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0
가능성의 짐승 (1)
“죄송합니다. 아버지.”
깊게 고개를 숙인 사내의 뒤로 오늘의 황혼이 지고 있었다.
붉은 황혼, 고개 숙인 빨간 머리, 그리고 사내의 손에 둘둘 감겨 있는 핏빛 붕대까지.
북부에서 보내온 강렬한 경고를 몸에 새기고 와버린 라두는 그야말로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어쩔······수 없었겠지. 이해한다.
황혼이 만드는 짙은 그림자 사이로 들려오는 힘겨운 목소리.
마치 신음과도 같은 숨소리를 들으며 라두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번 대의 강철공도······. 그렇게 호락하지만은 않은 인물이었었지.”
라두의 시선 끝에는 지팡이를 움켜쥔 채 힘겹게 일어서는 노인이 있었다.
시들어가는 오늘의 태양을 밟으며 계단을 내려가는 노인.
비틀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푹신한 카펫을 밟으며 라두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래도 좀 아쉽구나. 아들아.”
“······!”
비틀거리는 발걸음과는 다르게 어느새 성큼 내려온 노인은 위로하듯 자신의 아들을 감싸 안았지만 정작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라두는 바짝 긴장할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북부에서 환대를 받고 왔는데 조금은 돌려주고 왔어야지.”
“죄송, 죄송합니다.”
방금의 힘겨운 목소리와는 다른 명료한 목소리.
중년인은 붉게 물들어버린 라두의 왼손을 보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까끌한 수염을 쓰다듬고 있었다.
“용의 피를 이은 자에게는 맞지 않는 초라함이구나.”
패배와 불명예,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강렬한 도전까지.
온갖 불결한 것들을 덕지덕지 달고 이곳까지 온 자신의 아들을 보며 용혈공 사르누스 공작은 입술을 굳게 다물 뿐이었다.
“오느라 수고했다. 그만 쉬거라.”
“······네. 아버지.”
오직 둘만 있는 어두운 홀에는 누가 밝히지도 않았음에도 어느새 촛불들이 내뿜는 빛이 가득했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빛 속에서 보이는 아버지의 젊은 얼굴.
라두는 그림자가 가려버린 용혈공의 얼굴을 보며 다시금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미르셰아.”
“네. 아버지.”
그렇게 라두가 고개 숙이며 떠나간 자리.
사르누스의 부름에 둘만 있다 믿었던 그 공간에서부터 천천히 고개를 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아무래도 저 녀석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그렇습니까.”
아버지와 꼭 닮은 색을 가지고 있던 미르셰아는 사르누스 공작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영글지 못하는 열매는 더 매달아봤자 썩어갈 뿐이겠지.”
자신의 피를 이은 아들을 썩어가는 열매에 비유하는 남자.
라두와는 달리 어둠을 꿰뚫어 볼 줄 알았던 미르셰아는 지금 자신의 아버지가 어떠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나저나 이번 아들 녀석은 어디까지 커나갈지가 궁금하구나.”
어느새 주름 하나 없이 미끈해져 버린 용혈공의 손이 이제는 필요 없어진 지팡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진창에다 뿌린 가능성은 나도 처음이니 말이다.”
어두운 홀 곳곳, 햇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부터 밝혀지는 촛불들.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일렁임이 가장 오래된 용의 푸른 눈동자를 비추고 있었다.
※※※※
전쟁이 끝난 데어마르의 성벽에는 여전히 달라붙어 있는 새까만 그을음이 가득했다.
타다만 잿더미와 함께 아직도 데어마르 곳곳에 튀어있는 핏자국들.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는 데어마르가 아직도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쿨럭, 쿨럭.”
전쟁에서 승리했으나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음울함일 뿐.
죽은 자들의 시체와 상처 입은 자들의 신음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요제프는 가만히 침대 위에 누워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군.”
요제프의 허약한 몸은 결국 격렬했던 공성전의 여파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도 주어진 의무만큼은 다 마치고 쓰러졌으니 다행이라 생각할 법도 했지만, 서쪽을 바라보는 요체프의 눈빛에는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울분이 서려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요제프의 저주받을 몸뚱이는 끊임없이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나사우에는 다다랐겠나?”
