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39
격돌 (3)
한참 혼란을 수습하던 지그문드는 자신의 옆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었다.
금발에 푸른 눈.
그 강렬한 인상은 옆에서 누가 설명해주지 않아도 익히 들어왔던 이름이 떠오르는 생김새였다.
“저, 저······.”
쇼아라의 블라드.
감히 내 아들의 검을 빼앗아 간 북부의 애송이.
“저런 미친 새끼가 있나!”
그리고 지금 미친 짓거리를 펼치고 있는 녀석.
아무리 진형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적진의 한복판이건만 저 망할 놈의 애송이는 교묘하게 틈을 타며 내달릴 뿐이었다.
적만 아니었다면 넋 놓고 보고 싶을 정도의 곡예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저놈이 움직일 때마다 애써 봉합해 놓은 진형이 찢겨 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지그문드는 방금 돌격해 들어왔던 바예지드의 기병대보다도 지금의 블라드의 행태에 더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 공격은 예상이라도 가능한 것이었지만 지금의 미친 짓은 태어나 처음 보는 기행이었으니까.
-저게 뭐야··· 갑자기 뒤에서 튀어나왔어!
-성문이 열렸나? 이거 진짜 괜찮은 거야?
마치 너희 따위는 얼마든지 헤집을 수 있다는 듯 벼락같이 나타나 떠나버린 바예지드의 기사.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블라드의 기행은 지그문드가 애써 잠재워놓았던 불안감에 돌 하나를 던져놓은 격이 되었다.
호수에서 잔잔히 이는 파문처럼 병사들의 불안한 웅성거림이 가이다르 군 사이로 천천히 퍼져나가고 있었다.
※※※※
홀로 적진에서 뛰쳐나와 푸른 초원을 내달리는 블라드.
가이다르와 바예지드의 사이, 아무도 다다르지 못한 탁 트인 공간은 블라드에게 알 수 없는 해방감을 안겨주고 있었다.
“······!”
그러나 느껴지는 해방감에 미소 짓던 것도 잠시. 곧 블라드는 누아르의 등에 몸을 바짝 붙이며 숨을 죽여만 했다.
불길한 냄새가 하늘 끝에서부터 풍겨오기 시작했기에.
“쏴라! 지금이 아니면 이런 기회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함성과 함께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는 시꺼먼 화살들.
블라드는 자신의 머리 위를 지나 등 뒤로 떨어지는 악의들을 느끼며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블라드가 미묘하게 벌려놓은 틈은 바예지드에게 또다시 시간을 벌어주었고 페테르의 매서운 눈빛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으아아악!
방패 들어! 방패!
땅은 푸르렀으나 하늘은 새까맸고 시커먼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누군가의 피가 모여 새빨간 웅덩이가 맺히기 시작했다.
좁은 틈을 헤치고 나온 세상은 분명 넓었으나 여전히 잔인할 뿐이었다.
“신원을 밝혀라!”
“바예지드! 바예지드의 기사 블라드다! 요제프 님이 보내시는 전언을 들고 왔다!”
마치 자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매섭게 떨어지는 화살들.
누아르와 함께 그것들을 넘어온 블라드는 정체를 밝히라 외치는 병사들을 향해 봉인된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요제프가 직접 적어넣은 그 편지에는 마법 전보와 까마귀의 전서구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귀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들여보내라.”
편지에 적혀 있는 문장이 소속을 알려주었고 틈을 가르며 나온 방향이 블라드의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런 자에게 있어 엄밀한 신원 확인은 그저 시간 낭비일 뿐.
“따라오십시오.”
병사의 안내를 따라 이동한 진형의 중앙.
그곳에서 블라드의 시선에 가장 먼저 와닿은 것은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는 바예지드의 깃발이었다.
강인한 스투르마의 성벽이 블라드를 맞이하고 있었다.
“요제프 님이 보내셔서 왔습니다. 저는 블라드라고 합니다.”
천막조차 세워지지 않은 벌판이었으나 그 어느 곳보다도 진중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마치 붉은 카펫을 밟으며 들어갔던 그때처럼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기사들.
그들이 천천히 열어주는 길 사이로 익숙한 검은 눈동자가 블라드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수고했다. 요제프의 기사 블라드.”
페테르는 아들이 보내온 기사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애써 호흡으로 가다듬고 있었으나 조금씩 들썩이는 어깨.
