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1
가능성의 짐승 (2)
색유리들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하얀 복도를 색색깔로 물들이고 있었다.
가을의 기운을 품은 바람이 청량했지만, 정작 그 선선함을 마주하는 두 사내의 표정은 딱딱히 굳어 있을 뿐.
제국의 수도 브리간테스.
그 영광된 도시 한 가운데 세워진 새하얀 건물 안을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네. 피에르 주교.”
붉은 법복을 입고 있는 두 명의 남자.
그러나 자세히 살펴본다면 목 언저리에 두르고 있는 칼라의 색깔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 열리는 추기경 회의는 자네가 말하는 그런 안건을 올릴 수 있는 그런 회의가 아니야.”
“하지만 추기경 님.”
피에르는 자신을 보지도 않은 채 단호히 말하는 에두아르드 추기경을 보며 일이 쉽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북부연합이 내미는 이교(異敎) 때문에 이번 회의가 열렸다는 것을요. 그러나······.”
그러나 이 말 만큼은 전해야 한다.
북부에 감돌았던 사특한 기운을 쫓아 우트만 남작령에 다다랐던 피에르 주교.
그러나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명예로운 성전이 아닌 온갖 의혹으로 덧칠된 수상한 전투였을 뿐이었다.
“우트만 남작령에서의 일은 분명 여태껏 보아왔던 성전과는 달랐습니다.”
신의 뜻에 따라 일어난 군세였으나 정작 어둠 앞에 다다랐을 때도 느긋했을 뿐.
자신의 협박과 간청에도 꿈적 않던 중앙의 군세는 북부의 강철공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북부가 참지 못할 때까지 기다렸다는 듯한 그들의 행태는 분명 피에르에게 의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아무래도 드라굴리아가 수상합니다. 추기경 님.”
“쉬잇!”
에두아르드는 피에르의 말에 기겁을 하며 그를 재빨리 벽으로 밀어붙였다.
피에르 또한 껑충한 키를 가지고 있던 자였으나 풍채 좋은 에두아르드의 다급한 밀침에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항상 말하지 않았나. 신의 뜻을 좇을 때도 항상 눈과 귀는 주변에 두어야 한다고.”
속삭이듯 외치는 추기경의 말에 피에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국에서 넷뿐인 공작 가문 중 하나인 드라굴리아.
그런 드라굴리아를 대놓고 수상하다 말하고 있었으니 추기경인 에두아르드로서도 낭패감에 식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네의 신실함을 높게 사지만 제발 주위에 돌아가는 일도 좀 생각하시게.”
“······죄송합니다 추기경 님.”
신의 뜻을 따르지만 인간들 사이에 있는 교황청으로서는 완전히 속세와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추기경들 가운데도 드라굴리아의 지원을 받는 자들이 있을 테니 피에르 주교의 직설적인 발언은 분명 위험한 것이었다.
“자네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일단 북부의 일부터 마치고 생각을 해보지. 북부정교회라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에두아르드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정말로 곤란하다는 듯 손수건을 꺼내어 땀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피에르의 보고는 분명 수상한 것이었지만 지금 교황청 앞에는 당장 대처해야만 하는 확실한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아무튼 이번 일이 끝나기 전까지 여기서 얌전히 있으시게나. 이제는 쇼아라로 돌아가지도 못할 테니.”
“······알겠습니다.”
피에르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떠나는 에두아르드를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말았다.
역시 숨어있는 어둠보다는 바로 앞에 있는 위협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리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에두아르드가 떠나고 오직 홀로 남게 된 복도 위.
그곳에서 피에르 주교는 조용히 기도문을 읊조리며 자신을 위안할 뿐이었다.
분명 보았으나 어찌할 수 없는 수상한 어둠.
게다가 그 어둠은 드라굴리아라는 영광된 이름 아래 숨어있었으니.
“제가 어찌하오리까.”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은 밝았으나 피에르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헤매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언제나 신의 뜻을 따라왔던 신실한 이단심문관은 이번에도 그의 뜻이 자신의 어깨로 내려앉기를 바랄 뿐이었다.
※※※※
평소라면 사람들이 북적거렸을 나사우의 항구.
그러나 갑작스레 들이닥친 바예지드 군으로 인해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해져 버린 항구는 블라드로 하여금 기묘한 감상을 일으키게 했다.
“괜히 나왔네. 이거.”
