은 그만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말하고 싶었지만 늙은 기사는 이미 상황이 한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지금의 상황에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군요.”
데어마르를 포기해야 한다.
평생을 하이날을 지켜왔던 늙은 기사의 절망을 보며 하이날의 기사들도 같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
순간 던칸의 귓가로 맴도는 희미한 소리가 있었다.
크게 상심하고 있던 그조차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낮지만 진하게 깔리는 소리.
여태껏 전장에서 들어본 적 없던 낯선 소리였다.
“······이빨 나팔입니다. 북부에서만 서식하는 검치호의 이빨로 만든 것이지요.”
“네?”
던칸은 더 설명해달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지만, 요제프는 그저 자그마한 한숨만을 내쉰 채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혹시 계획이 새어나갈지 몰라 말씀드리지 않았었습니다.”
이제야 가까이서 마주 볼 수 있는 젊은 청년의 모습.
파리한 안색, 짙어진 눈그늘.
누구보다 평온해 보이기 위해 노력했던 그의 발버둥이 이제야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하.”
내가 헛 늙었구나.
이제야 사태를 파악한 던칸은 조용히 하얀 눈썹을 감고 말았다.
얼마나 많은 것을 감내하고 있었을까.
다가올 확실한 순간을 위해 요제프는 적의 공격뿐만 아니라 아군의 공포까지도 책임져야만 했다.
그것이 지휘관의 무게였고 바예지드로서 짊어져야 하는 의무였다.
“위스키입니까?”
“네.”
이 자리에 있던 하이날의 누구도 요제프에게 자신들을 속였다며 화를 내지 못했다.
수통을 들고 있던 요제프의 손끝이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으니까.
짙은 눈그늘의 청년은 분명 데어마르의 성벽 위에 자신의 목숨도 함께 걸어 놓은 것이었다.
“아끼던 것이었는데 다행히 살아서 마실 수 있었군요.”
역시 데운 와인이나 희멀건 차 따위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
목구멍을 파고들어 내장까지 태우는 이 술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니까.
우우- 우우우우-
저 멀리서부터 아스라이 들려오는 나팔 소리.
그 소리가 다가올수록 질척이던 전장의 공기는 빠져나가고 차가운 북부의 바람이 깃들고 있었다.
요제프는 익숙한 북부의 소리와 함께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위스키를 들어 올렸다.
※※※※
“어서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란 말이다!”
사납게 울부짖는 서부의 패자.
지그문드는 직접 검을 뽑아 들고는 미친 듯이 외치는 중이었다.
“얌전히 내려오는 자식은 내가 친히 죽여주겠다! 뭐라도 찌르고 내려오란 말이다!”
핏줄이 터져버려 붉게 물든 눈동자와 체면 따위는 내던졌다는 듯 아예 쉴 새 없이 뛰어다니기까지.
누가 보아도 고귀한 귀족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지그문드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늘이다! 오늘 안에 우리는 이 빌어먹을 성벽을 넘어가는 거다!”
세련되지는 않았으나 이 또한 분명 지휘 방법의 하나.
열정적이다 못해 미친것만 같은 가이다르의 몸짓은 분명 병사들을 가혹하게 독려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지그문드는 점점 기울어 가는 전장의 기세를 느끼며 환히 미소를 지었다.
쾅! 쾅!
힘없이 부서지고 있는 성문과 어느새 자신들의 병사로 가득 찬 성벽까지.
결국은 이것이었다.
그 어떤 전략의 귀재가 와도 농성하는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직하게 병사들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그문드는 그 우직함이라는 덕목에 확실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선봉에 서라. 아들아. 가서 네 꺾어진 자존심을 세우고 와라.”
“알겠습니다. 아버지.”
지그문드의 명령에 이슈트반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긴장과 흥분 그 어딘가.
아버지의 명령은 분명 이슈트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순간을 말하고 있었다.
저곳에 내가 빼앗긴 검이 없다면 물망초 꽃이라도 꺾어오리라.
“성문이 뚫렸습니다!”
“좋다!”
길게 걸리면 1년도 넘을 수 있다는 게 바로 공성전이었다.
그러나 지그문드에게는 데어마르를 함락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 확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병이 있었다.
“그래도 애송이치고 끈질기게 버텼군.”