게다가 잔뜩 우그러져 있는 갑옷은 분명 이 어린 기사가 그동안 치열한 전장 속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도 그렇고, 요제프도······. 어디 다친 곳은 없었느냐.”
“네. 건강하십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는 블라드의 대답에 페테르는 그제야 적잖이 안심할 수 있었다.
비록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행이로군.”
귀족의 푸른 피는 페테르로 하여금 최선의 효율을 선택하게 했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심장마저 차갑게 식은 것은 아니었다.
분명 그는 병약한 아들을 걱정했었고 또한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500명이라.”
힘차게 눌러쓴 필체로 아들의 안위를 확인한 페테르는 블라드가 전해온 편지를 기사단장인 안탈라스에게 건넸다.
아들이 아닌 데어마르의 지휘관인 요제프로서 보내는 보고서.
그 보고서에는 오직 500명의 군사만이 성문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라 말하고 있었다.
“흠.”
그러나 페테르의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500명이라는 숫자보다 보고서의 가장 밑에 쓰여 있는 한 줄의 첨언이었다.
평소 군말 따위는 하지 않던 자신의 둘째 아들이었건만 이번만큼은 특별히 자신의 기사를 위해 한 줄을 더 적어 보낸 것이었다.
“······고딘과의 대결을 원한다고?”
“네.”
나지막이 들려오는 페테르의 목소리에 그를 수행하던 기사들의 눈초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고딘이라면 혹시 가이다르의 기사단장인 고딘을 말하는 것인가?
“너를 무시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와 너의 차이는 뛰어넘기 힘든 것일 텐데.”
너무나 희미한 기색이었기에 블라드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오랫동안 페테르를 모셔온 바예지드의 기사들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들의 주군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좋을 대로 해라. 너에게 자격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
실로 오랜만에 마주하는 북부의 기세.
찬란히 꽃피웠던 바예지드의 황금세대가 지나간 지금, 다시금 높은 벽을 향해 도전하겠다 말하는 어린 기사를 기꺼워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가능성이란 아름다운 것이며 그것을 꽃피우려는 어린것들은 언제나 귀한 존재였으니까.
※※※※
“이 개자식!”
질척이는 언덕 위를 오르는 가이다르의 병사들.
용케 진형을 갖췄지만, 또다시 제 발로 혼란 속으로 기어들어 가야 하는 현실에 지그문드는 그만 악에 받친 욕지거리를 내지르고 말았다.
“페테르 바예지드! 이 씹어먹어도 시원치 않을 놈아!”
데어마르를 미끼로 삼아 혼란을 유도하고 철저하게 그 틈을 노려 깊은 상처를 낸 북부의 군주.
이제 그는 언덕 위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지그문드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네가 먼저 들어와라.
비록 나는 단단히 준비하고 있을 테지만.
보급로는 막고 퇴로는 끊었으며 이제는 막다른 곳까지 밀어 넣고만 페테르는 그야말로 마지막까지 지그문드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가 보이는 냉혹한 악랄함은 서부의 찬탈자인 지그문드조차도 치를 떨게 만드는 것이었다.
“빌어먹을 야만인 놈들!”
불리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올라가야만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한 것은 가이다르일테니까.
도무지 버틸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지그문드는 어떻게든 눈앞의 군대를 뚫고 서부로 향하는 활로를 만들어야만 했다.
“창병 앞으로!”
그리하여 기어이 맞닿은 북부의 병사들.
단단히 쌓아 올린 방패 벽 너머로 시퍼런 도끼들이 번뜩인다.
그 옛날 강을 타고 내려오며 도시들을 약탈했던 야만인의 습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빌어먹을! 창이 부러졌어!
무기 잃은 놈들은 뒤로 빠져!
으아악! 저 미친놈들이 도끼를 던진다!
대등한 숫자의 싸움.
그러나 방전된 체력과 떨어진 사기만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차이였기에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오직 가이다르만의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바예지드! 앞으로!”
야만인들의 피가 섞인 자들.
차별과 멸시가 가득한 표현이었으나 감히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분명 피로부터 전해지는 흉악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새끼들이 감히 어딜 들이대!”
“죽어! 죽으라고!”
북풍의 설한에서도 뜨겁게 유지해야만 하는 사내들의 성정은 분명 어느 지역의 사람들보다도 야만적이고 포악한 것이었다.
전술과 전략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북부의 광기가 그들의 도끼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역시!’
