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r-Embracing Swordmaster RAW novel - Chapter 142
가능성의 짐승 (3)
키는 훤칠하게 크고 어깨는 넓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하더라도 마치 귀족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품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그들의 귀.
인간이라면 가질 수 없는 뾰족하고도 긴 귀가 지금 이들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고 있었다.
“마치 최근에 전쟁이라도 치른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곳곳에 있는 핏자국이며 그을음이 전부 최근의 것으로 보입니다.”
“바라디스 님. 정말 이런 곳에 어머니 세계수의 흔적이 있을까요?”
마치 속삭이는 것만 같았으나 확연히 들려오는 발음과 운율.
처음 듣는 엘프들의 언어에 경비병들은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으나 정작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데어마르에 대한 불길한 첫인상뿐이었다.
“······기사 블라드가 말했었다.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은 이 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레인저들의 부정적인 보고가 있었지만 그래도 바리디스는 믿어보기로 했다.
블라드는 분명 하이날의 데어마르라는 곳에서부터 어머니 세계수의 기억이 시작되었다고 했었으니까.
다른 인간들이라면 몰라도 어린 세계수를 지켜주었던 블라드의 말이라면 신뢰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방금 영주님께서 여러분의 입장을 허가하셨습니다.”
인간들의 눈빛 속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엘프들의 언어.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두 세계의 경계를 향해 다가온 던칸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기는 했으나 분명 귀한 손님이었으니 환대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들어오십시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혹시 그는 알고 있을까.
자신이 제국 역사상 엘프들을 위해 최초로 문을 열어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던칸의 명령과 함께 새로 갈아치워야만 할 것 같은 성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록 초라한 모습으로 삐걱대는 데어마르의 성문이었으나 그 움직임만큼은 충분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과연 맞았군.”
엘프들을 위해 활짝 열리기 시작하는 도시 데어마르.
난생처음 마주하는 인간들의 도시를 보며 레인저들의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보는 인간들의 도시는 낯선 모습이 가득했지만, 도시를 떠도는 공기의 냄새만큼은 어딘지 모르게 아우슈린을 떠올리게 하는 낯익음이 있었다.
—-?
그리고 그 낯익음이 시작되는 곳. 데어마르의 하얀 저택.
그 위로 빼꼼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언덕 위의 하얀 뱀.
멀리 있어도 보이는 뱀은 엘프들을 향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만 같았다.
“데어마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엘프 여러분.”
바라디스는 던칸의 말을 들으며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맞이하는 인간들의 도시.
그 낯섦에 한껏 긴장하고 있었으나 분명 데어마르는 그들을 환영해주고 있었다.
자신을 알아보는 엘프들을 향해 흔들리고 있는 하얀 꼬리처럼.
※※※※
도시에 깃든 어둠 속, 그곳에 자리 잡은 낡은 술집 하나.
술집 사이에 드리워진 그림자에 기대어 서 있던 흉터투성이의 남자는 멀리서 다가오는 블라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커스.”
“이제는 포즈난이야.”
“······그 정도로 이름을 바꿔대면 헷갈리지 않나요?”
블라드의 장난 어린 핀잔에 이제는 포즈난이 되어버린 마커스는 그저 냉막한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이걸로 그때의 협조는 다 갚은 거다.”
“알겠어요. 더는 샤를 때의 일에 대해서는 생색내지 않을게요.”
알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블라드를 보며 포즈난은 시선을 돌렸을 뿐이었다.
감히 암행대의 대장에게 거래를 걸어왔던 대담한 녀석.
바예지드의 피를 이은 두 후계자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을 이렇게 쉽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잘 쓰고 돌려줘라.”
“알겠어요. 마커스.”
블라드는 마커스가 전해주는 까마귀를 품에 집어넣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앞에 있는 술집을 향해 휘적거리며 들어갔다.
마치 그 안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듣던 대로 정말 말 안 듣는 놈이로군.”
포즈난이라 말했으나 굳이 마커스라 대꾸하는 블라드.