어찌할 수 없는 허탈함, 그리고 무언가 비어있는 듯한 공허함.
애써 마음을 다잡아도 가끔씩 불쑥 튀어 오르고 마는 고딘에 대한 감상은 지금도 블라드를 우울한 푸른색으로 물들이고는 했다.
“어이. 거기 서 있는 쇼아라의 파란 눈깔.”
눈앞에 바다를 보며 천천히 상념 속으로 빠져들던 블라드를 끄집어내는 목소리가 있었다.
“······루트거 님.”
항구를 향해 다가오는 검은 머리의 남자.
바예지드가 자랑하는 후계자인 루트거 바예지드였다.
“괘씸하군. 다들 바삐 움직이는데 여기서 혼자 뭐 하는 거냐.”
“죄송합니다.”
푸른 항구 위에 덩그러니 서 있는 금발과 검은 갈기는 아무래도 쉽게 숨을 수는 없는 색깔들일 것이다.
마치 한 몸처럼 같은 동작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블라드와 누아르를 보며 루트거는 가만히 웃음 짓고 말았다.
“어디 숨고 싶으면 머리부터 가리는 게 좋을 거다.”
일부러 손을 들어 머리를 가리키는 루트거의 손짓이 익살스러웠다.
분명 루트거가 블라드를 찾아 나선 것은 나름의 위로를 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같은 기사였기에 블라드의 우울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 자리에 같이 있었기에 공감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끝은 맺었으니 된 거다. 훌륭하게 대처했어.”
“······.”
그런 루트거가 블라드에게 해주고 싶은 한마디는 분명 너는 잘했다는 말이었다.
비록 허무하게 끝나버린 대결이었으나 어떻게든 스스로 끝을 내려 했던 블라드의 의지만큼은 그곳에 있는 모두가 볼 수 있었으니까.
“이게 뭡니까?”
“보면 몰라? 교회의 문장이잖냐.”
누아르의 등을 쓰다듬으며 다가온 루트거는 블라드에게 생소한 목걸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교회의 문장이라기에는······. 뭔가 다르게 생겼는데요.”
루트거의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은 분명 교회의 문양이었으나 그 아래에 걸쳐 있는 가로의 줄이 하나 더 새겨져 있었다.
익숙함 속에 새겨져 있는 생소함.
설명을 요구하듯 고개를 올린 블라드를 보며 루트거는 입을 열었다.
“이번에 새로이 탄생한 북부정교회의 문양이다.”
신의 뜻은 하나였으나 그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가지.
교리에 대한 해석은 분명 수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던 종교계의 골칫거리였지만 북부연합과 북부 교구 산 로지노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온전히 홀로서기 위해서 자신만의 것을 갖춰야 하는 것은 어느 세계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저는 안드레아 사제님의 말씀만 믿거든요.”
“그분도 이제 북부정교회야.”
“그러면 이 문양이 맞겠네요.”
어차피 블라드에게 있어서 문양의 모양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블라드에게 있어 신에게 가장 가까운 입구는 바로 안드레아 사제였을 뿐이니까.
뒷골목에서 굴러다녔을 뿐인 나에게 세상 위에 새길 이름을 만들어 준 사람.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뒷골목의 소년에게 신의 말씀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나저나 어쩔 거냐. 계속 따라올 테냐?”
“네?”
블라드는 밑도 끝도 없이 따라올 거냐 묻는 루트거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이번 진격이 나사우에서 그치지는 않을 거다. 서부를 전부 점령하는 거야 불가능하겠지만 말이야.”
루트거의 말대로 바예지드 군은 이곳 나사우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페테르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취해야 하는 몇몇 지역들을 이미 간추려 놓았고, 그 영역은 서부에 존재하는 세 개의 남작령에 걸쳐져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들만큼은 가져가야 계산이 맞겠지.”
시작은 가이다르가 했으나 끝은 바예지드가 낸다.
찬탈자에게 동조하고 있던 서부의 영주들은 그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왜 따라올 거냐고······.”
“돌아가고 싶다면 돌려보내 주마.”
한 사람의 기사도 아쉬운 시기였지만 페테르와 루트거는 블라드의 상태에 주목하고 있었다.
아직 나이도 차지 않았던데다 충분히 흔들릴만한 계기도 있었으니 그에 대한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요제프도 앓아누워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그 녀석을 보좌할 멀쩡한 녀석이 필요할 것 같기도 하고.”