쉼 없이 병사들을 독려하던 지그문드는 앞에서 터져나가는 핏물들을 보며 이를 악물고 말았다.
역시나 서부의 창병만으로는 북부의 보병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보병대 보병의 싸움이라면 그들을 꺾을만한 병과는 제국 내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테니까.
“조금만 더 버텨라! 분명 때가 온다!”
그럼에도 지그문드가 쉼 없이 전선을 향해 병사들을 밀어 넣고 있는 이유.
북부에 흉악한 도끼병들이 있다면 서부에는 거친 황무지를 가로지르는 기병들이 있기 때문에.
“이놈들만 버텨내면 다시 우리의 흐름이 온다!”
서부라는 지역의 특성상 기병들의 수준이 발달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게다가 드워프들에게서 갈취한 장비들까지 두른 서부의 중기병들은 분명 북부의 기병들로는 대적하기 힘든 존재였다.
페테르가 일부러 질척한 초원 위에 자리를 잡은 것도 그들의 돌격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한 방이면 된다!’
모든 것이 무너져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의지해야 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일 것이다.
그렇기에 지그문드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로 결정했다.
가이다르의 자랑인 기병대의 창끝을 통해서.
※※※※
땅은 질척이고 말발굽은 무거워지고 있다.
여름의 날씨와 함께 끈적이는 데어마르의 초원은 분명 서부의 기사들에게 있어 낯선 전장이었다.
“적 대응합니다!”
고딘은 참으로 지랄 같은 전장을 선택했다며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속도가 점점 죽고 있다.
그러나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 이 공격에 모든 것을 때려 실었으니까.
“우측에 바예지드 기병대가 달려옵니다!”
“무시해라!”
기병들의 돌격은 화살과도 같다.
떠나간 순간부터 적에게 닿기까지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던 가이다르 기병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방패를 들이밀고 있는 병사들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뿌드드드득-
으아아아악!
방패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그와 함께 따라오는 비명은 이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역시!’
알고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라는 것이 있다.
가이다르에게 있어서 기병들의 돌격은 언제나 승리를 가져다주는 확실한 공식이었으며 그렇기에 지그문드는 이 한방을 통해 활로를 꿰뚫을 수 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
그러나 정작 돌격을 감행하던 고딘은 창끝으로 와닿는 기이한 감각에 조금씩 손끝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모자라다!’
분명 닿고는 있었으나 무언가 모자란 감각.
한참을 더 찔러내야 했지만 내지르는 창끝이 어딘지 모르게 공허한 기분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창끝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던 고딘은 그 기이한 감각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깨닫고 말았다.
굽이진 언덕이 교묘히 감추고 있던 각도.
아래에서는 알아볼 수 없는 진형이 맞닥뜨린 지금에서야 자신의 모습을 보이었다.
‘사선 진형!’
일직선으로 서 있다 생각했지만 바예지드의 병사들은 사실 대각선으로 늘어서 있었다.
정확한 타점만이 확실한 충격을 안겨다 주는 법이었지만 비스듬히 꺾여버린 가이다르의 돌격은 천천히 세워진 방패 벽을 따라 그들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우회······!”
가장 자신 있어 하기에 가장 확실히 대응할 수 있었다.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어느새 바짝 붙어 버린 바예지드의 기병대가 또 다른 벽이 되어 가이다르에게 우회할 공간을 빼앗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도 활개 치고 다녔겠다.”
감고 있는 왼쪽 눈 사이로 붉은색의 세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루트거 바예지드.
다음 대의 가주가 될 것이 거의 확실한 남자.
“밀어붙여라! 공간을 내줘서는 안 된다!”
“젠장!”
오른쪽에는 보병들의 방패 벽이.
왼쪽에는 굳건히 따라붙는 바예지드의 기병대가.
그리하여 점점 깔때기의 입구처럼 좁아지는 그곳에서 가이다르 기병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범상치 않은 기세를 흩뿌리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그들 모두가 하나같이 왼쪽 눈을 감고 있는 자들이었다.
“나에게 가지고 와라! 기사들아!”
군주이자 기사인 페테르의 검 끝이 달려오는 기병대를 향하고 있었다.
“저들의 목을! 바예지드를 능멸한 자들의 끝을!”
파멸을 향해 달려드는 돌격.
서부의 기사들도 서둘러 자신들의 세계로 대항하려 했지만 바예지드의 기사들이 노리고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었다.