이름 없는 사내는 저 젊은 기사의 고집만큼이나 자신이 오래도록 마커스라 기억될 것임을 자각하고 말았다.
“마커스라는 이름이 어감이 괜찮긴 했지.”
기억되어서는 안 되는 남자의 입에는 어느새 길게 빼문 담배 한 개비가 물려있었다.
※※※※
주인이 내미는 술잔 위로 영롱한 황금색이 비치고 있었다.
서부의 특산품이자 이 술집의 자랑이기도 한 맥주.
난생처음 보는 술을 보며 블라드의 혀가 메마른 입술을 홅고 말았다.
장미의 미소에서 일했던 초팔이의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하얀 거품이 둥둥 떠 있는 이 술은 분명 기가 막힌 맛일 거라고.
“드워프 말씀이십니까?”
“그래. 드워프 말이야. 키 작고 땅땅한 친구들.”
시선만큼은 맥주라는 술에서 떨어지지 않았지만 펼쳐져 있는 블라드의 손바닥은 자신의 허리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이 정도의 키라고 말하는 듯한 블라드의 손놀림을 보며 술집의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드워프들은 갑자기 왜······.”
“여기서 사고팔고 그런다며. 드워프들 말이야.”
무심히 건넨 블라드의 말에 순식간에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앞에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술집 주인도, 접시를 나르던 종업원도.
그리고 취한 듯 테이블에 엎어져 있던 사내들까지도.
모두가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빛으로 블라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다 알고 왔거든. 그러니까 너무 돌아가지 말자고.”
그러나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는 상황에서도 블라드는 그저 가만히 술잔을 들었을 뿐이었다.
뒷골목의 어둠 속에서 태어난 바예지드의 기사.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맥주잔을 들고 있는 블라드의 눈빛에는 오직 동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끈적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지금부터 내가 물어볼 테니까 대답만 하면 돼. 그리 어려운 질문은 아닐 거야.”
블라드가 내뿜는 기세에 산전수전을 겪어왔던 노예 상인조차도 차마 긴장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모습과는 전혀 다른 거물의 냄새.
이제 블라드라는 존재는 어두운 뒷골목이 품을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넓은 세계가 되어버렸다.
“여기 창고에 너희들이 가둬놓은 드워프들이 있는 거로 듣고 왔거든.”
휴가를 명받은 블라드였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의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바예지드의 기사였지만 요제프의 기사.
데어마르를 떠나 나사우에 다다랐던 블라드는 앓아눕고 만 자신의 주군에게서 자그마한 임무 하나를 받아 이곳까지 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저는 전혀······. 끄아아악!”
“원래는 손가락부터 시작하는데 지금은 좀 바쁘거든. 그러니까 손목부터 가자.”
태연하게 말하는 목소리 뒤로 저 멀리 날아가는 손목 하나.
뒤늦게 찾아온 격통에 술집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노예상은 고래고래 비명을 질러대었지만, 그의 조직원들은 쉽사리 블라드에게 달려들지 못하고 있었다.
“남아있는 손 다음에는 바로 모가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네. 이게 쇼아라 방식이거든.”
태연하게 웃는 얼굴 위로 비치는 푸른 눈동자가 스산하다.
잘려나간 손목을 애써 붙들고 있던 노예상은 그제야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쇼, 쇼아라의 블라드! 파란 눈깔!”
“······하. 파란 눈깔이 뭐야. 진짜.”
북부에서는 경의와 자부심을, 그러나 서부에서는 공포를 담아.
“그래서 드워프들. 있어 없어?”
보이는 모습만큼이나 다를 수밖에 없는 블라드의 이름은 그렇게 다른 의미를 간직한 채 불리며 대륙을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
서부의 기병대가 유명한 이유.
그것은 그들이 가진 말과 기마술의 훌륭함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들고 있는 가볍고도 단단한 무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더 멀리 날아가는 화살.
더 단단한 방패와 갑옷.
소소하지만 전장에서만큼은 중요한 차이를 만드는 무기의 격차들.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드워프들의 피와 땀에서 갈취 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창살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처럼 서부에서는 이들에 대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는 했다.