지그문드는 거멓게 그을린 데어마르의 성벽을 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바예지드의 애송이가 애는 썼다만 애초에 이 성벽은 5천의 병력을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오지 않는 아비를 기다리며 악을 쓰기야 했겠지만 말이다.
“기사들은 들어라! 가장 먼저 요제프 놈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는 금화 300골드를 주겠다!”
금빛 약속이 시작되자 곳곳에서 들려오는 함성들.
그와 함께 울려 퍼지는 지그문드의 목소리는 분명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알리시아 남작을 데려오는 자에게는······.”
그러나 그의 말을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우우- 우우우우-
마치 짐승이 울부짖는 것만 같은 소리.
서늘함을 간직한 나팔소리가 지그문드의 말을 가로막고 있었다.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누구랄 것도 없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뭐야.”
그곳에는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자신들이 있던 진형 뒤의 숲속.
그곳에서부터 까맣게 초원 위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병사들.
어림잡아도 3천은 되어 보이는 군사들이었다.
“아니······.”
지그문드는 그 모습을 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동자를 크게 부릅뜨고 말았다.
서둘러 손으로 닦아내 보았지만, 여전히 그의 두 눈에는 굳건히 서 있는 군세들이 가득할 뿐이었다.
“······스투르마를 버렸다고?”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함정이라 생각했건만.
그러나 지금 자신들의 앞에 있는 것은 분명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자들의 깃발이었다.
“어째서?”
북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차별과 멸시, 그리고 끊임없는 견제를 넘어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그때를.
드라굴리아와 가이다르의 위협은 그때를 앞당겨주는 불씨가 되었을 뿐이었다.
“바예지드! 바예지드가 어째서!”
저 앞에서 펄럭이고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
그 깃발이 바로 북부가 서부에게 전하는 답변이었다.
깃발에 나부끼는 스투르마의 성벽이 우리는 오랫동안 참고 있었노라고 말하고 있었다.
※※※※
“역시나 조금 늦고 말았군.”
페테르는 까맣게 그을려 버린 데어마르의 성벽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성벽 가장 높은 곳에는 여전히 하이날의 깃발이 흔들리고 있었으니 늦지는 않았다.
“잘 버텨주었구나.”
3천이나 되는 대병력을 우회 기동시키는 것은 분명 무리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 안에서 버티고 있던 요제프보다야 나았겠지.
페테르는 여태껏 고군분투했을 자신의 둘째 아들을 생각하며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아들아. 앞장서거라.”
“네. 아버지.”
루트거는 페테르의 명령에 들고 있던 창(Lance)을 바짝 치켜세웠다.
날카롭게 치켜떠진 창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뒤를 훤히 열어놓은 가이다르 군의 진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긴말 않겠다! 나의 기사들아. 저들에게 보여주고 와라!”
페테르의 검은 눈동자에서부터 천천히 짙은 분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나를 능멸하고 나의 부인을 모욕하고 나의 아들을 괴롭힌 자들.
차갑게 벼려놓은 페테르의 분노가 바예지드를 피를 타고 루트거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바예지드가 누구인지를-!”
페테르의 명령과 함께 기사들의 함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넓은 초원을 따라 돌격하기 시작하는 바예지드의 기병대.
이제야 그들을 확인한 가이다르 군이 허둥지둥 진형을 갖추기 시작했지만 이미 달려들기 시작한 기병들을 막아내기에는 너무 늦고 말았다.
저게 뭐야!
저놈들이 왜 우리 뒤에 있어!
피할 수가 없습니다!
수백 기의 말이 달려드는 정면.
뒤로는 아직 뚫지 못한 성벽.
왼쪽 눈을 감고 있던 루트거는 조용히 자신의 창을 손가락으로 튕겨보았다.
“들어올 때는 네놈들 마음대로였지만.”
깊은 세계에서부터 퍼지는 울림이 그의 창끝을 타고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곧 그의 창끝에 매달릴 파멸들을 기대하며 루트거는 조용히 웃음 지었다.
“그러나 나갈 때는 아니지.”
콰아아앙-!
으아아아악!
마치 깨어진 파편처럼 흩날리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가장 단단한 용도 갈라내었던 루트거의 세계가 매서운 기세로 서부의 독수리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