히이이이힝-!
으아아악!
다리를 잃어버린 말들의 비명 소리가 요란하게 초원의 언덕 위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닿지 못하는 땅을 향해 분리되어 버린 무릎들이 허무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크으윽!”
육중한 소리와 함께 땅으로 쓰러지고 마는 말들.
그들의 위에서 허우적거리는 기사들의 몸짓이 하늘 위로 높게 떠 오르고 있었다.
추진력을 잃어버린 서부의 돌격이 북부의 기사들 앞에 멈추기 시작했다.
“바예지드 기사단!”
말을 잃어버린 기병대는 더 이상 기병이라 할 수 없는 법.
강제로 하마해버린 그들의 앞으로 차가운 북풍의 설한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앞으로!”
멈춰버린 땅 위에서 마주 보는 서로 간의 시선.
이제부터는 기사들의 시간이었다.
달은 지고
시선을 잃은 채 힘없이 흔들거리던 호르헤의 눈빛을 기억한다.
흐느끼던 창녀들의 울음소리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비릿한 고깃덩이의 냄새까지도.
그렇게 나의 둥지를 부숴버린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고 말았다.
그렇다. 내가 저 남자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었다.
“고딘.”
기사들이 열어주는 틈 사이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행색은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들고 있는 검만큼은 여전히 빛나는 남자.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애송이.”
이제야 가까이서 마주한 고딘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거짓된 이름으로 소개했던 그때처럼.
그러나 예전과는 다르게 그가 치켜드는 검은 정확히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름을 말해라. 가이다르의 기사.”
“······뭐?”
이제는 뒷골목의 소년이 아닌 한 명의 기사로 서 있는 남자.
이제야 마주한 푸른 달을 향해 블라드는 오랫동안 담아두었던 말을 입 밖으로 열었다.
“네 이름. 말하라고. 지금 내 앞에서.”
너무 오랫동안 품어 이제는 염원이 되어버린 분노가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날의 거짓된 이름이 아닌 진실된 이름을 원한다.
동등한 자리에서 마주 본 지금, 나는 너에게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일 테니까.
“그래. 그렇겠지.”
고딘은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한 블라드의 눈동자를 보며 모든 것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녀석의 이런 면이 좋았었다.
역시 그때 데려갔으면 좋았을 텐데.
“가이다르의 고딘이다.”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야 그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는 진실된 이름.
그 이름을 들으며 블라드는 손을 불끈 움켜쥐었다.
드디어 왔다. 이곳까지.
하늘 위 달처럼 멀었던 남자가 지금 내 눈앞에 있다.
“기사는 정당한 대가만을 가져간다고 했었지 고딘?”
이제는 뒷골목의 소년과 거짓된 기사가 아닌 진실된 이름으로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
서로의 이름을 주고받은 고딘과 블라드는 마치 약속이라도 했다는 듯 동시에 왼쪽 눈을 감았다.
“나는 아직 너에게 못 받은 것이 있어.”
부서진 둥지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오늘 달을 부순다.
너를 죽여서. 고딘
그것이 그날에 대한 나의 정당한 대가일 테니까.
※※※※
콰아아앙-!
수많은 기사들이 맞부딪히는 전장의 한 가운데.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대결이 펼쳐지는 공간이 있었다.
폭발하듯 터져나가는 푸른색과 그 색을 닮은 하얀색이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곳이었다.
‘빠르군!’
예측을 뛰어넘는 속도.
분명 단순하기 그지없는 경로였지만 블라드의 일격은 고딘에게 당황감을 안겨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흐아아압!”
기선제압은 화려하게.
그리고 잡은 기세는 절대 놓지 말 것.
목소리가 가르쳐준 대로 선공에 성공한 블라드는 잡아놓은 주도권을 마음껏 흔들며 고딘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또 커버렸군.’
유연히 내딛는 발걸음에는 수많은 수를 감춰두었지만 내리치는 검만큼은 간단하고 명료하다.
예측을 불허하는 움직임과는 다르게 확실한 의도를 담은 일검.
그야말로 모순과도 같은 존재.
예전의 치기 어린 내려치기 따위는 이제 흔적조차 없다.
“······!”
감고 있는 왼쪽 눈에서부터 고딘의 세계가 보였다.
그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지금!’
그리고 어디가 비어있는지까지도.