“아마 그럴 겁니다. 근방의 영주들은 저희를 막을만한 여력이 없을 테니까요.”
옆에 있던 자야르도 요제프의 심정을 이해했는지 조용히 안대를 쓰다듬으며 창밖을 바라볼 뿐이었다.
자야르의 말처럼 바예지드 군은 지금도 거침없이 서쪽을 향해 진군하는 중일 것이다.
전투는 끝났으나 전쟁은 시작이었고 바예지드는 감히 먼저 칼을 들이댄 서부의 영주들을 향해 그 대가를 받아낼 자격이 있었다.
“······그래. 블라드는 여전히 힘이 빠져있었나?”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과 달리 이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여태껏 쌓아 왔던 상처를 마주해야만 했다.
격렬한 맞부딪힘 간에는 어찌할 수 없는 생채기가 생기는 법이었고 본의 아니게 남아버린 요제프에게는 그런 상처들을 돌봐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처음으로 진 건가?”
“공식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요제프는 들려오는 자야르의 말을 들으며 그만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첫 패배의 상대가 가이다르의 고딘이라니······.”
지금의 처지가 우울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조금은 웃을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모든 것이 우울해 보이는 데어마르였으나 그래도 자그마한 영광의 잔재 하나가 이 도시에 머물러 있었으니까.
“이걸 잘 졌다고 표현해야 하나? 고딘이라는 이름값이면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는 않을 테니.”
“죽지는 않았으니 분명 다행이겠지요.”
자야르는 요제프의 말에 무언가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입술을 찌푸릴 뿐이었지만 그의 말에 딱히 반박할 수는 없었다.
요제프의 말대로 세상에는 오르는 것만으로 높게 평가받는 산이 있었으니까.
결과가 어찌 되었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수 있는 그런 험준한 산들.
그리고 블라드가 시도했던 가이다르의 고딘 또한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결과야 어찌 되었건 이제 블라드도 본격적인 기사의 세계에 진입하겠군.”
떨어지는 별이 있다면 떠오르는 별도 있는 법.
아마 이번 전쟁의 결과가 널리 퍼지게 될 때쯤이면 제국에 있는 모든 호사가들은 새로이 떠오른 이름 하나를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이다르의 진형을 꿰뚫고 달렸으며 고딘이라는 강대한 적과 대적했음에도 살아남은 신인.
쇼아라의 블라드.
이제는 내가 먼저 외치지 않아도 남이 먼저 알아주는 그런 이름.
그래도 아직은 멀었다며 애써 부정하는 자야르를 보며 요제프는 가는 기침을 쿨럭거리며 웃음 지을 뿐이었다.
※※※※
성벽 타고 올라온 저 새끼! 저거 도대체 뭐야!
블라드다! 파란 눈깔의 블라드!
이즈니크 남작령의 도시 나사우.
이미 루트거에 의해 한번 불탄 적 있던 도시는 바예지드 군을 향해 창을 들이댔지만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다.
“문 열 거야 말 거야?”
“······크으으.”
걸어온 길은 핏물로 넘쳤으며 바라보고 있는 푸른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과연 서부에 퍼진 악명만큼이나 바예지드의 어린 기사는 검 끝에 자비를 매달아두지 않았다.
“이번에도 대답 안 하면 너는 죽는 거야. 지금 여기에 문 열어본 놈이 너밖에 없었겠어?”
“열겠, 열겠습니다.”
육상 병력이라고는 애초에 몇백밖에 보유하고 있지 않던 도시 나사우.
이미 한 번 파괴되어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성벽과 가이다르에 동조하기 위해 무리해서 보낸 지원 때문에 나사우의 전력은 더욱 약화된 상황이었고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인 페테르는 그런 약점을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너. 아까 나보고 뭐라 그랬지?”
“네, 네?”
고작 열 명 정도의 기사들일 뿐이었으나 그들은 페테르의 예상대로 훌륭히 성벽을 장악했다.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기사들의 이름값만큼은 수백의 병사들보다 무거운 것이었으니까.
“파란 눈깔이라잖아. 파란 눈깔의 블라드.”
블라드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지나가는 루트거를 보고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파란 눈깔이라니.
기사 앞에 쓰일 칭호치고는 너무 무게감이 없는 거 아닌가?