“······.”
드워프들의 자부심이나 다름없는 수염조차 엉망으로 잘려버린 창살 안의 사내.
비쩍 마른 몸 위로 드러나고 만 근육들이 처량해 보였다.
등허리 곳곳에 새겨져 있는 채찍 자국들이 그가 그동안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철컹-
저 위에서부터 무거운 자물쇠 소리가 퍼져오자 갇혀 있던 어린 녀석들의 긴장된 숨소리가 들려왔다.
어두운 지하 감옥과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쇠사슬들.
그리고 그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학대는 드워프들의 핏속에 흘렀던 강인한 영혼마저도 충분히 꺾을만한 것이었다.
“어디 보자.······불카루? 볼카누?”
“······불카누다.”
삐걱거리는 판자 소리와 함께 내려온 사내.
낮이었으나 벌써부터 어린 녀석에게서 풍기는 맥주 냄새가 알싸했다.
실실 웃고 있는 모양새가 불량한 것이 아무래도 가지고 있는 머리 색만큼이나 싹수가 노란 녀석인 것 같았다.
하긴, 저 젊은 나이에 노예들을 기웃거리고 있으니 분명 훌륭히 썩을 재목이겠지.
“음. 음. 좋아. 불카누. 그래.”
“······?”
그러나 불카누는 눈앞의 금발 청년이 가까이 다가오자 맥주 냄새 사이에 숨겨져 있던 비릿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피 냄새였다.
그것도 한둘로는 배길 수 없는 확연한 피 냄새.
“여긴 진짜 전부 드워프들 밖에 없네? 과연 드워프 전문 상인이라더니.”
과연 마커스가 알려준 정보처럼 마치 상자처럼 쌓아놓은 철창 안에는 드워프들이 가득했다.
차마 손발을 제대로 피지 못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
그중에서도 보이는 어린 드워프들을 확인한 블라드는 조용히 들고 있던 맥주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너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마. 여기 있는 아이들만 풀어준다면 무기를 만드는데 협조······.”
“다 풀어줄게.”
시작은 시원하고 넘어가는 목 넘김은 부드럽다.
분명 위스키보다 싼 술이겠으나 블라드는 처음 맛보는 맥주라는 술에 빠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뭐?”
“대신 조건이 있다. 불카누.”
근처에 있던 의자를 잡아당긴 블라드는 맥주잔을 집어던지고는 불카누라는 드워프와 눈을 마주쳤다.
드디어 찾았다. 드워프.
“나는 쇼아라의 블라드다. 바예지드 가문의 차남이신 요제프 바예지드 님 밑에서 일하는 기사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맥주잔 소리가 요란하다.
그와 함께 블라드의 손 위에는 핏자국이 가득한 열쇠 꾸러미가 들려있었다.
제안과 선택.
블라드의 입에서부터 요제프가 명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분께서는 드워프 해방 전선과 인연을 맺고 싶어 하신다.”
공기조차 제대로 들어오지 않을 것만 같은 지하 감옥.
그곳에서 겨우 열린 창살 사이로 건네지는 편지와 까마귀 한 마리가 있었다.
“네가 이 편지에 대한 답을 가져온다고 맹세한다면 여기에 있는 모든 드워프들은 자유다.”
좁디좁은 창살에 갇혀 있는 드워프들과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몸뚱이에 갇혀 있던 요제프.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던 둘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 넓은 세계로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의무를 가득 담았던 첫 잔은 요제프를 위해.
그리고 가라앉아 있던 황금색을 담았던 다음 잔은 목소리를 위해.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하고 있는 불카누를 보며 블라드는 속에 담아두었던 또 다른 물음 하나를 꺼내 들기로 했다.
“혹시 너희들이 있다는 섬에 소드마스터에 관련된 전승이 있나?”
블라드는 잊지 않고 있었다.
이름을 찾아주겠다는 그때의 계약을.
엘프들의 마을에서 가리키고 있던 소드마스터에 대한 흔적은 분명 드워프들이 있는 서쪽을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