제국의 검에게서 배운 예리한 간파가 푸른 달빛이 닿지 못하는 공간을 향해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까가가가강-!
“크윽!”
확신하기에 망설임 없는 돌진.
그와 함께 요란히 터져나가는 오러의 잔상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생사를 건 사투를 벌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돌아볼 수 없게 만드는 빛이었다.
“내가 그때 말했었지.”
“······!”
들고 있는 검은 이빨이고 노려보고 있는 것은 짐승이다.
요란하게 까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는 두 개의 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한 푸른 눈동자 안에서 감히 인간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기이한 광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너를 반드시 죽여버리겠다고!”
마치 나를 보라 외치는 것만 같은 블라드의 함성.
더는 무시한 채 뒤돌 수 없는 울림이 고딘의 앞에 서 있었다.
“죽어!”
지친 몸에서는 가쁜 숨이 차올랐지만 정작 내딛는 발걸음은 가벼울 뿐.
마주한 상대가 고딘이었기에 블라드는 그 어떤 때보다도 깊은 세계에 빠져들며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검 끝에 맺히는 빛이 푸른색에서 점점 다른 색으로 변해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콰앙-! 쾅! 쾅!
별을 담은 검과 달빛이 머무는 검 사이로 거친 불꽃들이 튀어 나가고 있었다.
스스로를 불태우는 것에 전혀 망설이지 않는 금발의 기사.
원했고 바랐고 진심으로 닿고 싶었던 세계가 지금 내 앞에 있다.
“고작 이거냐! 애송아!”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지 마라!”
지금에 와 뒤를 돌이켜보면 남겨진 것들은 흔적일 뿐.
진실된 사제가 전해준 이름에서부터 지금 들고 있는 검에 이르기까지 전부 누군가의 흔적들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너만큼은 나를 애송이라고 부르면 안 돼.”
그중에서도 가장 깊게 새겨진 흔적 하나.
그것은 상처이자 흉터였고 블라드의 세계에 가장 아프게 박혀있던 기억이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마주 보고 있잖아.”
“······!”
장미의 미소. 소년의 둥지.
그곳에 가득 피워졌었던 새빨간 장미들.
굴러다니던 버레이의 목을, 힘없이 흔들리던 호르헤의 시선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는 아무것도 못 했지만.”
마주한 블라드의 검에서부터 확연한 형체가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안에만 있던 세계가 세상 밖으로.
이제는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그와 함께 천천히 떠지기 시작하는 왼쪽 눈.
“지금은 아니잖아.”
이제야 온전히 두 눈으로 마주한 세상 사이로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오러가 있었다.
황금색.
그 색은 소년이 태어날 때부터 간직하고 있던 찬란히 빛나는 황금색이었다.
——!
각자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던 기사들도.
그리고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페테르도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는 빛줄기 하나.
크게 휘두르는 검 끝으로 황금색 물결이 굽이치기 시작했다.
“피해라!”
“다들 고개 숙여!”
온전히 마주한 세상 위로 블라드의 세계가 구현되기 시작했다.
화려하면서도 날카로운 물결.
마치 달빛이 퍼져나갔던 그때의 광경과도 같은 물결이었다.
내가 여기 있다.
나 쇼아라의 블라드가 너를 향해.
이제 굳건히 세워진 나의 세계는 너라는 달을 향해서도 닿는다.
“크윽!”
펼쳐지는 황금색의 물결 앞에서 고딘이라는 세계가 새빨간 피를 튀기며 장미꽃 한 송이를 피워내기 시작했다.
자신과 같은 물결이었지만 색만큼은 확연히 다른 세계.
“크하하하하!”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기어이 자신을 쫓아온 어린 세계를 보며 고딘은 크게 웃음 짓고 말았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를 따라 커버린 세계를 보며 어찌할 수 없는 흐뭇함이 감돌았으니까.
“적으로 만나 너무 아쉽군.”
아쉽다 말하는 고딘의 검 끝에서부터 푸른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시작과도 같았던 푸른 달빛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처연할 뿐이었다.
※※※※
수많은 고함이 가득했으나 이제는 침묵만이 가득한 전장.
흩뿌려진 피와 뒤섞인 진창이 끈적하다.
“허억, 헉······.”
고개 하나 들 수 없을 정도로 끈적해서 블라드는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가쁜 숨을 내쉴 뿐이었다.
지금 자신의 목덜미로 차가운 검날이 와닿았음에도.