두드드드득-!
블라드의 불만이 어찌 되었든 간에 나사우의 도개교는 육중한 쇠사슬과 함께 해자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사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사뿐.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사우에는 바예지드의 기사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실력 있는 기사들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각 지휘관들은 병사들에게 확실히 전해라.”
눈앞으로 천천히 내려오는 도개교를 보며 페테르는 다시 한번 차가운 경고를 내렸다.
“나사우에서만큼은 그 어떤 약탈 행위도 허락하지 않는다. 이를 어기는 자는 엄중히 처벌하도록 하겠다.”
서슬 퍼런 페테르의 명령에 주위에 있던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아무리 군율이 엄중한 군대라 할지라도 은연중에 일어나는 약탈만큼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페테르 바예지드는 북풍의 설한보다도 매서운 존재감을 통해 군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었다.
“진입해라.”
“알겠습니다. 백작님.”
도시 나사우.
얼어붙지 않는 최북단의 항구도시.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아무리 각 영주의 통치권만은 보장해주는 것이 영지전의 관례였지만 페테르는 나사우에서만큼은 그 관례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가능하다면 별 손해 없이 손에 넣고 싶군.”
처음부터 이 도시만큼은 가져가겠다 생각했었다.
더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굳이 어린 소년만이 가지는 특권은 아닐 것이다.
바예지드 또한 더는 북부 안에만 갇혀있고 싶지 않았다.
“항구로 뛰어라! 어딘지 알지?”
“들어왔던 길이 전혀 다르거든요!”
도개교가 내려가는 것을 확인한 기사들은 서둘러 성벽을 뛰어 내려가 나사우의 항구를 향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끝에 지난번에는 보지 못한 거대한 배 한 척이 돛을 펼치기 시작했다.
“역시 튀려고 준비 중이었네!”
블라드의 외침처럼 아마 이즈니크 남작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올라탔던 가이다르는 고꾸라지고 말았고, 기세등등이 서부로 내려온 북부의 군세를 자신의 힘만으로는 막을 수 없을 테니까.
“뛰어!”
각자의 세계를 갖춘 루트거의 기사들이 서둘러 항구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항구에 닿는 자에게는······.”
“누아르-!”
루트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블라드가 큰 소리로 성문을 향해 외치기 시작했다.
이즈니크 남작을 놓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가 챙겨놓은 재산이 탐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전쟁이란 금화를 먹는 괴물이었고 그 금화는 엄연히 패자가 지불해야 하는 재물이었다.
“먼저 닿는 자에게는 뭐요?”
“······하여튼 많이 챙겨주마.”
그저 이름 하나 불렀을 뿐인데 어느새 바짝 붙어있는 검은 말을 보며 루트거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산금이 나올 올해 겨울이 기대되네요.”
“그것도 지금 저 배를 출항시키면 말짱 헛기대가 되겠지.”
비록 말은 그렇게 했으나 루트거는 누아르와 함께하는 블라드라면 그 누구보다 빨리 항구에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가이다르의 진형을 헤집고 다녔던 그때의 광경이 아직도 눈에 선할 지경이었으니까.
“가자!”
히이이힝-!
블라드의 외침과 함께 항구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달리는 검은 말이 있었다.
여름의 태양 아래서 반짝이는 푸른 바다.
그 빛을 바라보는 블라드의 눈동자에는 어느새 자신의 세계에 매달아 놓은 푸른 달빛이 머물러 있었다.
“항구로 가게 하면 안 된다!”
“저 자식 막아! 막으라고!”
자신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보며 블라드는 달리는 누아르의 위에서 가만히 왼쪽 눈을 감았다.
이제는 제 색을 찾은 블라드의 세계.
“저리 비켜 새끼들아!”
이제는 닿을 수 없지만 그렇기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고딘의 달은 더는 높디높은 밤하늘에 매달려 있지 않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블라드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빛나는 달이었다.
하얀색도, 초록색도 그렇다고 푸른색도 아닌 온전한 블라드만의 색깔이 검 끝에서 파도처럼 물결치기 시작했다.
황금빛으로 물든 그 세계의 시작은 아마도 모닥불 옆에서 피어올랐던 푸른 달빛에서 시작된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