“······.”
빙빙 돌려 말하고 있었으나 블라드는 루트거의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의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너는 좀 쉬는 것이 좋겠다.
지금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이니.
“······오랜만에 쇼아라로 돌아가겠네요.”
“그래. 이번 기회에 쉬고 와라.”
강제적인 휴가에 뭐라 반발이라도 하고 싶었으나 이제 블라드는 그저 발끈할 뿐일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스스로를 관조하고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알아야 하는 기사 중의 한 명이었다.
“바다······. 좋았는데요.”
“그래?”
올려다보았던 높은 달은 이제 없기에 자연스레 마주할 수밖에 없는 푸른 바다.
그 바다가 말하고 있었다.
이제는 올라갈 때가 아닌 넓혀야 할 때라고.
‘오랜만에 한번 듣고 싶네.’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블라드는 자신의 세계 안에서 조용히 울려 퍼지는 울림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 울림의 진동은 마치 목소리를 떠올리게 낯익음이 깃들어있었다.
※※※※
여전히 전쟁의 상처에 신음하는 데어마르.
지금도 속속 도착하는 보고서들이 알리시아의 신경을 짓누르고 있었다.
“······결국 바예지드에게 전장을 내준 꼴이 되었군요.”
든든한 우군이었으나 정작 상처는 데어마르만의 것.
전쟁에서 살아남았기에 가문의 존속만은 이루어냈으나 지금부터는 곪아가는 상처에 신음해야 할 차례였다.
“노렸던 걸까요?”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습니다. 아마 전대 가주님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하셨을 겁니다.”
바예지드는 지금도 서부를 뛰어다니며 전리품들을 줍고 있겠지만 하이날은 그저 가만히 서서 숨만을 고르고 있을 뿐.
알리시아는 처참히 쓰러져 있는 데어마르를 보면서도 울분을 터트릴 수가 없었다.
“결국,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뿐인 거네요.”
힘이 없기에 무시당했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기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 답답한 현실을 오롯이 홀로 감내해야 하는 알리시아의 앞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회의에 참석해야겠어요.”
짓눌리는 무게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이고 만 알리시아 앞에 고풍스러운 초대장이 하나 놓여있었다.
그 초대장을 보는 알리시아의 물빛 눈동자가 색에 맞지 않게 조금씩 이글거리고 시작했다.
“우리도 언제까지나 레몬 농사만 지을 수는 없는 거예요.”
“······.”
군사가 있어야 하고 기사가 있어야 하며 남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오직 반짝이는 금화뿐.
지금도 상처에 허덕이는 데어마르의 영지민들을 위해서라도 알리시아는 이번 북부 회의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뚫어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너무 급하게 떠나서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때마침 창밖을 통해 보이는 하이날의 나무.
이제는 홀로 서 있는 것이 더 낯설어 보이는 그 나무 밑에는 언제나 그녀에게 위안을 주었던 기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럴 때 그가 있다면 참 좋았을 텐데.
“영주님. 영주님!”
알리시아가 창밖에 보이는 나무를 보며 조용히 의지를 다잡고 있을 때, 갑작스레 누군가의 고함과 함께 집무실의 문이 요란하게 열리고 말았다.
“지금 밖에, 밖에······.”
“이게 무슨 일인가?”
던칸은 자신의 앞에서 허리를 굽힌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집사를 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오랫동안 충성해왔던 하이날의 집사.
자신만큼이나 노회한 그는 언제나 침착한 모습으로 알리시아를 보좌하고 있었으나 지금의 모습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밖에? 뭔가요?”
“알리시아 님······.”
심상치 않은 집사의 모습에 알리시아조차도 긴장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나 집사는 불길한 소식 때문에 그녀를 다급히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 밖에 손님들이 와계십니다.”
“손님이요?”
간신히 숨을 고른 집사를 보며 알리시아는 어째서인지 그의 등 뒤에서부터 낯익은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만 같았다.
“엘프들입니다. 그들이 영주님을 뵙고 싶다고 합니다.”
“······네?”
지금은 이곳에 없는 자신의 기사가 가져왔던 엘프들의 편지.
지금 불어오는 바람은 마치 그때 편지 안에서 느껴졌던 바람과도 같은 느낌이었다.
“엘프? 엘프요?”
아주 먼 곳에서부터 온 손님들.
그들은 자신들을 동쪽 끝, 아우슈린에서 왔다 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