“그런데 애송아. 내가 그때 말하지 않았었냐.”
애송이라 부르지 말라고 했건만 고딘은 여전히 자신을 애송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당연할 것이다.
나는 그에게 패배했으니.
“앞으로 나아가기 전에 네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확인하라고 했잖냐.”
쇼아라의 어둠을 가르며 뛰어가던 소년에게 알려주었던 가르침이 있었다.
당황하지 말고 천천히.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부터.
“그래야만 제대로 된 방향을 잡을 거······ 아니냐.”
빠른 속도보다는 옳은 방향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만 지금처럼 빗나가지 않을 테니까.
“쿨럭.”
목덜미에 와닿는 검날 위로 검붉은 핏줄기 하나가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천천히 검을 타고 오던 새빨간 핏줄기는 천천히 블라드의 목을 타고 내려와 차가워진 손끝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너에게는······. 딱 이름까지다. 애송이.”
흔들리는 검 끝처럼 고딘의 말끝이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블라드는 고딘의 말이 완전히 어둠 속으로 먹혀들어 가기 전에 서둘러 고개를 들어 자신 앞에 서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
어느새 고딘을 둘러싸고 있는 바예지드의 기사들.
고딘의 몸 곳곳에 꽂혀 있는 검들이 블라드의 목으로 닿는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봉쇄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정확히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검에는 오직 바예지드의 가주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환영한다. 애송아.”
저 하늘 위에 있던 달이 추락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의 검에 의해.
“기사의 세계에 온 것을.”
끄드드득-
천천히 뽑혀 나가는 검들의 상처 위로 새빨간 피가 용솟음치기 시작했다.
흐르는 피와 함께 천천히 허물어지는 고딘.
그러나 블라드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나 분노가 아닌 희미한 미소가 맺혀 있을 뿐이었다.
오직 승자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였다.
“······제가 졌습니다. 가이다르의 고딘.”
비록 지금 내뱉는 말을 들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블라드는 그를 위해 기사로서 해야 하는 마지막 말을 해주었다.
증오했으나 동경했던 푸른 달.
그토록 닿기를 원했으나 결국 뛰어넘지 못한 그 달을 보며 블라드는 다시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승자는 위에 패자는 아래에.
그리고 이제는 도전할 수 없는 푸른 달은 영원히 나의 위에.
그렇게 블라드는 땅에 떨어져 버린 달을 향해 조용히 읊조릴 뿐이었다.
※※※※
“백작님! 백작님!”
“······.”
옆에서 크게 소리치는 친위기사.
그러나 그의 외침에도 지그문드는 침통한 표정을 지은 채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가 빠져나간 것만 같은 허탈한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뒤에서 데어마르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가이다르의 뒤쪽으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오는 병사들이 있었다.
이제야 병력을 수습하고 성문을 열어젖힌 하이날 군.
짙은 눈그늘의 청년과 함께 빠져나오는 그들의 기세는 그동안 당한 만큼이나 살벌했다.
“······내 아들을 챙겨라. 이제는 나 다음으로 가치 있는 것이니까.”
“알겠습니다. 백작님!”
전투는 졌으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란 한 번의 전투로 결정지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지그문드는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빌어먹을.”
수많은 고함이 울려 퍼지는 전장 속에서 지그문드는 가만히 저 위에 있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당당히 달리고 있었으나 어느새 멈추고 만 독수리의 깃발.
역시 그 깃발 하나에 모든 것을 의지하기에는 짊어진 부담이 너무 컸던 모양이었다.
“전원 후퇴하라! 어떻게든 자력으로 살아남아라!”
이 전투는 졌다.
인생이란 불확실함의 연속이라지만 설마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뼈 아프군.”
그러나 한 번의 패배보다 지그문드를 괴롭히는 것은 이제는 꺾이고 만 자신의 기사일 것이다.
충성스럽지는 않았을지라도 분명 같은 꿈을 꾸고 있던 푸른 달빛의 기사.
그와 함께였기에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건만.
“백작님!”
“······가자.”
들어올 때는 허락이 필요 없었지만 나갈 때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가야만 했다.
그것이 페테르의 요구였고 이제 지그문드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려놓지 않기 위해 초라하게 모습을 숨겨야만 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병사들의 원망과 욕설.
그들을 뒤로한 채 서둘러 빠져나가는 지그문드 옆에는 이제 100명조차 되지 않는 초라한 군세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